“아니 웬 맥주입니까?”
겐트릭이 수통에 담아온 것은 물이 아니라 맥주였다. 예민해진 나의 후각에 알코올 향기가 알싸하게 파고들었다.
“허허. 밤에 몰래 마시려고 가져왔다네.”
마치 겨울이니까 목도리를 두르고 왔다는 듯한 태연자약한 대답이었다.
“헌데 현지에 와 보니까 아는 모험가들이 있어서, 나도 그쪽 텐트에 실례하게 됐지 뭔가? 그렇다고 나만 마시자니 눈치가 보이고. 그래서 가방에 넣어뒀다가 자네들한테나 주려고 이렇게 들고 왔지.”
“와아! 감사합니다!”
프랑이 제로백 1초의 스피드로 반색을 했다. 거절하려던 나는 어이가 가출해버려서 그만 따지듯이 반박해 버렸다.
“아니, 프랑아. 너 술 먹고 내일 일은 어떻게 하게?”
“1잔 정도는 괜찮아!”
저번에도 그 레파토리로 취중섹스 했잖니 우리.
내 합당한 반박은 겐트릭의 존재로 인해서 입밖으로 사출되지 못했다. 아는 사람 앞에서 아다를 물물교환한 꽐라 섹스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안 될까?”
그렇게 내가 말이 막힌 틈을 노리고 프랑이 두 손을 뺨에 갖다대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프랑이!!! 애교를!!!
존나 내 인식체계를 아득하게 초월하는 깜찍함이었다. 시발 심장하고 쥬지에 흘러들어가는 피가 3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거의 심폐소생용 재세동기 수준이다.
“와 씨, 프랑 너…. 그건 반칙이지….”
개 귀엽네 증말. 나는 공성추에 쳐맞은 물 먹은 나무 문처럼 저항의지가 개박살나 버렸다.
“하아. 내가 졌다. …겐트릭 씨, 고맙게 받겠습니다.”
“보고 있자니 흥미진진하던데. 나는 내버려두고 마저 얘기해도 되네만?”
“됐습니다. 제가 심정지 오게 생겼어요.”
“좋을 때군, 좋을 때야.”
나는 나를 놀려대는 겐트릭에게 빈 냄비를 주었다. 여따가 받아서 뚜껑 덮어 뒀다가 이따 밥이랑 먹어야겠다. 브리타니아 맥주는 도수도 낮고 안주도 만들 테니 우리 프랑도 원펀치 넉다운은 면할 것이다.
냄비를 받은 겐트릭은 그것을 내려놓고 맥주를 담은 수통을 한 손에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냄비에다가 맥주를 붓나 했는데, 아딱이 할배는 내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취했다.
“아무리 쌀쌀한 날씨라도 역시 맥주는 시원한 것이 최고 아니겠나.”
겐트릭은 지당한 말을 하면서 철제 수통을 들고 빡집중을 했다. 5, 6초 정도 지났을까. 노인의 입에서는 나지막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얼어붙는 손길(Freezing Hand)>.”
쩌저적…!!
주문을 외우자 겐트릭의 손이 푸르게 빛나며 그가 든 수통에도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서리가 맺힌 수통은 만져보지 않아도 몹시 차가울 것임을 훤히 알 수 있었다. 겐트릭은 그렇게 차가워진 맥주를 냄비에 조심조심 부었다. 탄산이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놀랍군요. 겐트릭 씨, 마법도 쓰실 줄 아셨습니까?”
내가 감탄하면서 말했다. 크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이언 클래스의 전사인 겐트릭 할배가 마법을 썼으니 감탄스러웠다.
겐트릭은 맥주를 다 따르고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뛰어난 전사는 마법도 다루는 법이지.”
뛰어난 전사(아이언 클래스).
존나 어썸한 표현이로군. 그러고 보니 이 할배도 가끔씩 개소리를 하는 타입이었지.
─개새끼가 아니라 벌레새끼일세!
시발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하수도에서 여치벌레 새끼들한테 지랄했더니 그딴 소리를 했었지. 농담이라고 생각하기엔 표정이 존나 진지해서 어느 쪽인지 구별이 안 갔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전사와 마법사의 경계를 구분짓는 의미가 줄어든다네. 100미터 밖의 적을 양단하는 전사나 맨손으로 골렘을 박살내는 마법사도 있다지. 그들에 비하면 주문도 없는 마법을 쓰는 전사 쯤은 별 것 아니잖은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이세계에서는 전사든 마법사든 마나를 다루는 직종이란 점에서는 도긴개긴이다.
마법을 쓰는 전사는 많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부터가 전사와 마법사의 혼종이다. 순수한 전사도 공격을 멀리까지 쏘아내는 기술은 필수로 배워두니까.
전사랍시고 원거리 전투에서 암것도 못해서는 약점이 명확하고, 마법사도 근접 전투에서 두들겨 맞기만 하는 추태를 보이기는 싫을 테니 말이다.
“무슨 마법인가요?”
관심이 동한 목소리로 프랑이 물었다. 겐트릭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청산유수로 대답을 쏟아냈다.
“얼어붙는 손길이라는 마법일세. 손에서 냉기를 뿜어내는 원리이지. 덤으로 차가운 것을 만져도 멀쩡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도 있고 말이야.”
“이름을 보니 정반대의 마법도 있을 듯 한데요.”
얼음 마법에 대척점에는 불꽃 마법.
판타지의 국룰이다.
“암, <타오르는 손길(Burning Hand)> 마법도 있고 말고. 나는 둘 다 배워뒀다네. 이 두 개랑 <물 생성(Water Creation)> 마법은 꽤 요긴허이.”
맥주를 내려놓은 겐트릭이 푸르게 빛나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무지렁이인 나도 배울 수 있을만큼 간단하고, 마나를 쓸 줄 몰라도 마법 발동에는 큰 문제가 없지. 모닥불이 필요할 때는 장작을 쥐고 주문을 외우면 돼. 여름이나 겨울에 아무리 덥고 추워도 아무렇지 않으니 편리하기도 하고.”
“아하. <물 생성(Water Creation)>까지 있으니 서바이벌 때는 곤란함이 없겠습니다.”
나는 말하고 나자 갑자기 열불이 뻗쳤다. 시발. 유적 경비 의뢰에 땡중 새끼 파라곤이 아니라 이 할배가 왔었으면 추위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무튼 겐트릭 할배의 말마따나 뒤지게 요긴해 보이는 마법이었다.
저번에 프랑이 바느질하다 찔렸을 때도 그렇다. 타오르는 손길인가 하는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바늘을 미리 소독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더운 날에는 저 렛잇고 마법을 약하게 켜고 프랑을 주물주물 해 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리고 굳이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아도, 갑옷을 입는 모험가들한테 여름철 더위는 진짜 좆 같음 그 이상이다.
여름에 일하다가 열사병으로 뒤지는 아딱브딱이는 몬스터랑 싸우다 죽는 놈들보다 많을 것이었다. 겨울? 겨울은 존나 돈없으면 가만히 있어도 뒤져나가는 계절이고.
이한치한은 시발 개소리. 문과 이하의 유사과학은 SF 소설로 꺼져 주기를 바라겠다. 그런 의미에서 저 마법은 상당히 쓸 만해 보였다.
“겐트릭 씨. 그 마법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내가 맥주에 뚜껑을 닫고서 물었다. 겐트릭 할배는 저 냉장온장 마법은 배우기도 간단하다고 했다. 그러니 나도 돈을 모아서 배워볼까 생각했던 것이다.
“마법사 길드에서 샀다네. 나는 글을 모르니 아는 사람이 대신 읽어줬지만, 그래도 며칠 안 걸려서 배웠어.”
“오, 그래서 얼마입니까?”
“세 마법 다 해서 1실버 60쿠퍼였다네.”
시발.
나는 입밖에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참았다. 존나 160만원 돈이잖아. 최신형 핸드폰이냐고.
마법이 돈이 존나 많이 든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저급 마법조차 저 정도일 줄이야. 티르시가 왜 그 인종차별자 탈모충 새끼 밑에서 고생했는지 알겠다.
“비싸군요. 대체 그런 거금은 어떻게 모으셨습니까?”
“내가 아직 혈기가 많던 40대에 호기를 부려서 산 걸세. 동료들이랑 돈을 모아서 구매한 거라 돈도 내가 전부 다 내지는 않았지.”
40대를 혈기가 많은 시절이라고 표현한 겐트릭은 클클 거리면서 웃었다.
“10년 넘게 썼으니 본전은 뽑았고 말고. 자네도 흥미를 보이는 걸 보니 배워두고 싶은가 보군.”
“흐으…. 까놓고 말해서 그렇긴 합니다만, 포기하렵니다. 돈이랑 달리 마법은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요. 곧 겨울인데 돈을 낭비했다가 얼어 죽으면 농담거리도 못 돼요.”
이번 겨울에는 포기하자. 당장 안 산다고 매물이 다 나가버리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런데 프랑이 그 말에 내 모포를 살짝 당겼다.
“노르. 사고 싶은 거면 나도 조금 보탤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나중에 정 땡기면 겨울이 지나고 다시 고민해 볼게.”
여름철에 불쾌지수가 올라가면 프랑이랑도 투닥거리게 될 지 모르니까.
내가 한여름에 대학원생 노릇 하면서 자살하지 않았던 것은 카르미네 대학에 있던 에어컨 비슷한 마도구의 지분이 컸다. 사르가디스의 여관방에 모텔 마냥 에어컨이 1대씩 구비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이니 저런 마법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번 여름에도 프랑과 기분 좋게 달라붙어 있기 위해서다. 얼어붙는 손길 마법만이라도 따로 배워두자. 3개에 160쿠퍼라면 대충 하나에 50쿠퍼 정도 들겠지.
그때 겐트릭이 수통 마개를 닫으며 말했다.
“이보게. 알고 있나? 사실 자네 하기 나름으로는 싸게 구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닐세.”
싸게 구할 방법?
그게 대체 뭘까. 시발 존나 혹하네.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내 꼬락서니에 겐트릭은 품에서 두루마리처럼 만 종이를 꺼냈다.
“마법사 길드는 길드원이 아닌 상대에게 파는 마법을 엄선한다네. 다시 말해서, 마법서를 산 사람이 되팔더라도 아무 말 않는다는 뜻이지.”
겐트릭이 꺼낸 것은 A4 용지 1장 정도의 종이에 앞뒤로 필사된 마법서였다.
…아니 이 할배가 설마?
“자네들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바라면서, 특별히 단돈 10쿠퍼에 넘기지.”
…….
나는 무지개의 끝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버린 어린 모험가 꿈나무처럼 침묵하다가 말했다.
“……프랑. 나 2쿠퍼만 빌려주라.”
“……기다려. 나도 배우고 싶으니까 절반 낼게.”
그리하여 우리는 할인률 90% 이상의 블랙겐트릭 데이의 마성에 훼까닥 해버렸다.
나 5쿠퍼. 프랑 5쿠퍼. 다 합쳐서 10쿠퍼였다.
짤랑짤랑─.
10쿠퍼를 받아서 확인한 겐트릭은 자상한 얼굴로 마법의 습득법을 적은 종이를 우리에게 건넸다.
“허허. 자, 여기 받으시게. 나중에 못 배웠으니까 환불해달라고 해도 못 해주니 명심하고.”
“아, 예.”
배워놓고 못 배웠다고 구라칠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10만원짜리 학습서의 가벼움에 나는 이걸 좋게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되팔렘으로 봐야 하나 헷갈려졌다.
그래서 존나게 얼굴 근육을 삐그덕대다가 결국 이렇게만 물었다.
“이걸로 대체 얼마나 버셨습니까?”
“자네들도 팔아 보게나. 그럼 알 수 있겠지.”
하이고 시발. 천공신 맙소사.
저쯤 되니까 막 존경심마저 들려고 그런다. 내가 말을 잃자 겐트릭은 호호웃음을 지으며 떠나갔다.
“식사 맛있게 하시게! 내일도 일이 있으니 푹 자고!”
돈을 번 사람의 발걸음은 존나게 가벼운 법. 자기 텐트로 돌아가는 겐트릭을 배웅한 나와 프랑은 말없이 맥주를 잔에 따르고 원샷을 때렸다.
지옥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가혹한 세상이어도 사람은 살 구멍을 찾아내는 것인가 보다.
1시간 쯤 지나서 우리는 식사를 마쳤다.
다행히 프랑은 맥주 1잔만에 넉다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잠이 쏟아지기는 했는지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노르, 미안. 나 먼저 잘게….”
“그래. 푹 자고. 난 좀만 더 있다가 갈게.”
“응…. 고마워. 사랑해.”
마법서의 내용을 복습하느라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더니 프랑은 내 곁에 다가와서 목을 끌어안고는 내 뺨에 키스했다.
─쪽!
와! 첫 뺨 키스까지 우리 프랑한테 바쳐버렸다! 시발 노르드 넘모 기쁜 거시에요! 프랑은 불그스름한 얼굴로 몽롱하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노르는 집중할 때가 젤루 멋지더라….”
“나는 네 덕분에 집중 다 날아갈 것 같애.”
“헤헤. 방해해버렸네. 공부 힘내.”
모닥불보다 기분 좋은 프랑의 체온은 그렇게 말하고서 나한테서 떨어져서 텐트로 들어갔다.
─휘청휘청
풀썩─.
풍선이 김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모포를 덮은 프랑은 미동도 않게 되었다. 오래 혼자 두면 프랑이 추울 텐데. 얼른 끝내고 들어가서 같이 안고 자자.
나는 종이를 덮고 마법을 복기했다.
겐트릭 할배 말대로 쉬운 마법이었다. 주문은 마법명만 외워도 된다. 야수회귀랑 거의 똑같은 수준의 단문영창이다.
룬 어도 나오지 않는 수준이라서 더 쉽다. 술에 취한 프랑은 결국 못 배우고 자러 가버렸지만 말이다.
“──<타오르는 손길(Burning Hand)>.”
화르륵….
주문을 외우자 오른손이 붉게 타올랐다. 손목 위로 내 손이 빨간 맛 LED등(燈)으로 변한 것 같다.
“개껌이구만.”
나는 손을 주물주물 거리다가 장작을 집어봤다. 내 피부의 감각은 평소랑 똑같았는데, 나무는 점차 달궈지더니 불이 붙어버렸다.
화륵─.
아니 근데 화력 왤케 약하냐. 거의 라이터 수준이다. 눈을 찌푸리고서 다른 손에다가 얼음 마법을 사용했다.
“<얼어붙는 손길(Freezing Hand)>.”
쩌적….
이것 봐라. 효과음부터가 영 시원찮다.
뭔 시발 요실금 온 노인네 오줌보처럼 기운 빠지는 소리가 난대냐. 한숨을 쉰 나는 두 손에 다른 마법을 사용하고서 얼어붙는 손길이 발동한 손으로 장작을 건드렸──
─화끈!
“앗 시발 뜨거!”
깜짝 놀라서 손을 뺐다. 오른손은 타오르는 손길의 효과로 불꽃 내성이 발라져서 불타는 장작을 만져도 괜찮았는데, 왼손에는 냉기가 흐르는데도 불의 열기를 못 이겼다.
마법의 냉기가 불꽃을 버틸 수준이 못 되서 그렇다.
“염병. 얼음 타입이라 데미지 2배냐고.”
불에 닿기 전에 빼서 살았다. 화끈거리는 손을 주물러서 식히고 불타는 장작은 적당히 모닥불에 던져버렸다.
─타탁 타닥.
모닥불을 보며 마법을 해제한다.
마법의 출력이 뒤지게 낮은 것은 왤까.
겐트릭이 나보다 마나가 많아서는 아닐 것이었다. 아마도 내가 마법을 제대로 못 다루는 것이 원인이다. 발동까지는 간단해도 마나를 써서 출력을 조절하는데는 요령이 요구되는 마법 같았다.
나는 이미 마나를 다룰 줄 알았지만 이거랑은 느낌이 약간 달랐다.
내 마나가 몸 바깥의 어딘가─아마 마법의 술식이겠지─로 빨려들어가는데, 그게 영 뻑뻑하고 갑갑한 감각이다.
마치 개발이 안 된 항문에 손가락을 찔러넣는 느낌!
‘뭐든 개발이 중요한 거군.’
내게 익숙하지 않은 마법이라 그런 모양이다.
태권도장에서도 발차기 전에 다리 찢기부터 가르치는 것과 비슷한 듯 했다. 이런 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되긴 힘들다.
천천히 배워나가지 뭐. 다리 찢기도 억지로 벌렸다가는 인대나 다리 근육이 존나 개씹창이 나서 평생 후유증이 생기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