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저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질투 중이니까 함부러 말 걸지 말아 주실래요~? 선배가 제 마음의 오아시스인 베로니카 언니를 뺏어가서 슬프거든요~?”
“왜 우리 베로니카가 니 오아시스가 됐냐.”
“와~♡! 벌써 ‘우리’ 베로니카라고 하시기 있어요? 선배랑 언니들이 ‘우리’면 저는 ‘너희’에요?”
반론하기 어려운 말로 투정을 부린 라리루라는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렸다.
“흥~ 이다. 선배랑 언니들이 같이 다니시는 동안에 저는 동물로 변신한 언니랑 완전 알콩달콩 했었거든요~? 선배한테 저희 언니를 뺏긴 기분이라서 삐진 거에요~.”
박쥐처럼 매달려서 시무룩해진 라리루라였다. 나는 능청을 떨며 낄낄댔다.
“무슨 얘긴가 했는데 동물원 자유이용권이 아쉽다는 거네. 내가 나중에 변신 마법 배우게 되면 벌충해 줄게. 원하는 동물이 있으면 그때 얼마든지 말해.”
“──진짜요?!”
라리루라는 생일 선물을 하나 더 사준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놀랐다.
“선배! 그 말 진짜죠?! 절대 취소하기 없기에요?!”
공중 3회전을 하며 나무에서 내려오는 라리루라. 잘못 보면 나무에서 떨어지는 줄 알겠다. 나는 팔짱을 꼈다.
“그래, 그래. 이 선배님의 잘생긴 얼굴을 걸고 맹세하마.”
“그거라면 판돈이 조금 많이 모자라지만 그간 지내온 정이 있으니까 감안해 드릴게요!”
아니 시발 우리 후배님 얼평 기준 더럽게 높네.
인싸력이 오지는 여자 후배한테 얼굴이 조금 많이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다니. 거인이랑 싸울 때보다 데미지가 더 큰 느낌이다.
물론 신나서는 내가 그따구로 데미지를 입는 걸 눈치채지 못한 라리루라는 촐싹맞게 폴짝대며 방방 뛰었다.
“아핫♡! 다들 뭐 하세요?! 얼른 돌아가요! 더워서 그런지 저 또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졌어요!”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놀다 가지 뭐. 열사병으로 뻗기 싫으면 뛰지 마.”
뛰지 말라니까 구보로 앞장을 서 버리는 라리루라. 젊어서 그런가. 기력이 넘치네. 노인네처럼 홀홀대는 내 열구리를 프랑이 다가와서 찔렀다.
“……노르. 변신 마법에도 적성 있어?”
“아마 없을 걸.”
“우와……. 우리 남편 새끼 진짜 존나 못 돼 쳐먹었네.”
내 말에 세 사람의 아내들은 혀를 내둘렀다. 사이가 좋은 듯 보여서 다행이다. 남편 뒷담화로 대동단결하지만 말아주라.
베로니카는 대표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왜 우리 주인님은 저 좋은 머리를 낭비하며 사는 건지.”
“인간은 삶을 낭비하기 위해서 사는 생물이니까.”
그리고 잔머리는 낭비가 아니란다.
그렇게 우리는 해맑게 우리를 부르는 라리루라를 따라서 해변으로 돌아갔다.
미안, 라리루라. 이게 킥스타터라는 거란다.
해변으로 돌아간 나는 파티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쉽게 말하자면 마지막 날이니만큼 또 해수욕을 즐기기로 한 것이었다.
기운을 차린 라리루라는 베로니카에게 돌고래로 변신해 달랬다가 베로니카가 돌고래를 모르자 그냥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다나는 그늘에서 얼음을 띄운 술을 마셔댔고 말이다.
그리고 혼자 수영복을 안 입은─남들 앞이라 못 입은─ 프랑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호오. 굉장한 가죽이네. 양도 많고.】
우르실라는 내가 배에 실어도 되냐고 물은 거인의 가죽을 감정하며 그렇게 말했다. 안 된다고 하면 교섭하려고 했지만, 뭐 예상했던 대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 가죽도 보수에 포함 돼?】
【조금 나눠드릴 수는 있죠. 그런데 그거 가공하기 더럽게 힘듭니다.】
내가 마나를 물 쓰듯이 써서 힘겹게 자른 가죽이다.
잘라온 나도 이걸 가공해서 옷이나 뭔가로 만들라고 하면 일단 1분기는 잡고 건드려야 할 것이었다. 하루에 30분도 못 자를 테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우리 대화를 얌전한 조강지처처럼 듣던 프랑이 웬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노르. 보통 이런 고급 가죽은 가공할 때 임시 약화 용액을 써. 연금술사가 만드는 포션인데, 그걸로 튼튼함을 낮춰서 가공을 편하게 하는 거야.】
【아, 그래. 그건 몰랐네.】
프랑의 말에 내가 대답하자, 얘기를 들은 우르실라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 포션이라는 건 유용하니 어디서든 팔 법 한데…… 이만한 가죽을 제대로 가공할 수 있는 대장장이나 재봉업자는 게르마니아에서도 보기 드물어.】
【아는 대장장이가 있기는 한데, 실력은 좋아도 가죽을 만지는 걸 싫어해서요.】
안 그래도 클라라한테도 일 맡기러 가야 하는데. 돈 좀 벌었으니 쓸 때도 됐지 않은가. 잠깐 생각이 삼천포로 빠진 나에게 우르실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다른 곳을 들릴 생각 없어? 마침 우리도 해적선에서 받아낸 물건들을 팔아치울 업체를 찾아야 하거든.】
【뭐 좋은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그렇지만 저희는 쿠드세스에서 열리는 축제에 갈 생각이었는데요.】
축제 이름이 뭐더라? 뷔페미니즈스트였나?
아무튼 그 맥주 축제가 열리는 걸 프랑이 기대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나는 거기 데려가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프랑은 내 옷깃을 당기며 신경 쓰지 말라는 눈치를 줬지만 그냥 못 본 척 했다.
우리 프랑이 나한테 뭘 부탁하는 경우가 얼마나 된다고 이런 기회를 놓치겠는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금전적, 시간적 손해 정도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지. 암, 그렇고 말고.
【비조페스트? 그거라면 오히려 내 제안대로 가는 게 나을 걸. 그 축제의 원류는 그쪽에서 열리거든.】
의기양양한 우르실라의 말에 나도 대충 눈치를 깠다.
거인의 가죽을 무두질할 만큼 힘이 세고, 마법을 다룰 줄 알며,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니. 여기까지 힌트가 있으면 모를 수가 있나.
【흥미롭네요. 들리시려는 곳이 어디길래 그러십니까?】
나는 프랑이 약간 놀라는 걸 돌아보지 않고도 알아차리며 그리 물었다.
우르실라는 담배를 물며 말했다.
【드워프들의 나라, 니다벨리르.】
판타지 국룰.
드워프는 대장장이 종족이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감각이 예민하며, 시각으로도 물체의 온도를 파악할 수 있는 내츄럴 본 스미스!
그들의 나라인 니다벨리르는 신대의 문명을 계승하는 게르마니아가 기술 강국이 된 이유이기도 했다.
드워프들의 국가는 영토가 작다.
그렇기에 특정 기술에 몰빵해서 강대국 사이에서 무역과 완충지대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나 뭐라나. 그 지리적 위치나 인적 자원 덕분에 알게 모르게 권력자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댄다.
피날레로 이 풍기문란 이세계에서 혼전 순결을 존중하는 유교적 국민성까지 있으니, 왠지 가본 적도 없는데 고향에 귀성 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시발 니들은 강제 배산임수 모드는 아니잖아.’
니다벨리르에는 평지가 많다. 국토의 50% 이상이 산이었던 대한민국보다는 이지 모드였다. 국민을 먹여 살리고 밀이 남을 만큼 자급자족이 되거든.
갓뎀 뻐킹 동고서저. 드워프 니들은 불만을 말할 자격이 없어요. 꼬우면 K-부동산 맛 좀 볼래?
‘종족도 우월하고 말이지.’
진짜 매번 하는 말인데, 이세계 종족 중에서는 인간만 병신이다.
혼돈의 총아라고?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 찬가고 염병이고 걍 손재주 패시브나 줄 것이지.
그런 주제에 세상의 패권을 잡고 있으니 놀라울 지경이다.
역시 인간은 대단하다니깐. 좆프 이하의 마법 적성, 드워프 이하의 신체 능력. 룬도 못 써. 수명도 짧아. 그런데도 영장류라니. 이세계 밸런스 꼬라지 대체 무엇.
‘아무튼, 드워프들의 나라인가.’
왠지 수염 숭숭난 숏다리들만 바글댈 것 같은 이름인데, 그 생각은 다리가 느린 흑인은 없다 수준의 인종차별이었다.
편견을 버리고 생각해 보자.
하프지만 우리 프랑도 드워프 아닌가. 프랑은 수염은 고사하고 얼굴에 잔털도 안 난다. 목 아래로는 털 한 올 안 자라니까 주물거리고 있으면 세상의 행복을 다 거머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프랑을 드워프의 평균으로 두면 어떨까.
대장간에도 프랑. 잡화점에도 프랑.
음식점 쉐프도 프랑이고 여관 주인도 프랑.
마법사 프랑과, 전사 프랑, 수녀 프랑의 모험가 파티.
공주 프랑과 여왕 프랑이 군림하는 프랑 투성이 나라라.
“……천국인데?”
내 입이 저절로 발사한 중얼거림에 프랑이 귀를 쫑긋했다.
“아냐. 니다벨리르는 어떤 곳인가 해서.”
나는 내 다리에 아이처럼 앉아 있던 우리 프랑에게 뺨을 비볐다. 아, 준내 말랑말랑해. 손이 지 혼자 가슴으로 가려다가 다른 파티원들도 있어서 참았다.
정확하게는 라리루라 때문에 참았다.
다나나 베로니카만 있었으면 눈치 안 보고 주물렀음.
“그냥 평범해. 노르가 무슨 기대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들이 많은 게 다일 걸? 항구라면 다른 종족도 많구.”
“글쿠만. 아쉽네.”
“응. 시골 마을로 가면 건물 크기가 작아서 다른 종족 사람들은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말야. 근데 그건 그렇고, 노르. 슬슬 면도 해야겠다.”
“앗, 미안. 간지러웠어?”
뺨을 쓰다듬자 확실히 잔털이 느껴졌다.
나는 수염이 별로 안 나는 편인데─기르면 보기 싫게 염소 수염처럼 난다─, 요즘 선상 생활을 하면서 면도 주기가 많이 짧아져서 그랬나 보다.
참고로 이세계 면도날은 나이프다.
존나 싸이코 살인마나 고문쟁이 새끼들이 쓸 것 같은 메스 말이다. 3년을 썼는데 그거에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프랑은 옆으로 허리를 돌려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는 김에 머리도 한 번 자르자. 내가 이따가 해 줄게.”
“와, 우리 프랑 못 하는 게 없네.”
요리에 옷 수선에 면도에 이발까지 다 할 줄 안다니.
까딱 방심하면 진짜 기둥서방이 돼 버릴 것 같다. 생활부터 가사 전반을 프랑한테 맡겨버리고 쥬지랑 달콤한 말만 속삭여 주는 생체 딜도로 취직하는 것이지.
지구로 돌아가면 아내들이랑 적당히 집값 싼 곳에서 그러고 살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운 라리루라는 다리를 까딱거리면서 물었다.
“선배~. 가죽 무지 많던데, 뭐 만드실 거에요~?”
“먼저 갑옷이겠지. 파란색도 멋있기는 한데 염료를 입혀서 검게 만들려고.”
거인 가죽 풀 세트(투구 제외)로 무장하고 리얼 블랙으로 염색하는 것이다.
남은 가죽은 뭐, 비싼 털을 붙여서 정장으로 참석하는 자리에 입고 갈 망토라도 만들까. 부재료 값을 생각해도 돈이 그리 많이 깨지지는 않을 듯 했다.
“남는 건 집 창고에 보관해 두게. 프랑 말로는 대충 2주일 정도 생각하더라.”
“디자인은 나랑 노르가 짤 거라서 빨리 끝날 거야. 연금술 용액 비용이랑 수선비만 챙겨가면 돼.”
“흐음. 그렇다면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겠구나.”
“그렇지도 않아. 보통 대장장이들이랑 연금술사는 협업을 맺고 있으니까. 가게에 맡기면 다 해 줄 거라구 생각해.”
프랑은 그리 설명해 주면서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두 그렇게 만나셨댔거든.”
“……그, 언니네 가족 분들은요? 인사 드리러 가실 거죠?”
일어서서 침대에 얌전하게 앉은 라리루라의 물음이었다. 그 말에 프랑은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내가 철 들기 전에, 어머니는 내가 13살 때.”
“헤헤. 미안해 하지는 마. 이제 익숙하거든.”
프랑은 진짜 신경 안 쓴다는 것처럼 웃었다. 나는 프랑의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려다가, 이상하게 신경 써 주는 게 더 싫을 거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었다.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해소하려는 듯이 베로니카는 한쪽 눈을 감으며 윙크했다.
“……부모가 없는 생활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지. 사실 이 자리에 제 부모를 만나러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잖느냐?”
“니는 왜 셀프 패드립으로 자폭하고 앉았냐.”
베로니카도 부모님을 잃은 걸까? 종족이 달라서 그런지 좀 신경을 못 썼었다. 남편 실격이로군.
참고로 다나는 살아계신다고 하는데, 보러 가긴 싫댄다. 이 자리에 없는 건 논문을 정리하겠다고 따로 나가 있기 때문이었고 말이다.
라리루라는 내 눈치를 보다가 질문했다.
“선배는 그, 가족 분들이……?”
“고향에 계셔. 못 뵌지 좀 됐으니까 걱정되긴 하네.”
“앗, 네. 그러셨군요.”
조금 안심하는 라리루라. 내 사정을 아는 두 아내들은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알렉산드라 씨─라리루라의 서커스단 단장님─의 말을 떠올렸다.
라리루라, 그러니까 본명 프리실라인 우리 후배님도 가족의 얼굴을 모르는 고아라고 했었지. 모험가나 세상을 유랑하는 서커스단에게 가족과 정착할 땅이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앞으로도 우리 아내들에게 좋은 가족을 꾸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게 프랑의 꿈이기도 하니까.
권태로운 항해가 며칠 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창을 들고 갑판에 올라왔다. 단련을 위해서였다.
─쩌저적!
마법을 발동해서 손에 냉기를 일으켰다.
야수회귀의 마나 코팅이 푸른 냉기를 얻었다. 나는 그것을 압축해서 손가락 하나에 모았다. 차가운 기운이 한 곳에 응축되자 하얀 서리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술식 결합으로 <구름 소환(Summon Cloud)>의 생성 포인트를 한 곳에 결정했다.
그대로 분사각을 예리하게 좁히면서── 발사.
“세로.”
액체질소가 터진 것처럼 발사된 냉증기!
그것은 레이저 빔처럼 날아가 해수면에 부딪혔는데, 파도치는 바다를 한순간에 얼릴 정도는 못 됐다.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얼어붙은 알갱이가 된 게 다다.
무슨 만화나 게임처럼 아이스 에이지를 일으키려면 존나게 말도 안 되는 마이너스 온도나 물리법칙을 왜곡하는 마법의 힘이 필요하니까.
‘내가 쓴 마법은 거기에 해당이 안 되지.’
지금 이건 폭주 상태의 내가 썼던 마법 중에서 그나마 재현해 볼 만 했던 술식 결합 마법이었다.
원본에는 못 치지만 살상력은 제법 있어 보였다.
제대로 압축해서 뿜으면 가스폭발 사고처럼 사람의 몸을 오체분시 시켜버릴 위력!
냉기는 특필할 것 없다. 화염방사기처럼 오래 맞는 게 아니라면 치명타는 안 될 것이었다. 10초만 맞아도 살아있는 멧돼지를 냉동삼겹살로 레벨 업 시켜주겠지만 말이다.
‘난점은 사정거리가 짧다는 점인가?’
10미터만 돼도 존나게 찬 바람 정도로밖에 안 느껴질 듯 했다.
‘진짜 폭주 상태의 그 냉동빔은 어떻게 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