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께서는 고개를 드시오.”
자연스러운 반존댓말이었다.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영주님이 우리한테 존댓말을 써 주기는 힘들 것이니까.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영주 일가. 휘황찬란한 판타지풍 옷을 입은 영주와 영주 부인, 영애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나의 영지를 위협하던 흑마법사와 그 수하인 골렘들로부터 사르가디스를 지켜준 그대들을 치하하고자 이리 불렀소이다.”
영주는 옆사람의 숨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파티 홀을 굽어보며 그리 말했다. 아래쪽에서 집사장이 이름을 호명했다.
“경비대장 고드윈 이즈들리. 길피 길드 사르가디스 지부장 에들린 데이메리. 마법사 길드의 소서러 버즈루드 크롬웰. 그리고 아우둠라 길드의 노르드는 앞으로.”
이름을 늘어놓고 호명하니까 내 칭호가 매우 빈약한 느낌이 든다. 나도 시발 석사야 석사!
입안에서 쫑알대며 긴장을 푼 나는 정해진 움직임에 맞춰 영주 앞에 갔다. 갑작스럽게 대표로 꼽히고서 몇 번이고 연습할 기회가 있었기에 실수는 없었다.
“우선은 나의 충실한 심복, 경비대장. 그대는 나를 대신하여 모험가들과 협업하여 훌륭한 작전을 짜 주었소. 이에 그대의 노고에 감사하며 3개월분의 녹봉과 작은 선물을 준비했소.”
“예! 영주님의 하해로운 배려에 감사하옵니다!”
검소한 정장을 입은 경비대장이 무릎을 꿇었다.
“그에 못지 않게 길피 길드의 장, 에들린 데이메리. 그리고 마법사 길드의 소서러(Sorcerer) 버즈루드 크롬웰. 그대들의 활약에 내가 직접 예를 표하겠소.”
““영광입니다, 영주님.””
─척척! 두 사람도 같은 말을 복창하며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이렇게 네 예 알겠습니다 그렇고 말고요만 말하면 된다.
“그대들은 흑마법사가 축적했던 골렘의 군대를 격파하여 위험의 싹을 잘라주었소. 이는 작게 보면 나의 영지의 안전을 지킨 것이요, 크게 보면 나라의 국민을 지켜준 것이니, 이에 감사하며 약소하나마 1골드의 포상금과 작은 선물을 준비하였소.”
““예. 영주님의 하해로운 배려에 감사하옵니다.””
영주 직속인 경비대장이랑은 달리 삭막한 감사인사였다.
저 사람들은 각자 자기네 길드의 길드 마스터한테 지부를 맡은 입장이니까 예의와 복종의 사이에서 타협한 것이었다.
‘근데 시발 1골드밖에 안 주냐.’
1골드. 100실버. 10000쿠퍼.
노르드 환율에 따라서 약 1억원에 상당하는 금액!
적은 돈은 아닌데 저번에 서커스단을 털어서 나온 돈에 비하면 존나 푼돈으로 느껴졌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다 공무원 안 하려고 그러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우둠라 길드의 모험가 노르드.”
딴 생각을 하느라고 저 말에 옙!! 하고 대답할 뻔 했다.
쓰벌 쫄려라. 내가 직립부동 자세로 말을 기다리자 콧수염 달린 영주가 말했다.
“그대의 활약을 감명 깊게 들었소. 예리한 판단력으로 이 인원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흑마법사가 조종하던 거대한 골렘을 파괴하였다지.”
아니 시발, 저 멘트는 리허설에는 없던 내용인데?
내가 들은 대본에서는 여기서 바로 칭찬으로 넘어가야 했다. 나는 저 애드립에 멘탈 데미지를 받으며 즉답했다.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함께 싸웠던 전우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 말게. 흑마법사의 목을 직접 쳐낸 것도 자네라더군. 뛰어난 영웅이 우리 영지에 머물러 주니 나도 안심일세.”
영주의 칭찬에 깨달음을 얻었다. 아이고 시발. 저 콧수염 아재가 왜 저러나 했더니, 나만 소속이 애매해서 그랬구만.
다른 세 사람은 지부장 역할이니까 냅둬도 여기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그래서 다른 세 사람의 활약이 약간 퇴색되어도 나를 띄워주려고 한 것이었다.
‘실제로 전공만 놓고 보면 내가 네페르티티 다음이니까.’
영주가 저렇게만 말해도 연회에 초대된 다른 길드에서 나랑 연줄을 대려고 들 테고, 그러면 저절로 나는 여기를 떠나면 손해가 된다.
도시에서 만든 연줄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로 가면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후원자 구하기 생활이 되지 않겠는가!
“영광입니다, 영주님.”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기냥그냥 90도로 인사를 박았다. 잘 알았으니까 고만 좀 하라는 뜻이다.
“활약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헌데 포상금을 한 번에 지불하는 것은 보관이 힘들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은행이 있어서 좆도 곤란하지 않지만 그렇게 말했다. 미리 합의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작게나마 성의를 보였소. 집사장.”
─뚜벅뚜벅. 집사장은 리허설 때처럼 내게 선물을 건넸다. 금속으로 된 작은 브로치와 증서였다.
물건을 넣은 상자를 열고 집사장이 말했다.
“이것은 앞으로 3년간 사르가디스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징세를 면제한다는 증서입니다. 포상금도 매달 연금 형태로 3실버씩 지불됩니다.”
여기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방향은 집사장을 쌩 무시하고 영주한테 향하는 것이 포인트다.
‘3 곱하기 36은 108. 1골드 8실버.’
딸랑 8 실버 더 받겠다고 연금 형태가 되는 건 내 본의가 아니지만, 세금을 안 걷는다는 점에 혹해서 이걸 골랐다.
내 홈 타운은 어차피 당분간 사르가디스니까 말이다.
“이렇게 대표로 나온 이들 외에도 많은 모험가가 사르가디스를 위해 싸워주었소.”
영주는 일을 끝내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대들에게도 보상이 있을 터이니, 오늘 하루는 축하연을 즐겨 주시오.”
“““예!”””
일동 합창으로 영주를 배웅하는 모험가들.
그렇게 숨 막히는 치하식이 끝나고 나는 자유를 되찾았다.
하이힐을 180도 돌려서 나한테 다가오는 에들린과 로브 자락을 펄럭거리며 속보로 걷는 크롬웰한테서 닷지한다.
이 시발, 여기서까지 댁들 얼굴 보기 싫어요. 니들끼리 짠 하고 2차 3차까지 쭉 달려주시길.
프랑! 프랑이 보고 싶다!
내 쿠크다스 멘탈에 힐을 줄 마이 러블리 엔젤은 오뎄서! 바쁘게 초대객들 사이를 누비며 이동하다가 라리루라를 발견했다.
나는 안심하며 거기로 가려고 했는데, 라리루라는 웃으며 반대편을 가리켰다. 참참참 좆밥처럼 손가락 방향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나는 그걸 발견하고야 말았다.
“히이이이이…….”
우리 여친님은 거기 계셨다. 시스루 캐미솔을 마지막 방파제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고 말이다.
‘갓뎀.’
나는 그 드레스를 보고 발이 못에 박힌 것처럼 굳어버렸다. 평소의 프랑한테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파격적인 옷이었기 때문이다.
가슴골과 옆가슴이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였다.
등쪽에는 아예 허리춤까지 천이 전혀 없다. 할리우드 여자 배우들도 소화하기 힘들 것 같은 곳인데 프랑한테는 미치도록 잘 어울렸다.
가린다고 가린 캐미솔도 하얀 시스루라서 오히려 섹시함만 늘어나는 느낌.
“──아! 노르!”
그때 나를 발견한 프랑이 아침햇살을 받은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었다. 불안이 싹 사라지는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1달만에 주인을 만난 미아견을 방불케 했다.
‘아 쉽펄 진정헤 미친련아.’
나는 파블로프의 쥬지콘다를 캠 다운 시켰다. 우리 프랑의 드레스 차림이 개껄리는 건 인정하지만 파티 홀 풀발기남이라는 별명이 생기겠다.
─폭. 프랑이 달려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체온이 따듯하다. 우리 고향 집에도 프랑 보일러 한 대 놔 두고 싶다.
“후훗! 노르! 영주님한테 인사 드리는 거 무지 멋졌어! 그 옷도 엄청 잘 어울리구!”
“프랑 너만 하겠냐. 남들 보여주기 아까울 정도네.”
까만 머리를 늘어트린 프랑을 토닥여줬다. 침대에서 매일 하는 일인데 등이 맨살인 게 오늘따라 몹시 선정적이었다.
“으, 응. 노르한테 보여주는 것만 생각하느라고 다른 사람들까지는 상상을 감안 못 했어……. 나 부끄러워서 죽어버리면 어쩌지?”
프랑은 부끄러운 것처럼 내 망토에 숨어들며 말했다. 그건 곤란하지. 프랑이 죽어버렸다간 내 인생의 목표가 차원이동 개발에서 예토전생 개발로 방향을 급선회 해 버린다.
“가만 있어 봐.”
─펄럭!
나는 망토를 벗어서 프랑의 옷을 가려줬다. 과대포장 ON. 이건 나만 볼 거다.
“아, 장미 예쁘다. 어디서 났어?”
원탁의 기사 망토에 감싸인 프랑이 내 찌찌 포켓에 꽂힌 장미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프랑은 따로 꽃을 꽂지 않았다.
라리루라가 말을 안 해 줬나? 눈치 좋은 녀석 같으니.
“오는 길에 샀지. 흐흐. 네 심미안에 맞을 정도면 어디 가서 모자라지는 않겠다.”
“에이, 과대평가야.”
그리 말한 프랑이 망토 자락을 잡고 수줍게 물었다.
“그래서…… 노르? 나 에스코트 해 줄 거지?”
“Yes, My Lady.”
허리를 숙이며 프랑의 손등에 입맞춤을 했다. 이세계에서도 이런 종류의 문화는 지구와 비슷했다. 프랑은 빨개진 얼굴로 웃었다.
“푸흐흐. 분위기 잡는 거야? 멋지네.”
“멋있어야지. 누구 남자인데.”
프랑의 어깨에 손을 감고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러자 분위기를 파악한 사람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메다다닥!
“안녕하십니까 노르드 씨. 저는 랑노르 상회의 대표인 펠프라고 합니다만──”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군요. 노르드 씨는 광석의 채굴에 대해서 혹시 아시는 바가──”
나랑 프랑한테 꼬여드는 잘나 보이는 사람들의 격류!
고위 모험가는 호위, 채집, 전속 고용 등에서 쓸모가 많다. 실력이 좋은 모험가일 수록 모험가를 때려치는 경향이 있어서 더 그렇다.
그래서 저들은 내가 아직 줮밥일 때부터 침을 발려두려는 것이었다.
도시 주요 전력들과 나란히 치하받은 은둔고수 브딱이! 그야말로 가상화폐 폭등 전의 비트 코인 같은 개꿀 아이템이다.
‘저 놈들을 다 상대해 줬다가는 파티 요리는 먹지도 못하겠구만.’
나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그들을 상대했다.
“시부럴. 존나 지치네.”
계속해서 밀려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다 지친 나는 정원으로 빠져나와서 그리 중얼거렸다.
회중시계를 보니까 벌써 8시 반이었다. 축하연의 파장(罷場)이 딱 10시라고 하니까 파티 시간의 6~70%를 노땅들 상대에 낭비한 것이었다.
나는 그러는 도중에도 프랑을 라리루라한테 붙여줘서 식사를 시키거나, 노땅들을 피해서 테라스로 도망치거나 했다.
근데 시발 그 새끼들은 내가 테라스에 나간 게 ‘@@@1대 1로 만남 주선함@@@’이란 뜻인 줄 아는지, 아주 밖에서 줄을 서고 기다리더라.
존나 판타지 소설 같은 곳에서는 테라스에 있으면 잘 안 건드리던데, 역시 소설은 소설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에들린이 줄 중앙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좆 빠지게 도망쳐 나온 것이었다. 저 좁은 테라스에서 40대 총각 사냥꾼 아줌마랑 맞다이 매치요? 미쳤습니까 휴먼?
아 시발 배고파. 11시에 점심 먹고 계속 굶은 나는 삶의 무상함에 신음하며 정원의 뒤편으로 갔다.
<당신은 정말 그걸로 괜찮아?>
뭐지? 내가 점찍어둔 장소에서 누군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늑대와 같은 귀로 멀리서부터 소리를 캐치해낸 나는 거기에 귀를 귀울였다.
귀족의 파티장에 습격을 거는 테러리스트! 존나 판타지 소설의 국룰 아니던가. 운이 좋으면 1골드이 아니라 10골드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은가 아닌가의 이야기가 아니여요. 가족들이 살아 있고, 쫓는 사람은 없다. 저는 그걸로 충분하와요.>
인상미채의 가면이 없어서 거리를 최대한 벌리고 은신에만 몰두하던 나는 인상을 썼다.
‘……목소리가 어쩐지 낯이 익다?’
말투는 엄청 위화감이 넘친다. 농도 100% 귀족 아가씨가 쓸 법한 말투다.
‘이거, 티르시인가?’
그런데 그 말을 자아내는 목소리는 귀에 익다.
2명의 여성 중에서 한 사람은 오늘 파티 홀에 보이지 않던 티르시였던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걸까?>
<후후후. 모를 일이어요. 저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줍는 행복도 있겠지요.>
<……티르. 줍는다고 하지 말아줘. 우연이든 운명이든 네 손에 들어왔다면 네 행복인걸. 나는── 읏! 누구냐!!>
티르시에게 말을 걸던 누군가가 갑자기 외쳤다.
앗 시발 들켰다! 나는 튈까 말까를 0.02초 정도 생각하다가 두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관수로 만들고 달려들었던 것은 헨네시스 영주의 딸내미였다. 그러니까 존나 리얼 블루-블러드 아가씨 말이다!
“당신은──”
당연히 근접 10미터에서 내가 자기 아빠한테 칭찬받는 걸 구경한 영애도 나를 알아봤다.
─휙! 손을 거두며 검처럼 털어내는 영애님.
아니 근데 영애 씩이나 되시는 분이 수도(手刀)로 공격을 하시네. 존나 터프하시구만.
“오늘 초대받은 모험가로군요. 여기에는 어쩐 일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지쳐서 숨을 돌리러 왔습니다.”
반쯤 사실이었기에 양심이 찔리지 않는 거짓말이었다. 갈색 머리에 귀족답게 롤빵 펌을 넣은 영애는 의심쩍다는 것처럼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어디까지 들었죠?”
“아뇨, 그. 브리타니아 어가 아니어서.”
“아아. 그랬죠. 다행이군요.”
이번에는 100% 구라였지만 헨네시스 영애는 내 피부색을 보고는 납득을 했다. 그러고서 서슬 퍼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만약 처음부터 들었다면── 당신과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뻔 했어요.”
“우, 운이 나빴군요. 영애님의 옥구슬 같은 목소리를 오래 들을 기회를 놓치다니.”
“어머나. 말을 재치있게 하시네요.”
─싱긋. 다정하게 웃으며 영애가 말했다.
“오늘 본 건 잊으세요. 알겠죠?”
“옛썰.”
“좋아요. 안녕히 계시길. 티르시? 당신도요.”
그렇게 할 말만 하고 헨네시스 영애는 떠나버렸다. 휴. 진짜 죠테루 뻔 헨네.
“후후후. 엿듣기는 안 좋은 취미에요, 노르드. 거짓말도 그렇고요.”
티르시는 목깃을 당기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늘색 드레스는 살갗 노출이 거의 없었지만 스커트 기장이 짧고 검은 스타킹을 신었다. 차이나 드레스의 이세계식 어레인지 같은 옷이었다.
“거짓말이라뇨. 제대로 못 들은 건 사실입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젠틀하게 인사했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다행입니다, 티르시. 드레스가 참 멋지군요. 당신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근사한 옷입니다.”
“고마우신 말씀. 노르드는…… 솔직히 말하면 검은 로브가 더 멋있었던 것 같아요. 칭찬해 줬는데 미안해요.”
“흐흐. 뭘요.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연미복은 프랑의 디자인 센스에 못 미친다. 간지라는 점에서는 아서 웨인의 코스튬이 압승이었다.
티르시는 그렇게 웃다가 약간 내 눈치를 봤다. 입가가 약간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