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1,009)

나 빼고 다 여성인 파티니까 더 조심을 해야겠다. 제 어미가 누구 애인지도 모르고 낳은 새끼들이 음심을 품을 법한 미인 집단이 아닌가.

─빠지직.

우리는 나무 문이 썩어서 문드러진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털린 뒤인지 발자국이 가득하다. 티르시는 거기에서 빈 병을 집어들었다.

“포션이군요. 오래 방치되어서 마개가 썩었는지 내용물도 다 증발했어요.”

“남아 있었으면 팔 수 있었나요~?”

라리루라가 방에 널린 병을 구경하며 물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선반에서 몇 개씩 빈 공간이 있다. 먼저 온 놈들이 안에 포션이 남은 병만 챙겨간 모양이었다.

티르시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요. 100년도 더 된 포션이 멀쩡하려면 엘릭서는 되야 할 걸요. 남아 있어도 약초로 만든 식초에 불과해요.”

“약초 식초? 아핫! 요리에 넣으면 건강에 좋겠네요!”

“그러다 훅 가버리는 수가 있어요? 배탈 나서.”

“그 정도입니까? 뭐, 가져간 놈들은 그 식초가 안 팔리면 독으로 쓰라고 하죠.”

“흐음. 글쎄요.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지만, 그냥 독을 쓰는 게 더 쉽고 빠르지 않을까요?”

전문분야 얘기가 되니까 티르시도 농담이 안 통했다. 이건 범생이들 종특이었다.

“야, 야. 여보님아. 딴소리 말고 이리 와서 도와.”

그때 다나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거친 말투랑 다르게 하는 짓이 존나 소극적이여서 깜찍하기가 짝이 없군.

볼에 뽀뽀라도 해 주려다가 말았다.

“뭔데? 기록이라도 찾았냐?”

“그런 게 있었으면 먼저 온 놈들이 쓸어갔겠지. 이것 봐.”

─달그락. 다나는 포션병의 라벨을 보였다. 유리 공예로 병에다가 새긴 문양! 나는 그게 뭔지 알았다.

“올레움 상툼(Oleum Sanctum)?”

“어.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나한테는 이게 황금시대의 포션 제조 업체 문양으로 보인다?”

“내 눈에도 그런데…… 이게 왜 여깄냐?”

올레움 상툼은 고대문명의 유명한 포션 제조 업체다.

업체, 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커다란 집단이었다고 한다. 올레움 상툼의 포션을 몇 다스 구매하여 배치했다~ 하는 문구가 유적에서 찾아보기 쉬운 상투구일 정도로 말이다.

“이 방이 포션 창고였나?”

“그냥 창고 치고는 양이 많은데요~?”

라리루라가 말에 프랑이 락피킹을 하는 흉내를 냈다.

“응. 입구 보안도 별로인걸? 나였으면 바늘 2개만 있어도 땄겠어.”

“……혹시 모르니까 이건 자료로 챙겨둔다?”

“굳이?”

“허탕이면 어때.”

탑에 살던 놈들이 상비약으로 챙겨놓은 물건 아닌가? 챙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는데, 다나는 병을 천으로 잘 감쌌다.

“라리루라?”

“네~. 오픈♡!”

─달칵. 병은 링링이 3.5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저 녀석 배는 주인인 라리루라한테 편리한 창고 취급을 받고 있구만.

우리는 2층을 대충 돌아보고 아래로 내려갔다. 전투는 최대한 피했다. 잡아도 전리품도 안 나오는 놈들이니까 말이다.

“저기요~? 이래서는 제가 내기에서 져서 선배한테 몹쓸 짓을 당해 버리는데요? 선배도 선배에요. 이런 비겁한 승리로 정말 괜찮으신가요~?

“더 내려가면 싫어도 싸우게 될 걸. 얌전히 있어.”

“힝.”

힝이고 나발이고 싸우지 않을 수 있으면 그게 제일 낫다. 장난 반 진심 반인 라리루라를 조용히 시키고 이동 개시다.

전투를 회피하는 일에는 프랑이 고생을 했다.

“이쪽 방향, 안쪽이 소란스러워. 싸우고 있는 것 같아.”

반지와 마나의 힘으로 레이더 역할을 톡톡히 하는 프랑!

그런 프랑 덕분에 우리는 처음 싸우고 나서 계속 전투를 회피할 수 있었다. 나도 귀를 기울여 보기는 했는데 저렇게 잡음을 잘 분별하지는 못하겠다.

이동하는 도중에 다나는 약도를 만들었다. 힐러는 전투 초반에 반응이 늦어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층으로 내려갔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남들이 손을 안 된 것으로 보이는 공간을 찾아냈다. 티르시는 일행을 대표해서 질문을 꺼냈다.

“……저기요 여러분? 저쪽으로 가실 건가요?”

“전 가기 싫어요……. 저희보다 빨리 온 사람들이 안 간 이유가 있을 거에요…….”

라리루라는 그 통로의 초입에 손가락질을 했다.

거뭇한 피가 묻은 벽면을 말이다.

“흘린 지 얼마 안 됐군.”

나는 피의 색으로 대충 눈치를 깠다. 의기양양하게 저기로 들어갔다가 아바바밧?! 하고 함정에 걸렸을 모험가의 낯짝이 눈에 선했다.

“존나 많이도 흘렸구만. 치료가 제때 됐기를 빌어야지.”

“말만 그렇게 해 놓고 성호 긋는 인성 무엇? 아니, 것보다 누나 종교 없잖아요.”

“이런 건 마음이 중요한 거야. 여기서 드루이드식 장례를 치뤄줄 수도 없잖아? 내가 아는 종교는 그것 뿐인데.”

“드루이드식 장례가 먼데요.”

“볏짚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고 거따가 시체 꽉꽉 채워서 불 지르는 거.”

존나 얼스터에는 그런 문화가 있나 보군요.

“브리타니아에도 비슷한 게 잇서요. 화형이라고.”

“그건 죄인들 처형하는 방법이잖아. 아, 태워야 하는 놈을 뼈만 남겨놓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베큐 하자고 부르면 멧돼지 몰아올 련……. 키스만 해 줘도 배때기 커질 련……. 그래서 더 귀여운 련…….”

“미친놈아.”

아무튼 그렇게 석-박사의 품격 있는 회의 끝에 나는 여기 함정을 해체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내 부름에 프랑은 가죽갑옷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나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우리 프랑의 지혜에 감탄을 하며 말했다.

“GO, 골렘. GO.”

《시, 신으로서 일어나라(Dd.f xa m nTr)……?》

“GOGOGOGOGOOOOOO─!!”

프랑의 어눌한 발음에도 골렘 생성은 성공했다.

투척 나이프를 코어로 흙 골렘이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흙이 없는 실내라서 유지에도 마나가 들겠지만, 오랫 동안 운용할 생각도 아니니까 괜찮다.

“됐다!”

프랑은 환호하며 골렘을 움직이게 시켰다.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정도로 느렸지만 등빨이 있어서 존나 듬직했다.

“아. 그치만 언니. 쟤 코어가 반쯤 삐져나와 있는데요? 저 상태로 괜찮나요~?”

라리루라가 골렘의 목에 묻힌 코어를 가리켰다.

보통의 골렘이라면 저건 실패작이라고 해도 좋았다. 심장을 가슴 밖에 내놓은 셈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저게 가장 좋다.

“어, 저거면 돼. 라리루라. 네 <꼭두극>을 코어에다가 연결할 수 있지?”

“──앗! 그렇군요? 부숴지거나 떨어지면 제가 당겨서 회수하면 되는 거죠?”

“설명 안 해도 되서 좋구만. 우리 라리루라 똑또케.”

“흐흥♡ 제가 좀 똑똑한 편이죠.”

라리루라는 뽐을 내다가 골렘의 코어에 마나의 실을 연결했다.

이제 박살나거나 추락해도 회수가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 골렘의 이마에다가 룬까지 새겼다.

ᚨ(Ansuz). <부여>. <타오르는 손길(Burning Hand)>의 3단 콤보였다.

“GOOOOOO──!!”

룬의 힘으로 흙이 강화되고 약한 열기까지 얻은 골렘!

이제 체중, 열기, 마나에 반응하는 함정은 모두 골렘에 맞춰 작동을 할 것이었다.

인간이 발동하는 것도 아닌 반자동 함정이라면 이 골렘과 살찐 침입자를 구분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저희 세 사람의 공동합작 골렘! 출발이에요☆!”

“조종하는 건 나지만.”

룬 마법의 힘일까. 빠르고 정밀해진 골렘은 프랑의 조작에 따라서 함정 해체에 도전했다.

뭐, 그래도 프랑의 손재주를 그대로 살릴 수는 없었다. 존나 손도 두꺼워서 성공 반 실패 반인 느낌이다.

─철커덩! 쿵!

─푹푹푹푹!!

살인적인 창살이 튀어나와서 골렘을 꼬챙이로 만들어놨다. 해체 실패다.

“GOGOGO.”

하지만 생물도 아니고 지능도 없으며 통증도 안 느끼는 흙 골렘에게는 좆도 상관이 없는 일!

솜 인형에 구멍이 뚫렸다고 뒤지는 것 봤는가? 3분 인스턴트 골렘은 흙을 쏟아내며 다음 함정으로 나아갔다.

─덜컹!!

함정에 4~5번 걸리고 나자 프랑도 이제 포기한 것처럼 걍 닥치는대로 함정을 몸빵으로 떼웠다.

TRPG에서는 전사가 힐러나 포션을 믿고 함정을 몸으로 떼우며 전진하는 작전이 있다는데, 그것의 이세계 실천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하하하하! 이거 편하네! 다른 녀석들이 보면 배 아파서 뒤지겠어!”

골렘의 대활약에 다나는 박수까지 쳐가며 즐거워했다. 저 복잡한 함정을 우회하지 않고 뚫어버리는 골렘 해체쇼가 존나 상쾌하긴 했다.

프랑은 조작에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다나. 함정 몇 개는 작동을 안 해. 관리를 오래 안 해서 그런 것 같아. 그리고 함정의 구조도 건물을 세우면서 설계한 느낌이 아니구.”

“만들어진 다음에 추가로 설치해 놨다는 거?”

“응, 아마도? 처음에는 침입자에 대비하지 않고 그냥 보통 탑으로 세웠던 모양이야.”

“탑 안에 함정을 설치하는 건 돈 낭비니까요. 이렇게 흙에 덮인 곳만 아니었으면 천장이나 벽을 부수고 나아가도 될 일이고요.”

티르시가 말했다. 우리는 취할 수 없는 전법이었다.

‘마나를 낭비했다가는 몬스터한테 당하니까.’

유물이 박살나도 곤란하고 생각 없이 부숴대다간 탑이 무너져서 토사에 깔려 뒤지는 수가 있었다.

“해체 끝. 내가 찾을 수 있는 함정은 다 찾았어.”

프랑은 그렇게 말하며 골렘 유지를 해제했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프랑이 저렇게 말하는 거니까 전부 다 해체한 거겠지. 함정은 찾는 것만 놓고 보면 어렵지 않다. 안 뒤지고 해체하는 게 어려운 거지.

─후두두둑.

마나로 만든 흙은 조금씩 형상을 잃고 사라져갔다. 라리루라가 나이프를 회수해서 프랑한테 줬다. 나도 룬을 해제했다.

우리는 조심하며 통로를 나아갔다. 함정은 발동하지 않았다.

“흐흐. 우리 프랑 최고야. 너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내가 귀를 만지며 칭찬해 주자 프랑은 기뻐했다. 아무래도 위험한 곳이라서 오래 꽁냥대지는 못했다. 다나가 통로를 전진하다가 혀를 찼다.

“석문(石門)이군. 또 함정 같은데?”

“어디?”

프랑은 세월을 견딘 돌 문을 발견하고 장갑을 꼈다.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물건이다. 그런 걸 끼고 잘도 락픽을 든 프랑은 문 손잡이를 건드려 보다가 물러났다.

“문고리를 따려고 하면 독침이 나오는 구조야. 낡은 방식이라서 발견하기는 쉬운데, 해체하기가 어려워. 부숴도 돼?”

“반대하는 사람?”

없군. 파티원들이 암묵의 동의를 하자 라리루라가 말했다.

“부수는 거라면 링링이한테 맡기시라~☆! 독 묻은 화살도 불꽃 세례도 전부 태연하다구요~?”

“부탁해, 라리루라. 내 골렘은 힘이 약하거든.”

“네네~.”

“그럼 다들 내 뒤로 와요. 실드 치게.”

처음 짠 파티지만 협업이 잘 되는 느낌이었다.

꼭두각시 인형이 전진하고 파티원들은 다나의 뒤로 왔다. 다나가 손을 들어올려서 심호흡을 했다.

─휴우우우우!!

나는 다나의 몸에서 움직이는 마나가 정해진 형태로만 돌아다닌다는 것을 눈치챘다. 보통 마법은 저렇게까지 확실하게 마나의 이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다나가 마법을 쓸 때 주문을 외우는 걸 본 적이 없네.’

얼스터의 전통 주술 같은 건가? 바이콘이 쓰던 룬 마법도 그렇고, 현대식 마법을 제외하면 다들 그런 모양이었다.

‘바이콘이라.’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을까. 날 보러 온다고 해 놓고 감감무소식이다. 며칠만에 오지 못하는 거리인가?

분명 꿈 속에서는 꼭 사르가디스에서 멀리 있다는 것처럼 말했던 것 같다. 어떻게 고작 하루이틀만에 먼 곳으로 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됐어.”

다나가 지름 3미터의 커다란 실드를 펼쳤다. 라리루라는 손가락에서 뻗은 마나의 실을 조작했다. 꼭두각시의 오른팔 소매에서 굵직한 날붙이가 튀어나왔다.

“새 무장이에요! 이름하야 뎅겅뎅겅 나이프☆!”

“슬슬 너도 니 작명센스에 회의감을 느낄 때가 되지 않았냐?”

사람 이름이 라리루라였던 때부터 눈치를 깠어야 했는데. 내 한숨을 씹은 링링이 3.5호는 문고리를 잘라냈다.

─와르르르.

동력원이 강화된 꼭두각시의 펀치에 문은 개박살이 났다. 함정이 발동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 저 통로에 깐 함정이 전부였나 보다.

우리는 다나의 실드 마법을 방패로 쓰며 그 방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은.

“──연구소?”

사람도 들어갈 것처럼 거대한 구(球)형의 유리 플라스크와 녹슨 파이프가 즐비한── 고대문명의 연구소였다.

“후으. 설마 하던 포션 연구소인가. 존나 허탕이었네.”

다나는 산타 할아범이 준 선물에서 닌텐도 영어 삼매경 게임을 발견한 아이처럼 그리 말했다.

존나 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고대문명의 포션 연구소는 예전부터 잔뜩 발견됐다. 그 기술도 분석이 많이 진행되었고 말이다.

최고급 포션인 엘릭서도 예산만 들이면 재현이 가능한 상황!

포션과 관련된 유적이란 그만큼 가치가 바래는 곳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