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면서 몇 마디 흘렸던 ‘우리’라는 말.
그런 정보를 뉴런에 넣고 주물럭대자 여러 추리가 나왔다.
‘염병.’
그래도 평소처럼 그 추리를 입에 담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새끼는 자기들의 정체를 들킨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행동강령’ 같은 걸 배워뒀을지도 몰랐으니까.
‘……저 새끼, 놓치면 진짜 좆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놈만은 여기서 죽여야 했다.
어떤 의미로는 죄값을 치루게 만들어야 할 상회장보다 더.
ᚲ(Kenaz)의 룬으로 발동하는 인상미채는 절대 완벽하지 않았다. 가면을 써도 우리의 기술, 인원 배치, 전투법, 무기 같은 건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개성이 짙은 면면이 모인 파티니까 우리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저 놈의 정체를 입에 담고, 그게 만약 정답이다?
나였으면 승패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장 튀어서 상부에 보고를 때리겠지. 그럼 그 날로 우리 파티는 행복한 꿀잠이랑은 영원히 굿바이 사요나라다. 밤마다 암살자들과 랑데뷰를 펼치는 나날이 막을 올리겠지.
【……너, 왜 저딴 미치광이 밑에서 일하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야부리를 털어봤다.
마치 난 아무것도 모르지만 네 실력에서 위화감을 찾아낸 거다, 하고 말하듯이 말이다.
【그 나이에 그만한 실력을 갖출 수 있다면 양지에서도 못 할 일이 없을 텐데. 아니, 음지에서 범죄조직을 차려도 이 상회를 턱으로 부릴 수 있을걸.】
【엉? 아항. 나는 권력에는 관심 없어. 생각없이 살고, 마음 편하게 싸울 수 있으면 만족해.】
─파지직. 피를 닦는 엔리르의 얼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따분한 일감만큼 시시한 건 없지. 그리고 그 따분한 일 중에 만난 피 끓는 싸움만큼 가슴 뛰는 것도 없고!】
쿠르르르르르릉…!!
대화는 할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엔리르는 무지막지한 마나를 뿜어내면서 주문을 외웠다.
<주여, 신성한 불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Kyrie!! ignis divine!! eleison!!)!!!>
허리의 룬이 회전하면서 번개가 하늘로 뻗었다. 나는 다른 말은 접어두고 일단 손가락에 냉기를 집중시켰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또한 그의 혀는 심판을 내리신다(Os iusti meditabitur sapientiam, et lingua eius loquetur iudicium)!!!>
【──ᚨ(Ansuz)!!】
나는 손가락에 룬의 만다라를 전개했는데, 좆 같게도 이런 상황에서조차 술식 결합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보통의 냉동빔이 쏘아졌지만 강해진 전류의 역장을 뚫지는 못 했다.
<유혹에 견뎌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Beatus vir qui suffert tentationem)!!!>
엔리르는 내가 룬의 만다라를 펼치는 것을 보면서 눈빛에 이채를 품었다. 하지만 그 이런 모습조차 전류에 감싸여서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번개의 기둥이 뻗으면서 공기를 불태웠다. 구신의 마나가 용트림을 부렸다.
시발. 아주 도시 사람들 다 들으라고 광고를 해라. 나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실은 아까까진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경비병이 몰려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진짜 이길지 뒤질지만 갖고 논해야 할 지경이 된 듯 했다.
<시험을 받고 이겨낼 때(Quoniam cum probatus fuerit), 그는 생명의 왕관을 받게 될 지어다(Accipiet coronam vitae)!!!>
로마니아 어로 된 주문을 완창한 엔리르가 하늘에 뻗었던 손을 움켜쥐었다.
번개 기둥에 덮여서 사람의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던 엔리르의 윤곽이 불에 타오르는 그림처럼 사라졌다.
내가 그 새끼의 팔이 번개로 된 건틀릿처럼 변했다고 느낀, 바로 그때.
<──유사신화형: 토르(Eptirleiða: ᚦᚢᚱ)!!>
하늘에서 쏟아진 망치가 그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 망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한 생김새였다.
──단적으로 말해서, 번개다.
망치 모양으로 뭉쳐진 듯한 번갯불이 엔리르의 손에 잡혀 있었다.
내 눈에는 그게 꼭 하늘에서 친 벼락이 그 씹새끼의 손바닥에 내려꽂힌 것처럼 보였다.
치이이이익…….
정원의 풀이 존나 잘도 타서 매캐한 연기를 피웠다.
엔리르는 손잡이가 짧은 번개의 망치를 자기 어깨에 기댔다. 룬의 허리띠와 몸의 번개 갑옷은 그대로였다.
손을 덮은 오러는 번갯불과 융합해서 빛의 건틀렛처럼 바뀐 상태였는데, 망치는 질량이 있는 것인지 무거워 보였다.
‘……돌겠네 시발.’
숨길 수 없는 좆망의 예감.
대체 저 망치는 뭐지, 같은 IQ 낮아 보이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내가 암만 지구의 신화에 무지한 놈이었어도, 번개와 망치라는 조합에서 어느 신화의 뇌신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묠니르냐?】
【오오? 역시 알아보는구만.】
엔리르는 자기 차종을 알아봐 주기라도 한 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 시발, 쳐웃지마 좆부랄년아.
저 씹새끼는 전신이 번개로 감싸인 인간 블루-랜턴 상태였기에 야밤의 어둠 속에서도 잘만 보였다.
【안심해라. 아쉽지만 진품 그대로의 성능은 아니거든.】
─툭, 툭. 손바닥에 번개의 망치를 두들기는 엔리르.
말마따나 그 망치는 어딘가 2% 모자랐다.
아니, 관용구를 빼고 내 감각만으로 말하자면…… 2%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커다란 수영장에 페트병 하나를 부어놓은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진짜 고작 2%는 아니겠지만, 진품에는 못 미칠 것 같다.
【하지만 인간 한 명 죽이는데는 무리가 없지.】
엔리르는 씨익 웃으면서 망치를 휘둘렀다.
【위력이 충분한지 아닌지는, 네 몸으로 겪어 봐라!!】
정전기가 나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내 얼굴이 굳어졌다. 이 느낌은 꽤 익숙했다.
뇌속으로 날아드는 진짜 번개가 꽂힐 때의 감각!
보통이라면 이걸 느낀 순간에 RPG겜의 장판기에서 피하듯 범위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고?
장판기의 범위가 날 기준으로 반경 20미터는 됐으니까.
【씨이부라아아아아아알──!!!!!!】
좆망 그 자체인 광범위 즉사기가 꽂히기 0.3초 전에 나는 행동했다.
피뢰침 역할을 할 창을 바닥에 던지듯 꽂고 후퇴했다. 대갈통을 지키려고 팔도 들었다.
ᚦ(Thurs)의 룬, 야수회귀의 마나 코팅, 【게르튀르】의 방어력까지 싸그리 싹싹 긁어모은 방어 자세였다.
콰르르르르르르릉──!!!!!!
온 세상더러 들으라는 듯 거친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벌써 번갯불이 내가 있던 곳을 가로로 관통한 상태였다. 나는 극한의 풀 세팅 버프를 뚫고 들어오는 전류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번개가 정원을 관통하면서 상회의 건물을 때려부쉈다. 벽 일대가 빨갛게 타오르고 망치로 두들긴 것처럼 박살나서 큰 구멍이 났다.
거기에 휩쓸린 내가 어떤 꼴이 됐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염병!!!! 존나 아파아아아악!!!!!!
피뢰침처럼 세운 창이 번개의 일부를 막아주었다. 하지만 막고 남은 전류만으로도 뒤지게 아팠다.
아픔이 느껴진다는 건 신경이 죄다 씹창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는데, 그게 좋은건지는 잘 모르겠다.
소방 호스의 물줄기처럼 사방으로 번개의 파도가 쏟아졌다. 나는 원시인이 만든 뗏목처럼 날아갈 뿐이었다.
왜 원시인들이 번개를 신으로 숭배했는지 알겠다. 궁금하면 젓가락을 220V 콘센트에 젓가락을 꽂아보길 바라겠다.
‘끄, 으으윽……!!’
비명을 눌러 참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ᚦ(Thurs)의 공격 마법 내성은 발동하고 있다. 마법 데미지 1000 감소 옵션을 2, 3000의 데미지가 뚫고 들어오는 게 문제지 시발.
야수회구의 방어력이나 【게르튀르】의 신체 강화도 번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도움이 안 된 건 아니다. 그마저도 없었으면 나는 진작에 화끈하게 맛있어져버렸을 테니까.
콰르르르르르릉──!!!!
──콰아아앙!!!!!
내 뉴런을 전기 통닭으로 만들려는 듯 지져대던 번개가 드디어 잦아들었다.
그렇게 1초가 10분 같은 시간이 지나갔을 때,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뇌에 스파크가 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면서 입가를 닦았다. 침이 넘친 건 줄 알았는데, 뺨에 묻어 있던 건 번갯불에 말라붙은 피였다.
빠삭하게 익은 피부 껍데기가 손등에 묻어나왔다. 좆 같네.
땅을 짚은 손 옆에서 활활 타는 나무 토막.
나는 멍한 머리로 바닥에서 그게 뭔지 잠깐 생각하다가, 내 가면이 불살라진 거라는 사실을 눈치깠다.
몸에서 풍기는 탄내는 실제로 타는 거였다.
피부도 탔고, 머리카락도 맛있게 익어버렸다. 단백질 태우는 냄새가 매캐해서 토악질이 나왔다.
불이 붙은 로브를 벗어던졌다. 지져진 팔은 힘 조절이 힘들어서 상의까지 싹 찢어졌기에, 바라지 않게 상의 탈의 상태가 됐다.
몸통에 번개 모양으로 화상 자국이 났다. 야성미 넘치는 게 마음에 드는군. 벌써부터 울상을 지을 우리 눈나 얼굴이 눈에 성했다.
나는 진동 모드가 된 주먹을 움켜쥐었다.
【개, 씨발련아……. 우리 마누라들 울면 책임질 거냐?】
팔팔 끓는 침을 뱉으면서 꽂아둔 창을 뽑았다. 왼발이 내 생각에 비해서 1초 정도 늦게 반응해서 넘어질 뻔 했다.
번개를 막아준 창도 성하지는 못했다.
미스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갖고 창날에 새긴 룬이 싹 사라졌으며, 그밖에도 라리루라가 부여해 준 <꼭두극(Puppetry)>의 부속 장비도 다 타버렸다.
【크하, 크하하하……!! 지금 걸 맞고도 살아있다고?】
방금 공격은 엔리르한테도 빡센 필살기였는지, 그 새끼의 뺨에 땀이 흐르는 게 보였다.
그래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죽음을 앞두고 예민해진 감각은 저 새끼가 남겨둔 마나를 어림잡고 있었다.
‘……앞으로 3, 4번 정도인가.’
그 정도는 방금 거랑 같은 위력의 공격을 날릴 수 있을 듯 했다.
저 기술에도 쿨타임이 있겠지만 마나 총량에 자신이 있어 보이던 건 허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에 비해서 나는 한 방만 더 맞아도 뒤진다.
즉사는 피해도 기절은 100% 확실하다. 그리고 적을 앞둔 상황에서 기절한다는 건 죽는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만약 여기에서 안 죽고 납치당해서 수수께끼의 조직에 잡혀가는 전개여도 나로서는 몹시 좆 같을 것이었다.
가면이 다 타 버렸으니까 후퇴하는 것도 소용없다. 여기서 도망쳐도 쫓아올 확률이 140% 정도로 보였다.
─파지지직!! 엔리르의 눈에서 번개가 튀었다. 진짜 말 그대로 번갯불을 튀기면서 그 놈은 나를 꼬라봤다.
【보인다!! 보인다고, 드루이드!! 네 뱃속에 똬리뜬 짐승이!!】
짝퉁 토르 상태가 된 걸로 뭔가 보이기 시작하기라도 했던 걸까? 번개번개 인간이 된 엔리르는 흥분한 것처럼 환희했다.
【자, 너도 꺼내 봐라!! 분노와 마나에 몸을 맡겨 보라고!!】
엔리르는 백 덤블링을 하면서 정원에 있는 시계탑의 정상에 올랐다. 그러고서 다시 망치를 들었다.
몸을 뚫고 지나가는 정전기와 죽음의 예감!
다행히 이번에는 범위가 직선 코스여서 피할 각이 나왔다.
【좆까!!】
죽어라 옆으로 피하는 나. 근육이 맛이 갔는지 발이 자꾸만 멈추길래 증기 분사로 움직임을 보조했다.
스파크를 튀기는 묠니르가 빛살처럼 날아왔다.
번개의 속도이니 빛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었다.
─콰아아아앙!!!
번갯불이 상회의 벽을 때렸다. 엔리르가 손을 당기자 묠니르는 역주하면서 놈의 손으로 돌아왔다. 기어이 무너져버린 상회 건물이 흙먼지를 피어올렸다.
저 씨발럼. 자기 집 아니라 이거지.
【왜 그래?! 망설여지나?! 싸움에 내놓지 않을 거라면 짐승을 기르는 의미가 어디에 있지?!】
자신의 힘을 휘두르는 게 기쁜 것처럼 묠니르를 투척하는 엔리르.
저 씨발럼이 흥분하는 박자에 맞춰서 나는 이리저리 몸을 피해야만 했는데, 망치 투척은 처음에 날린 싸이오닉 스톰이랑 다르게 피할 수는 있었다.
【나한테 보여 봐라!! 네 구신의 마나가 어떤 것인지를!!】
하지만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미 반생반사일 지경인데 얼마나 피할 수 있겠는가.
첫 번째 뇌격은 그만큼 강력했다. 살아남아도 몸이 성할 수는 없었다. 저 놈은 이걸 계산하고 초반부터 궁극기를 날렸던 듯 했다.
‘씨발!! HP도 못 깎고 2페이즈 들어간 것도 서러운데!!’
지금까지 싸웠던 몬스터들이랑은 달랐다.
저 씨발럼은 내가 위험한 상대라고 생각하자마자 비장의 패를 꺼내든 것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릉──!!
망치에서 번갯불이 쏟아졌다. 나는 창을 풍차처럼 돌려서 막아냈다.
빨갛게 달아오른 미스릴 창이 회전하자 번갯불은 믹서기에 넣은 면발처럼 갈려나갔다.
피할 각이 나오질 않아서 그런 거였는데, 쳐내기만 해도 손아귀가 찢어지고 감전당한 몸이 불타올랐다.
【……………!!!!】
무슨 적란운 속에서 프로펠러를 돌리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죽을 각오로 창을 회전시켰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려가며 내 안의 구신의 마나를 굳게 뿌리박고 팔을 움직였다.
조금만 더 빠르게. 번개가 창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떨어내면서 회전을──
‘──회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내 발이 멈췄다.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날아오는 묠니르.
증기 분사로 회피하면서 바닥을 굴렀다. 번개 망치가 땅을 두들기자 바닥에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아악, 시발!! 생각 좀 하자, 개발련아!!】
나는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건지도 분간이 안 갔다.
이를 악물어도 몸에서 진이 빠졌다. 마나는 남았는데 체력을 내력까지 다 빼다 쓴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