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가 어쩌구 하는 건 나도 잘은 모르지만, 고양이 연쇄살인마 슈뢰딩거 씨의 잔혹동화 얘기는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관측자가 발생함으로써 결과가 정해진다던가.’
운명이란 것도 비슷한 모양이다.
근데 그건 다시 말해서, 예언이란 값이 도출됐을 때부터 피할 수 없는 미래라는 뜻이 아닌가. 나는 분신의 말에서 희미한 위화감을 찾아냈지만 일단은 아가리 하고 있기로 했다.
선지자의 분신은 베로니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리하여 피할 수 없는 파멸이 지척까지 다가왔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신들께서는 몇 명인가의 신족에게 자비를 내리셨습니다. 그들의 대표를 불러, 일족에게 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선택의 기회를 주셨죠.】
【……자비라고 하심은?】
베로니카가 애태우는 듯한 말투에 조급하게 묻자 선지자의 분신은 눈을 내리깔았다.
【……일족의 후예여.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제 예언에 따르면 라그나로크는 모든 신족의 몰락입니다. 수메로니아의 신들도 나르메르-나일의 신들도 그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죠.】
비슷한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오딘의 분신이 했던 얘기도 대충 저랬던가?
‘내가 이세계에 오게 된 거냐고 너 때문이냐고 물어봤을 때였나.’
오딘은 그렇지 않다며, 이미 이세계에는 신들이 대부분 죽거나 패배해서 쇠약해져 있다고 말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는데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저희는 살아 있습니다. 신족인데도 신족에게 내린 파멸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신족의 말예를 자칭하고, 실제로 저주를 절반만 풀어도 본래의 힘을── 본래 가졌어야 할 힘을 조금 되찾을 수 있는 바이콘 족.
그런데 그들은 왜 신족이 떼몰살을 당한 현대 이세계에도 잘만 살아있는가.
그 대답이 이유였다.
【──저희 일족에게 내린 저주는, 저희를 라그나로크에서 구제하기 위한 오딘 님의 자비였습니다.】
선지자가 바이콘족에게 내려진 저주를 ‘자비’라고 표현했던 이유.
그리고 바이콘족에게 저주가 내린 이유 말이다.
【──저주가 아니라, 자비였던 거군요.】
선지자가 그렇게 자신의 말을 마쳤을 때, 베로니카는 무척 감회가 깊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인간의 유적을 찾아보며 알게 된 신들의 파멸이, 어째서 일족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정말 상상조차 못 했어요.】
【외형을 빼앗고 금제를 걸어서 몰락시킨다면 저희는 더는 신족이 아니게 됩니다. 신들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분신은 새로운 사실을 곱씹는 베로니카에게 그리 말했다.
【저희는 예언에서 죽음이 확정되지 않은 신족이었습니다. 제 꿈에서 일족의 멸망은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일족의 대표로서, 저주라는 자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였군요.】
베로니카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선지자님의 회고에서 어딘지 모르게 회한이 묻어나오는 거였어요. 피치 못할 파멸을 예지한 당신께서, 그 파멸에 목숨을 잃으실 신들께 당신의 목숨과 일족을 구원받아서. 그렇죠?】
오딘은 미래는 관측된 순간부터 확정된다고 했었다.
그러면 어떤 의미로 선지자가 신들에게 파멸을 선물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원해서였든 아니든 그녀가 신들의 운명을 예지했기 때문에, 라그나로크는 일어났으니까.
그렇게 베로니카의 생각을 추리한 나는 입을 열었다.
【아냐. 베로니카, 그게 아니야.】
【뭐라고?】
나는 놀라는 베로니카를 두고 선지자의 분신을 관찰했다.
진짜 생명처럼 면밀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분신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마, 선지자의 정신에 깃든 ‘진짜 후회’가 그만큼 짙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말에는 군데군데 모순이 있습니다. 한 개씩 보면 작은 위화감이지만 하나로 모아서 생각하면 심히 커다란 오류가 되죠.】
【그대여? 그게 무슨 뜻이더냐. 위화감이라니?】
【생각해 봐. 저 분의 예언은 신들도 피해가지 못했어. 신들의 파멸이라는 허무맹랑한 미래조차 정말로 실현돼 버릴 만큼 적중률이 높았다는 거야.】
당혹스러워하는 베로니카. 나는 단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 분은, 왜 그토록 ‘자격’을 따지셨지?】
【……읏!!】
베로니카가 눈을 부릅떴다.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채버린 모양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미래가 확정되었는데, 중간 과정에 무슨 의미가 있냐는 얘기다.
【바이콘들한테는 언젠가 구세주에게 구원받는다는 예언이 전해진다며.】
신들의 파멸조차 결정지어버린 예지능력이다.
굳이 이렇게 결계를 여러 겹 치고 분신까지 남겨가며 구세주의 자격을 심사할 것도 없다.
냅두면 알아서 구원자가 나타나서 할 것 다 해놓고 꺼져줄 텐데, 뭣 하러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 예언으로 너희의 구원은 확정됐어.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왜 네가 고초를 겪은 후예라고 생각했지? 왜 네가 예언과 별개로 세상을 조사하던 후예라고 알아차렸는데?】
자기 예지를 확신하는 예언자라면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나는 단언하듯 말했다.
【일족에게 확실하게 이루어질 예언을 알려줬던 분께서, 널 보자마자 예언을 안 믿고 세상을 떠돌던 바이콘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는 말이야.】
예를 들어서 주식 시장을 꿰차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투자하는 족족 성공을 거두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길 믿는 친구에게 투자 정보를 알려줘 놓고도, 걔가 쪽박을 쳤을 거라고 확신한다?
앞뒤가 안 맞지 않는가.
선지자는 후손들에게 구원받는다는 예언과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성지를 남겼다.
그렇다면 당연히 베로니카를 봤을 때, 예언대로 성지에서 구세주를 기다리던 바이콘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게 ‘절대 틀리지 않는 예언자’가 가지게 되는 자연태다.
【그, 그건…… 선지자님께서 예지로 내가 나오는 미래를 봐서…….】
【정말 그랬다면 자격을 따질 이유가 없잖아. 너는 예지에 나오지 않은 거야.】
나는 베로니카가 주워 섬긴 핑계를 일축했다.
【저 분은 너를 몰라. 예지에 나온 게 구세주의 안내인이 너였다면 너더러 자격을 물을 것도 없었겠지. 올 사람이 왔다면서 모두에게 예언한 대로 말하기만 하면 되는데.】
찾던 사람이 왔으면 어서 오라면서 환영해야지 않은가.
거기서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건── 선지자 자신이 예지에 확실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밖에 안 된다.
선지자의 분신은 우리를 보고, ‘이들이 정말로 구세주일까’ 하는 의심을 가졌던 것이다.
의심이라는 말이 듣기 나쁘다면, 불안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하, 하지만, 그러면…… 그러면 설마, 일족에게 전해져 왔던 예언은……!】
베로니카는 목이 막힌 것처럼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선지자의 분신은 그런 베로니카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일족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 예언은 아닙니다. 선지자의 예지능력은 신족의 힘과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저주를 받은 뒤에도 예지능력을 잃지 않았어요.
그렇기에 아스가르드에 황혼이 지던 날, 저는 분명하게 일족이 구원받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나는 초조하게 쏟아진 말을 짧게 받아쳤다.
솔직히 나도 못할 짓을 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냥 넘어가면 안 될 문제였다. 그건 베로니카에 대한 기만이 되니까.
【선지자님. 제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읏.】
선지자의 분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존경하던 선조의 분신이 말을 잃을수록 베로니카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갔다.
【대답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예지에 나온 예언의 구세주입니까?】
동굴에는 내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와, 진짜 세상 시발 좆 같다. 양심이 찔려서 뒤져버리겠네.
꼴마초는 여자를 괴롭히는 생물이 아니라고. 베로니카가 울려고 하자 존나 나까지 우울해졌다.
【맞다면 기쁘겠습니다만, 당신께서 저희를 보자마자 마법으로 자격이 있는지부터 보셨지요. 저로서는 그 탓에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를 보면서 눈에 마법의 빛을 빛냈던 선지자의 분신.
그걸로 우리한테서 뭔가 정보를 읽어내고 그제야 안심한 듯 설명을 해 주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절대 ‘확실한 예언의 당사자’는 아닐 것이었다.
선지자의 분신은 대답이 없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혼돈의 총아. 운명에 족속되지 않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라셨죠. 신화시대가 저물고서부터 수천 년, 그 동안 세상의 판도를 잡은 것은 인간입니다.】
신화시대의 끝, 라그나로크 이후.
신들은 지상에 거의 개입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들은 그 뒤로 고대문명을 쌓고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물론 그 점에도 결정적인 모순이라고 해야 되나, 의문점이 하나 존재하긴 했다. 근데 이건 나중에 하자.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바이콘들의 미래다.
나는 진짜로 하기 싫었던 억측을 입에 담았다.
【……선지자님. 당신의 예지능력은, 라그나로크 이후부터 정확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닙니까?】
라리루라가 있었으면 어색함에 깔려 죽었을 듯한 침묵이다.
선지자의 분신은 결국 이실직고했다.
【……제가 예지했던 구원의 날은, 지금으로부터 5천년도 전에 지났습니다.】
【……그런.】
베로니카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넋을 잃었다. 선지자의 분신이 처음에 베로니카의 자기 소개를 들었을 때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선지자가 성지를 떠나서 헤매었던 건, 아마 5천 년도 전에 빗나갔던 예언을 어떻게든 끼워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일족은 어떻게 되나요?】
베로니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일족의 저주를 푸는 방법이 없어진 건 아니죠? 예언이 빗나갔어도 저희는 스스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마음의 버팀목을 잃은 베로니카는 선조의 분신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영상에 불과한 몸은 베로니카의 손을 차갑게 투과해버렸다. 베로니카의 손이 힘없이 내려갔다.
내가 처음 보는 심약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베로니카가 심지가 굳은 듯이 보였던 건, 선지자의 예언을 그만큼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그랬다.
내가 룬 스톤의 실체를 알려줬을 때도, 베로니카는 자신의 연구가 헛고생이었다는 사실보다 내가 예언의 구세주일 것만 같다는 생각에 더 기뻐했었지.
【저희는…… 영원히 성지에 갇힌 채, 세상에게 버림받지 않아도 되는 거죠?】
…풀썩.
무릎을 꿇은 베로니카는 혼잣말처럼 그리 중얼거렸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기에 베로니카의 충격을 보듬어 줄 사람도 없었다.
“흐윽, 흐윽……. 흐으윽…….”
가슴을 움켜쥔 베로니카의 숨이 이상할 만큼 가빠졌다. 충격에 과호흡을 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급하게 옥새를 꺼냈다. 위로의 말을 떠올릴 말재간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옥새에 깃든 9개 분량의 룬의 마나를 내가 가진 룬 하나에 몰아넣었다.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셰이드나 전투에도 유용하게 쓸 룬이긴 했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잠깐 가라앉혀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썼을 것이었다.
평화와 안전, 안식을 의미하는 룬의 참된 깨달음이 내 머릿속을 꿰뚫었다.
“──ᚦ(Thurs).”
나는 룬 마법으로 편안한 꿈을 꾸게 만드는 수면 마법을 발동했다.
…투욱.
정신적 충격이 컸던 베로니카는 수면 마법에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물론 잠들었다가 깨어나도 바뀌는 건 없다. 하지만 충격을 가라앉힐 시간을 주는 것은 가능할 것이었다. 나는 옆으로 쓰러지는 베로니카를 받쳐서 눕혀주었다.
【……감사합니다. 혼돈의 총아시여.】
【감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닙니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핑계는 많았지만 선지자는 결국 빗나간 예언을 가지고 구라를 깐 것 아닌가. 본바탕에는 이런 결과를 예상 못한 죄책감과 선의가 깔려 있겠지만, 사기꾼인 건 부정 못할 사실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알았는지 분신은 해명했다.
【운명은 자기실현적입니다. 저의 예언이 빗나갔어도, 같은 조건을 가진 이들이 운명의 실을 붙잡는다면 틀에 맞춰지는 것처럼 예지대로 성사될 것입니다.】
【그렇게 끼워맞춘 예지가 조작이나 사기랑 뭐가 다르죠, 하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예언이 빗나간 상태에서도 저주를 해주할 방법은 있습니까?】
【……오딘님의 저주를 웃도는 마나를 가진 신님께 탄원을 드리면, 해주는 가능할 겁니다.】
【생판 남남인 분들께 도와달라고 자비를 구걸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것도 라그나로크 이후로 폭삭 망해서 남을 도울 여유도 없는 상대에게요.】
눈치 못 챘었는데, 아마 나도 은근 빡쳤는갑다. 의식하고 나서야 말투가 거칠어졌다는 걸 알아쳤으니까 말이다.
【……하아.】
나는 한숨으로 짜증을 털어냈다.
선지자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진짜 예언가가 미래를 정할 수 있는 힘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신족이 운명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면 선지자가 라그나로크를 예지한 것도 운명일 뿐이었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때문에 살던 터전에서 떠나서, 일족만이라도 구해내려다가 실패한 삶.
그 실패를 수습하려고 만리타향을 방황하던 삶의 끝이 다른 세상에서 꾀꼬닥 객사라니. 어디 사는 석사 꼴마초의 IF 미래 같은 꼬락서니라서 화를 내기도 뭣한 기분이었다.
분신한테 화를 내서 어쩌냐는 생각도 들어서 나는 건설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기분도 일신할 겸, 잠시 화제를 바꿉시다. 선지자님. 혹시 ‘타오르는 가지’라는 셰이드 소재에 대해서 아십니까?】
존나 깜빡해 버리기 전에 미리 챙겨두든가 해야지. 베로니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급하게 올라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때 가서 물어보면 늦을 테니 말이다.
내 말에 선지자의 분신은 근처를 가리켰다.
【불꽃의 마나를 받고 자생한 나뭇가지라면…… 저것으로 어떻습니까?】
거기에는 바짝 마른 나무인지 나뭇가지인지가 자라 있었다.
거의 뭐 잘 말린 나무를 바닥에 꽂아놓은 느낌이었다. 저걸 살아있다고 봐도 좋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다. 일단 나는 말리 죽은 나무다에 한 표.
【어떠냐고 하셔봤자 저는 잘 모릅니다. 일단 뽑아 보죠.】
─뿌드득!
마른 나무를 잡아서 뽑았다.
노인의 팔처럼 비틀린 나무는 왜 ‘타오르는 가지’라고 불리는지 모르게 생겨먹었다. 거친 생김새랑은 다르게 질감은 매끄러운 나뭇가지였다.
판타지 마법사들이 지팡이로 쓰기 좋을 것 같은 외형이다. 룩딸용으로도 좋겠군.
【타오르는 가지는 취급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몇 가지 지식을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기본 모드로 돌아와서 설명하는 선지자의 분신.
역시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이다. 트라우마 워드를 자극하지 않으면 AI처럼 제 할 일을 하러 돌아가는 모양.
울적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것도 피곤하니까 잘 된 셈 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