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1,009)

그렇게 우리는 프로 도굴꾼답게 내부를 조사했다.

─달칵달칵.

상자의 안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다 포션이었다. 개조를 거친 뒤에도 계속 포션 연구소로 활동했던 모양이다. 상자를 뒤적거리며 조사하고 있는데 갑자기 셀레나가 외쳤다.

“여기!! 백골이에요!!”

그리 말하며 하얀 뼈다구를 가리키는 셀레나.

바닥에 쓰러져서 손을 뻗으며 죽은 백골!

근데 그냥 사람 뼈다. 시발 무슨 대발견이라도 한 줄 알았네.

다급한 톤만 들으면 스켈레톤이 나타났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다나가 빠른 걸음으로 백골을 보러 갔다.

“연구원일까요. 급소에 외상은 안 보이네요. 저주 마법이나 노화, 심장 질환 같은 병으로 죽었을 거에요.”

건틀렛을 벗고 위생장갑을 낀 다나는 조사 결과를 말했다.

현대 이세계에서 범죄 조사에 쓰는 마법은 시간이 많이 흘렀거나 대책을 세워 놓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루미놀 반응 같은 거라서 이렇게 오래된 유적의 백골은 전문설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뼈를 조금 가져가서 사망년도를 조사해 보겠습니다.”

다나는 셀레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럽게 뼈를 집어서 가죽 봉투에 담았다.

백골을 대하는 경건한 태도에 수녀 같은 옷차림이 더해지니 어딘지 모르게 성직자 같기도 했다. 골딱이 팀의 사제도 남겨진 백골을 위해서 성호를 그었다.

“사후에 방치됐다는 건 방문자가 없었다는 뜻이겠어요!! 큰 성과를 못 거둘지도 모르지만 조사에 계속 힘 써 보죠!!”

뼈를 회수한 다나가 일어서자 셀레나는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그리 외쳤다.

빼액거리는 톤이었는데 이상하게 거슬리진 않았다. 이게 카리스마라는 걸까. 금수저는 맨날 여유 넘치고 대범해 보인다는 썰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의 이세계판일지도 모르겠다.

“선배, 선배.”

그때였다. 라리루라가 몰래 내 소매를 당겼다.

“그 문의 암호 말인데요. 어떻게 된 걸까요?”

“아마 단순한 우연일 걸. 저런 암호를 생각하고 문을 봉일할 만큼 잘난 사람이면 금전적 여유도 충분했을 거 아냐. 크라운의 공연을 봤든가, 아니면 네가 가진 책을 읽어봤겠지.”

그리 말한 나는 티르시가 조사하는 곳을 가리켰다.

연구소에는 책장도 있었다. 대부분 종이책이라서 밀폐된 공간이었음에도 세월을 못 견디고 너덜너덜해졌지만 말이다.

책을 구하다가 다 아는 이름이구만 하고 크라운 크라운의 원숭이 어쩌구 하는 책을 구해서 읽었던 게 아닐까? 반쯤은 자서전 같은 내용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저기 엎어진 백골이 크라운 씨이기라도 할까 봐?”

“아뇨, 그건 아니지만요. 이런 곳에서 제가 존경하는 사람의 발자취를 찾으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궁금하면 가서 티르시랑 같이 책장을 뒤져 보면 어떠냐. 혹시 알아? 한 권이라도 그 책의 다른 시리즈가 멀쩡하게 남아 있을지.”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티르시가 조사를 멈추고 우리한테 온 것은 말이다.

나는 내가 한 말을 들었나 했는데, 티르시는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작고 내용도 얇아서 거의 책자에 가깝다.

“라리루라 양. 이 책, 저번에 노르드에게 받아서 읽으시던 책자랑 같은 시리즈 아닌가요?”

라리루라는 책을 받아서 읽어보았다. 튼튼한 종이와 잉크였는지 지나간 세월이 무색하게 내용은 거의 멀쩡했다.

“마, 맞아요. 이거, ‘원숭이도 할 수 있는 궁중광대’의 1권이에요! 수제자가 쓴 초판본인지 1권이라고 적혀 있지도 않지만요!”

“아니, 진짜냐고.”

연구자료는 싹 다 미숫가루가 됐는데 왜 얘만 멀쩡하지.

자기 책이니까 고품질 소량생산을 한 건가? 하지만 일이 여기까지 수상하니까 약간 심증마저 생겼다. 진짜로 뭐 있는 거 아냐, 그 광대?

“서, 선배? 이 책 말인데요. 제가 가지면…… 안 되겠죠?”

치켜뜬 눈으로 묻는 라리루라였다. 그게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갖고 와서 눈치를 보는 어린 조카 같아서 조금 웃겼다.

“이따가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볼게. 가지고 싶어할 사람도 없을 것 같으니까, 빼돌리지 말고 제대로 발견품 상자에 넣어 놔라?”

“네에~! 역시 선배밖에 없다니까요~♥!”

─꾸욱. 라리루라는 나를 허그하며 감사를 표했다. 책자를 갖고 물러나는 얼굴이 세상 행복해 보였다.

저런 모습만 놓고 보면 마냥 애 같네. 아니 뭐, 나이가 40줄인 사람도 좋아하는 컬렉션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는 있겠다만.

티르시도 그런 라리루라를 미소로 배웅하며 말했다.

“허름한 책들 사이에 저것만 달랑 남아 있더군요. 다른 책들은 보통 종이였는지 다 넝마가 되서 집지도 못하겠어요.”

“아쉽군요. 고대문명의 포션 제법은 아는 사람만 아는 기밀 아닙니까. 그런 거라도 주워갔다면 티르시도 좋았을 텐데요.”

“후훗.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네요. 그래도 말씀드렸다시피 탑이니까요. 혹시나 하는 기대가 반, 역시나겠지 하는 마음이 반이었어요.”

“합리적이군요.”

존나 똑똑한 감정의 분산투자였다. 얻으면 개꿀이고 놓치면 그러려니 하는 마인드. 나도 본받고 싶다.

어깨를 살짝 으쓱한 티르시가 말했다.

“저는 책장을 계속 찾아볼게요. 비밀 통로 같은 게 나오면 좋겠네요.”

“흐흐. 비밀 소환진에 끌려가지 않게 조심하십쇼.”

“어머? 그렇게 되도 노르드가 구하러 와 줄 거면서.”

그리 말하며 윙크를 날린 티르시는 사뿐한 걸음으로 마저 조사를 하러 갔다.

다시 혼자가 된 나도 뭔가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일단 저번처럼 룬을 써서 저 백골의 영혼이 남아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봤는데, 이건 꽝이었다. 니미럴 시발.

아쉽지만 참았다. 혼자 딸치다가 모니터를 켜 둔 채로 뒤진 게 아니라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미련이나 후회의 힘으로 혼이 유지될 리가 없었으니까.

─힐긋힐긋.

그건 그렇고, 가끔씩 마주치는 다른 탐사원들의 시선에서 ‘이 새끼가 또 뭔가 해 주는 거 아님?’ 하는 생각이 보인다.

‘나 같은 빡대구리 심해 브딱한테 웨 기대를 하는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건 자업자득이었다.

이계에서 살아남기와 탑에서 살아남기 2연타를 대활약으로 장식했기 때문일까? 탐사원들에게 나는 거의 유적 탐사의 맥가이버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었다.

존나 이세계 폰 노이만 취급을 받는 느낌.

고고학자 존 폰 노이만.

아니 좆 폰 노르드인가.

‘힘을, 생각해 낼 힘을, 교수 슬레이어, 생각해 낼 힘을 다오. 진실은 언제나 하나!’

나는 엘리트 대갈통에 윤활유를 발랐다.

이유를 생각해 보자.

‘왜 이 방은 봉인이 되어 있었지?’

내가 아까 머리를 굴려서 나온 답이 맞다면, 이 탑은 다른 전선기지에 회복물자를 보내는 비밀 연구소였다.

연구소를 지하에 묻은 것은 ‘적’에게 안 들키려고 한 것!

방을 봉인한 것은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겠지.

‘피난소? 아니, 아니야.’

백골 한 사람밖에 없는 장소에 피난소는 무슨.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포션 보관 창고?”

내가 중얼거렸다. 근처를 조사하던 프랑이 귀를 쫑긋했다.

“노르? 방금 뭐랬어?”

“어. 여기는 혹시 포션을 다른 전선기지로 보내기 전에 보관한 창고 같은 게 아닐까 해서.”

“창고? 포션은 만드는대로 다른 기지에 보내지 않았을까?”

프랑이 물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낭비가 존나 많았다.

“그랬다간 <공간이동(Teleport)>에 쓰는 마나가 말도 안 되게 들었을 거야.”

“아, 그렇구나. 전시(戰時)에 그런 마나 낭비는 안 했겠다.”

“그래. 이 탑은 <공간이동>으로만 오가도록 만든 공간이야. ‘창고’로 쓸 공간은 사방이 막힌 밀폐실을 만들어서 거기에 <공간이동>으로 이동해도 되겠지만, 이건 아마 아니라고 생각해.”

“응. 산소 같은 문제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마나 소모가 엄청났을 거야.”

“내 말이.”

나는 팔짱을 끼며 신음했다.

사람 한 명이 그걸 다 자기 마나로 커버칠 수 있다고?

그러면 그 새끼는 전선에 가는 게 맞다. 존나 개쎈 마법사였을 것 아닌가. 아마 <공간이동>은 소환진처럼 사전에 준비한 고대문명의 매직 아이템 같은 걸로 발동했을 것이다.

매직 아이템이나 마법진이라면 미리 충전해 놓은 마나 같은 걸 쓰면 되거든.

타뷸라의 가면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공간이동>으로만 오가는 비밀 공간을 만들진 않았을 걸. 이 탑부터가 이미 그런 공간이잖아. 한 번 들킨 수법을 두 번 쓰면 ‘적’들에게 100% 들켰을 거고, 이런 엄중한 봉인도 안 했겠지. 속임수라기에도 마나가 너무 아깝지.”

포션 보관 창고라는 가능성을 생각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리 중얼거리고 나는 백골을 조사했다. 고고학자 3년 짬은 어디 안 갔기에 적지 않은 정보가 모였다.

야수회귀의 마나 손톱을 세워서 뼈를 잘랐다.

아마추어인 내 눈에도 골밀도가 낮아 보이는 단면이었다.

“경골(脛骨)과 대퇴골(大腿骨)에 금이 갔어. 골다골증의 흔적도 보여. 백골의 주인은 생전에 몸을 단련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뼈의 금 정도는 세월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내 말에 다나가 대답했다. 백골의 뼈에 죽을 정도의 상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풍화됐거나 옛날 상처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나의 진단은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지도. 그래도 뼈가 고령자의 특징을 많이 띄잖아. 난 이 사람이 죽기 전부터 뼈가 약했고, 넘어져서 골절로 움직일 수 없게 됐다고 본다.”

21세기에서 노인의 고독사는 슬프지만 자주 있는 일이었다.

골절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핸드폰을 코앞에 둔 채로 돌아가시는 가난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뉴스!

그걸 듣고 우리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꼭 스마트폰을 몸에서 떼고 다니지 말라며 목에 거는 끈을 드리거나 했었지.

“포션의 대가였을지도 모르는 양반이 이 방에서 혼자 굶어 죽었다는 건가. 슬픈 일이긴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는데?”

다나는 기대감이 서린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21세기의 지식을 떠올린 나는 뼈를 내려놓고 백골이 누운 방향을 관찰했다.

“이 사람이 쓰러져서 죽었다면, 왜 여기에 있었을까? 연구 설비는 더 위층인데? 그리고 혼자서 죽을 때까지 아무도 이 장소에 오지 않은 건 왜겠어?”

“하나. 다른 연구원들은 암호를 몰랐으니까. 둘. 이곳에는 이 사람 혼자 일했고,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셋. 이 사람의 동료들이 전멸했으니까. 이것들 중 하나겠죠.”

머리가 잘 굴러가는 티르시가 손가락을 꼽았다.

솔직히 세 번째는 나도 생각 못 했다. 전쟁에서 좆발려서 그대로 버려졌을 가능성도 있었구만 그래.

“예. 아무튼 중요한 건, 위쪽 설비가 말끔하다는 거죠. 아마 이 탑은 마지막까지 습격받지 않았을 거에요. 그렇다면 백골의 주인은 사고로 인해서 죽었겠죠.”

“──그런가!”

다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내가 보는 방향을 눈으로 쫓았다.

그 백골이 손을 뻗고 있는 방향을 말이다.

“죽기 전까지 며칠 유예가 있었다면, 포션을 찾았을 거야! 하체의 통증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까지는 상처를 치료할 가망이 있다고 생각했을 거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렇다면 이 사람이 기어서 가려고 했던 방향이──”

“──포션 창고를 감춰놓은 곳일 수도 있겠어요!!”

어느새 내 말에 집중하고 있던 셀레나가 그리 외쳤다.

“조사! 조사! 조사에요! 바즈란트! 프란체스카 씨! 조사를 부탁드려요!!”

“이크. 그런 거라면 나도 돕지.”

“제가 왼쪽부터 볼게요.”

프랑이랑 헤르마이온 길드 탐사대의 도적, 골딱이 도적이 사이 좋게 백골이 쓰러진 방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있어! 노르! 정말로 있어!”

발견자는 우리 프랑이었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조사하던 프랑이 작은 틈새를 벌려서 레버를 당겼다.

─쿠르르릉!

그러자 열리며 나타나는 작은 문! 나도 이게 맞기는 한지 가물가물한 느낌이었는데, 존나 놀랍게도 내 막가파 과학 추리는 정답을 때려맞춘 모양이었다.

“크으으──!! 미쳤어, 미쳤어──!!”

─와락! 다나는 전율이 든 것처럼 몸을 찌르르 떨더니 내 어깨에 팔을 감았다. 흥분으로 뺨에 홍조가 오른 다나.

“너 이 새끼! 이 미친 새끼! 뭔데? 어떻게 알았는데? 우리 남편 진짜로 미친 거 아니야?!”

“흐흐. 누구 남편인데 당연히 미쳤지. 그래도 찾은 건 프랑 덕분이잖아. 나보다 프랑한테 고마워 해야지.”

“헤헤. 칭찬해 줘서 고마워. 나 열심히 했다?”

내가 프랑의 수고를 위로하려고 말하자 프랑은 웃으며 날 끌어안았다.

“그치만 노르가 말 안 해 줬으면 몰랐을 거야. 모든 곳을 다 저렇게 조사할 수도 없는걸? 그렇죠?”

“크흐흐. 맞는 말이지. 발견된지 100년이 넘은 유적에서 새로운 통로가 발견되는 게 어디 남일이오? 눈치를 못 채면 보물창고를 코앞에 두고도 평생 모르는 것이지.”

다른 도적들은 프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존나 조사를 시작한지 1시간만에 비밀 창고를 찾은 우리였다. 도적들이 다른 함정이 없는지 확인하고 우리는 그 공간을 확인했다.

좁은 방이었다. 창고라는 말이 딱 맞았다.

“노르드 씨? 저 상자를 가장 먼저 확인할 권리가 당신에겐 있어요!!”

셀레나가 가장 멀쩡한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방통행 수신용 마법진에 올라간 상자! 저게 다른 기지에 보냈던 포션일 것이었다.

“자물쇠는 따 놨수다. 안전은 제 손모가지를 걸고 입증했고 말이오.”

골딱이 도적이 손목을 저어댔다.

나는 꼴마초이즘을 끌어올려서 당당하게 끄덕이고 상자를 열었다. 21세기 과학 지식을 써서 적당히 때려맞춘 것이지만, 운도 실력이 아닌가!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간 4개의 병을 봤다.

싼 병에 제대로 포장한 포션!

고대문명은 100년 200년으로는 셀 수 없는 존나 오래된 과거의 시대다. 그런 옛날에 만들어진 포션이 현대에도 액체로 남아 있다니!

그런 포션은 어메이징하며 매지컬한 이세계를 뒤져도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보라색 포션의 성스러움에 티르시의 말을 떠올렸다.

신의 눈물이라고도 불리는 절세의 치료제!

‘애1미. 파워 엘릭서네.’

내 인생 첫 레전더리 아이템은 개씨발 엘릭서였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엘릭서다. 존나 머리가 띵하다.

기뻐서 그러냐고?

아니오.

씨발 존나 아니오.

‘이건…… 논문거리가 안 되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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