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3화 (293/1,009)

【……무너져? 성지가?】

베로니카는 깜짝 놀라서 앞으로 나왔다. 저도 모르게 발이 움직인 듯 했다. 질문한 나도 약간 당황했다.

아비두스 새끼가 처음 간 곳이 <임모르탈리스>의 행동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물었던 건데, 이 년은 왜 그런 대형사고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이지.

난민 생활이 오래 돼서 뇌에 당근이라도 박은 것인가?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지? 선지자님의 결계가 그리 쉽게 부숴질 리 없거늘…….】

【선지자는 또 누구에요?】

나랑 베로니카는 앨리스의 대갈텅텅한 질문에 합죽이가 돼 버렸다.

이 말대가리 새끼, 뇌 한 번 오지게 청순하네. 머리 쪼개서 들여다보면 뇌 대신 호두과자가 들어 있을 것 같다.

‘얘, 대가리가 모자라갖고 성지에서 쫓겨난 거 아냐?’

하다하다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인간인 나도 이런데 바이콘인 베로니카는 어떻겠는가.

선지자의 후예, 예지자 베로니카는 서른살에 직장도 없이 락 밴드를 한다는 놈이 비틀즈가 누군지도 모르는 걸 본 사람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우리 시종님 파이팅.

【모, 모른다고? 선지자님을 모른다는 말이냐? 아스토리아 마기도라! 정녕 모르느냐?】

【어…… 아, 아르토리아? 네! 들어 봤어요!】

【아르토리아는 또 누구야, 빡대구리 말대구리년아.】

영국의 유명한 교수 중에 그런 이름이 있던 듯도 같았다. 내 말에 앨리스는 빼액 거리면서 항의했다.

【아니, 알거든요! 그, 그! 그 사람이잖아요! 구세주 예언을 남긴 사람! 신마의 후예에게 구원이 오리라고 했다는 그 분 맞죠?!】

이번에는 나랑 베로니카가 말을 잃었다.

맞네, 시발. 저것도 알려줘야 했지. 우리가 입을 다문 것도 눈치 못 챈 앨리스는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선지자라는 이름은 못 들어봤지만, 아스톨… 아세톤…… 세, 세피아톤? 아무튼 그런 이름은 저라도 안다구요! 저희 고향에는 그 분의 말씀을 남긴 석비도 있었어요!】

선지자의 말을 석비로 남겼다고?

‘분명 선지자는 생전에 자신의 말을 구전으로만 전하라고 했을 텐데?’

유니콘들에게는 선지자의 뜻이 제대로 전해지 않은 걸까.

나는 뭔가 뒤통수를 간질이는 듯한 감각에 나불거리는 앨리스의 말도 무시하고 인상을 썼다.

‘시발?’

정보와 추측이 연결된다. 근거 없는 망상이었던 내 생각과 추리가 진주알을 꿰듯 하나로 이어졌다.

【제가 좀 공부를 싫어해서 그렇지, 고향에서도 다들 저더러 머리는 좋다 그랬거든요?! 걔네가 아직까지 살아있는지는 몰라도──】

【야.】

나는 영양가 없는 항의를 끊었다.

불만이 있는 듯 하던 앨리스는 내 표정을 보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가 씹정색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유니콘의 성지는 한 곳만 있는 건 아니지? 그치?】

【네? 아, 뭐, 그렇죠? 못해도 10개 쯤은 있었을 걸요. 전 제 고향밖에 모르지만요.】

【그것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멸망한 거야? 모든 성지가 다 자기들의 지식을 기록으로 남겼고?】

【어, 아마도요? 저는 잔느── 그러니까, 하이로메인이랑 다니기도 바빠서 다른 성지가 망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고향에 있을 적에, 석비 정도는 다 설치했다고 들었어요.】

【……뭐에 멸망했는지는 혹시 모르냐?】

나는 묻고 나서 어떤 대답이 나오든 실망하지 않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 말대가리는 대답해 줬으면 하는 질문에는 생뚱맞은 소리만 했으니까.

【그…… 뭐라고 하죠? 웨얼 바스트? 라, 라이프슬로우?】

역시나 말 주댕이로 개소리를 내뱉는 듯 하던 앨리스.

【아, 그래! 늑대인간!】

하지만 그 멍청해 보이는 소리의 끝자락에 나온 말은,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저희 성지는요, 늑대인간이라는 몬스터에게 멸망했어요!】

이세계에서 늑대인간은 멸종위기종이다.

사실 이미 멸종했을지도 모른다. 늑대인간이라는 개념이야 있지만 목격정보가 끊긴지 존나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생포하면 경매장에서 돈 좀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전설의 레전드급 레어 몬스터를 운 좋게 족쳐본 경험이 있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운 나쁘게인가? 아무튼 티르시랑 싸워서 1마리의 늑대인간을 족친 건 팩트다.

그리고 보물 고블린이 레어템을 뱉는 것처럼, 내가 조진 늑대인간도 무척 큰 레이드 보상을 주고 갔다.

상태창도 없는 밸런스 개좆망 매지컬랜드에서 유일하게 날 버닝 캐릭터로 만들어주는 현상. 마나 계승을 말이다.

‘내 성장 비결의 10%가 노력이고 70%가 야수회귀 덕분이라면, 분명 나머지 20%는 룬 술사를 족치는 걸로 발생하는 마나 계승이지.’

벌레한테 쫓겨서 뒤질 뻔 하던 아딱이 노르드가 반년만에 얼스터 인이랑 3대 1로 붙어도 이길 수 있게 된 이유가 뭐겠는가.

이세계의 마나란 게임으로 따지면 MP와 INT 스탯을 합친 표척이다.

저위 마법밖에 모르는 좆밥이어도 마나만 많으면 어떻게든 마법사 구실을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사정량이 티스푼 급이어도 쥬지만 크면 아내의 만족도는 높은 것과 같은 이유다.

‘습득한 마법이 10개도 안 되는 내가 매직키드 마수리로 활동할 수 있는 근간은, 마나량의 가파른 성장세 덕분이야.’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도 그 늑대인간의 이름을 기억한다.

사람 이름을 거의 기억 못하는 내가 말이다.

내 인생에 본격적으로 게르마니아 신화의 편린을 내밀었던 늑대인간 새끼.

그 늑대인간의 이름은── 타뷸라였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커다란 의문이 해결되었는데도 베로니카는 별로 기쁘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역시 우리 주인님이다. 지혜의 신의 후계자로서의 진면목이로다. 주인님의 추리대로 선지자님은 <편찬대대>를 경계했으나, 그 심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동포들은 실수를 저질렀단 거로구나.】

존나 유니콘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우리가 입을 다물고 표정이 씹창나자 앨리스는 눈치껏 엎드렸다.

베로니카는 앨리스가 못 듣도록 나한테만 텔레파시를 쏘았는데, 앨리스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보였지만 참는 듯 했다.

‘어쩔 수 없겠지. 구전은 와전되는 법이니까.’

군대에서 퍼진 소문이 부풀고 왜곡되는 것처럼, 유니콘들은 선지자의 말을 구전하는 중에 ‘글로 기록을 남겨선 안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잘못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선지자도 확실하게 말을 안 한 책임이 있긴 하니까.

아무튼 그래서 유니콘들은 성지에 석비를 남기거나 기록을 유출하거나 해서…… <편찬대대>에게 발각당했다.

그 다음은? 호스(Horse)-홀로코스트다.

유니콘들의 성지에서 대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친절하게 서치 앤 디스트로이.

【늑대인간. 늑대인간이라. 하. 그렇군. 그랬던 거야.】

말이 안 나오는기 탄식하는 베로니카였다.

신체 변이가 일어나는 야수회귀의 부작용.

변이마법으로 늑대인간이 된 타뷸라.

몸에 비늘이 돋아있던 투스타스 상회장.

그들이 가진 구신의 마나.

이것들 모두가 하나의 답에 대한 힌트였던 것이다.

【<편찬대대>는 타뷸라처럼 짐승으로 변해버린 늑대인간을 풀어서 유니콘의 성지를 박살낸 거야. 결계가 사라지고 흔적이 세간에 드러나도, 범행을 들키지 않으려고.】

우리가 염료 사건의 전말을 알아챘던 때랑 같다.

무고한 야생의 엄마곰을 약쟁이로 만들어서 염료의 자생지를 망치던 새끼들 있잖은가.

그 놈들처럼, 그리고 이번 누켈라비 사건처럼, <편찬대대>는 스케일이 큰 말소정책에서는 변이마법으로 짐승이 된 실험체들을 풀어놓은 것이다.

인간이 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사건 현장을 만들고자.

‘앨리스의 말을 들으면 전부 늑대인간은 아니라지만, 그건 뭐 중요하지 않으니까.’

투스타스 상회장도 늑대털이 아니라 비늘이었다.

사람마다 변이 끝에 어떤 동물이 되는지는 개인차가 있는 거겠지.

나야 변이의 원리가 다를 테니까 쥬지만 커지고 끝나긴 했는데, 쎄지려다가 이세계판 미녀와 야수(미녀 없음)의 피해자가 된 새끼들은 억울하긴 하겠다.

꼬우신가요? 그럼 지구인 하던가, 작은 고추들아.

【인간들에게 동족을 몰살당했다 이건가. 살아남은 아비두스가 인간 혐오꾼이 될 만 하네.】

【그렇군. 안 그래도 이종족 말살론자였다고 하니, <편찬대대>의 존재를 알았다면 인간족부터 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멸망한 성지에서 도망친 아비두스는 진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타락해서 유니콘 흑마법사가 된 게 아닐까.

뿔이야 뭐 흑마법 수련 중에 살살 녹은 거겠지.

【그 새끼, 나랑 만났을 때는 이미 본모습이었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고, 그걸 알려주거나 시행해 준 놈을 ‘예언의 계도자’라고 착각했다면……】

<임모르탈리스>에 충성을 바치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을 실험재료로 아는 흑마법사 단체 아닌가. 자기 맘에 쏙 드는 집단에서 인정받고, 구원받으면 지화자 좋다 하고 코가 꿰이겠지.

그야말로 KKK단에게 구제받은 네오나치다.

오히려 앨리스가 이렇게 태평한 게 이해가 안 갈 정도다.

얘는 왤케 낙천적인 거야 대체. 사정을 몰라서 그런가.

사정이 비슷한 어떤 교수년도 하는 짓은── 잠깐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스쳐지나간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기다려 봐? 엘프, 엘프는? 그 새끼들도 수명은 길잖아? 걔네들은 뭐 기록 같은 거 안 남겨?】

【엘프요? 남기는 게 당연하죠. 멸망한 엘프 왕국의 유물, 못 들어 보셨어요? 고고학 박사의 말인 저도 아는데, 고고학 박사님의 남편 분이시면서 왜 모르세요?】

모르긴 시발, 나도 석사야 썅것아.

나는 무심코 전체 채팅으로 날린 텔레파시에 앨리스가 꼽을 주자 빡칠 뻔 했다. 그런데 앨리스는 악의가 있는 게 아닌지 눈만 깜빡거렸다.

꼽을 준 놈한테 나쁜 맘이 없었다고 듣는 사람이 좆 같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일단 참았다.

나랍시고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다. 이 반전의 연속인 이세계에서 내 상식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아무튼 씹, 엘프들도 기록 남기잖아. 그치?】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 여자도 짐승에게 습격당해서 부모를 잃고, 숲에서 쫓겨났댔지?】

【맞아. 바로 그거야.】

이거다.

자기가 하이 엘프의 혈통이라던 예르나는 애새끼일 적에 뭔 짐승에게 습격당했다. 활활 타는 숲에서 엄마를 여의고 헤니르에게 주워졌단 얘기다.

애기 히틀러 예르나비치를 낳은 하이엘프 마망.

그녀를 죽이고 예르나를 엿 멕인 ‘짐승’을 보면서 헤니르는 어째서인지 인간족을 향한 분노를 터트렸었다.

그건 어째서인가.

【──엘프의 숲을 습격한 ‘짐승’과, 유니콘의 성지를 작살낸 짐승. 그 새끼들은 같은 종류일 거야.】

아마 틀림 없을 것이었다.

시발 이게 또 다른 범죄조직이면 이세계는 진짜 멸망하는 게 맞다.

대체 음지에 암약하는 범죄자가 몇 명이길래 마주친 곳마다 단체가 다 다르겠는가!

나라마다 삼합회 야쿠자 마피아로 나뉘면 됐지, 뭐 거기서 K-빌런지정단체 딸기미역파라도 나오게? 넷이서 사우나도 가고, 밥도 먹고, 으이?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거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또 어떤 추리가 생겨난다.

【그래. 생각해 보면 엔리르는 너무 병신이었어.】

그 놈은 사고관이나 지능이 애새끼보다 나을 게 없었다.

나이가 젊어서 어수룩했다는 건 핑계 치곤 우습다. 왜냐고? 엔리르 새끼보다 어린 라리루라도 그 병신보다는 똘똘하고 착하고 신중하거든.

【나랑 만났을 때, 타뷸라는 제물을 모으고 있었지.】

그 제물은 외팔이 청년과 어린애 셋이었다.

외팔이 청년은 서커스단에서 장애인 서커스를 위해서 납치당했던 인물이었다.

타뷸라가 노리던 건 어린 아이들 쪽이다.

납치범들은 그걸 모르고 전원 살려뒀던 것이고 말이다.

─어린 아이를 제물이라면서 데려가는 늑대인간.

─나를 <인신>으로 의심하다가 ‘나이가 많다’면서 아니라고 생각하던 하이 좆프.

이걸 조합하면 답이 나온다.

【<편찬대대>는 어린 아이들을 모아서, <인신>의 적성이 있는 ‘실험대’를 찾은 게 분명해.】

그래서 예르나 년은 ‘실험기’ 같은 소리를 한 게 아닐까?

1. ‘제물’이 될 아이들을 모은다.

2. 적성을 확인하고 선별한다.

3. 입맛에 맞게 교육하고 세뇌한다.

4. 신좌를 계승할 재목으로 기른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인신>이다.

엔리르는 그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럼 설명이 돼. 그래 시발, 그딴 멍청한 새끼한테 과한 힘을 준 게 이상하다 했지.】

드론이나 RC카만 줘도 갖고 놀고 싶은 게 남자다.

그런데 사람 조지는 걸 길냥이 밥 주는 것처럼 죄책감 없이 저지를 새끼한테 미사일 발사장치를 준다?

사고를 안 칠 거라고 생각하는 놈이 병신이다.

그런데도 반드시 줘야만 했던 이유.

【반대였어. 토르의 신좌를 이을 만한 적성을 가진 새끼가 하필이면 그런 병신 빡대가리였던 거라고.】

중국산 묠니르를 가지고 날뛰다가 내 도발에 걸려서, 내가 궁극기를 켤 시간을 내주고 뒤져버린 병신.

그런 병신조차 <인신>의 말석이었던 이유 말이다.

【……그대여. 이쯤 되면 어째서 헤니르가 인간을 멸하려고 하는지도 상상이 가지 않느냐?】

【어. 아마 맞겠지.】

헤니르는 라그나로크 이후에 살아남은 신이다.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몰라도 운 좋게 뒤지지 않고 인간들 하는 짓을 관찰하고 있었던 건 확실했다.

꿈에서 본 그 놈은 인간에게 실망하고 있었으니까.

‘실망. 실망이다. 실망하려면 우선 기대를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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