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만약 내가 같이 못 움직였으면 너 혼자 여기로 끌려왔을 것 아냐.”
“……앗. 그렇게 생각하니까 쪼오끔 후회되는 것 같기도 하고?”
“크흐흐. 솔직해서 좋구만.”
그렇게 우리는 옷이 말릴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잡담을 안 했다가는 상대방이 쓰러져도 모를 것이니까.
“그런데 너, 어두운 곳이 무섭다면서 유적까지 따라온 건 왜 그랬냐? 억지로 따라올 건 없었는데.”
“그것도 오해인데요?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캠프 파이어나 밤의 파티가 어둡다고 싫어하는 거 봤어요? 사람이 있고 불이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여관에선 혼자서 어떻게 자는데?”
“제 랜턴이 새 걸로 보이세요~? 저거 5년은 쓴 건데요.”
“그러냐. 너도 의외로 물건의 애착이 많구만.”
이 녀석, 밤에는 랜턴을 키고 자는 건가.
……존나 나랑 프랑이 얼레꼴레 하고 있는 동안에 랜턴을 켜고 혼자 잤을 라리루라를 생각하니까 책임 없는 죄책감이 맥시멈이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아아, 그래. 그 원숭이 어쩌구 하는 책은 괜찮냐? 나는 들고 다니는 노트가 젖어서 말리고 있는데.”
“유적에는 안 들고 왔죠. 보통 때는 도둑 맞을 것 같아서 들고 다니는 거지만요. 그리고요, 그 책도 이유에요.”
“이유? 뭐가?”
“유적에 따라온 이유요. 오르왈리아는 크라운 크라운 님의 고향이거든요.”
그리 말한 라리루라는 옷이 말랐는지 만졌다. 나도 내 옷을 만져봤는데, 꽤 말랐다.
“책에 적혀 있었어요. ‘나는 브리타니아에게 버려진 영지의 골목대장이었다. 동시에 자유를 대신해서 주어진 침략국가의 예술에 반한 얼뜨기였고 말이다. 나의 고향 오르왈리아는 그런 얼뜨기들의 나라다.’ 라고요.”
“자기 고향인데 신랄하구만.”
뭐, 오르왈리아는 고대 로마니아의 영토&문화 침략에 당한 국가니까.
‘당시 사람들 기준으로는 그러려니 한 느낌인가?’
존나 사람들의 윤리관이 어메이징, 어썸, 언빌리버블의 트리플 크라운인 이세계다. 신대를 막 벗어난 고대문명 시기에는 제국주의는 범죄 취급도 못 받았을 것 같다.
지금도 게르마니아의 급진파는 그런 느낌이고 말이다.
“그러니까 궁금해진 거에요. 절대 언니오빠들이 걱정되서 따라온 게 아니니까, 콧대 세우지 마세요?”
“오빠?”
“왓썹, 브라더♡? 쟘꺈 쟐 묫 먈헀써여☆!”
“발음 뭉개지 마라, 킹받으니까.”
라리루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랩퍼처럼 들리니까 진짜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나는 머리카락을 말리고 말했다.
“옷 다 말랐으면 일어나라. 나머지는 걷다 보면 마르겠지.”
“네. 언니들도 걱정하실 테니까 힘 내서 움직이죠!”
─스륵. 주섬주섬.
우리는 다시 옷을 입고 무장을 갖췄다. 내가 머리를 대충 넘기고 있자 광대옷을 입은 라리루라가 애교 있게 웃었다.
“선배. 그거 아세요? 저는요~? 선배가 머리를 넘기고 있을 때가 제일 좋답니다♡?”
“내 이마에서 빛이 나니까 그러는 거 다 티남.”
“선배처럼 눈치 빠른 선배는 싫어해요☆”
싫든가 말든가. 내가 젖은 창대를 쥐며 몸을 돌리자 라리루라가 기운차게 따라왔다.
“아핫♡! 가랑이만 덜 말라서 기분 나쁘네요!”
“누가 물어봄?”
존나 나한테 등짝을 보여주며 부끄러워 하던 년은 오데로 갔는지 몰겠다. 얘는 어느 틈에 수치심이 프랑보다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프랑도 아직 나한테 속옷을 보이는 건 부끄러워 하는데.
“아, 맞다. 라리루라. 너 일로 와 봐.”
“넷? 뭔가요? 저 삥 뜯기나요? 모자랑 나이프밖에 가진 게 없는데요?”
“헛소리 말고. 네 이마에도 룬 새겨 줄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라리루라는 정색을 했다.
“저는 초롱아귀 되기 싫은데요.”
“그럼 나는 이미 초롱아귀냐 이 년아.”
시발, 이세계에 초롱아귀가 있는 줄은 몰랐네. 아무튼 나는 억지로 라리루라의 이마에 룬을 새겼다.
“프랑의 반지에도 새겨놓은 ᚲ(Kenaz)의 룬이다. 이걸로 너도 주변을 경계하면서 소환진의 마나를 찾아. 여기가 그 벌레 새끼들의 스위트 홈이라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소환진이요?”
“그 벌레 새끼들은 통솔이 안 됐었잖아? 걍 불러놓고 방치했다는 뜻밖에 더 되겠어? 여기 있던 놈들을 탑 안으로 소환하는 마법진이 존재하겠지. 우린 그것만 찾으면 돼.”
유적의 소환진을 유지하는 마나가 바닥나기 전에만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소환진의 마나가 바닥나도 다나랑 티르시가 눈치껏 유적의 마법진에 마나를 넣어주겠지.’
소환 마법은 공간마법의 한 분류였다. 요즘 시대에는 재현을 거의 못 하는 기술 말이다.
그래도 마나를 채워넣는 것은 쉬운 일!
우리는 그냥 죽지 않고 살아서 마법진의 위치를 찾아내면 만사 OK였다. ᚲ(Kenaz)의 룬으로 영감(靈感)을 강화하면 그따위 것은 누워서 떡 먹기고 말이다.
라리루라는 이마를 만지다가 물었다.
“여기가 전혀 다른 이계면요?”
“그때는 그때지만 가능성은 적어. 여기로 끌려올 때 벌레 대장의 벽 뚫기랑은 원리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빛이 잠깐 번쩍였었잖아. 아마 그게 소환진의 효과였을 걸.”
“해변── 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쪽에는 소환진이 없었는데요?”
“아마 소환좌표는 완전 랜덤인 것 같아. 우리를 여기로 날려보낸 건 3층보다 아래에 깔린 지저의 탑의 함정이겠지.”
1. 침입자가 생기면 이세계 살인벌레를 푼다.
2. 그 벌레들의 둥지로 이어지는 소환진도 함정으로 쓴다.
그런 것이라고 봐도 될 듯 했다. 나는 혀를 찼다.
“아마 출입을 생각하지 않은 구조도 그것 때문일 거야. 이 탑이 세워진 시기에는 좌표만 알면 <공간이동(Teleport)>가 가능했으니까.”
내 추리는 그랬다.
탑을 세운── 아니, ‘묻은’ 놈들은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탑을 숨긴 것이 아닐까?
“탑을 숨긴 놈들은 원래 쓰던 포션 연구소를 지하에 감춰서 적들 몰래 포션을 만든 거라고 생각해. 상식이 있는 놈이면 보급물자부터 끊었을 거 아냐. 포션 같은 회복도구는 최우선 파괴 대상이야.”
“그런 중요시설이라기엔 몬스터들이 약간 약하지 않아요?”
“여러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시간이 흘러서 소환진에 담은 마나가 증발했거나, 많은 마나를 넣어두면 지면에서도 탐지가 가능했어서 그렇게 못 했거나.”
어쩌면 중요시설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기지의 위치를 적은 지도까지 보관을 해 놨지 않은가.
‘시발. 생각해 보니까 그 지도도 의심스럽네.’
지도도 침입자들을 낚기 위한 함정인 거 아니냐? 좌표대로 찾아가면 살인벌레 둥지라든가 막 그런 거지.
내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자 라리루라는 감탄스럽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그랬지만 선배랑 있으면 일이 착착 풀리네요. 만약 정말로 저 혼자 왔으면 선배가 구해주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면서 어디 숨어 있었을 걸요?”
“혼자일 때는 그게 나을 걸? 그랬으면 당연히 구하러 왔을 테니까, 만약 다음 번에 이런 일이 있으면 가만히 기다려.”
─휙! 내가 말하자 라리루라는 갑자기 하늘을 쳐다봤다.
존나 놀란 나는 뭐가 또 날아드나 싶어서 창을 겨눴는데,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뭐여 시벌. 놀랬잖어. 왜 그래?”
“……으흠. 아뇨, 아무 것도요~? 아무튼 움직이죠. 저희가 늦장 부리면 언니들이 선배랑 같은 생각을 하고 이쪽으로 넘어올지도 몰라요?”
“아, 어. 그래야지.”
라리루라가 표정을 감추려는 것처럼 억지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신경쓰였지만, 지금은 소환진을 찾는 게 더 중요했다.
그렇게 우리는 촉수의 육림을 헤매는 두 마리의 하이에나가 되어서 정글을 나아갔다.
“아아아악──!! 어디서 이렇게 잔뜩 나오는 건가요──!!”
나는 개빡친 여성의 고함을 듣고 라리루라랑 같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유적에 진입하기 전에 봤던 뭐시기 상인 길드의 아가씨와, 그 파티가 벌레 새끼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디스뮤크!! 마법은?!”
“죄송합니다, 아가씨!! 발동이 되지 않습니다!!”
“제기랄──!!! 함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니, 불책 또 불책이에요!! 제 인생 최대의 실책이에요──!!”
─샤사삭!!
상인 아가씨는 검을 들고 파티와 정면에서 분전했지만 숫자 차이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거의 둘러싸이기 직전이다. 숫자 싸움을 뒤집을 마법사가 마법을 못 쓰니까 저렇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라리루라?”
“돕죠? 사람은 많을 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반목해서 싸우게 되는 일이 있어도요.”
그걸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찬성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 했다. 나는 웃으며 창을 겨눴다.
이 벌레 놈들이 있다는 건 여기에 유적으로 돌아가는 소환진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내가 벌레를 보고 이렇게 기뻐하는 날이 오다니! 이것은 군인 시절에 분대장 놈의 생활관에 팅커벨 3마리가 날아들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창을 쥐고 맹대쉬를 했다.
“이 씨발 벌레 새끼들!!! 존나 보고 싶었다!!”
“라리루라! <꼭두극>으로 중간열 놈들의 발을 걸어!”
“굴러라, 굴러~☆!”
꼭두각시를 두고 와버린 라리루라는 전투에 직접 참가할 수 없었다. 대신 손가락에서 마나의 실이 뻗어나왔다.
“코로로로로로!!”
마나의 실은 벌레 놈들의 발에 붙어서 한 마리씩 지면과의 뜨거운 키스씬을 연출했다.
나는 덤벼드는 새끼들부터 대가리 뚜껑을 따주었다.
출력이 낮은 마법이기에 몸을 빼앗아서 조종할 수는 없다. 그래도 힘이 딸리는 잡몹들을 넘어트리는 것은 할 수 있다. 고작 몇 초밖에 유지가 안 돼도 발을 걸기만 하는 거니까.
“코느르아아아아아아!!”
우리의 기습이 성공해서 포위진이 무너졌다. 상인 아가씨는 검으로 몬스터를 격퇴하며 놀라워했다.
“누, 누구시죠?!”
“유적의 탑을 탐사하던 모험가입니다! 사냥 중에 실례지만 손 좀 보태겠습니다!”
내가 창대로 워킹-벌레의 대가리를 터트리며 외쳤다. 좋은 뜻으로 참전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유적이든 어디든 다른 파티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불문율로 금지되어 있다. 논공행상의 문제도 있고 실수한 척 하며 다른 파티를 공격하는 걸 노리는 놈들도 있거든.
“──그 참견, 감사히 받겠어요!”
근데 이런 이계에서 그딴 걸 따질 여유가 어딨어. 상인이라 셈이 빠른지 경갑옷에 검을 든 아가씨는 우리의 참전을 기쁘게 승낙했다.
“전열은 방어를 존속하며 넘어진 놈들을 배제하시오! 활을 가진 자는 무리의 뒤쪽에 쏴서 해치우고!”
디스뮤크랬던가 하는 늙은 집사의 지시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포위에서 빠져나와서 연계를 취하니까 승산이 보인 것이었다.
‘전부 실버 클래스 이상인가?’
나는 상인 길드 파티의 실력을 보고 그렇게 각을 잡았다.
아가씨나 집사까지 모든 파티원이 적당한 실력자였다. 임시 고용된 파티 치고는 팀워크도 좋다. 아예 정기적으로 고용이 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죽어라, 벌레 놈들아!”
“마법을 못 쓴다고? 그럼 화살을 쏘면 되잖아!”
“피지컬 펀치! 피지컬 킥!”
“코르르르르륵!”
벌레 새끼들은 평균적으로 약한 수준이라서 우리들이 흐름을 휩쓸자 눈 깜짝할 사이에 괴멸했다.
약간 소름이 돋는 건 최후의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도망치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정도? 진짜 개시팔 또라이 새끼들이었다.
무슨 이세계 버서커 벌레들인가.
“전투 종료! 모두 고생했어요!”
─휙! 상인 아가씨는 머리를 넘기며 그렇게 소리를 쳤다. 그 다음으로 말을 건 상대는 존나 말할 것도 없이 우리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 목소리는 낮춰야죠. 죄송해요. 안 좋은 버릇이라는 건 아는데 안 고쳐지네요.”
“아뇨. 그보다 부상자가 적어서 다행입니다.”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상인 아가씨는 그 칼을 대충 닦고 납검했다.
“물론이죠. 제 전속 탐사원들인걸요. 지금까지 유적을 탐사하면서 사망자는 단 1명도 없었답니다! 아─핫핫핫핫!”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대는 상인 아가씨.
그렇게 홍소를 터트린 아가씨는 건틀릿을 벗고 악수를 청했다.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있다. 유부녀? 아니, 약혼반지인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임자 있는 몸인가 보다.
“소개가 늦었네요. 헤르마이온 길드장의 둘째 딸인 셀레나 헤르마이온이에요.”
“아우둠라 길드의 브론즈 클래스 모험가인 노르드입니다. 여긴 제 파티원 라리루라고요.”
나도 건틀릿을 벗고 소매를 걷어서 악수를 받았다.
나도 잘 아는 것은 아닌데, 건틀릿을 벗고 소매를 걷는 게 모험가들의 인사 예절이랜다. 무슨 숨겨놓은 독침 같은 걸로 찌르고 기습을 때리는 수가 있다나 뭐라나.
“노르드? 아우둠라 길드의?”
셀레나는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아는 그 노르드 씨인가요? 흑마법사가 조종하던 거대한 골렘을 쓰러트리고, 그 악랄한 수괴의 목을 베어냈다는?”
“풍문은 다 과장되는 법이죠. 그래도 아마 그건 제 얘기가 맞을 것 같네요.”
정확한 팩트만 제시한 건데 과대평가를 받는 느낌.
이세계에도 미디어와 기레기질은 존재하는 것인가? 시발거 누가 들으면 힘숨찐 브딱이가 미스릴 클래스 아다 유니콘을 혼자 잡은 줄 알겠네.
“역시! 어쩐지 실력이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죠! 제 눈은 틀리는 법이 없다니까요!”
“감사합니다. 셀레나 양도 솜씨가 대단하시더군요.”
자뻑하는 척 하면서 날리는 칭찬이 존나 교묘했다.
나도 사람이라서 칭찬을 받으면 어깨가 막 으쓱대고 그러기는 한데, 저 아가씨는 상인 길드장의 딸내미다. 적당히 필터에 걸러서 듣도록 하자.
“과찬이세요. 그나저나 노르드 씨는 왜 이런 곳에?”
악수한 손을 건틀렛에 넣으며 묻는 셀레나였다. 혹시 이 사람들한테는 내가 상위 던전을 도는 고인물로라도 보이나? 약간 기대감이 서려 있는 눈빛이 부담스럽다.
“아마 여러분과 같은 이유일 겁니다. 3층 아래를 탐험하던 중에 마법진 같은 걸 밟거나 발동시키지는 않으셨나요?”
“마법진! 예! 그거에요! 발견하지 못하고 발동시킨 마법진에 휩쓸려서 이런 역겨운 장소로 날아왔답니다.”
찰진 리액션이다. 분통이 터진다는 느낌이었다.
“역시 그렇습니까. 참고로 묻겠습니다만, 이 벌레들과 같은 생김새의, 훨씬 큰 대형종을 보신 적은 있나요?”
“대형종이라뇨?”
눈쌀을 찌푸리는 셀레나. 잘 모르나 보다. 나는 우리가 겪은 경험과 내 가설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