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하니까 실망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
헤니르는 뭐에 기대했지?
이세계의 인간족에게 무엇을 기대하다가 실망했길래, 심즈나 문명에서 게임을 리셋하는 것처럼 이세계 인류보완계획을 펼치기 시작한 거지?
나는 이 답을 이미 들은 뒤였다.
그 시대의 인물이 남긴 지식으로 들었으니까.
【……혼돈의 총아.】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는 인간족만의 힘.
오딘은 그것을 믿고 죽었다.
라그나로크 이후의 세계에는 운명에 지배당하지 않는 세상이 오리라고 믿고, 안배를 남겨둔 채로 꾀꼬닥 해 버렸다.
하지만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헤니르는 본 것이다.
바이콘도, 유니콘도, 엘프도, 드워프도 죽이고.
세상을 지배하거나 지들끼리 싸우다가 멸망해 버리는, 인간족의 이기심을 말이다.
삶의 깨달음이나 해답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유레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물론 내가 알게 된 내용을 유레카! 따위의 기쁜 감탄사로 표현하는 건 좀 그랬지만 말이다.
【저기요……? 더 하실 질문 없으세요?】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자─정확하게는 우리끼리만 심념을 주고받은 거지만─, 앨리스는 망설이며 물었다.
【……질문은 끝났어. 대답해 줘서 고맙다.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야.】
기쁘지는 않아도 적의 행동방침이 어떤지 각이 잡혔으니까 말이다. 내 말에 앨리스는 더욱 눈치를 보다가 질문했다.
【그, 그러면 약속하셨던 그……】
【해주? 좋아. 해 줄게.】
“헹힝!! (야호!!)”
워매 시발, 깜짝아.
얼마나 기뻤는지 말 울음소리를 내는 앨리스였다.
베로니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기분이 이해도 가고, 사실대로 말해줄 생각을 하면 골치도 아프고 그렇겠지. 나는 그 기분을 상상하면서 손을 풀었다.
【그치만 너 괜찮냐? 신족 모드로 돌아가면 말 형태로는 못 변하는데. 룬 마법으로 변신 돼?】
【변신은 못 하지만 상관없어요! 말이야 사면 되니까!】
포부 봐라. 혹시 얘도 베로니카처럼 부자인가?
나는 궁금증이 머리를 내밀었지만 대충 신경 꺼 버렸다. 하이로메인이 자가용 따릉이를 모에화해 놨다고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지만, 그거야 이 처녀충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해주해도 처녀 알레르기── 니 경우는 비처녀 알레르기인가? 아무튼 그건 안 낫는다.】
【잔느는 처녀니까 괜찮답니다!!】
그건 딱히 알고 싶지 않았어.
중년 여교수의 성생활을 노골적으로 들으니까 기부니가 좀 이상하구만. 내 반응을 뭘로 착각했는지 앨리스는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소리쳤다.
【제가 인간 주인을 찾아서 밥 얻어먹고 사는 것도 어연 200년은 됐는데요! 40살이 넘도록 결혼도 안 하고 남친도 안 사귀는 처녀는 처음이라니까요!! 완벽한 주인님이에요!!】
【아줌마…… 왜 그런 걸 좋아하세요.】
【좋을 수밖에 없죠!! 보통 주인님은 나이가 좀 차면 전부 순결한 몸이 아니게 된다구요! 눈물을 머금고 헤어지기만 몇 번째인데, 잔느는 40살이 넘어도──】
【그 정도면 교수가 아니고 수녀이신 거 같아요.】
웨 나한테 교수녀 하이로메인의 챠밍 포인트를 알려주려 하는 것이지? 주인님의 치부를 더 이상 밝히지 말아 주길 바랄 따음이다.
나이 먹고도 모솔이라는 건 느그들 입장에서나 자랑거리란다. 하여튼 처녀충들은 항상 지 기준으로만 생각해서 문제여.
근데 존나 우리 눈나한테도 들려주고 싶은 얘기이긴 했다.
인생을 갈아서 연구하는 사람은 결혼도 못한단 얘기니까.
‘늘 나한테 감사하십시오, 전직 노처녀.’
느그 아다 박살내 준 자지님께 매일 충성충성 하도록.
【그래서 해주는 어떻게 하나요?!】
【음…… 긁어서 저주 해제?】
【네?】
나는 손가락을 풀고 기지개를 폈다.
아마 유니콘한테도 효과가 있긴 하겠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그야말로 해주 당첨 복권이다.
‘뭐, 베로니카랑은 다르게 얘는 아다일 테니까 해주해도 부작용은 없겠지.’
다행히 바이콘이랑 다르게 유니콘인 앨리스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줄 사람이 둘이나 있다. 나는 베로니카에게 손짓했다.
【베로니카. 도망 못 치게 눌러.】
【알겠다.】
【네? 아니, 잠깐만요?! 여러분들이 가까이 오면 제가 저주 때문에 소름이우웨에에엑──!!】
그렇게 다음날 아침.
“잔느!!”
해주의 여파로 기절해 있던 앨리스는 깨어나자마자 텐트에 아침마당 모닝콜을 시전했다. 갈색 머리의 미소녀가 된 남의 집 말딸이 기운차게 우리 임시 숙소에 덤벼든 것이다.
“잔느, 잔느!! 나야 나! 나 누군지 알겠어?!”
“네? 네……? 누, 누구시죠?”
해맑게 텐트를 젖히고 들어온 그녀는 영문을 몰라하는 하이로메인에게 접근했다. 잠에서 깨어난 프랑이랑 다나를 존나 잘 피해서 그녀에게 안기는 앨리스.
“나, 앨리스야! 네가 타고 다니던 말!!”
“……헤흐?”
앨리스의 말에 이상한 탄성을 흘리는 하이로메인이었다.
하루 아침에 타고 다니던 말이 이마의 상처 자국을 가린 여자애가 되서 나타난 것이었다. 누구라도 당황할 만 했기에 난 우리 파티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빅투아르? 그 놈이 여자 텐트에 있을 리가.
“하아아암……. 선배? 밤새 저 애 저주도 해주하셨어요?”
“몸 성하게 풀어준 걸 보니까 나쁜 새낀 아니었는가 보네?”
아침에 약한 라리루라와 다나는 하품을 했다.
섹스한 다음날만 아니면 아침에도 쌩쌩한 프랑만 일이 돌아가는 꼴을 대충 눈치깐 모양이다.
“응. 쟤한테 쓸모 있는 이야기를 꽤 들어서…… 일단 설명 좀 할게. 어디 조용한대로 가자.”
나는 일행을 데리고 숲으로 갔다. 베로니카는 이제 시키지 않아도 방음 결계를 깔았고, 우리는 나무에 기대거나 허그를 한 자세로 얘기를 나눴다.
“──해서, <편찬대대>가 벌인 짓거리가 헤니르 일당의 행동윤리를 정하게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얘기야.”
어젯밤에 나눈 얘기를 정리해서 말해줬다.
경악이나 소란은 없었다. 하도 이런 일이 많아서일까. 더는 놀랄 것도 없는지 다들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씹어삼키는 듯 했다.
“추가로 부연설명 필요해?”
“아, 뭐. 내용은 대충 알아들었어.”
다나는 소탈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이건 짚고 넘어가자. 유니콘 아비두스는 헤니르의 부하인 건가? 예르나 그 년이랑 접점이 있었잖아.”
“으음. 아마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추운지 프랑을 껴안고 있던 라리루라가 말했다.
“그게, 그 나쁜 엘프는 망령도시의 유적에서 <임모르탈리스>의 흑마법사로 보이는 누군가를 죽였었잖아요? 그러면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요.”
“아, 근가?”
다나는 납득한 것 같았고, 나도 그 말에 수긍했다.
망령도시에서 프랑의 참새 드론이 발견한 흑마법사의 시체.
그건 식물 마법을 쓰던 예르나가 죽였던 <임모르탈리스> 소속의 마법사로 추측된다. 같은 조직이거나 두 단체가 협력 관계라면 그건 좀 이상한 얘기였다.
그야 범죄자 새끼들끼리 서로 통수쳤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아비두스가 그 흑마법사 동아리에 스파이로 잠입했다는 건…… 좀 억측인가?”
“가능성은 있다만 생각해 봤자겠구나. 다른 놈들은 어쨌든 <임모르탈리스>만은 목표도 거점도 불분명하잖느냐.”
베로니카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확실히 아는 게 무엇 하나 없는 상대가 <임모르탈리스>다. 지금 생각해 봤자 정신력 낭비였다.
뭣보다 그 벌레먹이 새끼들이랑은 그다지 접점도 없다.
우리 파티의 주적일 게 확실하고, 인류 전체의 적인 다른 두 단체 쪽에 더 신경을 쓰는 게 맞다. 솔직히 우리는 <편찬대대>랑 예르나네 조직을 신경 쓰기도 바쁘니까.
‘계기가 없으면 그 흑마법사 놈들이랑은 앞으로 다시 만날 일도 없겠지.’
나는 그 계기가 생기지 않길 바랐는데, 라리루라도 같은 생각인지 화제를 되돌렸다.
“그보다, 로마니아에 가면 <인신>이나 <편찬대대> 같은 놈들이랑 맞닥뜨릴 확률이 커지지 않을까요~? 저는 갑자기 단장님이랑 서커스단 동료들이 걱정되네요…….”
“응. 티르시 씨두 어느 정도 접점이 있으니까…….”
“바깥 활동을 대놓고 하는 놈들은 아닐 거야. 그래도 만에 하나 마주칠 수 있으니까 조심은 해야겠지.”
나는 걱정을 불식시키고자 그리 말했다. 사실 나도 완전히 안심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범죄자 새끼들이 양지 바른 곳에서 깽판을 치는 일이 드문 건 맞다.
그래도 아비두스 새끼처럼 미친 척 하고 날뛰어대는 놈도 존재한다.
‘티르시 건도 있고, 시골 촌구석이라면 목격자를 몰살해서 입 막음을 하는 것도 가능해.’
그리고 여긴 정보 통신 기술이 미숙한 이세계다.
나라에서 움직이면 사건사고를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설마 그 씹쌉새끼들이 로마니아의 수뇌부랑 커넥션이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주의는 필요하다.
“……이거 전력의 확충이 필수겠는데.”
다나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인원을 늘렸다간 얘기가 새어나가니까 아웃이고, 우리 파티의 실력을 더 기르지 않으면 안 돼. 노르의 추리대로라면 엔리르보다 더한 놈도 있단 거잖아.”
“응. 단체랑 싸울 때의 철칙은 절대로 상대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거니까. 싸우게 된 이상은 확실히 해치워야 해. 자칫 적에게 우리 정보가 노출돼 버릴 거야.”
그건 사냥의 요령이었지만, 인간과의 싸움에도 적용되는 얘기였다.
<인신> 중에는 우리 파티의 탑 전력인 나보다 쎈 새끼가 여러 명 있을 것이다. 다구리를 까서 해치우면 편하겠지만 역으로 우리가 다굴을 당할 수도 있었다.
‘싸운다면 우리 신원을 들키기 않게 만나는 족족 해치워버리는 수밖에.’
그러려면 가능한 우리 파티가 그 새끼들보다 전력이 높은 게 좋다.
도망은 승리보다 쉬운 법이고, 적이 도망쳐버리면 우리의 패배니까.
─짝! 다나는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손뼉을 쳤다.
“쉽구만 뭐. 고대문명의 유적을 돌든가, 얼스터의 기술을 배우든가 하면 되겠네. 우리라고 남편놈이 훈련 뺑이칠 때 놀고 있던 건 아니잖아?”
“그려. 근데 너무 서두를 건 없다? 그 행동력 오지는 또라이들이 얌전한 걸 보면 우리 정체를 알았을 것 같진 않아.”
엘프 왕국과 유니콘의 성지를 갈아버리고 드워프 왕국에다 빠빠가루를 뿌리는 새끼들이다.
그런 놈들이 우리 정체를 알아냈다? 그야말로 결혼식을 준비하던 중에 우리 집에서 중국산 애시르 신 정모가 열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목표에 ‘전력 증강’이라는 공통 과제를 두고 텐트로 돌아왔다.
“잔느잔느잔느잔느잔느잔느잔느잔느잔느!!!”
“알았어, 믿을게!! 네가 앨리스인 건 알았으니까 제발 잠깐 떨어지자!!”
그러자 하이로메인이 앨리스에게 덮쳐지고 있더라.
─데구르르. 거칠게 흔들리는 텐트에서 아침 이슬을 맞던 민달팽이 2마리가 굴러 떨어졌다.
“……나의 그대여.”
“어. 눈치 깠으니까 조용히 하자.”
저건 아무리 봐도 우정을 느끼는 눈초리가 아니다.
아무래도 앨리스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쥬지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하긴. 어차피 유니콘이라서 저주를 완전 해주할 때까지는 아다도 못 떼니까.’
자지가 있어도 섹스를 못 하는데 굳이 남자에게 집착할 건 없다는 논리인 걸까. 존나 유니섹스하구만.
앨리스는 우리의 그런 눈빛을 눈치깐 듯 소리쳤다.
“아, 왜요! 로마니아에서는 동성애도 보통이거든요!”
“애, 앨리스! 암만 그래도 여자끼리는 보통 안 해!!”
“로마니아 인들도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더 많은데요.”
시큰둥하게 말한 라리루라였는데, 얘도 은근히 우리 아내들이랑 스킨십이 잦은 걸 보면 그렇고 그런 문화에 아예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닌 거 같다.
물론 라리루라가 동성애자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왜 있잖은가. 한국 여자들은 서양인들이 보면 레즈비언으로 착각할 만큼 스킨십을 많이 한다는 얘기도 있고.
솔직히 코리안 쥬지맨들이 여자들처럼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 봤는가?
성장의 배경이 되는 나라의 문화란 이렇게 사고관에서 드러나는 법이었다.
“근데 베로니카. 부럽지는 않냐? 너랑 다르게 쟤는 저주의 절반만 해주해도 쌩쌩 날아다니는데.”
“후후. 나도 이제는 쌩쌩 날아다닌다만?”
내 말에 팔짱을 끼면서 은근슬젖 부비부비를 하는 우리 베로니카.
하긴. 나랑 우마뾰이 실컷 하고 아다 뗐으니까, 이제 어디 수녀원에라도 쳐박히는 게 아니라면야 베로니카에게 운신의 제약은 거의 없었다.
“진짜 오늘만큼 니가 바이콘인 걸 감사할 날이 없다.”
“후후. 결국 다 그대 덕분이 아니더냐.”
“아니, 그치만 만약에 베로니카 네가 유니콘이었으면…… 어후, 끔찍해라.”
자칫하면 사랑하는 아내랑 혼전순결충 귀족들처럼 뒤로만 해야 할 뻔 했네.
물론 똥꼬가 헐도록 박으면 순결하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유니콘식 처녀 판정이 뒷구멍을 OK로 볼지 아닐지에 따라서 갈리지 않을까.
만약 그마저도 아웃이었으면 기껏 베로니카랑 결혼하고도 69자세가 한계였을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베로니카가 바이콘인 건 다행인 일이었다.
섹스가 동반되지 않는 남녀는 깊은 관계가 되어도 금방 헤어지게 된다고 하니까.
아, 사족이지만 앨리스한테도 선지자의 예언의 진실에 대해서는 아까 설명했다. 내가 저주를 풀어줬다는 말도 함구하도록 룬으로 맹약시켰고 말이다.
그런데 저 뇌지컬 청순녀는 잠깐 실망한 게 전부였다.
─어차피 예언 같은 건 별로 믿지도 않았어요! 고향은 개박살났지, 성지란 성지는 전부 망해버렸지! 어떤 유니콘이 그런 예언을 아직도 믿겠어요? 저는 눈앞의 현실에나 충실할래요!
우리 설명을 들은 앨리스가 텔레파시로 외친 말이었다.
현실이 아니고 성욕에 충실한 것 같긴 한데, 사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아비두스 새끼처럼 인간 반드시 죽인다맨이 되지 않은 것에나 감사하자.
어떤 의미로는 하이로메인의 앞길에 펼쳐질 고충이 그만큼 값진 거였다는 뜻 아닐까?
“잔느! 대도시에 도착하면 일단 마법 재료랑 화장품을 사서 피부 탄력부터 고치자! 자꾸 밤샘을 하니까 눈가에 주름이 생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