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족장 본인은 검은 도료를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문양은 문신이니까 매번 바꾸지는 않겠지. 아까 나한테 칼질을 했던 여자처럼 문양을 그린다면 매일 새로 칠하겠지만.
“마을에 숯가루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장인은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도 몰랐을 수도 있죠. 문양을 그리는데 숯가루를 사용하고 나서부터, 뭔가 짐작가는 변화는 없었나요?”
“……젊은 아이들의 치기라고 생각했어요.”
족장도 충분히 젊어 보이는데, 말하는 걸 보면 나이가 꽤 되는 모양이다.
나는 신경 안 쓰기로 했다. 안티에이징을 개빡세게 했든가 하겠지. 마을 부하들을 부려서 달팽이 크림이라도 빻았나.
“마을 사람들에게는…… 제가 전하죠. 외부와 교류하자마자 불상사의 연속이군요. 제 다음 족장대에서는 다시 교류가 뚝 끊어지겠어요.”
족장은 참담한 기색이었지만 눈을 내리깔아도 표정에 표가 안 나서 알아보기 어려웠다. 사람 눈이라는 게 인상에 존나 큰 영향을 끼치긴 하는군.
“외지인인 저희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힘내시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우울해 하는 족장을 위로했다.
자기 판단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으니까 좌절할 만 했다. 그것도 족장이 이끄는 사람은 한두 명도 아니잖은가.
나도 우리 가족이 나 때문에 이상한 걸 먹게 되었다면 분명 저럴 것이었다.
우리 아내들이 아들딸을 1명씩 낳아서 나, 아내들, 아들딸들로 11명의 대가족을 차렸는데, 그들 전부가 내 착각이나 실수 때문에 중국산 알몸 김치와 파리 고춧가루를 매일 먹었다?
생각만 해도 개빡친다. 사실 나도 아직 내 자식들 얼굴은 그다지 상상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기왕이면 나는 안 닮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스텔라 씨는 괜찮으십니까?”
“뭐다?”
대답 쌈박하네. 나는 내 손목을 두들겼다.
“문신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숯가루를 피부에 새기신 것 아닙니까? 문신을 지우는 방법이라도 있나요?”
“너, 에린의 문화 빠삭하다. 하지만 이상 없음! 마나 문신, 마나 써서 지운다!! 흐읍!!”
─퍼엉! 스텔라는 앉은 자세에서 마나를 뿜어서 옷을 터트렸다.
얇은 미시 드레스가 터진 풍선처럼 펄럭이며 쏟아졌다. 난 이제 이 사람이 얘기하다가 갑자기 바퀴벌레를 집어먹어도 놀라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문신을 뱀처럼 조종해서 염료로 뭉쳐서는 초록색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에 던졌다.
“소각!!”
“소각 같은 소리 마십시오!!”
족장은 보디태클로 염료를 걷어내고서 성을 냈다.
“위험한 염료라지 않습니까!! 제 집에 독가스라도 차오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독가스? 브리타니아 말 어렵다.”
[독가스요!!]
[독가스! 위험하군!]
혹시 염료 이전에 머리에 병이 있는 게 아닐까. 보고 있는 우리야 재미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평소부터 시달리면 홧병 생기겠다.
그래도 족장이 기운을 차린 모양이라서 다행이다.
마이페이스인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기운을 복돋아 주는 법이었다. 휘둘리는 사람의 멘탈이 버텨주는 범위에서는.
“원하신다면 저희가 치료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치료? 이거 냅두면 죽나? 아니면 안 낫나?”
“염료에 접촉하지 않으면 낫기는 할 겁니다.”
매지칼 빠빠까루도 결국은 약물이다. 몸을 헤집어놓는 게 아니고 정신, 마나에만 영향을 끼치는 약물. 뻐팅기면 낫는다.
특히 아예 염료랑 접촉을 안 하면 금방 완쾌할 것이었다.
“낫는 거면 됐다. 약은 사람을 약하게 한다.”
“약이 아니고 마법으로 치료하는 겁니다.”
“치료도 사람을 약하게 한다. 전사장은 강해야 한다.”
뭔진 모르겠는데 싫다는 걸 억지로 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아서 넘어갔다. 자기가 싫다는 사람을 잡아놓고 치료해야 하는 건 전염병 사태에나 허락되는 일이었다.
“……후우. 하여간에 이로써 대강 이야기는 끝났군요.”
족장이 한숨을 쉬었다. 스텔라의 난입 때문에 개판이 나긴 했지만 얘기는 끝난 게 맞았다.
누켈라비의 산란장─수상생물이니까 대충 맞는 표현이겠지─ 위치를 들었고, 궁금하던 야수회귀 짭 마법에 대해서도 들어볼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 잘 곳도 생겼지.’
알몸 부족이라서 밤에 화장실 갔다가 문신한 전라 아재랑 마주칠까 무섭기는 했지만 말이다. 시이발. 바바리맨 랜드 존나 무섭다.
“오늘은 밤이 늦었습니다. 가능하다면 내일 마저 이야기를 하심이 어떠실까요.”
족장의 그런 말에 우리는 가만히 따랐다.
사실 하이로메인이랑도 할 말이 많기는 했는데, 계속 흥분해서 그런지 상처가 덧나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만일을 기해서 수면 가스를 뿌렸지만 저항도 없다. 진짜 잠든 거다.
‘간이 배 밖에 나온 게 아니라면 우릴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겠군.’
역시 대학원생을 부려먹지 않는 교수이니만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착해빠진 사람인 걸까.
“쿠우우우…….”
하이로메인은 자다가 목에 칼을 찔려도 안 일어날 듯이 푹 잠들었다. 나는 교수 슬레이어로서 너무나도 큰 모순과 조우한 듯한 기분에 입안이 씁쓸했다.
착한 교수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는 선인가? 아니면 결국 악이 될 팔자이기에 악으로 봐야 하는가?
선하게 태어나는 것, 혹은 악한 본성을 위대한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 무엇이 더 훌륭한가?
이건 당분간 나를 괴롭힐 명제였다.
‘강바다의 기슭’이라고 시적으로 네밍된 얼스터 인 마을은 무척 넓었는데, 그에 비해서 집은 얼마 없었다.
염료로 쓰는 풀을 기르는 텃밭을 빼면 따로 농사도 짓는 것 같지 않았다. 땅을 호화롭게 쓰는군.
그래도 우리가 따로 잘 집은 있었다.
물론 나는 자지 않았다. 그리고 베로니카도.
【……나의 그대여. 잠들진 않았겠지?】
【카페인으로 국밥 한 그릇 말아먹은 것처럼 쌩쌩해.】
우리는 조용하게 천막을 빠져나와서 밖으로 나갔다.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면 경계받을 게 뻔하기 때문에 필요 최소한의 인원인 나랑 베로니카만이 나온 것이었다.
어디로 가냐고?
말하면 입만 아프지. 우리의 목적지는 마차였다.
마을에는 마굿간이 없었기에 마차에 천막을 쳤다. 말들은 거기에서 잠을 자는 중이었다.
아니, 말이 좀 잘못됐다. 1마리는 깨 있었다.
마치 우리가 자길 찾아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왔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뿔이 꺾인 유니콘이 ᚨ(Ansuz)의 룬으로 말했다.
나도 옛날에 꿈에서 베로니카한테 사용했던 일방통행 텔레파시다.
‘아니, 목소리로 보면 년인가?’
유니콘은 여자였다. 이름이 앨리스랬나.
원래 이름은 따로 있겠지만 하이로메인에게 지 이름을 알려주진 못했을 것이다. 저주 때문에 룬을 써도 말이 안 통했을 게 뻔했으니까.
【ᚴ(Kaunan)의 룬을 쓰겠다. 저항하지 마라.】
【……그러시는 게 대화하기 편하시다면, 얼마든지요.】
앨리스는 내가 지들 말을 하자 놀란 듯 했지만 금방 냉정을 되찾고서 대답했다.
베로니카가 룬을 뽑아내서 우리 심념을 연결했다.
이제 우리 셋이서만 조용한 대화가 가능했다. 이 오밤중에 말이랑 히힝거렸다가는 미신을 믿는 얼스터 인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이었다.
【그대여. 먼 핏줄, 과거의 벗이여. 오늘은 그대의 정체와 과거에 대해서 듣고자 왔느니라.】
【잘 됐네요. 저도 궁금한 게 산적(山積)한 참이었어요.】
베로니카의 말에 앨리스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말 모드의 크기를 보면 베로니카보다는 훨씬 연상이겠지.
【그런데 제 정체라뇨? 제 꼴을 보시고, 저희 말을 쓰실 수 있으신 분께서 제 정체를 상상하지 못하진 않으실 텐데요.】
그러나 우리 어머니 가로되, 스무 살을 넘은 여자들끼리는 나이가 젊은 게 갑이라 하셨다. 앨리스는 베로니카에 비해서 태도에 여유가 없었다.
으윽. 말투에서 느껴지는 노처녀 히스테리 냄시.
【종족이야 알지. 유니콘. 슬레이프니르의 후손 아냐?】
【아시네요 뭘. 자존심도 명예도 땅에 떨어진 유니콘. 유희신님과 신마님의 말예를 자처하지도 못할 한심한 자칭 신족. 제 자기소개가 더 필요한가요? 이름은 앨리스면 됐어요.】
그녀는 냉소적인 어투로 말했다.
나랑 베로니카는 가만히 아이 컨택을 나누었다. 우리한테 빡친 게 아니라면 앨리스는 자신의 처지에 상당히 자괴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말투에서 짜증만 좀 덜어내면 말이 통할 것 같군. 동포 앨리스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협박으로 안 들렸으면 좋겠는데, 나는 난생 처음 본 유니콘이 나한테 흑마법을 쏴제끼던 새끼라서 너희 종족에 유감과 편견이 많아.】
우리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중얼거리면서 팔찌를 만졌다.
앨리스는 이게 창으로 변해서 자기를 죽이려던 누켈라비를 인육이 혼합된 말고기로 만들던 걸 5D로 보았다. 그녀는 냅다 자세를 똑바로 했다.
【죄송해요. 놀리시는 것처럼 들렸어요.】
【유니콘이랑 바이콘이랑 사이가 안 좋나? 바이콘을 아내로 둔 내가 초면인 너한테 시비 털어서 얻을 게 뭐 있다고.】
【정말로 신족과 맺어지신 건가요? 아니, 그보다 어떻게 저 바이콘님은 신족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죠?】
【……질문은 하나씩 주고 받지. 불만 없길 바란다.】
【좋아요. 먼저 물어보세요.】
나는 벌써부터 실망감이 몰려왔다.
이 유니콘한테 저주의 해주법을 바라진 않았다. 단지 뿔이 꺾인 유니콘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그 흑마법사 새끼의 얘기라면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말하는 걸 보면 꽝이겠군.’
베로니카의 뿔을 존나 초롱초롱하게 꼬라보는 걸 보면 흑마법사 새끼가 지껄이던 ‘위대하신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기분으로 말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법은 모르는가 보군. 내가 본 유니콘은 뿔은 꺾였지만 인간의 모습이었어. 흑마법을 쓰는 뿔 꺾인 유니콘, 누군지 몰라?】
【……질문에 대답 못 하면 저도 질문 못 하나요?】
【자꾸 간 보면서 수작을 부리면 콱 족쳐놓고 니 혼에다가 물어본다. 니가 수입산 말고기가 돼도 하이로메인한테는 누켈라비의 저주라도 받았겠지~ 하고 퉁쳐버리는 수가 있어.】
【가, 간 안 봤어요! 모를 뿐이에요!】
내가 매섭게 쏘아붙이자 앨리스는 쫀 것처럼 소리쳤다.
베로니카가 내 옷깃을 당겼다. 선입견 때문에 의심이 앞선 나는 덕분에 좀 냉정해졌다.
아직 사악한 짓을 벌인 것도 아닌 앨리스를 줘패가면서 취조하면 나도 내가 욕하던 개새끼들이랑 똑같아질 것이었다.
【……미안했다. 방금 건 내가 지나쳤어. 아는대로라도 좋으니까 질문에 대답해 주면 고맙겠다.】
【그, 그…… 흑마법을 쓰는 유니콘이라는 게 솔직히 별로 신빙성 없는 단어끼리의 조합인 건 아시죠? 저희는 어둠과 음의 마나 같은 걸 쓰면 몸이 못 버텨요.】
【그 새끼는 죽인 인간의 영혼을 동력로로 흑마법을 썼어. 이름만이라도 몰라? 그러니까, 그…….】
【아비두스. 아비두스-누비라고 하더군.】
베로니카가 서포트를 넣어주었다.
슬쩍 쳐다보자 웃음을 짓는 우리 시종님. 내가 이름을 잘 까먹는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이거 약간 부끄럽군.
【──아비두스요?】
그런데 앨리스의 반응이 급변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듯 떠들었다.
【걔, 걔가 살아 있어요? 아니, 그것보다 그 개자식이 인간님한테까지 해를 끼쳤다고요?】
【아는 사이야?】
월척까지는 아니어도 30cm급 농어 정도는 되려나? 기대가 드러나는 내 말에 앨리스는 인상을 쓰면서 대답했다. 옛날 일을 반추하는 듯 말이 느렸다.
【그러니까 그게 분명, 지금으로부터 143년 쯤 전……】
【서론 빼고, 오프닝 날리고, 잡설이랑 사족 다 뗀 다음에 본론만 말해줄래. 그래야 내 대답도 더 성실해 질 듯.】
【그 개자식은 저랑 같은 성지의 유니콘이었어요.】
다행히 앨리스는 3줄 요약이 가능한 유니콘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급진파 중에서도 희대의 미치광이였죠. 유니콘과 바이콘, 그리고 신들을 뺀 모든 종족을 지상에서 쓸어버리면 원래의 모습을 영유할 수 있다고 떠들었었요.】
그건 시발 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인데.
‘……헤니르의 목표랑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군.’
역시 미친 놈끼리는 사상이 통하는 면이 존재하는 걸까.
예르나 년이랑 왜 친한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두 씹년씹놈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최종 목표가 인류의 멸망이냐, 이종족의 멸망이냐의 차이다.
아비두스의 목표를 실행하려면 엘프인 예르나 년도 뒤져야 했다. 유니콘과 바이콘의 저주는 엘프나 드워프 앞에서도 적용이 되니 말이다.
되도록이면 지들끼리 먼저 서로 죽일 것이지.
【그 새끼도 보니까 뿔이 꺾여 있더라? 나는 흑마법의 부작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너도 그렇군. 뭐 공통점이라도 있는 거냐?】
【……그, 제가 질문할 차례 아니에요?】
【질문에 전부 대답하면 네 저주도 어느 정도 해소해주마. 너네 주인님이 원래 모습이 된 너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만──】
【뭐든지 물어보세요!!!】
처음부터 이럴 걸. 거의 광신도처럼 즉답하는 앨리스였다. 내가 무슨 사이비 교주가 된 기분이다.
말대가리 해방교. 특정 세력한테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종교다. 나는 픽 웃으면서 물었다.
【네가 뿔이 꺾인 이유를 말해.】
【유니콘은 성지를 나오려면 뿔을 꺾어야 해요.】
유니콘 앨리스는 대답했다.
【바이콘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희한테 성지를 나온다는 건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거든요. 아예 일족이랑 연을 끊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하는 일이죠.】
그리 말하고 입을 다무는 앨리스. 얘기가 끝난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시시한 대답이었기에 나는 무심코 인상을 썼다.
【그게 전부야? 그냥 니들은 허가증처럼 무 부러트리듯 뚝 분지르고 나오는 거라고?】
【네. 딱 잘라 말하면 그렇게 되네요!】
그야 이 푼수떼기 같은 유니콘이랑 그 미치광이 흑마법사 새끼랑 접점이 있을 거라고는 기대 안 했다.
그래도 뭔가 더, 그 흑마법사 집단 <임모르탈리스>을 찾아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랐는데. 나는 한숨을 참으면서 질문했다.
【……아비두스는 언제 성지를 나온 건데? 그 새끼가 처음 간 나라가 어디인지 혹시 모르냐?】
【네? 아뇨? 그 자식은 성지가 무너질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