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009)

아마 갇혀있는 동안 행상인을 의지했던 것인지 아이들은 눈물을 뚝 그치고 얌전해졌다. 나는 그 능수능란함에 감탄하며 그에게 목례를 했다.

“진정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목숨의 은인 분들을 위해서인걸요!”

꽤나 겸손한 대답이었다. 이 사람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을 테니까 서로 윈윈인가.

─묵직.

애들 영양상태가 안 좋길래 도난품들은 절반 이상을 내가 혼자 들기로 했다. 야수회귀를 키고 보따리 상인처럼 등에 가방만 4개 넘게 맸다.

“<불꽃의 화살(Fire Missile)>.”

마지막으로 티르시가 유일하게 배웠다는 불 속성 마법으로 시체를 태워버리면 끝.

─우르르릉!!

바깥에 나와서 불을 지르고 있으려니 불길에 동굴이 폭삭 무너졌다. 내부의 흙이 고열을 못 버티고 붕괴한 것이었다.

“뒤탈이 없어서 좋겠군요.”

티르시가 마나를 차단해서 불꽃을 껐다.

이걸로 우리의 논문 회수 대모험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아무튼 좋은 일을 하니 기분이 좋구만. 돈도 벌고 말이지.

“아서. 저 인간은 어쩌실 건가요?”

도적단의 유일한 생존자인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티르시가 물었다.

나는 티르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도적단의 우두머리는 우리를 추적할 커다란 단서가 된다. 무협지 등에서 맨날 반복되던 암묵의 룰 아니던가.

감옥에 갇힌 도적에게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자객!

그런 부류의 어쌔신들은 도적을 심문해서 정보를 캐낸 다음에 살인멸구를 하고 도주하고는 한다.

장면 내내 주인공 시점이 아닌 제 3시점에서 서술되다가 마지막에는 ‘다음날 옥졸이 발견한 것은 싸늘하게 식은 도적단 수장의 시체 뿐이었다…….’ 같은 식으로 말이다.

후환을 없애려면 이 놈을 경비대에 넘기지 않는 게 낫다.

경비대원들은 은화 30닢이 아니라 1닢이어도 저 새끼 신상을 낯선 사람에게 팔아넘길 것 같다. 저 도적놈은 메시아가 아니니까.

“물어볼 게 있어서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이들의 귀를 막게 할까요?”

우리는 눈치 빠르게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 비명소리는 아이들 감수성 발달에 해를 끼칠 것이었다.

“제가 떨어진 곳에서 하고 오죠.”

짐을 내려놓은 나는 기절한 우두머리를 데리고 으슥한 곳으로 갔다. 비명을 질러도 적당히 닥치게 하면 아이들 귀에는 안 들릴 거리였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우두머리는 일어날 기미가 없다.

“<물 생성(Water Creation)>.”

촤아아아─.

마법으로 만든 물줄기를 얼굴에 부었다. 콧속에 물이 들어가자 우두머리는 지랄을 하며 깨어났다.

“허어어어어억!!”

일어나서 기침을 하던 우두머리는 팔다리가 묶인 상태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상황파악을 끝마친 듯 했다. 내 눈치를 보면서 머리를 낮췄다.

“다, 다, 당신은……?”

“나를 잊었나?”

이 새끼가 단기기억상실증이라도 주장할 생각인가? 미안하지만 노르드 헌법은 심신미약에 따른 감형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가면의 효과로 내가 소굴을 습격한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하는 걸 수도 있다.

‘타뷸라 흉내를 계속 낼까?’

괜찮은 방법이다. 만약 내가 가짜라는 걸 들켜버려도 이 새끼와 나 사이에는 압도적인 입장 차이가 있다. 우두머리는 내 질문에만 대답하게 만들면 된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라. 반론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꺾겠다.”

“예, 예!!”

꽁꽁 묶인 우두머리의 손가락을 짚었다. 말귀를 알아들은 도적놈은 헤드뱅잉을 해가며 복종했다.

“아이들을 납치해서 파는 게 너희의 주 수입원인가?”

“아, 아닙니다. 돈 되는 거라면 뭐든지 훔칩니다.”

“아이들은 어디서 구했지?”

“헤이스벤트에서, 그, 밤에 돌아다니는 애들을 채왔습죠.”

“성벽이 있을 텐데? 개구멍이라도 찾았나? 위치는?”

“예, 예. 그게 헤이스벤트 북서 거리에는 폐점한 잡화상이 하나 있는데…….”

경비대가 물어볼 법한 내용부터 질문했다. 우두머리는 왜 이런 것을 묻는지를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자기 장사 수단까지 모조리 부는 것을 보면 상당히 쫀 모양이었다.

나는 추가로 영화에서 주워들은 취조법을 실행했다. 아까 물어봤던 것을 다른 식으로 물어보거나 하며 이 새끼가 구라를 깠는지 확인해 봤는데, 놈의 말은 앞뒤가 논리정연했다.

‘순순히 불고 있군.’

그럼 이제 본론이다. 나는 도적들이 쓰던 단검을 꺼내서 빙빙 돌렸다. 처신 잘 하라는 뜻을 담은 위협이었다.

“팔려나간 인질들이 어떤 처사를 받는지에 대해서 아나?”

말의 저의를 찾으려는 듯이 놈이 눈알을 굴렸다. 변명을 생각하지 못하게 배를 발로 까줬다.

“눈알 굴리지 말고 대답해라. 대답에 3초 이상 걸릴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 다시 묻지. 팔려나간 인질이 어떤 처사를 받는지 알고 있나?”

“모,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당신들께서 더 많은 금액에 인질을 구매하신다길래 사르가디스로 온 것이 전부입니다!!”

도적단을 소탕하던 중에 들었던 얘기다. 아무 것도 모르고 돈에 낚여서 온 건가. 그렇다면 이 이상 심문해봤자 의미가 없다. 나는 단검을 도로 집어넣고 물었다.

“원래 구매자는 누구지?”

“그, 그것이,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들이었습니다. 저희와 거래를 한 것은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었고, 뒤에는 호위인지 뚱뚱한 놈과 마른 놈이 한 명씩 있었습니다.”

“어떤 놈들이었지?”

“어, 그, 그게. 말투가 약간 어색했으니 아마 외국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 하지만 거래를 도맡은 남자의 언동에서는 자신감이 넘쳐났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에 익숙한 상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그들은 불법 노예상인일 듯 했다. 신분을 감추는 솜씨는 나보다 뛰어날 테니까 이 새끼한테 추궁해봤자 모를 것이 분명하다.

“그래. 물어볼 내용은 이게 전부다.”

“그, 그렇다면──”

─퍽!!

무영창으로 발동한 야수회귀로 오른팔만 강화해서 우두머리의 정수리를 갈겼다. 내가 미리 대머리로 만들어 놓았기에 맞추기도 쉬웠다.

고꾸라져서 죽은 우두머리의 밧줄을 풀고 그 자리에 방치해뒀다. 이렇게 하면 소굴에서 도망치다가 죽은 도적놈으로 보일 것이다.

오른팔에 발동한 야수회귀에서는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타뷸라의 마나를 흡수했어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건가.

‘──아니야.’

달라진 점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스릉!

내가 의식을 집중하자 손가락 끝에 변화가 일어났다.

몸 주변을 덮은 두꺼운 가죽 같았던 녹색 마나가 손끝에 날카롭게 뭉쳐들었다. 녹색의 마나가 짐승의 손톱처럼 형태를 바꾼 것이다. 고양이과 생물들처럼 손톱을 꺼낼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서 손톱으로 긁어봤다.

─카가가각!

가볍게 긁었는데 돌멩이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깊게 파였다.

시발거 뒤지게 날카롭네. 이거 내 칼보다 예리한 거 아냐? 길이가 짧아서 자주 쓰지는 못하겠지만 비장의 수단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은 이득이었다.

‘이만 돌아갈까.’

우두머리도 죽였으니 후환은 전부 없앴다. 나는 손톱으로 긁은 돌멩이를 부숴서 뿌려버리고 일행과 합류했다.

도시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운송 길드였다.

“아버지!!”

“아들아!!”

길드 뒷문으로 간 우리는 감격의 부자 상봉을 지켜보았다. 가면을 쓴 나는 그들의 눈물 어린 재회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약속했던 대로 도적단을 토벌하고 아드님을 구출해 왔습니다. 감격하시는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보수를 지불해 주시겠습니까?”

“예! 드리겠습니다! 드리고 말고요!”

엉엉 울면서 대머리 상인 아재는 내게 돈을 가져왔다. 딱 10실버. 약속했던 금액 그대로였다.

“10실버. 확실히 받았습니다.”

역할을 마친 계약서를 돌려주면서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길드장님. 이번 일에 관해, 두 분께서 알아두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 어떤 겁니까?”

계약서를 받아서 접던 대머리 상인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들을 구출해준 사람의 말이니까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는 미리 생각해둔 말을 내뱉었다.

“도적단의 두목을 심문한 결과, 이번에 아드님이 납치된 사건에는 어떤 배후가 존재했습니다.”

“배, 배후라고요?! 제 아들을 노린 놈이 있다는 겁니까?!”

경천동지하는 대머리. 난 팔짱을 끼고 근엄하게 수긍했다.

“두목은 함께 납치한 아이들을 포함해서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들은 얼굴을 가려서 정체를 숨긴 3인조였는데, 거래를 제안한 대표자는 상인 같은 남자였다고 합니다.”

“상인…….”

“그렇습니다. 정체를 모르는 누군가가 아드님을 노렸다는 뜻입니다. 도적단은 그들의 수족으로 움직인 것이고요.”

구라 아니냐고? 응, 아니야. 누군지는 몰라도 도적단이랑 거래해서 인질을 구매하려는 새끼들이 있기는 했잖아.

그러니까 구라 아님. 타뷸라네 검은 조직 얘기를 싹 뺐지만 100% 진실 맞음.

아마 타뷸라가 없었다면 외팔이 청년이랑 아이들은 걔네들한테 팔려나갔을 테니까.

“경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히 주의하지요.”

두 상인 부자(父子)는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양심은 전혀 찔리지 않았다. 내가 목숨을 구해준 것도 맞고, 평소에도 조심하면서 지내면 저 사람들한테도 좋잖아. 난 나쁜 짓 하나도 안 했다. 반박시 내 말이 맞음.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도적단한테서 되찾은 도난품과 아이들의 처우는 여러분들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나는 같이 구해낸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물었다.

“분명 이 아이들도 잘 모르는 저희나 경비대보다는, 거기 계신 아드님을 더 따를 테니까요.”

“예. 저희에게── 아니, 제게 맡겨 주십시오.”

내 말에 외팔이 청년이 가슴은 두들기며 호언장담했다.

“도난품은 경비대에 넘기고, 이 아이들을 반드시 집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도적단의 소굴에서 같이 공포에 떨었던 아이들입니다. 제 자식처럼 여기고 반드시 책임지겠습니다!”

“아저씨!!”

아이들이 감격해서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세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비록 팔이 하나밖에 없는 그였지만 아이들을 마음으로 품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 그래. 동굴 안에서도 말 했었지? 아저씨가 꼭 엄마랑 아빠를 만나게 해 준다고.”

“흐에에에에에에엥!!”

부둥켜 안으면서 울어대는 아이들과 외팔이 청년. 이번엔 정말로 감동적인 장면이라 나도 약간 코가 시큰해졌다.

“크흑. 흡……!”

가만 보니 대머리 상인 아재도 언제 자기 아들이 이렇게 어른이 됐나 하는 눈길을 보내며 즙을 짜고 계셨다.

그래. 평생 아이일 것만 같던 아들딸들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서, 자신들이 아이를 보살피는 입장이 되고는 하는 것이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아이들이 좋은 미래를 맡을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내가 마음의 쿠퍼액을 흘려도 되는 장소는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밖에 없으니까.

“예!!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나는 운송 길드가 구매한 손님의 물건─마나 포션 같은 것─도 보수로 챙겨서 길드를 떠났다.

참고로 도적단의 드랍템도 운송 길드에서 구매해 줬다.

약속한 보수를 더해서 현금만 무려 14실버 30쿠퍼다.

“크흠, 애시. 여기 이거, 약속했던대로 보수의 30%입니다. 받으시죠.”

나는 이 보수를 티르시와 나누어 가졌다. 티르시와 내가 3:7로 분배해서, 5실버 30쿠퍼와 9실버로 말이다.

티르시는 봉투를 확인하지도 않고 작게 웃었다. 뒤에서 내가 눈물을 참으며 떠나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14실버 30쿠퍼를 7대 3으로 나누면 제 보수는 4실버 29쿠퍼 아니에요? 이대로라면 제가 1실버 1쿠퍼나 더 받아버리는데요?”

“어흠. 뭐, 잔돈은 제가 마신 상처회복 포션 값입니다.”

“어머. 50ml도 안 되던 포션값이 1실버나 해요? 그거 참 수지 맞는 장사네요.”

“깨진 포션 값도 생각하셔야죠. 그것까지 포함하면 애시가 손해입니다.”

그래서 티르시한테 마나 포션도 1병 더 챙겨줬다.

돈이 안 되는 도난품들은 그냥 운송 길드에 두고 왔기 때문에 추가 수입은 마나 포션 8개가 전부였다. 10병 있었는데 내가 싸우느라 2병 썼거든.

우리는 이걸 똑같이 4병씩 나눠가졌다. 팔면 1병에 1실버 정도는 한다는데 나는 예비용으로 들고 다닐 생각이다.

“아서? 혹시 있다가 옷 갈아입고 나서, 저녁이라도 같이 하지 않으실래요?”

그때 티르시가 내게 식사를 권했다.

아, 확실히 이제 맨얼굴을 깐 사이니까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프랑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승낙하기는 어려운 권유였다.

“기쁜 제안이지만, 다음 기회로 하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래서 나는 권유를 거절했다. 유혹하는 느낌이 있었다면 사양하기 어려웠을 텐데, 진짜 그냥 밥 한끼 먹자는 말투라서 거부감 없이 거절할 수 있었다.

“그거 아쉽네요.”

티르시도 별로 슬퍼하지 않고 내 거절을 받아들였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아아~. 루시도 오늘은 남자친구 만나러 나간다면서 밖에 나갔는데. 그럼 오늘도 저는 기숙사에서 혼자 빵에 잼이나 발라먹고 자야겠네요~.”

“크흠흠.”

나는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그냥 헛기침만 했다.

나 때문에 죽을 뻔 했던 티르시가 신분을 숨기는 것까지 제껴두고 불평하니까 막 미안하고 그렇다.

도적단 소굴에 따라와서 티르시가 얻은 거라고는 대충 천만 원 정도의 보수가 전부였다. 10실버는 마법사에게도 큰 돈이지만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물어보면, 글쎄? 아닐 것 같다.

“그, 길드에 식당은 없습니까?”

“후후. 농담이니까 그렇게 허둥거리지 마세요.”

내가 어쩔 줄을 몰라하자 티르시가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그리 말했다.

“방금 했던 농담까지 포함해서 보수라고 치죠. 오늘은 돈도 벌었겠다, 식당에서 맛있는 밥이나 먹을게요.”

“하하. 그래 주십시오. 다음에 제가 먼저 권하겠습니다.”

“기쁜 말씀 감사해요. 기대할게요?”

티르시는 뒷짐을 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후드 아래의 목도리를 당겨서 살짝 얼굴을 보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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