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8화 (248/1,009)

【알겠습니다. 받아 적을 테니까 말씀하시죠.】

【괜찮으시다면 마법으로 지식을 전승해 드리겠습니다.】

【마법이요? ……뭐, 부탁합니다.】

지금 나의 불 내성을 높여주는 마법을 생각하면 믿어볼 만 하겠지. 선지자의 분신은 석비에 저장된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 마법은 마법에 관련된 지식만 전승할 수 있습니다. 제 본체가 남긴 마법의 지식을 일부 전송합니다.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일부가 아니라 전부 보내셔도 되는데요.】

【룬 마법은 지식만 가져서는 의미가 없습니다만,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네. 부작용이 없으면 그냥 전부 받겠습니다.】

깨달음과 룬의 마나가 없으면 쓰잘데기 없는 게 룬 마법의 지식인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선지자의 분신은 알겠다는 것처럼 마법을 발동했다. 베로니카도 신족 모드에서는 몇 번 썼던, 등 뒤에 만다라를 띄우는 룬 마법이다.

─화아악!!

내 발 밑에도 만다라가 떠올랐다. 말을 전하는 ᚨ(Ansuz)의 룬이었다.

마치 PDF로 찍은 책 페이지가 뇌에 저장되는 것처럼 어떤 지식들이 머리로 들어왔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서 지식들을 흡수한 나는 인상을 썼다.

‘이건 공부하는 것도 일이겠는데.’

왜 굳이 추천하지 않았는지 알겠네. 전공서를 USB로 머리에 넣어둔 기분이다.

문제는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한 게 아니라서 오픈북 정도의 효과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손해를 본 건 아니지만 말이지.’

나는 지금 얻은 지식에서 익숙한 마법을 하나 선별했다. 이 나뭇가지의 사용법 말고, 폭주 상태에서 사용했던 마법 중에 하나였다.

지식은 방금 전의 마법으로 얻었다. 사용법을 기억하는 내 몸은 저절로 그 마법의 요령을 재현했다.

원래는 지식이 없었기에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것도 못 떠올렸지만, 곂치는 지식이 들어오니까 몸이 움직였다. 꼭 기억상실에 걸린 요리사한테 칼을 들려준 것처럼 말이다.

─부웅.

나는 내 손바닥에 초록색 만다라를 띄웠다.

룬 마법의 상위 응용 기술이었다.

원래는 배우는데 기본 몇 달은 써야 하는 고난이도 스킬! 하지만 전승받은 지식과 치트 모드에서 습득한 흔적이 합쳐지니까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이 만다라에 ᚨ(Ansuz)와 ᚦ(Thurs)밖에 넣을 수 없었는데, 장차 다른 룬도 넣을 수 있게 될 듯 했다.

─파앗! 나는 마법을 해제했다.

원래 목적이랑 주객이 전도되어 버리기는 했는데, 따지고 보면 셰이드의 재료를 얻어서 하려는 것도 이런 의문의 답을 찾는 것 아니던가.

나는 베로니카가 일어나기 전까지 들을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들어둘 생각으로 물었다.

【선지자님. 저는 한때 꿈에서 오딘의 분신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말로 시작을 끊고, 내가 들었던 후계자 어쩌고 하는 얘기를 설명했다.

【……저주를 일부 해주하고, 꿈에서 오딘님께 후계자라고 평가받으셨다구요?】

선지자의 분신은 처리능력의 한계인지 경악에 말을 잃거나 하는 반응은 없었다.

정령화의 술식을 걸 때 ‘오딘의 후계자가 나타날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겠지. 선지자는 자기 예언에 맞는 상대가 오는 것만 생각했을 테니까.

【예. 저는 베로니카의 저주를 일부 풀었습니다. 다른 종족 앞에서는 말로 변한다는 저주를요. 제가 추가로 다른 저주도 풀 수만 있다면 종족의 저주가 끊어지는 셈 아닐까요?】

【……네. 그것만 해 주셔도 천 년을 이어갈 업적이며, 저희 일족의 기쁨일 겁니다.】

【문제가 있다면 말씀해 주셔야 편합니다만.】

내가 꼽을 주자 선지자의 분신은 감정을 드러내며 머뭇거렸다. 아마 이러한 대화는 전부 분신의 트라우마 스위치로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건 당신께서 보유하신 신의 마나가 오딘님의 것과 많이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주와 마나가 공명해서 중화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은 아닐 겁니다.】

【어떤 점이 문제죠?】

【개개인의 저주를 해소하는 방식이라…… 새로이 태어날 아이들은 해주되지 못한 상태로 태어날 겁니다.】

아, 그렇겠군.

내가 죽거나 없어지면 해주법의 명맥이 그냥 끊기겠지. 그 점은 문제가 맞았다. 베로니카도 그걸 염두해서 개개인의 해주는 피하려고 했었지.

이런 지식이 분신에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빗나간 예지에 나온 구세주는 어떻게 종족 단위의 저주를 푼 겁니까?】

【그때까지 살아계셨던 신께 탄원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제 예지와는 달리 그 신께서 급작스럽게 사망하시고, 구세주였던 자는 성지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제쪽에서 찾아가 보니 젊은 날에 목숨을 잃은 뒤였죠.】

그렇겠지. 예지대로 해서 해결될 문제였으면 선지자가 살아생전에 어떻게 해 보았을 것이다. 나도 참고 삼아서 물어본 것에 불과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계자라는 게 사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언이니 운명이니 하는 게 인간들에게 휘저어진다면 제가 후계자가 될 거라는 보장도 없네요?】

【오딘 님께서는…… 운명을 따르기를 싫어하셨습니다. 그 분의 분신이라면 조금 전까지의 저처럼 자격을 가진 자의 앞에 나타나셨겠죠.】

존나 좆도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그거, 거꾸로 말하면 나 말고도 자격이 있는 놈이라면 누구든지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 아냐.’

존나 정통 왕위계승자인 줄 알았더니 후계자 후보 D-29였을지도 모른다니.

100명의 오딘 짭들이랑 배틀 로얄을 벌여서 신족의 왕이 되라고 그러면 어쩌지. 헛소리는 작작했으면 좋겠다. 아니길 바랄 뿐이다.

‘존나 상또라이 개깡패 새끼가 후계자가 되면 어쩌려고 그런다냐.’

운명을 싫어한다던 오딘이니까 그것도 감수하려나.

만약 거부하려고 해도 바지사장 오딘은 왕위를 계승당하는 늙은 왕처럼 왕좌를 양도해야겠지만 말이다.

‘아니, 왕좌가 아니라 신좌인가.’

뭣보다 그 분신이 아직도 신좌에 앉아있는지조차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신좌는 비어있고 분신은 세상은 관조하다가 좀 봐줄만 한 놈의 꿈에 나온다든가, 그런 건가? 근데 그런 것 치고는 나 말고도 후계자 후보가 있다는 식의 말투는 아니었는데……

‘……잠깐만. 신좌?’

나는 내가 떠올린 생각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신좌. 신좌라. 들어봤다.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였다.

분명 오딘도 말했던 것 같고, 예르나도 말했던 것 같다.

촤르륵─!

품에서 노트를 꺼내서 펼쳤다.

오딘의 얘기는 어쨌든 예르나 년이 지껄인 망언은 제대로 기록해두지 못했다. 그래도 몇 마디 정도는 암호화 해서 기록해 두었다. 나는 이 직감이 사라지기 전에 노트의 페이지를 서둘러서 넘겼다.

찾았다. 최근 페이지였다.

─【중간 가지(Miðgarðr)】에 남은 신들은 가짜나 패배자밖에 없는걸. 안심해. 너는 신좌의 노리개도 운명의 노예도 아니니까.

예전에 들었던 말을 데자뷰처럼 떠올리며 엘리트-대갈통을 3000% 가동시켰다.

내가 셰이드를 통해서 기억을 찾아보고자 했던 상대들은 다 ‘신좌’라는 공통된 고유명사를 꺼냈었다.

신좌.

다시 말해서, 신의 자리.

─……놈들의 성공작? 말도 안 돼. 논외야. 불가능해. 비어있는 신좌는 더는 없어. 나이도 많아. 나를 압도할 실험기 따위…….

다음으로는 예르나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비어 있는 신좌라는 건 또 무슨 뜻이지? 오딘의 후계자는 그 신의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는 얘기일까? 근데 그 신좌란 게 전부 다 찼다며. 좆 된 거 아냐?

모르겠다. ‘가짜’나 ‘실험기(實驗機)’라는 표현도 눈에 존나 밟혔다.

그보다 시발 나이가 많은 건 무슨 상관인데.

28살이 틀딱이냐? 존나 피부만 탱탱한 인성파탄 할망구년 주제에 파릇파릇한 꼴마초한테 어디 나이 갖고 시비야.

고민하던 나는 직감처럼 떠오른 질문을 그대로 내뱉었다.

【인간족이, 아니. 바이콘 같은 신족을 제외한 생물들에게 룬 마법의 제약이 걸린 것은 왜입니까? 이것도 저주입니까?】

【예. 저주입니다. 어떠한 일을 계기로, 오딘 님께서는 인간들이 기록을 글로 남기길 바라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답이 빨랐다. 나는 생각을 촉구하듯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글로 남기길 바랐다? 그래서 각인하는 걸로만 룬을 발동할 수 있도록 금제를 건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 분께서는 인간족의 왕에게 내렸던 룬 문자에, ‘입으로 뜻이 통하지 못하게 만드는’ 금제를 거셨습니다.】

【……어째서 문자 자체를 빼앗거나 금하지 않고요?】

【오딘 님께서 룬 문자를 완전히 거두지 않으신 건, 인간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은 내가 아는 오딘 다웠다.

인간이나 다른 종족을 제물로 받기 싫다며 자기 자신을 창에 꿰서 나무에 매다는 다정한 또라이!

유니콘, 바이콘, 그라니 등등에게 저주라는 자비를 내려주던 것도 그렇잖은가. 방식은 과격해도 행동을 좌우하는 심성은 절대 사악하지 않았다.

내가 꿈에서 봤던 오딘도 옆집에 사는 이웃처럼 평범하게 말을 걸어오는 여신이었으니까.

【……참고로 묻는 겁니다만, 룬의 저주의 해주법은요?】

【바이콘의 저주와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뭐, 됐다. 내가 룬 문자까지 해주해 주는 건 업무 과다였다.

베로니카라면 몰라도 남 모를 이세계인들한테 그런 혜택을 나눠줄 의리는 없는데스.

나는 쓸 수 있으니까 됐지 뭐.

【그런데 제가 들은 거랑은 조금 다르군요. 선지자님께선 생전에 동족들에게 ‘기록을 구전으로 전승하라’는 말을 남겼다더라고 하던데요. 그건 어째서였습니까?】

언제였더라? 분명 정원섬에 가자고 정하기 직전의 일인가 그랬었다.

베로니카는 분명 바이콘은 얼스터 인들처럼 구전으로 기록을 전하는 문화가 있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 시초가 선지자의 말 때문이었다고도 했었고 말이다.

그러던 게, 이제 와서 보니까 선지자가 섬기던 신의 뜻과 모순되는 짓을 한 셈이 돼 버렸다.

그러한 내 질문에 선지자의 분신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갱신되지 않은 정보입니다.】

아무래도 선지자가 바이콘에게 기록 금지령을 남긴 건 저 분신의 마지막 갱신 이후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날로부터 100년 주기를 못 채우고 사망한 거겠지.

대충 각이 보였다. 나는 기억의 퍼즐을 조금씩 맞춰갔다.

‘……<편찬대대>인가?’

편찬대대.

예르나 년을 쫓던 타뷸라의 조직이다. 룬 스톤의 연구가 수상할 정도로 없어진 이유이기도 했다.

마치 화장실 변기 뒤에 알을 까대는 바퀴벌레처럼 역사의 뒷면에 아른거리는 이세계 홍위병 새끼들!

‘예르나는, 그리고 거의 확실하게 그 년의 적대세력은 신좌 어쩌구 하는 일에 관계가 있어.’

오딘은 아마도 인간이 구전으로 이야기를 전하다가 진실이 와전되지 않게 룬 문자에 제약을 걸어두었다. 인류가 기록을 남기도록 말이다.

어쩌면 그게 후계자와 관련된 정보나 뭐 그런 중요한 얘기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기록으로 전해지던 역사를 <편찬대대> 놈들이 찾아내서 말소했다?’

추살하는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썼을지도 모를 일!

‘실험기’라는 말도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앞뒤가 맞았다.

‘아마 선지자는 생전에 <편찬대대>나 그 전신(前身)을 발견하고 일족에게 함구령을 내린 것 같은데.’

느낌이 그랬다.

만약 긴 세월을 사는 바이콘이 룬 문자로 과거의 기록을 기록해 둔다면 어땠을까?

뻔하다. 99% 정확한 ‘진짜 역사’의 기록이 바이콘의 성지에 생겨날 것이었다.

그럼 이세계의 역사에 동북공정을 실시하는 집단이 그걸 가만히 냅둘까?

지랄도 옆차기다. 원시 고대 <편찬대대>와 그 따까리들은 눈치를 채는대로 진짜 역사의 기록을 ‘홍위병’해 버리고자 바이콘의 성지를 습격했겠지.

‘룬 스톤 중에도 그런 영상이 있었지.’

베로니카의 룬 스톤 컬렉션에도 비슷한 게 있었다.

사다코 짭 할배가 음산하게 떠드는 영상!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할배는 <편찬대대>나 그 짝퉁이랑 관계가 있는 인물 아니었을까.

근데 룬 스톤의 역사 배경은 신화시대 전후잖아?

이세계 홍위병의 역사가 기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버리는군. 아주 유서 깊은 개쌉새끼들이다. 나는 공화정이 싫어요.

‘바이콘의 성지는 맘만 먹으면 침입하지 못할 것도 없어.’

오우거 교수 새끼나, 정원섬의 결계 안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거인처럼 말이다.

다른 생물 앞에서는 말의 모습이 돼 버리는 바이콘 족이다.

기록만 안 남기면 너 이 새끼 반동이구만! 하고 숙청 당하지는 않겠지.

‘말 상태에서는 말이 안 통하니까.’

존나 아재 개그가 돼 버렸군.

본의는 아니었다.

‘아무튼 이제야 조금 알겠군.’

선지자의 분신이 알려준 정보를 정리해 보자.

1. 이세계의 신들은 라그나로크로 인해서 대부분 나가리가 된 상태다.

2. 바이콘과 기타 신족들의 저주는 그 좆망각에서 그들을 구하려는 오딘의 자비였다.

3. 하지만 이 저주를 종족 단위로 해주하려면 오딘 급의 힘이 필요하다.

4. 선지자의 예지대로라면 한참 전에 해주 되어야 했는데, 그 예지가 빗나가버렸다.

5. 정황이 이렇다 보니 종족 단위의 해주는 영영 불가능할 가능성도 크다.

──일단 여기까지가 베로니카한테 중요한 내용이다.

이건 노트에 적어둬야겠네. 그렇게 펜을 끄적거리면서 남은 정보도 정리해 봤다. 이번 건 나랑 관계 깊은 내용이었다.

6. 나라면 바이콘의 저주를 약간 해주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된다.

7. 인간이 룬 마법 사용에 제한이 걸린 건 오딘에게 뭔가 생각한 바가 있어서다.

8. <편찬대대>는 그러한 오딘의 심계(心計)를 망쳐놓고, 역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9. 그래서 대전쟁 전후, 선지자는 죽기 전에 <편찬대대>의 위험을 암암리에 경고했다.

‘대략 이 정도인가.’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연이어서 들어 그런가, 골치가 존나 아팠다.

정보가 존나 많아서 까먹지 않으려면 고생하겠다. 중요한 것만 놓고 봐도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절반 정도는 잊지 않을 듯 했지만 말이다.

─탁.

노트를 접었다.

목표는 세워졌다. 중구난방이었던 목적과 지식이 하나로 뭉친 느낌이었다.

‘<편찬대대>를 경계하면서 놈들의 정보를 찾아낸다.’

봉인해 두었던 예르나의 기억을 탐색하면 그 새끼들이 요즘 뭐 하고 다니는지 개요를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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