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무엇을 알았고,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주 하는 말로 당신을 평가하겠어요.】
─철컥. 프랑은 갑옷의 아공간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범죄자 주제에 변명하지 마세요. 죄에 그럴싸한 핑계를 붙여봤자, 당신은 남의 피와 눈물로 갑옷을 사 입는 최악의 죄인일 뿐이에요.】
【……네가 싸우는 이유는 원한이냐? 아니면 의무감?】
【어느 쪽도 아니에요. 제가 당신을 용서하지 않는 건, 절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배웠기 때문이에요. 꿈을 이루려면 꼭 끝맺음이 필요하다는 걸요.】
【좋군.】
분노와 광기를 충동질하는 갑옷으로 무장한 드워프는 어둠 속에서 웃었다.
【너는 순혈로 태어났어야 했다.】
─콰아앙!! 보법을 밟은 상회장이 대쉬했다. 그 발에는 빛이 머물면서 갑옷의 각반마저 무언가의 매직 아이템이라는 것을 뽐내는 듯 했다.
이어서 다시금 번개가 몰아쳤다. 그것을 받아치는 나에게 프랑이 외쳤다.
【노르!! 가!! 이 사람은 우리가 맡을게!!】
【──그래! 다녀오마!】
나는 거창한 말이나 쓸데없는 걱정을 날려버리고 대답했다. 프랑도 다른 파티원들도 내가 걱정하고 지켜줘야 하는 짐덩이가 아니다.
엔리르의 번개는 위험하다.
프랑이나 라리루라는 마나량이 적었다. 부적이 있어도 언제 마나가 다 소진될지 모르며, 위력을 더 높일 수 있다면 마법 내성을 뚫을 가능성도 컸다.
광범위하게 작렬하는 번개 앞에서 뭉쳐서 싸우는 건 멍청한 선택이었다. 저 번개쟁이 새끼는 가장 빠르고 강한 사람이 맡아야 했다.
그리고 꼴마초는 자기 여자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거침없이 달려가야 하는 법.
나는 창을 들고 푸른 번갯불이 튀는 복도의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짐승의 목을 이 창으로 꿰뚫기 위해서 말이다.
─콰르릉!
내가 방에서 뛰쳐나가자 저 멀리에서 보이는 번갯불이 더 거칠어졌다.
최소한의 온정인가. 아군인 상회장을 휘말리게 하지 않을 정도의 출력 조절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받아칠 각을 간 보려던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용트림을 감지했다.
경계할 건 없었다. 매우 익숙한 마나였다. 내가 보법을 밟으면서 벽에 밀착하자 엔리르가 한 아름은 될 듯한 번개를 쏘아냈다.
마나를 끌어모은 라리루라가 외쳤다.
“──<복사 방출(Emission of Radiation)>!!”
─쿠화아아아악!!
강화한 <마법의 화살>이 운동 에너지의 포격으로 진화하여 번개와 부딪혔다.
안타깝게도 승부는 라리루라의 패배였다. 하지만 번개도 얼마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지고 말았다. 나이스 어시스트다. 그 틈에 나는 냉동빔을 쏘면서 번갯불에게 접근했다.
【크하하하!! 꼭두각시에 저위마법으로 내 번개를 받아쳐? 신세대의 문물이라고 얕볼 게 못 되는걸!!】
호전적인 말투로 즐거운 것처럼 외친 엔리르는 냉동빔을 피해냈다.
─까드득! 강력한 번개를 쏜 직후였기에 완전한 회피는 불가능했던 것인지 그 새끼의 어깨에 냉기가 스쳤다.
기뻐할 순 없었다. 어깨를 스친 정도의 냉기로는 【뇌신의 허리띠】의 방어력을 못 뚫었던 것이다.
엔리르는 로브 아래의 육체에서 근육과 마나를 쥐어짜듯이 팔을 교차했다.
【그래도 너희는 결정적인 위력이 모자라!!】
그리 외치는 놈의 손에서 새까만 마나가 흘러나왔다!
【──적을 갈라찢을 공격력이 말이다!!!】
─파아아아앗!! 데자뷰가 드는 검은 마나는 난폭한 말투나 태도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정갈하게 갈무리된 마나였다.
나는 그 예기(銳氣)에 유년기 때 태권도장 관장님의 방에 걸려 있던 진검을 봤을 때를 떠올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분은 도검소지허가증까지 딴 무(武)의 구도자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분야를 극한까지 갈고 닦은 달인의 증명은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오직 살상을 위한 도구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품격과 아름다움!
나는 그 마나의 정체를 눈치깠다.
【──오러인가!!】
최소 미스릴 클래스는 되어야 쓸 수 있다는 기술!
그것은 아직 나도 배우지 못한 절기 중의 절기이면서, 한때 나랑 같이 싸웠던 미스릴 클래스 모험가 네페르티티가 패도적인 위력으로 선보였던 달인의 무예이기도 했다.
【정답이다, 키타이 인!!】
엔리르는 오러의 손톱을 50cm 정도로 늘리면서 수도를 휘둘러댔다. 검은 마나가 섬칫한 소리를 내며 강습해 온다.
피할까? 아니, 기껏 접근해놓고 그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뭉게뭉게-순보로 뒤점멸을 박아봤자 달려오는 적을 상대로 문 워크를 펼치면 따라잡힐 것이었다. 사람은 후퇴보다 전진이 빠른 생물이다.
‘겁 먹지 마라, 꼴마초!!’
과거의 기억이 뉴런을 스쳐지나갔다.
아직 내가 좆밥이던 시절, 이세계 달인의 힘을 내 눈에 각인시켰던 네페르티티의 이세계 그린 잼민이 학살쑈!
그때 오러를 감은 채찍의 위력은 분명히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다.
엔리르가 그녀와 동격이라고 한다면 맞고 멀쩡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긴 아직 이르다.
근거는 있었다. 네페르티티가 유니콘 흑마법사 아비두스와 싸웠을 때, 그녀는 오러를 감은 채찍으로도 거대 골렘과 힘겨루기를 하고 반쯤 그로기가 되었었다.
네페르티티도 공격력이라면 거대 골렘에게 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 해답을 눈치깠다.
‘오러는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게 아니야! 공격력을 높일 뿐!’
아까 엔리르를 후려갈겼을 때, 손끝으로 느낀 놈의 파워는 나랑 엇비슷했다. 도움닫기를 밟고서 덮쳐오는 지금의 엔리르도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신체능력은 호각.
──아니, 내가 더 우세하다!
【꼴떨지 말고 이거나 받아라!!】
나는 라리루라에게 배웠던 신체 조율과 경험을 믿었다.
─쐐애액!! 창대로 엔리르의 배를 찍었다. 놈은 번개 갑옷을 믿는 것인지 방어도 하지 않았다. 피부를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이겠지.
오러의 위력을 생각해 보면 틀린 작전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대가 나빴다.
나도 그 새끼의 배를 찍은 창으로 기술을 펼쳤다.
【게르튀르】의 반격기 제 4품새가 엔리르를 달리게 만든 운동 에너지를 상쇄시켰다. 달려들던 놈은 급 브레이크를 밟아서 정지한 차량처럼 멈춰버렸다.
엔리르의 눈이 부릅뜨였다.
달인에게는 무기의 리치도 의미가 없다지만 주먹보단 창이 더 길다. 벽에 부딪힌 듯 정지당한 손톱은 내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지금이다.
나는 근육에 혈관이 튀어나오도록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반격기 제 4품새로부터 공격기 제 1품새로의 연계기.
【위위격라(偉威擊拏)!!】
나는 창날을 쏜살같이 휘둘렀다.
운동 에너지가 0이 된 엔리르는 눈치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래도 늦다. 제로백 0.1초의 SF 레이싱 카도 이미 시속 300km를 밟고 있는 차량보다 빠를 순 없으니까.
반격기 제 4품새의 운동 에너지 상쇄로 메즈를 걸고, 공격기 제 1품새의 고위력으로 후드려 까는 콤보!
간단하기에 더욱 강력한 절기에 엔리르는 속수무책으로 대굴빡에 공격을 허용했다.
─빠아악!!
확실한 크리티컬의 감촉!
번개 갑옷의 역장이 창을 밀어내려 했지만 창의 항마력도 그에 저항했다. 번개의 위력을 삭감하며 역장도 파훼하자 내 창은 방어를 뚫고 그 새끼의 머리통을 갈길 수가 있었다.
【끄으으으으윽!!】
그런데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강철도 베어낼 내 절기를 맞고도 엔리르의 골통은 두 쪽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번개 갑옷의 방어력과 마나가 흐르는 몸의 방어력! 그 두 개을 합치자 보통 갑옷은 명함도 못 내밀 튼튼함이 갖춰진 듯 했다.
【이 시팔! 뭔 두 겹 세 겹으로 버프를 깔아놨어!!】
야수회귀의 사용자인 나는 사돈남말을 했다.
엔리르는 쪼개진 가면을 떨어트리면서 창대를 잡았다. 우악스러운 힘과 오러의 출력이 더해지자 마나를 튕겨내는 창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씨발! 이러다가 내 창 또 뽀개먹겠다!
【오러 멈춰-!!】
나는 따로 의미는 없는 기합을 내지르면서 엔리르한테 잡힌 창대에 <구름 소환>의 생성 포인트를 중첩시켰다. ─퍼엉!!
손에서 폭죽이 터진 것과 같은 위력에 엔리르가 손을 놓자 그대로 백 스텝을 밟았다.
─쏴아아아악!!
내 얼굴 앞을 마나의 손톱이 스쳐지나갔다. 오러의 손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공기가 베어지는 게 들릴 정도였다.
【샤아아아아앗──!!】
피가 눈에 들어가자 엔리르는 포효하면서 진각을 밟았다.
시야가 흐려지자 일단 후퇴하려는 동작으로 보였는데, 내 발은 마비라도 당한 것처럼 바닥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발이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은 바닥이 울린 순간부터였다.
엔리르 저 씹새도 【게르튀르】처럼 뭔가 특이한 무술을 사용한 것이다!
거리를 두면서 엔리르는 손톱을 휘둘렀다. 수압 커터처럼 뿜어진 검은 오러가 가로 횡렬로 쏟아졌다.
다크사이드 버전 비인혈조(飛刃血爪)인가? 개새끼다운 기술이었다. 예르나와의 싸움에서 폭주하던 내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당황하지 않고 대처했다.
【씨이이이바아아아알──!! 근두우우운──!!】
미안, 거짓말이다. 존나 당황했지만 어떻게 대처는 했다.
여의봉 대신에 창으로 장대찍기하듯 바닥을 찍으면서 신발 밑창에 구름 소환을 발동했다. 리펄서 건처럼 발에서 뿜어진 증기가 공중에 뜬 내 몸을 날려버렸다.
피할 곳이 없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달인의 영역에 한 발을 걸친 나에게 이 상회 건물의 벽은 엿가락처럼 물렀다.
숄더 태클로 벽을 부숴서 빠져나가는 나.
빗나간 오러의 칼바람은 돌벽을 종잇장처럼 잘라냈다. 저 애1미 시팔. 맞았으면 진짜로 17토막 났겠네.
거침없이 나아가는 오러의 칼날에 문득 저쪽에 있을 동료들이 걱정됐지만, 그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알아서 피해줄 거라고 믿자.
나는 빡긴장을 하면서 내가 빠져나온 공간을 살폈다.
‘정원인가?’
건물 중앙에 4각형으로 둘러싸인 풀밭이었다. 돈지랄을 해갖고 만든 비싸 보이는 정원이었다.
서거거걱─!!
그때 엔리르가 오러를 감은 손톱으로 벽을 잘라내고서 내 앞으로 걸어나왔다.
벽을 자르는 건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저렇게 순두부를 휘젓듯이 자르려면 얼마나 예리해야 하는지는 상상이 잘 안 갔다.
‘……오러가 무섭기는 하군.’
공격력만 올려준다고 깔볼 게 아니었다.
전사의 공방에서 뎀딜 버프는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아까도 그랬다. 나는 엔리르한테 붙잡혔던 창대를 손으로 쓸어봤다.
창대는 그 잠깐 사이에 오러에 뭉개져서 흠집이 생겼다.
아마 내 창이 항마인지 뭔지 하는 기능으로 마나를 떨쳐내지 못했다면, 엔리르 새끼의 손에 잡히지마자 빼빼로처럼 부러졌겠지.
세상에 시발. 근딜전에서 무기나 방어구를 1~2초만에 씹창내는 기술이라니?
이건 공격을 전부 피하지 않고서는 싸울 엄두가 안 났다.
그리고 피하는 게 막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존나 시발 오러쟁이 새끼들.’
이래서 오러에는 오러로 맞서야 하는 것이었다.
아까 전에 엔리르의 번개 갑옷을 공방일체라고 생각한 나였지만, 그것도 섣부른 결론이었던 모양이다.
【뇌신의 허리띠】는 방어를 위한 기술이었다.
공격한 상대를 감전시켜서 움직임을 둔하게 하는 방패!
엔리르의 진짜 창은 저 오러를 덮은 손이었던 것이다.
내가 방금 펼쳤던 연계기와 같은 원리다. 적을 멈추게 하고 확실한 공격으로 마무리하는 콤보 말이다.
다른 점은 나는 성공해도 엔리르를 족치는데 실패했지만, 저 새끼는 1번이라도 맞추면 나를 죽여버리기가 누워서 떡치기처럼 쉬울 듯 하다는 점일까.
‘……쓰벌. 진짜 뒤지게 쎄네.’
거의 뭐 모르면 맞아야지 수준인데, 맞으면 즉사.
존나 게임 밸런스 실화냐? 오러가 미스릴 클래스의 자격이라는 건 허언이 아니군.
떨어지면 번개랑 손톱바람으로 니가와 전법을 펼친다.
가까이 붙어서 때리면 감전당해서 오러 손톱에 간 빼먹기를 당한다.
손톱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서 견제하면 발에 마비를 걸고 치도리.
근거리도 원거리도 전부 커버가 되는 전법이다.
‘……이거 보통 방법으로는 승산이 안 나오겠는데.’
나는 속으로 조이드를 재평가했다. 그가 한 말 중에 틀린 게 없었다.
엔리르는 존나 위험한 상대였고, 분명 어딘가 나랑 닮았다.
구신의 마나를 다룬다든가, 옷이 비슷하다든가 하는 얘기 말고. 갑옷이나 무술로 적의 발을 멈추고 고화력의 필살기로 족친다는 전투법부이 닮았다는 소리다.
그리고 격겜에서 같은 캐릭터끼리 붙으면 누가 더 고였나, 누가 더 잘 하냐로 승패가 갈리기 마련 아닌가.
진짜 좆됐다는 느낌이 들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크하핫! 크하하하핫!! 이거 즐거운데 그래! 마침 드워프 나라 놈들은 씹을 맛이 안 나서 몸이 찌뿌둥하던 차였어!!】
─파즈즈즉!! 엔리르는 정원으로 걸어나오면서 피가 흐르는 이마를 번갯불로 지졌다.
난폭한 지혈이었지만 감전되지도 않았는지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쪼개댔다.
【이렇게 피가 끓는 건 오랜만이야, 키타이의 드루이드!! 좀 더 즐기게 해 주라!!】
【……몇 대 더 맞아서 피 뽑아 새꺄. 그럼 진정될 거다.】
나는 대충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드루이드라는 건 또 왜 나온 말이래.
아무튼 가면이 벗겨진 엔리르의 얼굴은 젊었다.
겉모습의 나이는 라리루라랑 비슷한 정도다. 많아봤자 20대 초반 아니면 중반일까. 피비린내가 나는 듯한 찌릿한 살기랑은 안 어울리게 몹시 앳된 느낌이었다.
예르나가 뒤지기 조금 전에 했던 말.
그 예르나 년을 쫓던 타뷸라와 닮은 성격과 전투법.
상회장과 협력한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