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1,009)

아직 설명 도중이었는데 베로니카는 벌써 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룬 스톤의 진짜 효과는 룬을 배운 인간족 연구자라면 알아내기도 쉽다. 그런데도 그대들처럼 역사와 유물을 연구하는 자들이 수백 년 넘도록 전혀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소리겠지?”

“어. 막말로 내가 이걸 알아낸 것도 우연 아니냐. 내가 간단하게 알아낸 비밀을 어째서인지 남들은 몰랐고, 나만 운 좋게 그걸로 꿀을 빨게 됐다는 건 조금 편의주의적인 생각 아니냐, 이거지.”

나는 존나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인 야수회귀에는 내가 지구인이라는 특수성이 있었다.

운 좋게 개꿀을 빨게 됐어도 기승전결의 일부가 추측이 됐었기에, 나는 야수회귀의 효과와 부작용을 잘 모르는 채로 개이득이라고 치고 넘어갔던 것이었다.

아직까지 그 비밀의 일부가 수수께끼에 감춰져 있더라도 말이다.

‘근데 룬 스톤은 그게 아니잖아?’

지난 수백 년 동안 전세계에 룬 술사만 수천~ 수만 명은 있었을 건데, 오직 나만 룬 스톤의 진짜 용도를 찾아서 꿀을 빨고 논문도 쓰게 되었다고?

‘나한테만 그렇게 행운이 찾아올 리가 없지.’

우연이란 변수가 없으면 그냥 확률론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꿀팁은 존재하지 않는다. 뽑기에서 현질도 안 하고 SSR만 뽑아대는 행운아는 운영진이랑 뒷배가 있는 씨발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내가 수만 분의 1의 행운에 선택받은 유일한 사나이라고? 예언이니 오딘의 후계자니 하는 걸 계산에 넣어도 나는 별로 운이 좋은 편이 아니다.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운빨은 여복(女福) 정도인가.’

……아니지. 나는 파티원 전원이 미녀에다가 존나 예쁜 아내만 둘이잖아.

가만 생각해 보니까 여자 운 하나만 있어도 어디 가서 운 나쁘다고는 못 하겠군.

“쉽게 말해서 이런 얘기야.”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에 다나는 얘기를 끝맺을 준비를 했다.

“그 흔하던 룬 스톤이 어째서인지 보석처럼 여겨질 만큼 줄어든 거며, 누군가 이미 써 놨을 법한 논문도 없다는 것. 뭣보다 우리 남편의 논문을 훔쳐간 년이 정체 모를 조직한테 쫓기고 있다는 것. 그런 점을 전부 고려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 거야.”

다나는 흡연자였으면 줄담배를 피웠을 것처럼 심란한 투로 말했다.

“룬 스톤의 연구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기보단── ‘못 한’ 게 아닐까 하고.”

잠깐 여관방이 조용해졌다.

만약 결계를 뚫고 우리 대화를 엿듣는 사람이 있었다면 자기 엿듣기 솜씨를 의심했을 만큼, 침을 삼키는 소리도 없을 정도였다.

“……누군가가 연구자들을 찾아가서 해쳤다는 거야?”

긴 침묵을 깬 프랑이 소름 돋는다는 것처럼 목을 감쌌다.

바로 그런 발상이 떠오른 것은 나 때문이겠지. 프랑이랑 연인이 된 다음날, 나는 차원이동을 연구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나부터 강해져야 한다는 얘기를 들려줬으니까.

프랑의 말에 다나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래. 광신도인지 뭔지가 자기들의 심보에 거슬리는 연구를 하는 놈들을 찾아가서 족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그것도 더럽게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그대여. 물어볼 이유가 없었기에 지금까지는 묻지 않았다만….”

다나의 답변을 들은 베로니카가 물었다.

“그대가 썼다는 논문이란 대체 무엇이지?”

파티원들이 나를 보았다. 그 논문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다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엘룬 어는 고대 게르마니아에서 쓰이던 룬 어의 파생 언어가 아니다. 유적에서 발견되는 어법의 유사성은 사투리나 은어와 같은 변형어로는 보기 어렵다.”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학위논문의 내용을 읊었다.

퀼리티 상승을 노리고 퇴고만 줄창 했었기에, 손가락에 잉크 냄새가 배는 것처럼 논문의 내용이 머릿속에 새겨졌던 모양이었다.

“그밖의 증빙자료를 토대로 고찰하여, 기존에 발견되거나 제시된 고대문명 시기의 지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고대 게르마니아의 동서(東西)권 지역은 별개로 보는 것이 옳다.”

나는 옛날 기억을 반추했다.

내가 랩실 노예였던 시절에 예르나를 따라서 다녔던 곳은 주로 게르마니아였다.

그 년은 게르마니아의 역사와 언어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예르나 년은 나를 노예에서 연구원으로 신분 상승 시키거나, 언어학과의 브람마톤 교수님이 업무를 대타 뛰어줄 만큼 친하기 지내거나 했던 것이다.

“……따라서.”

논문 내용을 길게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기에, 나는 다른 내용은 제쳐두고 논문의 키 포인트만을 짧게 읊었다.

“고대문명의 게르마니아 동쪽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국가가 존재한다.”

묘비 같은 룬 스톤에 보았던── 어느 늙은 광인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내가 논문의 주제를 입에 올리자 파티원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들 불편해 하거나 생각이 많아진 모습이었다. 씨발, 너무 가오를 잡으며 말했나? 그치만 농담 따먹기를 하듯 대충대충 말하기에는 무거운 주제였던 것도 사실인데.

“……저기요~?”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 것은 이런 침묵이 가장 쥐약일 사람이었다.

말해서 뭣하겠냐만, 라리루라였다.

“심각한 얘기라는 건 알겠어요. 선배나 다나 언니가 일을 하다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유적 탐사도 포기하실 건가요?”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게르마니아는 많이 위험한 느낌이야.”

프랑도 자기 생각을 말했다. 오는 길에는 해적이 나타나면 어쩌나 했던 나라가 이제는 수상한 악의 조직의 온상으로 보이기 시작한 모양.

내가 프랑의 머릿속에 있던 게르마니아의 좋은 이미지를 망쳐놓은 거면 어쩌지. 고향 근처 나라라서 좋은 이미지가 있었을 텐데.

‘아니, 아닌가? 아닐 수도.’

그 이웃 국가가 한중일 관계라고 생각하면 좋은 이미지만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쪽빠리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주제에 차이나 머니로 스시를 사먹고 꺄르륵 웃는 한국인이 어디 드물던가.

아무튼 그런 프랑의 대답에 라리루라도 우리 눈치를 살폈다.

“저는 돌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선배는 어때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나라의 유적을 탐사할 이유는 없지.”

“그러면──”

“아니. 그래도 문제는 어느 지역에서 활동하느냐가 아니야. 그 정체 모를 새끼들이 어떤 방법으로 연구자를 찾아내서 해치느냐지.”

예르나의 경우는 딱 보인다. 천익장을 타고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으니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전부 지 자업자득이라는 말씀이지.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어떻게 알아내서 족친다는 말인가?

햇볕을 못 보고 가라앉는 논문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들 눈에 거슬리는 논문만 쏙쏙 골라서 잡아낸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인터넷 커뮤니티 관리자들도 24시간 365일을 글이란 글마다 뒤져가며 특정 언급 단어만 찾으라고 그러면 뚝배기를 빠따로 후려갈길 것이었다.

존나 학계에서 빛을 못 본 논문과 연구를 알아보고 찾아와 준다면 배에 칼 꼽히기 전에 고맙기는 하겠다. 아, 내 연구가 마냥 무의미한 좆병신 활자뭉치는 아니었구나 하고 말이다.

느낌상으로는 살인 전문 맨 인 블랙 팀이나 터미네이터에 가까운 느낌.

칼침 맞아서 뒤지기 전에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하고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L처럼 정신 승리를 하며 뒤질 수는 있겠군.

“학계의 논문검수과에 스파이가 있다든가, 그런 거 아냐? 염병. 연구하는데 후원자 말고 다른 사람들 눈치까지 봐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좆 같네.”

다나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연구 마감이나 후원자한테 알랑방귀를 뀌어야 하는 경험은 연구자의 씨발맞은 체험 랭킹 Best 5에 늘 노미네이트 될 만큼 좆 같은 일이었다.

아니 시발,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존나 위험하네. 언제 또 나나 우리 누나가 연구 때문에 ‘천안문’ 당할지 모른다는 얘기 아닌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좋은 사실을 알았네. 만약 이걸 모르고 있었어 봐. 끽 했으면 나는 ‘아내를 찾습니다’ 포스터를 집집마다 붙이고 다녀야 했을 걸.”

“존나 망나니 남편 새끼. 넌 내가 잡혀가는 게 전제냐?”

“안 잡혀가게 해야지. 내가 누나없이 어떻게 살라고. 프랑이 있어서 죽지도 못하는데. 누나 없어지면 남편놈은 빵에 건포도가 들어갔는지 강낭콩이 들어갔는지도 모르고 쳐먹다가 도랑에 빠져 꼬르륵 뒤질지도 모름.”

나는 다나를 귀까지 시뻘겋게 만들어주고 엘리트-대갈통을 가동시켰다.

‘나랑 다나가 수수께끼의 암약단체에 끌려가서 인체의 신비전에 박제될 가능성은 낮아.’

우리 부부가 노려졌을 거면 옛적에 어두컴컴한 컨테이너에서 재회해갖고 서로 속살(내장)을 보여주다가 시커먼 공구리에 갇혀서 물고기밥이 됐을 것이니 말이다.

‘근데 이게 또 100% 안전할 거라는 생각도 안일하지.’

어쩌면 총력을 다해서 예르나부터 조지고 있는 중일 수도 있지 않은가?

수수께끼의 악의 조직이 만화나 소설에서처럼 하청의 하청, 따까리들부터 보내다가 일을 그르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었다.

정보를 많이 아는 년놈들부터 차례차례로 조질라고 하는 거라면?

그 다음은 다나, 다른 랩실 노예들, 최후에는 나한테까지 손을 뻗겠지.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 그 새끼들이 나랑 다나를 노린다면 우리 파티원들도 안전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다. 미친놈들은 피를 봐야 만족하는 생물이니까.

“뭐라고 결론을 내리기에도 아는 게 너무 없어.”

나는 소리를 내서 말했다. 존나 모르겠는레후.

“그래도 이 동네가 뭔가 으스스하긴 해. 돈에 눈이 멀어서 위험한 곳을 어슬렁대는 것도 미친 짓이긴 하지. 유적이나 유물은 나중에 다시 주으러 오자. 지도에는 다른 유적도 많을 거 아냐.”

내가 그리 말하자 파티원들은 안심했다.

존나 여기까지 오는데만 일주일을 넘게 걸렸는데 돌아간단 말에 좋아한다니. 그만큼 우리의 추리가 불길하게 느껴졌던 듯 했다. 유일하게 프랑만 약간 아쉬워 하며 물었다.

“맞다, 다나. 지도 하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가 주운 지도에 노르가 말한 ‘역사에 안 남은 나라’는 안 나와 있는 거야?”

“응. 나와 있거나 복구가 가능했으면 그것부터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운이 좋았네. 발표를 했었으면 우리도 그 수상한 집단한테 쫓겼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렇구나. 아쉽다.”

그렇게 프랑이 아깝다는 것처럼 읊조렸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다나 베르베이아 님. 계십니까?”

하이 소프라노의 질문이었다. 여관의 웨이트리스다.

─툭. 베로니카가 눈치 빠르게 결계를 구성하던 돌멩이를 발로 찼다. 벽에 작용하던 마나가 사라지고 우리 목소리가 바깥에 들리게 되었다.

“네. 있어요.”

이름을 불린 다나가 대표로 대답했다.

아까까지 뒤숭숭한 얘기를 하던 참이었기에 우리는 아이 컨택트를 주고 받으며 전투 준비를 했다. 영화처럼 문을 부수고 공격이 날아오면 좆 되니까.

“아, 다행이네요. 손님을 찾아오신 분이 1층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창문이나 문에서 적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치울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왠걸. 웨이트리스는 웃는 목소리로 할 말만 딱딱 하고 떠나는 것이 아닌가?

‘근데 뜬금없이 왠 방문객?’

존나 미심쩍다. 나는 다나를 쳐다봤다. 우리 눈나는 자기를 찾아올 사람은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역시 뒤지도록 수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백날 이러고 있어서 어쩌겠는가.

나는 즉시 전투가 가능한 우리 3인 가족만 모아서 1층으로 내려갔다.

약간 걱정되기는 했지만 설마 시내에서 테러를 저지르겠는가. 그리고 그딴 미친 놈들이면 도망쳐도 쫓아와서 지랄을 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막 분양을 온 0.5살 댕댕이처럼 경계심을 MAX로 끌어올린 우리는 자칭 손님이라는 새끼한테로 갔다. 전원이 풀 무장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던 것은 놀랍게도 엘프였다.

당연하지만 예르나는 아니다. 금발의 여자 엘프다. 숲에서 돌아다니고 있으면 세상에 자기랑 엄마아빠밖에 없는 줄 아는 코찔찔이 잼민이도 저게 엘프구나 하고 알아볼 것처럼 존나 판에 박힌 엘프였다.

‘랩실 노예군.’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동종업자의 냄새를 맡았다. 매의 눈이 아니라 곰의 코로.

군바리가 짬내로 알아보는 것과 같이 나는 그녀한테서 잉크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뒤로 묶은 머리나 두꺼운 안경은 세상 꾸미는 것을 잊어버린 랩실의 망령 그 자체였다.

“아, 어서오세요.”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꼴이 역시 학자다웠다. 그녀는 번갯불처럼 펜을 놀리는 속도를 얻은 대신, 자기 입으로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여자 엘프 너드라니 존나 저세상 조합이었다.

“누구신가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다나가 물었다. 풀 무장 상태인 우리의 모습에─나는 창까지 메고 있다─ 쫄았는지 금발의 엘프녀는 어버버 거리다가 대답했다.

“그, 저는 로드브릭 대학 고고학과 연구원생인 릴리안 헤르시알 석사에요. 예르나 교수님이랑 같이 일하셨다는 다나 베르베이아 씨…… 맞죠?”

“네. 옆의 두 사람은 제 가족이고요.”

다나가 우리를 가리키길래 나는 목례를 했다.

“남편인 노르드입니다. 모험가죠.”

“같은 모험가인 프란체스카에요.”

“가족……? 아, 그러셨군요. 일단 앉으세요.”

릴리안은 가족이라는 말에 잠깐 물음표 갈고리를 띄웠다가 대충 눈치를 깐 것 같았다. 다나는 릴리안이 권한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내 엉덩이가 의자의 차가움을 느끼기도 전에 말했다.

“초대면인 분이 일부러 찾아오신 이유는 하나밖에 짐작이 안 가네요. 저희 간의 공통점이나 접점은 고고학자라는 것과 같은 교수 밑에서 일했다는 점 뿐이니.”

“그라시에 교수의 실종 때문에 오셨나요? 죄송하지만 저희 일행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아는 게 없어서……. 도움은 못 되어 드릴 것 같네요.“

다나는 정중하게 결론부터 쏴제꼈다. 릴리안은 대충 보기에도 자기 할 말을 하는데 몇십 분은 걸릴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뇨, 그게…… 거의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요.”

릴리안은 내 생각대로 어물거리는 표현을 썼다. 존나 나도 옆에 앉으면 안 될까. 굴러가는 거 보니까 본론까지 30분은 걸릴 삘인데.

나는 약간 불만을 가지고 그리 생각했는데,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릴리안은 곧장 본론을 말했다. 서론을 유창하게 늘어놓는 재능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실은, 예르나 교수님의 행방에 짐작가는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뭐라구요?”

그런데 그 본론이 생각보다 묵직하게 유효타를 남겼다. 다나는 어린애와 대련하다가 유효타를 허용한 것처럼 눈이 주먹만 해졌다.

─움찔. 나한테 눈길을 주려는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낸 다나. 내 의견을 물으려다가 릴리안한테 정보를 주지 않으려고 참은 것이었다.

“……대학에는 말씀을 하셨나요?”

“아뇨. 말하지 않았어요.”

“어째서죠? 대학에서도 찾고 있다는 건 아시잖아요?”

“네. 하지만 교수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릴리안의 렌즈에 가려진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예르나가 말하지 말라고 했다니? 사라지기 전에 자기 행방을 알려주고 갔다는 말인가? 우리 의문을 예상했는지 릴리안은 낮게 말했다.

“베르베이아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예르나 교수님은 정말 착한 분이세요.”

존나 느닷없는 개소리였다. 존나 대책도 없는 폭탄 발언에 나는 다나의 등을 살짝 치고 프랑의 손을 잡아야만 했다. 요 마누라님들한테 크라피카 교수님의 분노 조절법을 알려줘야 했는데.

“……네. 착한 분이시죠.”

다나는 창자로 줄넘기를 하는 것처럼 이를 악물다가 그리 대답했다.

솔직히 분노조절잘해인 나도 빡치긴 했다. 릴리안에 대한 호감도가 심해로 곤두박칠쳤다. 이게 주식이었으면 한강 강물 온도를 체크했을 우하향(右下向)이었다.

릴리안은 아싸형 공부벌레답게 눈치가 없는지 머리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하지만 그러셨던 예르나 교수님이 최근 행방불명 되시기 몇 주 전부터 갑자기 많이 날카로워지셨어요. 강의도 자주 캔슬하시더니 잠적하시기 일주일 전부터는 아예 출석도 안 하셨고요.”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게 뭐가 문제지? 교수가 ‘교수’한 것 아닌가?

이건 예르나가 지 본성을 드러냈는데도 못 알아본 릴리안의 잘못이 아닐까.

입을 열려던 말총머리 엘프는 응접실의 방음을 걱정하는 것처럼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러고서 안심했는지 말했다.

“그리고 종적을 감추시기 며칠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어요. 잠시 동안은 모즈리운의 망령도시에 탐사를 나갈 생각인데, 같이 와 줄 수 없느냐고요.”

그 말에 다나는 입을 벌리려다가 닫았다.

모즈리운의 망령도시.

우리가 고대문명의 유적을 찾아내려고 찾아갈 생각이었던 곳이다. 지도의 표기가 대략적이었기에 가장 의심스러운 그쪽 주변부터 수색을 하려고 했었다.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그라시에 교수는 왜 그런 얘기를 릴리안 양에게?”

“저한테 탐사를 권하셨던 건, 저도 교수님도 똑같은 타타르니아 밖의 태생이어서 그러셨을 거에요. 키타이에서 태어나지 않은 엘프는 드물다면서 교수님께서도 저를 많이 챙겨주셨거든요.”

릴리안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외국에서 만난 한국 사람 같은 걸까? 해외에서 제일 믿어선 안 되는 사람이 동향사람이라고 하던데,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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