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5화 (245/1,009)

“……없으면 내가 그대를 태우고 날면 될 것이다. 음. 아마도.”

그렇게 우리는 멍청하게 서 있다가 쪽팔린 정신승리로 거인과의 싸움을 마무리 지었다.

씨발. 어쩔 수 없잖아.

처음 쓰는 기술인데 힘 조절을 어케 해.

나랑 베로니카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숨을 돌렸다.

“하, 쓰펄. 존나 지친다.”

내가 큰 대자로 누워서 그리 뇌까리자, 베로니카는 수통의 물을 마시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그대 자신의 마나는 거의 쓰지 않았잖느냐?”

“그건 표현이 이상한데? 내 마나량 최대치의 80%는 썼어. ‘위력에 비해서 마나가 덜 들었다’고 하는 게 맞지.”

절대천공영역은 내가 3~4개의 마법을 술식 결합에서 자연 상태의 마나를 끌어모으는 마법이었다.

말하자면 양판소 같은 데에 나오는, 자연의 마나를 써서 마법을 사용하는 기술이다. 폭주 상태의 내가 썼던 것보다 수준은 낮지만 말이다.

‘그마저도 나 혼자서는 재현 못 하겠지.’

문제가 몇 개인가 쌓여 있기에 당장은 어려웠다.

베로니카처럼 마음이 맞고 실력도 뛰어난 마법사가 협력을 해 주던가, 아니면 내 마법 기술이 지금의 몇 배는 일취월장 해야 가능하겠지.

‘그래도 목표가 세워지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니까.’

최근엔 【게르튀르】만 연습해서 그런지 마법에 소홀해진 느낌이었는데, 내가 목표로 삼을 가까울 경지를 느껴본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폭주 모드는 너무 차원이 달라서 재현하기 어렵고 말이다.

“끙차.”

그렇게 잠깐 쉬었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싸움에 이겼으니 이제 중요한 아이템 루팅 타임이었다. 저 먼 곳에서 뒹구는 거인의 시체에 접근했다. 상체 하체가 썩둑 잘려나가서 내장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우욱 씹. 나는 쉰 피냄새에 코를 집었다.

“니 내장. 통 속의 김치 같아서 굉장히 추해.”

─슈와아아아악.

내가 다가가자 그 시체에서 구신의 마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확인사살은 필요없겠군. 나는 옥새를 들었다.

슈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 새끼 마나를 다 흡수하면 이제 가죽을 벗겨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거인의 시체에서 나오는 마나가 조금 이상했다.

“……머고?”

하늘에 기둥처럼 치솟는 푸른 마나의 증기!

그것은 이태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구신의 마나를 보여주며 내게로 빨려들어왔다. 씨발, 이거 맨몸으로 받으면 100% 기절각이다.

나는 옥새를 방패처럼 세워서 마나를 전부 거기에 옮겨담았다. 빨려드는 푸른 마나는 거의 폭포에 맞는 듯한 감각이었다.

“존나 풍작이구만.”

하나, 둘, 셋…… 룬을 습득하는데 필요한 양의 10배를 훌쩍 넘는 구신의 마나가 옥새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던 마나는 옥새의 안에서 하나로 뭉쳐졌다. 묵직하니 옥새의 무게를 늘려버린 듯한 착각마저 드는 마나! 나는 그 마나를 흡수하고서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마나를 쓰면 또 한 개, 룬의 참된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참된 뜻을 깨달은 룬.

다시 말해서, 베로니카처럼 주문만 외워도 발동하는 룬을 하나 배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인간에게 걸린 룬의 저주는 어째서인지 나한테는 통하지를 않았다. 아마도 내가 지구 출신이라서 저주에 안 걸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뿐이다.

‘물론 룬도 적성에 안 맞으면 못 쓰지만 말이지.’

마법 적성의 한계는 룬이라고 별로 다를 것 없다.

베로니카가 ᚨ(Ansuz)로 영혼과 대화할 수 없는 것처럼, 난 베로니카 수준의 변신 마법은 쓰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도 룬의 참된 뜻을 깨닫는 방법을 알아낸 것은 괜찮은 수확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면 룬을 강화할 수 있는지 제대로 몰랐거든.

ᚨ(Ansuz)는 골렘에 가둬졌던 영혼들이랑 쌰바쌰바를 해서 얻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흡수량이 장난 아니었지.’

그때 골렘에 갇힌 영혼들은 나한테 달라붙어서 성불했었다.

그 과정에서 갖고 있던 룬의 마나를 나눠줬던 것이다. 아마 그래서 막 습득했던 룬의 각성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나는 옥새에 들어 있는 마나를 짐작해 보았따.

‘하나, 둘, 셋…… 아홉 개 분량인가?’

보통 룬을 9개 배울 수 있는 룬의 마나로 1개의 룬을 강화할 수 있는 듯 했다.

‘왜 이 거인이 룬의 마나를 갖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이 새끼는 룬을 안 썼었는데 말이다.

‘마나 계승 현상의 미스테리인가.’

어쩌면 거인이 갖고 있던 구신의 마나가 룬의 마나로 치환된 걸 수도 있다.

현대 마법에서 구신의 마나는 룬으로 얻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룬 술사한테서만 획득할 수 있는 거라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마나 계승은 ‘유사한 마나를 흡수하는’ 현상이니까 구신의 마나끼리 공명해도 이상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룬을 강화할 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옥새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잘 모르는 일 투성이인 건 매일 있는 일이었다. 생각해 봤자 답이 안 나오는 일 아닌가. 그냥 개이득이라고 기뻐하도록 하자.

“그대여. 거인의 가죽을 벗길 방법은 있느냐?”

나를 따라온 베로니카가 물었다.

아, 시발. 그것도 그렇네. 이 새끼 가죽은 창을 휘둘러도 안 갈라지던데.

“쓰으읍……. 잠만. 시도해 볼게.”

나는 얼마 안 남은 마나를 쏟아부어서 야수회귀의 발톱을 세웠다.

‘보통 때는 창이 더 날카롭지만…….’

야수회귀의 출력이 높아지면 손톱도 날카로워진다.

당연한 얘기였다. 효율이 안 좋아서 안 하는 것일 뿐.

같은 마나 소모량으로 치면 풀 버프 상태가 가성비에서 더 나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 연비 개판인 2중 버프보다 마나가 많이 드는 기술이었다.

마나를 아끼고자 오른손 엄지에만 야수회귀를 발동했다.

거인에게서 흡수한 마나로 마나통이 조금 늘었다. 그래도 마나가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만 풀 회복을 2번 했으니 더 이상은 회복하기 힘들다. 또 회복했다간 부작용이 나올 것이었다.

하루에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전력질주를 3번 하는 거랑 똑같다. 끽 하면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수가 있었다.

“잘려라, 제발…….”

엄지 손톱을 커터칼처럼 피부에 쑤셨다.

─서걱.

“오!”

야수회귀의 손톱에 뚫리는 피부. 나는 기뻐할 겨를도 없이 맹렬하게 소모되는 마나에 안색이 굳었다. 씨이발, 해체 작업 잘 못 하는데.

─서걱서걱.

푸른 가죽을 한 뭉탱이라도 더 건지고자 열심히 손톱질을 하는 나.

팔다리가 있는 생물이라서 거부감이 들 만도 한데, 그냥 뭐 캥거루 가죽 벗기는 느낌이다. 사람이랑 닮게 생긴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것보다 얼굴 생긴 게 더 좆 같애.’

씨발. 목 부분 자르다가 눈 마주쳤다. 토 나온다.

이 새끼, 뒤지니까 가면이 녹아내려버렸다. 가죽이랑 피부 사이의 막을 벗기는 것보다 한쪽 눈깔이 터진 얼굴 쪽이 100배는 더 혐짤이다.

‘이걸 잘라가서 메두사 목처럼 눈갱에 쓸 수는 없나?’

그런 생각도 들었는데, 크기가 작아지더라도 이딴 걸 들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다 뒤진 시체여도 보고만 있어도 몸이 으슬으슬해 진다고. 이걸 가방에 넣고 다니려는 새끼는 정신에 문제가 많은 놈일 것이다.

─콰르르릉!!

그렇게 가죽을 다 벗기고 생닭처럼 된 거인에게 번갯불을 쏟아부었다.

시체에도 물의 마나가 많이 남아 있어서 마법사 길드에다 팔면 사 줄 것 같은데,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귀찮아 질 것 같아서 그냥 태웠다.

치이이익…….

피부를 벗기니까 잘만 타는 거인.

물의 마나에 전기를 흘렸는데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이 새끼의 방어력은 다 가죽빨이었던 것이다.

“끄으윽…….”

장롱 2~3개를 빵빵하게 채울 듯한 무거운 가죽을 등에 매 봤다. 마나가 동나서 그런가. 허리 뽀개지겠네.

무거워서 곱게 접어도 존나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 베로니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버려 뒀다가 돌아갈 때 들면 어떻겠느냐? 아직 우리가 여기 온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느니라.”

“망할. 그래야겠다.”

타오르는 가지도 구해야지 참. 나는 가죽 묶음을 내려놨다.

─쿠우웅!

소리 봐라 씨발. 존나 바윗덩이야 아주.

이거 갑옷으로 가공할 수는 있나?

뭐, 돈 주면 알아서 해 주겠지.

“근데 베로니카. 출구가 막혔는데 어쩌게?”

“여기보다 밑으로 내려가야 하느니라. 길은 달리 있겠지.”

오리할콘 기둥을 띄우며 말하는 베로니카. 레이더가 그렇게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스으윽.

10분 정도 찾아보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막다른 길인 줄로만 알았던 공간에 환영 결계가 하나 숨겨져 있더라.

이번에도 나한테만 보이는 결계였다.

“씨발, 기운 없는데.”

“파이팅이다, 주인님.”

하여튼 존나 이럴 때만 주인님이지. 한숨을 쉰 나는 똥꼬에 힘을 빡 주고 주먹을 쥐었다.

──야수회귀 140%.

“우디루이드, 스매시!!!”

야수회귀 부분 발동으로 결계를 박살냈다.

쓰벌거. 결계가 점점 단단해지거나 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스테이지 넘어갈 때마다 결계의 강도가 올랐으면 일단 한 번 복귀해야 할 뻔 했다.

그렇게 열증기가 피어오르는 동굴을 넘어가는 우리.

냉동펀치로 아이스팩을 못 하니까 더 힘들었다.

“힘이 빠지는데스……. 화끈해지는데스…….”

“열기가 강해져가는구나. 도착이 멀지 않았다는 징조다. 조금만 더 참거라.”

“네훼에엥…….”

나아가다 보니까 또 결계가 나왔다. 이번에는 베로니카만 볼 수 있는 결계였다.

존나 이 결계는 기준이 대체 무엇이지. 불쾌지수가 올라간 내가 세상 모든 것에 욕을 퍼붓고 있자, 땀을 흘리던 베로니카가 안색이 밝아졌다.

“그대여. 결계를 분석해 보니 희소식이 생겼느니라.”

“더워서 기운 빠지니까 본론만.”

“이 결계를 통과하면 고열에 내성이 생긴다. 여길 넘으면 더는 더위를 안 느껴도 된다는 것이다.”

“무야호!!!!”

나는 만세를 하며 달려나갔다가 결계에 부딪혀서 자빠졌다.

땅바닥과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이세계 불판 도게자 ON.

“갸아아아아아악!!!”

─펄쩍!! 불판에 올라간 문어처럼 트위스트를 추면서 몸을 꼬자 베로니카가 웃었다.

“쿡쿡. 설명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대 혼자서는 통과하지 못하느니라.”

한국인의 조급함을 보고 그리 웃고서 손을 내미는 베로니카였다.

“이리 오거라. 내 손을 잡고 같이 넘어가자꾸나.”

“야, 여기 넘어가면 막 용암 나오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럴지도. 결계에 불 내성을 주는 마법을 걸어둔 이유가 있겠지.”

씨부럴.

나는 욕을 중얼거리며 엄마 손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유치원생처럼 결계를 넘었다.

마나를 거부하는 내 창은 1초 정도 앙탈을 부리다가 아가리를 싸물었다.

결계에 걸린 술식의 정교함과 마나량 앞에 분노조절잘해가 돼 버린 것이었다. 내 창이 걍 찐따가 돼 버리네. 어깨 깡패 조폭 앞에서 조용해지는 문신 양아치 같군.

빛을 띄우고 종유동굴을 진행하자 또 넓은 공간이 나왔다. 하지만 거인이 잠자던 곳이랑은 달랐다.

여기는 그야말로 불지옥이었다.

‘애1미. 진짜 용암이 있고 지랄이네.’

나랑 베로니카는 아연하게 지하의 용암 폭포를 쳐다봤다.

용암 폭포란 진짜 말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뭔가 새까맣게 그을린 벽이 일면 가득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벽에는 붉은 열기가 네온사인 전선처럼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벽에 닿은 바위가 녹으면서 폭포가 되어서 밑에 흘러가는 것이었다.

‘이런 게 지하에 있는데 화산이 활동을 안 한다고?’

이게 어디 자연의 신비라고 할 경황이냐.

고고학자 때려치고 싶어지네. 암만 이세계라지만 시발 좀 너무 판타스틱한 거 아니냐? 내셔널 지오그래픽 PD들도 여기 출장 가라 그러면 앉은 자리에서 사표 써서 던지겠다.

존나 불 내성을 걸어주는 결계가 없었다면 호흡도 곤란했을 듯 했다.

‘버프를 걸어줬다는 건, 들어오는 사람을 고려했다는 거지.’

바이콘 족의 선지자는 누군가가 여기에 도달해 주기를 바랐다는 소리였다.

그리 생각하게 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동굴의 바위랑 재질이 다른 석비가 폭포에서 떨어진 곳에 존재했던 것이다. 나랑 베로니카는 아이 컨택을 나누고 석비 앞으로 갔다.

아무 것도 안 적힌 석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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