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할까.’
이세계에 살면서 징그러운 것들에 익숙해진 나라도 시체를 굳이 헤집고 싶은 기분은 안 들었다.
경찰이나 형사들은 못 볼 꼴 보면서 일하다가 PTSD가 온다는데, 나 같이 건전한 정신을 가진 꼴마초가 정신에 편향을 얻으면 세상의 손해 아니겠는가.
‘……하, 쓰버랄.’
그렇게 변명을 하던 나는 전기톱을 끄고 바닥에 박았다.
염병할 핑계를 될 만큼 진짜 보기 싫긴 했는데, 어디 무시할 수가 있어야지.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라면 확인해 둬야 할 것이다.
“실례합니다. 발열 체크 좀 하겠습니다.”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서 시체를 뒤집어 봤다.
놀랍게도 뒷모습은 새까맸는데 앞쪽은 멀쩡했다. 아마도 이 시체의 죽은 모습을 뒷면밖에 보질 못한 예르나가 앞쪽의 참상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면 의식해서 상상하지 않았든가.’
왜냐면 그 시체는 머리색을 빼면 예르나랑 쏙 빼닮은 엘프였기 때문이다.
“……가족인가?”
어머니, 언니, 동생? 어느 쪽이든 피가 많이 섞인 혈연이란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예르나는 어느쪽으로 갔을까.
나는 일어나서 전기톱을 뽑다가 바닥에 버려진 신발을 발견했다. 풀로 엮은 듯한 엘프다운 신발은 어린아이가 신을 법한 작은 크기였다.
쓰러진 시체를 힐끗 보고 신발의 주인을 뒤쫓았다.
잘못된 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쪽으로 갈 수록 불길이 세지고 길을 막는 나무가 난립했는데, 그건 어떻게 봐도 방화벽이 강화된 느낌이었다.
“목둔 진수천수 받아치기!”
전기톱 살인마의 쌍검술이 나무를 분쇄했다. 그렇게 거부 반응을 때려부수면서 나아가던 차였다.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
저번에도 겪어본 적이 있는 화면 전환이었다. 나는 정신에 스며드는 몰입감── 내가 의식의 흐름이라고 부르던 감각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단디 차렸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어둠에 잠겼다가 깨어났다.
──목덜미가 가려워졌다.
‘나’는 발작하듯 목으로 향하려는 손을 자제시켰다.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처를 스스로 헤집을 만큼 어리석었다면 ‘나’는 벗들에게 현명함을 신뢰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팡이를 든 손은 몹시 하얗지만 그 손목은 여성이라기엔 두꺼웠다. 미술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운 남성의 팔이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와 ‘나’의 남매들을 기준으로 피조물에게 수컷이나 암컷이라는 기능을 부여했다고 하는 게 옳겠지.
‘우리’들이 손수 만들지 않은 건 이성을 갖지 못한 짐승들 뿐이었으니까.
짐승의 시체에서 지팡이를 뽑아냈다.
방해되는 짐승은 전부 치워버렸다. 도망치려는 놈들은 신도들이 쫓아가서 격멸할 것이다. 도주하는 사냥감을 뒤쫓는 건 그들의 일이다.
길의 안쪽에 이 습격에서 빠져나간 생존자가 있다.
‘나’는 지팡이에 묻은 피를 털어내면서 품위 있게 걸었다.
목걸이의 마법에 지켜지고 있는 건 어린 엘프 소녀였다. 그 귀는 자신의 열기에 달궈진 듯 빨갰다. 히끅거리면서 떨리는 어깨는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겠지.
남색의 불을 뒤집어 쓰면서 소녀에게로 나아갔다. 숲을 불사르는 불꽃은 무례를 조심하는 요정처럼 ‘나’의 옷자락에 닿는 족족 꺼져갔다.
「아이야. 괜찮으냐?」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화들짝! 엘프 소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나’는 연민을 느끼면서 지팡이를 휘저었다. 숲의 공간을 재배치하자 풍경이 뒤바뀌었다. ‘나’는 아이의 앞으로 전이한 것이다.
「……흐윽?!」
경악한 아이가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공포에 젖은 눈이 이쪽의 얼굴을── 아니, 귀 모양을 확인했다.
아이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흐려졌다. 동족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친 곳은…… 없는가 보구나. 이름이 어떻게 되지?」
「……예르나. 예르나 리오스알프에요.」
아이는 의심하지 않고 이름을 밝혔다. 무구한 눈동자였다. ‘나’를 동족이라고 믿고 조금도 의심하지 못하는 듯 했다.
「도와주세요. 엄마가, 저희 엄마가 괴물한테 잡혀가서…….」
울먹이는 아이는 어미를 찾으면서 ‘나’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미안하다. 내가 오는 게 너무 늦어버렸구나.」
‘나’는 통탄하면서 그 아이를 안아주었다. 소녀의 어미는 오는 길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 하이 엘프의 혈통도 그 힘을 개화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내’가 세계수의 정상에 쳐박혀 있는 동안, 신족의 혈맥도 옅어져버리고 말았으니까.
지팡이를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다시금 수천 년도 전의 자신에게 격노를 품었다.
이것이었나? 정녕 이런 세계가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었나?
이래서야 천상에서 내보낸 아이들과 추접한 짐승들을 뒤얶어서 진창에 풀어놓은 지옥도가 아닌가.
운명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 아이들의 손으로 미래를 개척해?
머리만 남은 멍청한 자식. 차라리 해신(海神) 놈에게 목이 잘려나갔을 때 그대로 나가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의매(義妹)에게 그딴 어리석은 조언이나 던져주지 않았을 것이다.
분노의 신이라면서 자신보다 현명했던 애시르 신족의 주신이라면 이따위 지옥와는 비교도 안 되는 괜찮은 세상을 만들었겠지.
이어붙인 목이 가렵다. 부족하다. 수천 년을 방치한 상처는 곪아버려서 벗의 육체를 기워 붙인지 100년이 지나도 붙을 것 같지가 않았다.
부족하다. 좀 더 많은 힘을 되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짐승’의 피가── 보다 많은 공양이 필요하다.
그 피를 바쳐줄 신도까지도 말이다.
「예르나야. 나와 함께 오려무나.」
‘나’는 품에 안은 아이의 남색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한다면 너에게 네 고향을 불태운 자에게 복수할 힘을 주마. 이 참상을 일으킨 짐승과 그 짐승을 부리는 가짜들에게 천벌을 내릴 힘을.」
우라누스는 틀렸다. 오딘은 실수했다.
이 땅에는 이제 물푸레나무도, 느릅나무도 필요하지 않다.
혼돈의 총아 따위는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정해진 운명대로 흐르는 올바른 세상을 되찾고야 말리라.
──미드가르드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족을 멸한다.
그것이 풀을 꽂은 진흙 따위에 지혜와 기지를 부여해버린 어리석은 신의 책무일 것이었다.
「……당신은.」
아이는 부어오른 눈을 닦으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헤니르.」
하이 엘프(Ljósálfr)의 혈통을 잇는 아이의 질문에, '나'는 만 년도 전부터 불리우던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총혜신, 헤니르=빌리(Hœnir=Vili).」
‘그’가 이름을 밝혔을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역대급으로 더러운 기분으로 기상하는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건 마나가 오링나서였다. 하지만 내가 기분을 잡친 건 예전에 야수회귀를 처음 썼을 때처럼 마나가 오링나서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이고 시발. 좆부랄 련놈들이 지들끼리는 존나 아련하네.”
혀를 내두르는 나. 꿈의 몰입도 때문에 여운이 남은 것이다.
그 왜 있잖은가. 냉정하게 보면 좆도 몰입할 가치가 없는 꿈인데도 깨어나면 왠지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아련한 그거.
지금 내가 딱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2배로 좆 같은 거에요.’
등장인물 라인업이나 대갈통 상태가 개씹창이었는데도 존나 눈물나는 영화를 한 편 본 기분이다.
물론 해당 영화는 아돌프 히틀러랑 그 후예인 김 히틀러가 포옹하면서 엉엉 우는 다큐멘터리 영화겠지만 말이다.
마치 토종 한국인인 내가 일제시대 순사들의 비극을 보고 몰입 ‘당한’ 듯한 좆 같은 느낌이었다.
씨부랄 탱탱부랄이다 저 연놈들이 죽인 인간이 몇 명일지를 생각해 보면 동정할 여지는 없는데 말이다.
“됐어. 역시 꿈보단 해몽이지.”
나는 뺨을 두들기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대충 예르나네 조직도 얼개가 잡혔군.’
투스타스 상회장은 뒤지기 전에 말했다. 황야 밖의 좆프를 조심하라고 말이다.
그 유언과 <편찬대대>의 존재를 합쳐서 잘 쌰바쌰바 반죽해다가 상상해 보면 전혀 증거가 없는 억측이 하나 뿅 하고 뉴런의 오븐에서 튀어나왔다.
‘──뻐킹 레이시스트 좆프 새끼들은 이세계의 인간족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고 있는 건가?’
아마 이게 맞다.
예르나가 소속한 조직의 최종 목표는 저거다.
운이 좋았다. 첫 도전으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이끌어 낸 것이니 말이다. 첫 발이 끗발이었다.
‘인류 몰살인가. 세계멸망보다는 현실적이군.’
그것만 놓고 보면 KKK-엘프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족치면 될지만 생각하면 되었을 것이다.
‘근데 시발 그 테러리즘의 뒷배가 무려 신님이라네?’
나는 얼척이 없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종교 테러집단이 위험한 것은 지나가던 고라니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로 신이 축복해주다 못해서 소매를 걷고 신도를 구하러 불에 뛰어드는 종교라니?
염병할. 존나 멋지네. 교리가 레이시즘만 아니었어도 나도 무교 때려치고 가입하고 싶을 정도다.
왜 이렇게 범죄조직 새끼들은 자기들 나와바리 안에서는 끈끈한 건지 몰겠다. 아주 반해버리겠다. 시불쟝새기들.
‘……헤니르. 헤니르라.’
나는 내가 호접몽의 대상이 되었던 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총혜신은 또 뭐야.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다.
이세계에서 손꼽히는 유명 대학에서 고고학 랩실 노예였던 내가 모른다는 건, 인간 사회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신이라는 건데.
진짜 존나 요즘따라 자주 드는 생각인데, 나는 왜 지구에 있을 때부터 북유럽 신화집 같은 걸 읽어보질 않았는지 모르겠다.
다들 이세계에 갈 때를 대비해서 평소부터 틈틈이 신화 공부를 하도록.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애1미.
‘아무튼 그 헤니르란 새끼가 보스겠지.’
설마 신보다 높은 지위가 있을 리는 없다.
뭐, 사이비 종교라면 하나님이라도 목사한테 깝쳤다간 뒤지는 게 일상이긴 하다. 그런데 교주란 새끼가 100% 트루 신족인 것이다.
그것도 베로니카처럼 신족의 후예거나 몰락한 신족인가?
아니다. 대충 읽은 정보만 놓고 봐도 염병할 신화시대에서부터 엣헴엣헴 거리면서 방귀 깨나 뀌던 오딘의 베프 새끼인 듯 했다.
그딴 새끼가 제발로 뛰는데 누가 그를 대신하겠는가.
예르나 년의 기억인데 이상한 신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도 대충 알겠다.
아마 헤니르가 예르나한테 바람을 불어넣으면서 자기 얘기를 해 줬던 게 아닐까.
‘문제는 신족 씩이나 되는 보스가 버젓이 있는 것 치고는 예르나네 집단이 별 것 없어 보인단 말이지.’
남들 모르게 숨어있는 거라면 존나 쌉오지게 잘 숨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예르나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몰라도 기본 100살은 찍을 것이다.
그런데 신을 주축으로 움직이는 집단이 그만한 시간 동안 목표를 못 이루고 있다?
애새끼였던 엘프가 다 커서 인간충 쥬거 거릴 때까지?
그건 그 헤니르라는 녀석이 희대의 존버 매니아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그리고 자본이 많으면 존버할 일이 없지.’
여기서 개인적인 진리 하나.
손해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존버하지 않는다.
쥬니어 네이버의 동물농장에서 아이템을 살 때마다 무서워 하는 건 왜인가! 열심히 모은 돈으로 장비를 사면 잔고가 텅텅 비어버리기 때문 아니던가!
‘그에 비해서 치트 오매틱으로 돈버그를 쓰는 잼민이들은 무서울 게 없지.’
잃는 게 무섭지 않다면 돈 귀한 줄도 모르고 지 좆대로 행동하게 된다. 자기 능력을 과시해대면서 말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
신족이라는 새끼가 아기 히틀러 예르나를 주워다 키워가며 존버했던 건, 버티고 버텨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게 아닐까.
─긁긁.
나는 목을 긁었다.
꿈에서 느낀 간지러움은 보통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헤니르에게도 행동의 제약이 있던 것이다.
억측이지만 그걸 극복해내려면 공양이 필요한 듯 했다.
오딘이 그렇게 싫어하던 인신공양이 말이다.
“흐으으으으음…….”
나는 예르나 년이 망령도시의 모험가들을 납치해 갔던 걸 떠올렸다.
신에게 공양을 바치고, 남은 혈육으로는 분신을 만든다?
‘거 시발 존나 알뜰살뜰한 년일세.’
내 능력이 안 됐던 게 아쉽다. 더 고통스럽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나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존나 아침부터 골치 아프구만.”
대충 정찰 가는 기분으로 나갔다가 적국 기지에서 핵폭탄 개발소를 발견해 온 듯한 기분이었다.
나더러 이걸 아내들한테 설명하라고? 와 나 씨이발. 미치고 팔짝 뛰겄네.
옆집에 대기업 프렌차이즈가 들어서서 우리 가게를 좆창내려고 한다는 얘기를 전해야 하는 동네 빵집 사장님도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에효.”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옛 말에 틀린 게 하나 없다. 선학의 지혜가 뼈에 스며드는 듯한 뻐킹 굿모닝이었다.
그때였다. 침대에서 자던 프랑이 잠꼬대를 하면서 내 손을 잡은 것은 말이다.
나는 잠깐 멍 때리다가 그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시발. 한숨 쉬고 있어봤자 어쩌겠냐.’
세상에 좆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지구나 여기나 똑같다. 사람은 자기 손으로 해결되는 범위에서 일이 잘 풀리도록 기도하거나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우리 귀여운 아내들이랑 물고 빠는 해피 라이프를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다. 나는 잠든 프랑를 안아주고 나서 침대에서 나왔다.
우선은, 그래.
우리 아내님을 위한 아침밥이나 준비하도록 하자.
거실로 가자 베로니카는 일어나서 우리집 냥이한테 밥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