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009)

“도망치지 마!! 자신의 운명에게서 도망치지 말라고!!”

나는 사신처럼 외쳤다. 고라니들은 언어체계는 어설프다. 나의 분노를 놈들에게 전할 표현이 없는 것이었다.

저 새끼들은 빡치면 서서 앞발로 윈드밀부터 돌려댈 테니까 말로 화를 낸다는 발상이 존재하질 않는다!! 그래서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격노를 표현할 단어는 고라니어 체계에서 이것 정도밖에 없었다.

“왜예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쥬거랏!!!!)”

“왜외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무섭다!!)”

지그재그로 튀는 4족보행 고라니를 쫓아가서 때려죽였다. 내 온몸은 누린내 나는 피로 범벅이 되었고, 난폭하게 쓴 검도 피범벅이라 날이 들지를 않았다.

“씁.”

이러니까 짜증나는 원시적 무기는 안 된다니까. 내가 혀를 차고 칼을 대충 닦으려고 했을 때였다.

─쿵.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커다란 덩치의 워킹-고라니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죽인 놈들보다 한층 더 컸다.

“──고라니의 우두머리로군.”

킹(King) 워킹-고라니가 부하들을 죽여댄 나를 조지러 온 것이었다.

패왕에게 어울리는 굵직한 목소리! 병신처럼 유순한 와꾸는 그대로였지만 내 감각은 고라니의 왕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풍격이랄 것을 느끼는 것이 가능했다.

─찌릿찌릿.

피부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 한낱 미물에 불과한 놈들이 뿜어낼 수는 없는 기척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서 이 고라니가 맹수에 가까운 생물임을 이해했다.

“너 이 새끼 혹시….”

두 발로 걸을 뿐인 고라니가 그러한 기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마나를 다루는 고라니인가!!”

저 놈은 상궤를 초월한 무언가를 지녔다는 것! 나는 그것을 알고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들 중에서도 못 다루는 사람이 널린 것이 마나일진대 한낱 미물 주제에 어떻게 마나를 다룬단 말인가!

이 새끼들 두 발로 걷기 시작한 것도 그렇고, 이대로 한 천 년 정도만 냅두면 미래에는 인류의 일각에 고라니인(人)이 추가될지도 몰랐다. 원숭이에서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와는 다른 계보의 신인류가 말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서 웃음을 지었다.

다윈은 쥬지선택설을 통해서 말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고.

이 새끼가 여기서 내 손에 죽어서 대가 끊긴다면 인류에 근접해가는 새로운 종류의 고라니는 자연에서 도태되겠지. 마나를 다루는 기술이 실전되고 말 테니까.

그리고 저 새끼는 유해조수들의 보스! 모가지를 똑 따서 아움두라 길드에 가져가면 브론즈 클래스가 눈앞에 다가올 것이었다!

“네놈의 내장을 찢고 죽인다.”

고라니의 왕 앞에서 나는 초연하게 선언했다.

“큰 덩치! 내장도 존나게 크겠지! 찢고 죽인다! 심야행 꼬마기관차가 간다!!!”

사납게 외치며 대쉬!! 칼은 피와 지방으로 몽둥이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 야수의 심정을 담은 주먹으로도 비건 헬창 고라니를 죽이는데는 충분하다!!

“벡터-뺑소니!!”

뻐어어어억!

내지른 주먹이 고라니의 배에 적중했다. 오늘 하루 중에서 제일 깔끔하게 들어간 공격이었다.

“왜액.”

근데 시발 이 새끼 왜 멀쩡하냐.

“──머임?”

슈이이이이….

나는 쭉 뻗은 팔에서부터 녹색의 마나가 거의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마나를 더 낭비하기는 했지. 칙칙폭폭 칙칙 때앵.

“……야수회귀 모드 종료. 더 이상 무적이 아니군.”

계획 수정이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킹 워킹-고라니가 포효했다! 그것은 아무런 의사소통의 의지도 가지지 않은 원시적인 워 크라이였다!!

“씨이이발!!!”

─부우웅!!

비명을 내지르며 앞발 윈드밀을 피했다. 마나 오링이라 버프를 못 쓴다! 야수회귀가 꺼진 상태의 나는 마나로 신체가 쫌 강화된 것이 전부인 모험가 짬찌 아딱이였다!

“왜애애애애애애액!!!”

“갸아아아아악!! 따라오지 마!!!”

호다다다다다닥!!

뒤져라 뛰었지만 거리는 벌려지지도 않았다. 워킹-고라니들도 두 발로 뛰는 속도는 느렸기에 따라잡혀 뚝배기가 깨지는 꼴은 면한 것이었다.

“무, 무기! 무기 없냐 무기!!”

내 검은 지금 피 범벅이라 날이 안 든다!

뭐라도 좋으니까 쓸 만한 무기가 필요했다. 인간은 무기 없이 야생동물과 맞설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다!!

그때 내 전방의 땅바닥에서 금속성 광채가 빛났다! 나는 킹 워킹-고라니가 4족보행으로 달려들기로 마음 먹기 전에 그 무기를 냉큼 집어들었다.

“아 씨발 낫이잖아!!”

찾아낸 무기는 농경용의 커다란 낫이었다. 아, 됐다. 존나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나는 무기를 장비하고 제자리에 정지했다.

이 이상의 도주는 체력 낭비였다. 저 놈이 네 발로 뛰기 시작했다간 순식간에 따라잡힐 테니까.

치이익─!

“왝!!”

킹 워킹-고라니도 바닥에 스크래치를 남기며 멈춰섰다. 저 놈도 내가 무기를 들고 반격 준비를 마친 것을 눈치깐 듯 했다.

─휘이잉.

가을바람이 우리 사이에 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간격은 딱 킹 워킹-고라니가 다섯 걸음 정도 달리면 내 뚝배기를 사정거리에 넣는 것이 가능한 거리였다.

“퓨우우우우….”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집중했다.

잠깐이다. 아주 잠깐. 공격을 시도하는 1~2초 정도만 야수회귀를 발동한다. 그렇게 하면 이길 수 있다. 야수회귀 상태의 내가 완력으로 밀릴 리가 없다.

이미 나는 무영창을 습득했다.

주문은 무용(無用).

놈이 달려드는 순간에 타이밍만 맞추는 거다!

──휘이이잉….

불어온 바람이 그치면서 마른 짚이 우리 사이에 떨어졌다.

──다각다각!!

고라니가 발굽 소리를 내며 대쉬했다. 나는 낫을 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불끈!

“일병류 오의.”

이두박근에서 피어오른 야수회귀의 녹색 마나가 팔과 어깨를 빛냈다.

“──예초의 노래.”

쐐액─!!

풀 파워의 공격! 야수회귀가 유지된 완력이 낫을 진동시키며 킹 워킹-고라니에게로 날아든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액!!!”

그때였다. 놈의 목을 노리고 근접한 낫을 고라니가 몸을 숙여서 회피했다!

─다그닥다그닥!!

아니, 숙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놈은 이족보행 자세에서 사족보행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낫을 피하면서 속도를 올려 접근!! 내 바로 앞에서 다시 이족보행으로 전환! 그 자세에서부터 뿜어져나오는 것은 상완근과 발굽의 어퍼컷!!

킹 워킹-고라니는 사실로써 인간과 짐승의 힘을 겸비한 전사였다. 그저 놈이 예상치 못한 것은── 나 또한 그렇다는 것.

“점멸.”

나는 속삭이면서 뒤로 회피했다. 놈의 목을 노렸을 때부터 사족보행 모드로 회피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기에, 회피는 전혀 어려울 일이 없었다.

얼굴 앞을 스쳐지나가는 발굽을 피하면서 나는 백스핀으로 뒤쪽의 땅을 짚었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오른발을 놈의 급소에 쏘아낸다……!!

“유전자 파괴술!!!”

─뿌직!!

땅을 짚고 날린 뒷발차기가 마나 고라니의 부랄에 제대로 명중했다.

다리에 찬 강철 보호대의 중량과 마나로 단련된 대퇴근은 UFC 챔피언처럼 초고속의 킥을 뿜어냈던 것이다!!

─아아, 그것은 그야말로 자연의 이치를 정면에서 거역하는 광경이었다.

고라니가 두 발로 서서 어퍼컷을 날리며, 그걸 피한 인간은 말처럼 땅을 짚고 뒷발차기를 날리는 말세의 모습!!

자연을 거부하는 초현실주의의 명화 같은 광경이었지만 저 고라니와 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나는 짐승의 힘을 다루는 인간이고, 고라니는 인간을 흉내내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점.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다.

“오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쥬지를 붙잡고 쓰러진 킹 워킹-고라니가 나라를 잃은 박사모처럼 포효했다. 일어나서 취권의 자세를 취한 내가 근엄하게 속삭였다.

“고자라니 새끼여. 네놈의 유전자 은행은 현시간부로 상장폐지가 되었다.”

낫을 집어든다. 부랄이 터져버린 고자라니 새끼는 저항도 못하고 목에 걸리는 낫을 쳐다보았다.

──알고 있는가? 고라니의 왕이여.

왕이란 정당한 혁명에 숙청되는 무력한 패배자라는 것을.

“리버스 그래비티 기요틴(重力逆轉 斷頭臺).”

─서걱!

농경용 낫이 고나리 왕의 목을 잘라냈다. 쓰기 힘든 무기였지만 이렇듯 낫도 엄연하게 살상용 무기인 것이다. 살인무기 앞에서는 왕도 병사도 평등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진 낫과 프랑이 가진 망치는 노동자와 평등의 상징이 아니던가.

붉은 피에 젖은 낫과 망치.

이것은 일종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노예농장에서 공산주의 혁명이라.”

정말이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고생했다.”

고라니 왕의 목을 들고 돌아가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호툴루실이 말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낫을 얼른 숨겼다. 만약 물어내라는 소리를 들었다가는 좆 된다.

“예. 다른 놈들은 다 정리가 됐습니까?”

“네가 잡은 보노디어가 보스였다. 우두머리가 죽은 것을 알고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더군. 야생동물에게는 흔한 습성이다.”

리을리? 의리도 없는 새끼들 같으니.

근데 사람도 별로 다를 게 없다. 호툴루실도 아무 것도 안 하다가 지금 튀어나왔으니까. 역시 이 새끼도 근본적으로는 좆프일지 모른다. 존나 마법 실력은 뒀다가 국 끓여 먹나.

좆프 새끼는 쓰러진 보스 고라니를 보며 말했다.

“보노디어가 실제로 습격해 온 게 대체 얼마만인지. 최근 불온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군. 천기가 흐트러진 모양이야.”

천기 어쩌구 하는 얘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세계 점술은 겨울철 강원도 기상예보만도 못하니까. 적중률이 낮고 뜬구름 잡는 표현도 많다.

나는 적당히 타이밍을 보다가 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호툴루실 씨? 기껏 호의를 받았는데 정말 죄송한 일입니다만, 아무래도 내일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흠. 다쳤나?”

“저는 괜찮은데. 동료가 걱정되서요.”

프랑의 자궁뿌끔 해프닝 때문에라도 신전에 가 보고 싶다. 내가 쓰던 논문도 대충 정리가 끝났고 말이다.

이번 논문은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빨리 끝났다. 어차피 증빙자료를 첨부하기 힘든 현장직 석사들은 뇌피셜 논리를 전개해서 논문을 쓰기 때문이다.

대학 측에서 이걸 검수한 다음에 학계에 내든가 하겠지.

“알았다.”

호툴루실은 의외로 쉽게 허락해 주었다. 솔직히 나는 왜 돌아가냐고 지랄할 줄 알았다. 약간 의외의 감정을 느끼는 내게 호툴루실이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의뢰 완료 도장을 찍어 주마. 보노디어의 우두머리를 죽여 문제를 조기에 제압한 것도 적어 두지.”

“아니, 정말입니까?”

의뢰자가 친히 의뢰 내용에 만족했다는 글을 써 준다는 것이었다. 분명 승급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

“흘린 땀과 피에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 타타르니아의 엘프는 은혜도 원수도 결코 잊지 않아.”

“흐흐. 감사합니다.”

말 한 마디로 내 안에서 좆프와 좋프를 오가는 호툴루실이었다. 약간 살벌한 느낌도 드는 격언이지만 나한테는 득이 되는 신념이니까 그냥 대충 넘어갔다.

“휴식시간을 주마. 피를 닦고 다시 나를 찾아와라.”

호툴루실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게 줄 것이 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우물 물로 대충 더러워진 갑옷이랑 무기를 손질했다. 프랑이 피로 더러워진 내 검을 보고서 손질도구를 꺼냈다.

“노르. 호툴루실 씨가 불렀다며. 무기 손질은 나한테 맡기고 다녀 와.”

“아, 땡큐.”

이번에도 프랑한테 신세를 지자니 쬐끔 미안했지만 제안에 타기로 했다.

팔 보호대 틈새에 피가 튀어서 이걸 닦느라고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기다리다 못한 호툴루실이 의뢰서에 좋은 말을 안 써 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서둘렀다.

타타탓─.

빠른 걸음으로 호툴루실이 오라던 오두막으로 갔다. 노예농장 주인의 집답게 썩 아늑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왔나.”

안으로 들어가니 집안에서도 밀짚모자를 쓴 호툴루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곰방대의 재를 털며 말했다.

“받아라. 내가 개인적으로 주는 보수다.”

그런 말을 하면서 내밀어진 것은 스크롤이었다. 첫날 저녁에 받은 겐트릭 할배한테서 산 물건과는 달리 꽤 품질 좋은 종이였다.

“실례지만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구름 소환(Summon Cloud)>의 습득법이다.”

“……마법서란 말씀이십니까?”

떠오르는 것은 저번에 호툴루실이 쓰던 마법이다.

하늘에 구름을 띄워 비를 내리던 모습. 마나량에 차이가 있을 테니 내가 흉내내기는 힘들겠지만 그때의 마법을 습득할 수 있는 마법서라니?

시발 이거 비싼 거 아냐? 내가 어색하게 둘둘 말린 종이를 만지고 있자 호툴루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단한 마법은 아니다. 마법사 길드에서도 돈만 내면 구할 수 있는 마법이지. 하지만 농삿일에는 도움이 많이 된다.”

“농삿일이라뇨?”

“그 마법으로 비구름을 만들 수 있거든. 마법이란 술식의 조합과 변형이니까.”

호툴루실은 스크롤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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