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009)

“아서. 다음에 만났을 때는 애시가 아니라 본명으로 불러 주세요. 씨 자도 빼고요.”

“애시도 그렇게 해 주신다면.”

“좋아요. 거래 성립이네요.”

티르시는 종종걸음으로 뒷골목에 들어갔다. 나처럼 저기서 목도리랑 후드를 벗고 길드로 돌아갈 생각일까.

“그럼 안녕히. 다시 만나요, 기사님.”

골목에 발을 디딘 티르시는 건물 모서리 밖으로 고개만 슬쩍 내밀어서 윙크를 던졌다. 그러고는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내 앞에서 사라졌다.

‘기사님?’

아아, 어스레이트를 줘팸했을 때도 기사도 운운하는 얘길 했었던가.

로마니아는 도서관이 많은 나라니까, 티르시도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티르시를 배웅한 나는 집으로 귀가하는 회사원처럼 피곤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시발. 되찾은 논문을 운송 길드에 맡긴다는 걸 깜빡했네.

이건 이번 일의 후일담.

“아, 노르…… 왔구나…….”

내가 여관방으로 돌아가니 프랑은 새까만 로브를 수선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마치 나를 떠나보내고 나서 눈도 깜빡 안 하고 일을 했다는 것처럼 초췌하길래 나는 깜짝 놀랐다.

“프랑?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일이랄 건 없는데…… 나도 신분을 감출 수 있는 옷을 만들려구. 노르랑 같이 움직이려면 필요하잖아.”

프랑이 들고 있던 로브를 펼쳤다. 내가 나갔다 온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로브는 거의 완성이 된 듯 했다.

설마 밥도 거르고 로브만 수선한 건가? 나는 들고 온 가방을 던져버리고 프랑 앞에 앉았다. 나 때문에 이렇게 프랑이 무리를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프랑. 나 오늘 아무 일 없었어. 이것 봐. 논문도 되찾았고 다 쉽게 끝났다니까? 이렇게 급하게 만들지 않아도 돼.”

“아무 일 없었다구?”

빤──.

프랑이 멍한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뭐지. 드워프 눈에는 사이코매트리 능력도 있나? 프랑은 그렇게 10초 정도를 쳐다보다가 로브를 걷어 치워버렸다.

─펄럭.

그러고는 돗자리를 편 바닥자리를 가리켰다.

“노르드 씨.”

“네, 넷?”

극한의 무표정이다.

거기에 존댓말이다.

분위기가 쎄했다. 내가 빳빳하게 굳어있자 프랑은 조용히 자기 앞의 돗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유무를 묻지 않는 선언에 얌전히 정좌했다. 나랑 프랑은 무릎을 꿇고 마주앉았다.

프랑은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으셨나요?”

“넷? 어, 그게요. 아무 일도 없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눈깔을 뒤룩거리면서 굴려댔다. 도적단 우두머리한테 눈깔 굴리지 말라던 새끼는 여기 없었다. 나는 아서 웨인이 아니라 노르드였기에.

“거짓말 말고 대답하세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으셨나요?”

“…………있었습니다.”

기나긴 번뇌를 거쳐서 나는 이실직고를 했다.

수녀에게 참회하는 사형수처럼 말이다.

프랑은 정좌를 한 상태로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대로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는 연인이 사정이 있어서 위험한 곳에 가게 됐는데, 노르드 씨는 따라가지 못하고 여관에 혼자 남았어요.”

“거기서 언제 돌아올까,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다음번에는 꼭 따라가겠다며 소일거리나 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연인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숨기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그 거짓말이 자신을 위한 거라는 사실은 물론 잘 알지만, 사랑하는 연인이 자기가 다친 것은 숨기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던 노르드 씨를 오히려 걱정하려는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했습니다.”

“그때 노르드 씨는 어떤 기분이 되나요?”

나는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시뮬레이트를 했다.

프랑이 게르마니아에 혼자 떠났다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돌아와서는 아무 일 없었다면서 배시시 웃으면?

“슬프고, 미안하고, 자신이 한심할 것 같습니다.”

“그게 지금 제 심정이랍니다.”

세상에.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 이렇게나 선명하고 다소곳하게 나를 혼내면서 가르침을 주다니. 프랑은 최고의 어머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와 프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유교 드래곤으로 폴리모프를 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크나큰 상심에 잠겨있는 걸 얌전히 쳐다보던 프랑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못 했어, 안 했어?”

“잘모택동…….”

이세계 꼴마초 노르드, 인생 최대의 반성이었다.

이건 어렸을 적에 친구랑 딱지게임을 하면서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카드를 소환하고 진짜로 친구놈을 후려갈겼을 때보다 더 미안했다.

듀얼킹을 꿈꾸던 시절에야 어릴 적의 치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방금 것은 다 큰 어른이 이기심으로 연인을 상처주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자신이 몹시도 한심했다.

─말캉말캉.

프랑은 커다란 가슴으로 나를 품으면서 엉망이 된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노르. 나를 걱정해주는 건 고마워. 그치만 노르가 나를 걱정해줄 때, 나도 노르를 걱정하고 있는걸?”

내 귓가에 대고 프랑이 자상하게 속삭였다. 우리 여친님의 거유에 안겨서 이 천상의 손놀림에 쓰다듬 당하고 있자니 정말로 성모에게 안겨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부탁할게. 노르 혼자서 너무 많이 짊어지려고 하지 마.”

“미안해.”

“알면 됐어. 나는 우리 노르 믿으니까. 노르의 짐을 같이 들어줄 수 있도록 나도 힘낼게.”

부드러운 앙가슴에 파묻혀서 프랑을 끌어안았다. 상황파악 못하고 고개를 쳐든 쥬지콘다를 내면의 교수 슬레이어가 제압했다.

‘고마워요, 교수 슬레이어.’

이 훈훈한 분위기가 뜨거운 원나잇으로 변할 뻔 했다. 나는 프랑의 품에서 빠져나와서 프랑을 내 가슴에 끌어안았다.

“사랑해. 프랑. 네가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야.”

“그건 나도 그래.”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떨어졌다. 프랑이 평소처럼 헤헤 웃는 미소를 지었다. 으윽. 우리 프랑 너무 귀엽고.

“흠흠. 그러면, 프랑? 너 저녁 아직 안 먹었지?”

“응. 노르가 늦기 전에는 온댔으니까 같이 먹으려고 안 먹고 기다렸지.”

“잘 했어. 일어나서 옷 입어. 좋은 걸로. 저녁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후후. 오늘은 잔뜩 고생했으니까?”

프랑이 일어나서 옷을 집어들며 웃길래, 나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빠 오늘 돈 많이 벌어왔다. 이런 날에는 맛있고 비싼 걸로 먹어줘야지.”

“정말이야, 부라더?”

“그건 하지 말자니까.”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프랑을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틈 날 때마다 찾아둔 식당 중에 하나였다.

“흐이에?”

우리 귀여운 여친님은 조금씩 화려해지는 거리의 모습에 미소가 점점 굳어가더니, 도착한 커다란 레스토랑 앞에서 바실리스크의 석화 빔에 맞은 마을소녀처럼 굳어버렸다.

“어, 어, 어? 노, 노르? 여, 여기로 가게? 여기 엄청 비싸 보이는데?”

휘황찬란한 가게의 모습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프랑. 나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내 짐작인데, 우리 여친님은 성장환경 상 살면서 이런 고급 음식점에 온 경험이 적을 것이다.

가출해서 하루 벌어 하루 살던 프랑 아닌가. 21세기 지구에 태어났다면 국밥 매니아가 되었을 정도로 음식도 가성비를 따지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내가 알바를 못 하던 나이대에 그랬으니까 잘 알지.’

중학생 시절에는 500원을 아끼겠다고 30분을 걸어가서 더 싼 마트에서 과자나 고기를 사고는 했었다. 행사 전단지를 방에 걸어둔 적도 있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며 돈을 벌 수록 씀씀이가 헤퍼졌던 것은 분명 어릴 적에 그렇게 살았던 반동일 것이다.

그런 나였으니만큼 프랑한테는 이런 경험을 자주 겪게 해 주고 싶었다.

‘사람은 때로는 이렇게 돈을 써주는 것도 중요하니까.’

오늘처럼 목돈이 들어온 날에는 시장경제의 활성화에 보탬도 될 겸, 비싸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돈 낭비를 해 주는 것이 예의였다.

“여기 그렇게 안 비싸. 내가 조사해 봐서 안 거고,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안심해.”

“조, 조사? 대체 언제?”

“시간 날 때마다?”

대충 대답하면서 프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머뭇거리는 프랑과 함께 가게로 들어갔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그렇게까지 비싼 음식점은 아니다.

‘진짜로 수준 높은 가게는 우리 프랑한테 꼬까옷을 입히고 데려가야 하니까.’

수준이 존나 높은 여관은 손님들 수준도 높아진다. 그런 곳에 허름한 옷을 입고 갔다가는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것이다.

부끄럽고 싫은 기억만 생기게 될 테니, 드레스코드나 손님 수준이 일반적이면서도 음식이 맛있고 그럭저럭 비싼 장소로 골랐다.

입구컷이 존재하는 격식 높은 식당에는 언젠가 드레스를 입혀주고 데려가도록 하자.

나는 음식의 가격을 보려는 프랑한테서 주문표를 슬쩍 빼앗아서 요리를 시켰다.

“노르. 내가 정말로 이런 비싼 곳에서 얻어먹어도 돼?”

“얻어먹는 게 아니지. 내 돈이 네 돈인데.”

“그, 그렇게 말해주는 건 기쁘지만…….”

치즈에 스테이크에 푸딩까지 나오는 엄청난 라인업에 프랑은 끝까지 망설였지만, 내가 태평하게 식사를 시작하자 나를 따라서 음식을 입에 넣었다.

“──아. 맛있다.”

눈이 휘둥그레진 프랑은 10분 정도 지나서는 푸딩의 맛을 음미하며 몸을 부르르 떨 정도가 되었다.

“맛있어?”

“응! 태어나서 이렇게 단 건 처음 먹어 봤어!”

기뻐하는 프랑을 보니 나도 여기에 온 보람이 있다. 아무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렇게 사치에 적응해가는 법이지.

우리는 그렇게 코스 요리를 배불리 먹었다. 약간 놀랐던 것은 프랑도 생각보다 식사량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가슴이랑 엉덩이를 빼면 몸이 꽤 말랐었기에 잘 몰랐는데, 프랑도 의외로 대식가인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맛있는 걸 자주 먹여주자.

매일 몸을 쓰는 모험가가 살이 찔 리도 없으니 말이다.

그날밤.

나는 프랑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맨얼굴로 거리에 나왔다.

어두운 골목길을 전전하다가 중앙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그런 내 뒤를 수많은 고양이들이 줄을 서서 쫓아왔다. 내가 먹이로 낚은 들고양이들이었다.

“냐으냥? (이 인간 누구?)”

“냐아으앙. (밥 준대.)”

“냐아? 묘아아앙! (밥? 조아!)”

이세계에도 고양이들이 좋아 죽는다는 무슨 풀 같은 것도 있다는 모양인데, 이 도시에서 파는 건지도 잘 모르고 해서 그냥 말린 생선으로다가 유혹했다.

개인적으로 고양이는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수의사가 되려는 이유가 개랑 고양이 때문이었으니까─ 이렇게 바글거려도 보기 좋기만 하다.

‘다른 주민들한테는 민폐짓이지만.’

21세기 지구에서는 이렇게 들고양이들한테 먹이를 줘대는 인간들을 캣맘이라고 부르면서 안 좋게 여겼던가.

나도 시달린 경험이 있어서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오늘부터는’ 예외다.

오늘 이 시간부터 나는 캣대디 노르드다.

“냐아 묘앙. (밥 먹어라.)”

장갑 낀 손으로 말린 생선을 찢어서 던졌다.

고양이들은 내가 던진 생선을 주워먹기 시작했다. 몇 마리는 내가 든 생선을 노리고 덤벼들기까지 했다.

“흐냐으앙…. (그거 조….)”

“냣. (안 돼.)”

더러운 발로 올라타려는 고양이를 밀쳐냈다. 그러자 이 새끼가 갑자기 내 다리에 냥냥펀치를 갈겼다.

─탁!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선빵을 때리고 내려가서 떨어진 생선 조각을 주워먹는 좆냥이.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얘네를 도도한 멍청이, 귀여운 참피라고까지 부른다는데, 약간 공감이 되는 기분이다.

“냐아아응 흐묘앙? (너희들 더 먹고 싶냐?)”

“냐냐─. (응─.)”

내 말에 동시에 애교를 부려대는 고양이들. 새끼들 귀엽네. 나는 피식 웃고서 말했다.

“으냐으 묘아으앙. (그럼 너희한테 부탁 좀 하자.)”

“묘아─? (부탁─?)”

고양이들이 애교를 멈추고 집중했다.

나는 고양이 언어로 얘네에게 주변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것들을 알려달라는 얘기를 전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무서운 느낌이 드는’ 사람들을 알아와 주면 좋겠다고 말이다.

특별히 도움이 되는 정보를 갖다준 녀석한테는 엄청 맛있는 음식을 사 주겠다고도.

“냐냐─! (응─!)”

“고로롱 냐아!! (맛있는 밥─!)”

고양이들은 내 말에 신나하면서 생선을 얻어먹다가 알아서 흩어졌다. 나는 사고 쳐서 주민들 엿 멕이지는 말라고 하려 했는데,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생선을 게걸스럽게 쳐먹고 닷지해 버리는 좆냥이들이었다.

“역시 가정교육을 생선 도둑질로 배운 떼껄룩들 답구만.”

고양이들이 흩어지자 중앙 광장에는 나만 남았다. 나는 기지개를 펴고 나서 후끈거리는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씨발. 사내 새끼가 냥냥 거리려니까 쪽팔려 죽겠네…….’

일부러 밤에 모여서 캣대디 노릇을 한 이유는 그거다. 네코미미 근육마초 노르드의 후냥냥 강의는 목격자가 없는 것이 낫다. 내가 혀 깨물고 뒤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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