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하죠. 1층을 샅샅이 뒤져서 남은 흔적부터 찾는 거에요.”
다나의 말에 우리는 의문을 제쳐두고 움직였다.
빛과 기름, 두 가지 랜턴의 빛만이 탑의 어둠을 밝혀주었다.
보통 게임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는 탑의 정상에서부터 1층으로 내려갔다.
이곳이 땅에 파묻힌 탑이라서 어쩔 수 없었는데, 그렇게 탐색을 해서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여기. 설계 당시에는 옥상이 맞았던 것 같아.”
안목을 살려서 실내를 조사한 프랑이 말했다.
탐사자들이 임의로 1층이라고 불렀던 이곳은 적어도 막 세워졌을 때는 옥상이 맞았다고 한다. 나는 안목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 프랑이 그렇다고 하니까 틀림없겠지.
다나는 선발대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내부를 보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주 갈아엎어 놨구만. 예상은 했지만.”
탑의 1층─편의를 위해서 1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에는 멀쩡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탐사자들이 물건의 가치를 잘 모르니까 닥치는대로 뜯고 부숴서 챙겨간 것이었다.
난폭한 이세계인들의 손을 거친 곳은 보통 이 지랄이 나고는 했다.
사실 다나도 연구할 재료가 털린 것에 분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지, 유적 훼손에 분개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라깽이가 폼 잡으며 지껄였던 것처럼 현대 이세계에서 탐사와 훼손은 표리일체였으니까.
“여길 계속 도는 건 시간 낭비겠어.”
1층을 대충 돌아본 우리는 그런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처음부터 탑으로 설계해 놓은 건물이기에 안쪽까지 이어진 비밀 출구나 숨겨진 공간은 없을 것이었다.
“다음층으로 넘어갈 용기가 없는 것들이 계속 들쑤셔 놨을 거야. 적어도 사람 손이 덜 탄 곳에 가서 자료를 찾지 않으면 눈 뜨고 놓친 유물을 연구비로 사는 꼴이 될 걸.”
“쥐꼬리 만한 예산을 거기에 융통하는 건 곤란하지. 좋아. 네 말대로 하자.”
내 의견에 의뢰주인 다나가 동의했기에 우리는 탑의 계단을 찾아서 내려갔다.
탑의 역사적 가치를 찾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뭐든지 간에 유물부터 확보한 다음에 해도 될 것이다. 유물을 가지러 온 놈들은 역사엔 관심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와서 2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잠깐, 멈춰.”
프랑이 손을 들어서 정지 사인을 내렸다.
반지에 손을 얹은 프랑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파란 마나가 미스릴 반지의 룬을 강화했다.
오감을 강화하는 반지의 효과를 더 강하게 발동해서 마치 레이더처럼 사용하는 것이었다.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도적인 프랑의 일이다. 우리는 얌전히 기다렸다.
1분 정도 집중하다가 눈을 뜬 프랑이 작게 말했다.
“발소리야. 딱딱하고 불규칙적인 소리…… 발끝이 갈라진 생물이 접근하는 것 같아.”
“숫자는?”
“대충 들어도 10마리 이상.”
그 말에 우리는 포지션에 맞춰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나랑 다나가 전위, 프랑과 라리루라가 중위, 티르시가 후위다.
─후두적. 후두적.
말로 적자면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되는 이상한 발소리!
넓은 실내의 출입구에서 한 마리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코로로록.”
말라깽이 놈이 설명한 그대로의 모습!
갑각 사이로 털이 난 이족보행 풍뎅이 같은 놈이었다. 손은 사슴벌레의 턱처럼 좌우로 벌려지는 집게였다.
다른 파티원들도 말로는 안 했지만 몬스터의 혐오스러운 생김새에 다 속이 안 좋아진 표정이었다. 그래도 나는 적과 마주친 공간이 넓은 것에 안심하며 창을 들었다.
“쓰벌롬이, 와꾸 봐라. 니 왜 그따구로 생겼어?”
대답을 바란 말이었다. 내 번역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벌레 새끼는 그런 우리들에게 곤충답게 무기질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코로로로로로락!!!”
─두두두두! 달려드는 이계의 몬스터!
그에 맞춰서 랜턴의 빛이 닿지 못한 곳에서 여러 마리가 더 나타났다! 애1미 시팔. 아까 들어간 상인 길드 놈들은 잘도 얘네를 피해갔구만.
나는 청룡언월도처럼 날이 긴 창을 빠따를 쥐듯이 잡았다.
“<부여(Enchant)>, 금태양(金太陽)의 호흡.”
창끝에 새겨놓은 ᚨ(Ansuz)의 룬이 <타오르는 손길(Burning Hand)>의 효과를 강화했다.
어두운 공간과 거기서 덤벼드는 초대형 육식 곤충!
그것은 나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스위치였다. 프랑과 티르시를 만났다는 사실만 아니었어도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미 그때의 내가 아니다.
“내가 네놈들의 세스코가 되어주마.”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곤충놈에게 황금의 불꽃을 깃발처럼 태우는 창을 내려꽂았다.
“코로아아아아악──!!”
─퍼서석!!
황금색 불꽃의 창이 털 달린 벌레의 데굴빡을 박살냈다.
해충 구제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뭔지 아는가?
그것은 치약과 불이다. 오물 소독에 효과적인 불소와 불은 리빙-오물이나 다름없는 벌레들에게 특공 데미지로 들어갔다.
야훼는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정화했지만, 나는 이 벌레 소굴을 불꽃과 창으로 정화하겠다!
“코로로아아아아아악─!!”
─퍼석! 빠각!
야수회귀의 힘으로 휘두른 미스릴 창이 벌레 몬스터들을 격파했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대갈통이 박살나는 벌레들!
이런 곤충형 몬스터는 밀림이 많은 아즈테카에서나 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제대로 대처법을 알아두지 않았다.
하지만 벌레는 자고로 대가리를 박살내고 확인사살을 하면 되는 법이라고 하지 않는가!
짬똥 행보관도 라이터와 에프킬라만 있으면 꿀벌집 정도는 지 혼자 해치울 수 있거늘, 내가 파이어-미스릴 스피어로 이 놈들을 못 죽일 이유가 없다!
“하아…… 시발. 내가 벌레가 어쩌고 할 때부터 좆 같겠다 싶기는 했지.”
한숨을 쉰 다나가 건틀릿을 낀 주먹을 쥐었다.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지금에는 알 수 있었다. 건틀릿 아래로 몰려드는 마나를 말이다.
야수회귀처럼 겉으로 표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신체를 추가로 강화하는 무언가의 버프가 작용하는 것이었다.
“코르아아아악!!!”
“입 벌리지 마, 역겨우니까!!”
─쩌적!! 무자비한 펀치에 머리통이 터져나가는 벌레들! 체액인지 뭔지가 몸에 튀자 다나는 인상을 썼다.
“아악!! 존나 소름 끼쳐 뒤지겠네!!”
불쾌함을 숨기지도 않고 다나는 정면에서 몬스터와 난투를 벌였다.
짜증이 담긴 주먹질을 매서웠다. 가끔씩 벌레의 공격이 다나가 갑옷을 입지 않은 곳에 날아와 맞았지만 다나는 역겨워 할 뿐, 통증을 느끼는 기미도 없었다.
나는 창대로 벌레놈의 대가리를 부수며 낄낄댔다.
“아이고, 우리 눈나 여전히 존나 튼튼하시네!”
“씨발, 말 하게 만들지 마! 입 안에 튈까 무섭다고!”
“흐흐. 그거 미안.”
말라깽이한테 들은 바로는 이 놈들한테 독은 없었다.
만약 그게 구라여도 해독 마법을 쓸 수 있는 다나도 있고, 마법으로 만든 해독 포션도 가지고 왔다. 걱정 안 해도 됐다.
“으윽!!”
흐르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다나는 벌레의 공격을 흘리고 아예 목을 후려쳐 꺾어버렸다. 아무리 벌레라도 크기가 저리 크다 보면 신경이 부숴진 뒤에는 움직이기 힘들겠지.
─타탓.
난전이 벌어진 탑 안에서 가장 빠른 것은 프랑이었다.
프랑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날렵한 움직임과 완력을 적극적으로 살렸다. 프랑이 손에 든 나이프를 던졌다. 뒤쪽에서 킬각을 노리던 벌레들이 허벅지에 나이프가 꽂혀서 멈췄다.
─슈카카칵!
무릎을 꿇은 프랑은 벌레의 몸을 양손에 든 나이프가 난도질했다. 특출난 손재주에 힘과 속도가 더해지자 벌레가 머리 가슴 배로 나눠지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강화된 움직임을 실전에서 시험해 본 프랑은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이유는 다나와 같았다. 프랑의 솜씨를 살려도 피가 튀는 것은 막기 힘든가 보다.
“여러분~? 별로 강한 녀석들도 아니니 물러나 계세요~!”
상큼하게 말한 라리루라가 링링이 3.5호를 가동시켰다.
벌레를 잡은 꼭두각시가 <마법의 화살(Magic Missile)>을 발사하는 기능을 가진 손가락을 놈의 가슴에 댔다. 마나가 펌프질을 하는 것처럼 발사돼 몸통을 터트렸다.
“썩을. 나는 후방에서 지원하련다. 미안.”
그걸 본 다나는 힐러 역할로 돌아왔다. 앞에서 싸우다간 저 공격에 앞뒤로 벌레 체액 샤워를 할 것 같아서 그랬겠지.
불꽃 덕분에 체액이 튈 걱정이 적은 나는 예상 이상으로 약한 몬스터들의 수준에 안심하며 마음껏 창술을 펼쳤다. 존나 전투가 여유로운 덕분에 잡생각까지 든다.
‘창이 이렇게 쓰기 쉬운 무기였나?’
난전이 되면 창을 휘두를 공간이 거의 안 날 줄 알았는데, 창의 위력과 사정거리가 벌레 놈들의 접근을 불허했다.
덤벼든 놈들의 사지가 버터처럼 썰려나가니까 공포를 알지 못하는 벌레 새끼들조차 접근을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존나 마음에 드네. 진작에 창으로 바꿀 걸.’
여러 번의 실전에서 깨우친 간격 조절 능력을 살리는 일에 창은 최적의 무기였다. 파티원들이 전열을 받쳐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미스릴로 만들어서 그런가? 창 자체의 위력도 굉장해.’
대학에서 보급품으로 뿌린 철검을 쓰다가 고급 소재로 도배를 한 무기를 쥐니까 존나 차원이 달랐다.
─서거걱!
벌레의 팔을 두짝 다 날려버리고 놈의 머리통을 꿰뚫는 창! 체액 투성이가 되어도 날카로움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낡은 가위로 종이를 자르다가 새 가위로 바꿔 들었을 때의 짜릿함이었다.
‘그래도 찌르기는 난전에선 쓰기 어렵군.’
관통한 다음에는 무기에 짐덩이가 생겨버리는 셈이라서 막 찔러대기도 어렵다. 나는 전황을 확인하고 초인적으로 강한 완력을 살려서 전력으로 창을 휘둘렀다.
─써거걱!
2마리의 벌레의 목이 한꺼번에 날았다.
전황이 위험했다면 마법을 쓸 생각이었지만 이 정도면 실전 겸 훈련을 하는 기분으로 싸워도 될 듯 했다. 3, 4층으로 계속 내려간다면 이럴 여유도 없어진다. 지금 이 틈에 조금 더 기술 연습에 투자하자.
“코르르르르륵!!”
마지막 놈이 <마법의 화살> 대포에 맞아 폭발했다. 링링이 3.5호는 걸레짝이 된 벌레를 내팽개쳤다. 다나는 그 위력에 휘파람을 불었다.
“조종실력도 대단하지만, 꼭두각시부터가 출력이 굉장하네. 라리루라 너 진짜 서커스단 출신이야? 모험가나 어디 마법사 길드가 아니고?”
“아핫♡! 그렇죠? 굉장하죠? 이게 다 선배한테 받은 좋은 코어 덕분이라구요~?”
라리루라는 <꼭두극(Puppetry)>의 실을 유지하며 나에게 도발적인 미소를 날렸다.
“후흥. 선배~♡? 내기, 잊지 않으셨죠?”
내기? 아, 맞다.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도 뭣해서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현재 스코어는 제가 6마리, 선배가 4마리에요? 후후. 벌써부터 차이가 벌어졌네요☆! 저한테 코어를 나눠주신 답례로 10마리 정도 물려드려도 되는데요~?”
“오, 땡큐. 그럼 내가 14마리고 너는 6마리네?”
내가 간단하게 양보를 받아들이자 라리루라는 입을 살짝 벌리고 어이 없어 했다. 흐흐. 아직도 내 성격을 잘 모르느냐, 라리루라야?
“……선배. 이럴 때는 보통 허세 부리면서 됐다고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저한테 이기고 싶으신가요?”
“어. 이기고 싶은데.”
프로포즈 언급을 절대 금지시키기 위해서다. 자기가 먼저 좋다고 양보를 한 건데 내가 사양할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꼴마초를 자칭하는 놈이 여성한테서 양보를 받아내는 꼴이 우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4년 전의 나였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허나 나는 이세계 꼴마초이지, 지구인 꼴마초가 아닐지니.
이세계 꼴마초라 함은 양성평등과 마초이즘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내 발언에 한 치의 수치스러움도 없닷!
“……흐, 흐응~? 도대체가 저한테 무슨 부탁을 하고 싶어서 저러실까~?”
라리루라는 그 말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몸을 뒤로 돌려버렸다. ─톡톡. 발끝이 바닥을 경망스럽게 쳤다.
“이것도 작전의 일환인가요? 저는 고작 이 정도 말에 평정심을 흐트러트리거나 하지 않는다구요?”
“하든 말든 이미 내가 2배 리드하고 있는데?”
“흥. 10마리 차이 쯤은 네, 다섯 번 싸우면 금방 역전할 수 있거든요? 두고 보세요☆!”
“내기에서 이기겠다고 무리나 하지 마라.”
“네에~♡! 그야 안전이 최우선이죠.”
라리루라는 혀를 빼물고 애교 넘치게 수긍했다.
─부우우우웅.
그때 우리가 쓰러트린 벌레 놈들의 시체가 역소환된 것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계에서 소환된 생물이라서 죽으면 원래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후우. 시발, 불행 중 다행인가.”
몸에 튄 체액까지 증발한 덕분에 다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첫 교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우리는 2층의 탐색을 속행했다.
2층으로 내려가니까 다른 모험가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출신은 판별할 수 없었다. 아우둠라 길드에서 봤던 것 같은 모험가들은 알겠다. 탐험가 같은 옷을 입은 놈들이나 마법사 차림새의 팀도 있다.
“2층으로 내려온 뒤로는 사람들도 늘어났군요.”
“네. 제 귀에도 잡음이 많이 잡혀요.”
티르시가 말하자 프랑이 귀끝을 당겼다.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는 감각에 의존하는 프랑의 탐지법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만큼 수상한 새끼들이 뒤지게 많았다.
핏발 선 눈으로 벽의 어딘가에 비밀 통로가 없는지 찾는 놈들이나, 자기들 말고 다른 사람은 다 도둑놈처럼 경계하는 놈들은 그래도 멀쩡한 새끼들이다.
유적의 깊은 곳으로 가서 사람이 줄어들면 다른 파티를 노리려 드는 새끼들도 나온다.
내가 모험가 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수입이 많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서커스단을 털어서 놈들의 재산을 털었을 때였지.’
한 번에 제일 많은 돈을 벌었던 것은 그때였다. 미스릴을 받은 건 네페르티티의 선물이었으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다른 파티를 조지고 주머니를 터는 게 제일 돈 벌기 쉽지.’
서커스단 퇴치는 존나 특수한 상황이었긴 한데, 아무튼 이세계에서도 남의 고혈을 빠는 것만큼 돈 벌기 쉬운 일이 없는 것이었다.
‘대놓고 사람을 죽이고 털어가는 새끼들은 적어.’
그래서 몬스터를 끌고 와서 대신 죽이게 만들거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