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 사살할 체력도 없다. 이 새끼가 포기하면 시합 종료라면서 일어나서 날 때리면 그대로 맞아 뒤지겠지.
야수회귀는 아직 켜 놨지만 거의 1년 방치된 형광 물감 같은 흐릿한 빛만 남았다.
“크, 크흐흐. 짐승으로 영락하고서도 졌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
타뷸라는 이성을 되찾았지만 되살아나진 않았다. 하긴 시발 마법내성을 단 보스가 회복기까지 쓰는 건 반칙이지. 레이드 보스도 아니고.
내가 경계심을 남기면서도 내심 안심하자 타뷸라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기술을 쓰게 만든 것은 네놈이 두 번째다…….”
“보면 알아 씹새야.”
사람 눈깔은 2개 뿐인데 그걸 누가 몰라 병신아.
아니면 뭐 춘부장이 천진반이시냐? 눈깔 뽑는 스킬을 세 번 쓰게? 존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사람 빡치게.
명장 하후돈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화살이 꽂힌 눈을 먹었다 전해지거늘, 저 놈은 스스로 눈깔을 뽑아 그것을 뭉개버렸다.
“이 애미애비도 없는 후레자식놈의 새끼 같으니. 네놈은 여포만도 못하구나.”
“여포…? 흐흐. 부모 얼굴을 모르기는 하지.”
씹새가 패드립 내성 맥시멈이네. 내가 참신한 패드립을 구상하기 위해서 두뇌를 3000% 풀가동하고 있으려니 그 새끼가 웃어댔다.
“크하하하. 네놈…. 구신의 마나를 그 정도로 몸에 받고도 아직도 이성이 남아 있는가.”
“아니 씹. 나 무교라고 몇 번을 말해.”
9신이고 9미호고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일갈을 해 줘도 타뷸라 이 새끼는 이세계인의 종특을 발휘해서 지가 하고 싶은 얘기만 했다.
“이르기를, 짐승으로 영락하지 않는 광전사. 야성과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는 자로되, 몰락한 짐승에게 안식을 주는 왕. 그렇다면 역시 네놈이, 예언의…….”
“애1미야. 귀가 멀었니?”
존나 왜 보스 컷씬에다가 대고 평타 갈기는 느낌이지. 이 새끼랑 나랑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 거 맞나?
“오오오…! 이 광채…! 천상의 발키리시여…! 이 타뷸라를 데리러 오셨나이까……!!”
이 병신은 기어이는 천장에 손을 벌리면서 지 혼자 중얼거리는 경지에 다다랐다. 얘한테는 사람이 뒤질 때 보인다는 뇌내의 생체전류 스파크가 천사들로 보이기라도 하나 보다.
“천공에 거하는 위대한 광기시여…… 당신의 에인헤리가 또 한 명…… 위대한 발할라로…….”
─께꼬닥.
그런 의태어가 어울리는 모습으로 타뷸라는 뒤져버렸다. 두 팔이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고 숨도 멈춰버렸다.
“아이고 이 시발련.”
뭐하는 새끼인지도 말 안 하고 그냥 지 종교만 전도하다가 골로 가버릴 줄이야. 이 놈한테 물어볼 게 존나 많았는데.
나는 성질이 나서 대가리를 걷어차려다 관뒀다. 시체 매너를 하지 않는 티배깅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다. 아마도.
그렇게 내가 체념하고 등을 돌렸을 때였다.
슈와아아아악─!
타뷸라의 시체로부터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나무 같은 갈색의 에너지── 아니, 마나인가? 그것은 내가 뭐 어떻게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날아들어와 내 몸에 스며들었다.
“시발, 뭐야!”
똥색 마나가 몸에 들어온다!
나는 팔을 털어서 마나를 떨치려고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 마나는 만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슈우우우….
그 마나가 신체에 흡수되자 내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재세동기나 펌프질을 넣은 것처럼 말이다.
아프지는 않았다. 고통은 없었고 체력이 약간 회복되는 기분마저 들었다. 심장박동은 서서히 안정되었고, 나는 꺼벙한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래 시발. 보스전 후의 HP 회복 이벤트는 국룰이지.
‘……염병.’
개소리는 관두자.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혀를 찼다.
짐작은 했었지만 역시 타뷸라의 마법과 야수회귀에는 어느 정도 연관점이 있는 듯 했다.
키워드는 구신(九神)의 마나라는 단어다.
이 새끼가 말하던 예언의… 예언의… 시발 까먹었네. 예언의 웨어울프였나? 아무튼 그것도 신경이 쓰인다.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야수회귀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는 계기였을지도 모르는데.
“아서? 왜 그래요?”
티르시가 비틀거리며 다가와서 물었다. 일어서서 걷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방금 거, 안 보이셨습니까?”
“방금 거……?”
안 보였나 보다. 나한테만 보인 건가. 혹은 야수회귀의 사용자이기 때문에 보였던 걸 수도 있다.
“그게 말이죠.”
나는 티르시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티르시는 내 설명을 곱씹고서는 대답했다.
“그건 계승(Succession) 현상이군요. 같은 계통의 마나를 쓰는 사람들끼리 간혹 일어나는 일이에요. 타뷸라를 쓰러트린 덕분에 마나가 흡수된 거겠죠.”
계승?
“위험한 겁니까?”
“흡수자의 신체에서 여과되기 때문에 위험하지는 않아요. 로마니아의 어떤 교단에서는 교황이 대대로 신성력을 계승하는 의식을 치루는데, 그때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나는 소실되거든요.”
오호라. 다시 말해서 타뷸라와 나의 마나가 공명해서 내게 흡수된 거고, 몸에 나쁜 마나는 튕겨나간다는 뜻이었다.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내면의 마나통을 의식해 보았다. 확실히 어딘가 커진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MP가 거의 바닥나서 어느 정도로 늘어난 건지는 감이 안 잡혔지만.
그나저나 비슷한 계통의 마법이라.
‘천공에 거하는 위대한 광기…… 랬던가.‘
타뷸라가 주문을 외우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는 광기의 신이라면 크툴루나 쉐오고라스 정도인데. 쉐오고라스… 오블리비언… 스카이림… 브리타니아는 노드의 땅이다. 망할 좆프 새끼들 죄다 꺼졌으면.
“참고로 묻겠습니다만, ‘구신’이라는 단어에 짐작은?”
“없네요. 이교의 신일까요?”
타뷸라가 지껄이던 소리를 들었기에 티르시는 따로 묻는 것 없이 의견을 타진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교도였다면 혼자서 다니지는 않았을 겁니다.”
“역시 그렇겠죠? 아즈테카의 우신숭배자도 아니고.”
로마니아를 포함해서 이교도를 배척하고 처형하는 집단은 각국에 존재했다. 그래서 이교도들은 절대 혼자서 돌아다니는 일이 없다.
지들이 핍박받는 것을 아니까 강박증처럼 말이 통하는 놈들끼리 뭉쳐 다니는 것이다. 지구에서도 그런 놈들은 흔히 있었기 때문에 딱히 새롭지도 않다.
‘타뷸라는 게르마니아 인이나 베르세르크 인이겠지.’
사용하는 마법이나 브리타니아 어의 악센트에서 그쪽 사람들의 냄새가 났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티르시는 끝까지 내 얼굴에 대해서 안 묻네. 나는 신경이 쓰여서 물어보았다.
“커흠. 애시?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혹시 제 얼굴이 기억 안 나십니까?”
“네? 안 날 리가 없잖아요?”
티르시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먼지투성이 얼굴에는 웃음기마저 있다.
“뭣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걸요? 아, 그때 같이 일했던 노르드 씨구나~ 하고.”
“뭐… 라고요……?”
나는 놀랐다. 존나게 놀랐다. 어느 정도냐면 오늘 하루 있었던 모든 해프닝을 포함해도 가장 크게 놀랐다.
─콰광!!
거의 뭐 머리 안에서 번개가 치는 것만 같았다.
티르시가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시발?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내가 경악하는 모습에 티르시는 반대로 자기가 더 놀랐다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네? 아니, 왜 놀라시는 거예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아서가 목소리를 좀 깔았다고 눈치를 못 채겠어요? 저희가 지금까지 한두 마디 나눈 것도 아닌데.”
“그, 그럴 수가…….”
벡터-근엄하게 말하기가 아예 효과가 없었다니!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지구용사의 이름을 씌운 기술이 나의 미숙함으로 인해서 병신 같은 쌩쑈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쿡쿡쿡. 쿠후후후.”
티르시는 뭐가 재밌는지 기침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난 존나 진지한데 이 아가씨는 왜 웃는 것이지.
‘앞으로는 훨씬 더 신경을 써야겠어.’
속으로 그렇게 다짐을 했다. 이 사태는 내가 다루는 벡터-목소리 깔기의 숙련도 부족이 원인이었다.
앞으로는 더욱 근엄하고 허스키한 섹시 보이스로 그 누구도 노르드=아서 웨인 설을 주장하지 못하게 만드리라!!
“쿠후후후. 아, 그나저나 상황이 다소 안 좋게 됐네요.”
웃음을 그친 티르시가 타뷸라의 시체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이 뭐하는 작자인지는 알 수 없어도, 어떤 집단의 일원일 가능성은 높으니까요.”
“아아, 예. 추적을 걱정하시는 거군요.”
“맞아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티르시. 나도 그런 티르시의 의견에 동감이었다.
타뷸라가 혼자서 불법 노예를 구하는 놈이었다면 괜찮다.
그런데 만약에 단독범이 아니라 세상에 암약하는 또라이 집단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일하러 갔던 놈이 갑자기 소식이 끊겼으니까 조사를 나오겠지.
생각해 보니까 ‘임무’ 운운했던 것 같기도 하다. 100% 뒷배…… 아니, 소속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뒷처리를 합시다.”
거기까지 생각한 내가 먼저 제안했다.
“도적단은 흔하디 흔하죠. 이 놈들 말고도 숨어다니는 놈은 넘쳐납니다. 저희가 시체를 모아서 소각하면 놈들도 저희를 추적하기는 힘들 겁니다.”
“과연. 적절한 대처라고 생각해요.”
티르시는 내 의견을 곰곰히 검토해 보다가 수락했다.
“타뷸라가 노리던 사람들은 평범한 일반인이었어요. 만일 ‘정체불명의 집단’이 정말로 있다고 해도, 이 도적단은 많고 많은 거래처 중에 하나겠죠. 타뷸라도 이 소굴의 위치까지 보고했을 리는 없을 거에요.”
“꼼꼼해 보이는 놈은 아니었으니까요.”
도적단이 궤멸해도 경비병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적당히 도적들에게서 ‘제물’로 쓸 사람들을 받고서 도적도 모조리 죽이고 탈주. 그게 타뷸라가 소속한 집단의 주된 방식이 아닐까.
오늘 일도 그렇게 매번 반복되던 ‘평소의 일감’ 중 하나였다면 아마 철저한 보고, 연락, 상담은 생략했을 것이다.
21세기 한국의 군대에서도 순찰이나 경계임무를 철저히 하는 경우는 있어도 모든 사소한 사항까지 보고하는 경우는 적었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건의 뒷처리를 시작했다.
살려둔 우두머리만 빼고 나머지 시체를 한곳에 모았다. 시체에서는 돈이 될 법한 무기만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타뷸라의 커다란 시체는 거기랑은 떨어진 곳에 파묻었다. 덩치만 뒤지게 커서 들어갈 만한 구멍을 파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
“아서. 얼굴은 어떻게 가릴 거에요?”
티르시가 정리를 마치고 물었다. 계속 나를 아서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 나름의 짖궂음일까.
“제 가면은 부서졌으니, 대신 이걸 받아갈 겁니다.”
나는 부숴진 동물가면 대신 타뷸라가 쓴 검은색 철가면을 챙겼다. 얼굴을 가려야 했으니 챙겨가기로 한 것이다.
티르시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줘 보실래요? 찝찝하실 테니 소독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티르시가 소독 마법으로 가면을 깨끗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는 김에 나랑 티르시도 피와 먼지를 닦아냈다. 상처는 포션 덕분에 간단한 지혈 정도는 가능했다.
“……이 가면, 마법이 걸려 있네요.”
그런데 티르시의 감정 결과, 놀랍게도 타뷸라가 쓰고 있던 가면은 평범한 철 가면이 아니었다.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인상 미채’와 ‘은신’ 효과가 부여(Enchant) 되어 있어요. 가면이 아니라 가면 안에 붙혀둔 나무 부적의 효과군요.”
가면을 마법으로 조사하던 티르시가 말했다.
“인상 미채요?”
“쓴 사람의 인상을 흐릿하게 하고, 가면이나 옷차림의 형태를 기억하기 힘들게 만드는 마법이에요. ‘은신’은 숨어 있는 동안 들키기 힘들게 만들어주는 거구요.”
“아아, 어쩐지.”
저 커다란 덩치가 어떻게 내가 도적단을 소탕하는 중에도 기척 하나 안 냈나 했더니, 매직 아이템의 효과였나 보다.
“이건 아서가 가지세요. 운송 길드에 갈 때도 이걸 쓰고 가시면 되겠네요. 정체를 숨기고 싶을 때 유용하겠어요.”
티르시는 마법으로 그것을 잘 소독해서 내게 돌려줬다.
가면 안에 붙어 있는 조잡한 나무 부적에서는 주술적인 느낌이 났다. 타뷸라 본인이 만든 것인 모양이다.
“제가 받아도 괜찮겠습니까?”
“저는 가면을 싫어해서.”
티르시는 다분히 사양한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튼 공짜로 준다는데 사양할 거 없다. 고맙게 받자.
‘개꿀.’
중고품인 것이 약간 거슬렸지만 쓸모가 많아 보이는 매직 아이템까지 얻다니. 나는 기쁜 마음에 지친 몸에 활력이 도는 것을 느꼈다.
나한테 마나를 나눠주기도 했으니 타뷸라는 아주 아낌없이 주는 씹새끼였다.
왜 몬스터가 바글대는 이세계에서 사람만 골라 노리는 쓰레기들이 있는지 이해가 갔다. 한탕 할 때마다 얻는 수입이 차원이 다르구만.
“도난품들은 인질이었던 사람들에게 들어달라고 할까요?”
티르시가 시체를 태우기 전에 물었다. 아예 이곳에 다른 사람들이 올 일이 없도록 뒤처리를 전부 마칠 생각인 것이다.
“양이 적으니까 그렇게 합시다. 도적놈들한테 시달리던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목숨값이라고 치죠.”
음식 같은 것은 도적놈의 새끼들이 다 쳐먹거나 해 버렸기 때문에 도난품은 얼마 없었다. 나눠서 들면 1번에 전부 옮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티르시를 따라서 인질들을 보러 갔다. 그들은 싸움의 소란에 벌벌 떨다가 우리가 나타난 것을 보고 환희에 차서 기뻐했다.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외팔이인 행상인─아마 운송 길드 마스터의 아들─은 눈물을 줄줄 짜면서 그렇게 인사를 해댔다. 그는 어른이었으니 뭐 잠깐 울고 말았는데, 문제는 애들이었다.
“고맙흡니다!! 고맙흡니다!!”
“흐에에에에에엥!!! 호에에에에에에엥!!!”
“히끅! 히끅!”
한창 감수성 예민할 시기에 납치당해서 갇혀 있던 애들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울음바다를 만들었다.
“자, 자! 얘들아! 그만 뚝! 저 분들이 곤란해 하시잖니!”
나도 티르시도 차마 펑펑 우는 아댈을 달래지 못했는데, 이 외팔이 행상인이 단 2분만에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이제 우리도 집에 갈 수 있어! 모두 조금만 더 힘내자!”
“네으에에!!”
“응으으응!!”
“히끅! 히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