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0화 (300/1,009)

“반대 방향이다. 네 친구들이겠지.”

시발, 아직 뭐가 더 남았나? 나는 약간 불길해져서 기척에 집중해 보았다.

크게 위험할 것 같진 않다. 아마 가짜 누켈라비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다가 우리 파티원들이랑 전투가 개시된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거기로 뛰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족장이 그걸 눈치챈 것처럼 말했다.

“가세요. 도움은 못 드릴망정 방해는 할 수 없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큰일은 아니겠지만요.”

“예. 다녀오겠습니다. 보수 얘기는 갔다 와서 하죠.”

“우리 딸은 어떤가.”

“그건 좀.”

나는 단호하게 사양하고 아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내 손에 들어온 창은 다시금 녹색 마나로 코팅되었다.

그리고 그날, 플루스미러 숲에 더 이상 살아 움직이는 반인반마는 남지 않게 되었다.

누켈라비를 족치고서부터 이틀 동안, 우리는 얼스터 마을에 남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 이유는 여럿 있었다. 우선 플루스미러 마을과의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신경 쓰였다는 게 첫째고, 둘째는 우리한테 준다는 보수가 아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숲의 동물들과 대화해서 바이콘의 성지가 이 숲의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창을 어깨에 매고 손가락에 앉은 작은 새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새끼가 나름 나이도 많고 몸도 잽싸서 숲의 지리에 빠삭하다는데, 실제로 탐색에 도움이 되었다. 마을에 남아서 숲을 조사할 수 있었으니까.

프랑의 참새 골렘은 이런 곳에는 적절하지 않다.

하늘에서 정찰한다면 괜찮은데, 숲 안을 헤매려면 나무나 수풀을 피하는데 집중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그렇다. 아직 우리 프랑도 성장의 여지가 많은 것이었다.

나는 참새에게 마을에서 받아온 애벌레를 그릇 째로 내밀어다가 멕였다. 손으로 직접 만지기는 싫어서였다.

“쮸찌짹 쭈짹 째액. (그럼 다시 해 보자).”

“째액짹! (넹!)”

─파다닥!

나는 룬을 바른 참새를 날려보냈다.

저 새끼의 움직임에서 위화감을 발견하면 거기에 바이콘의 성지를 감추는 결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직진시켰던 놈이 갑자기 내 지시도 없이 O자로 우회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결계에 막힌 게 아니겠는가.

이렇듯 신수의 숲의 결계도 완벽하진 않았다. 그래서 유니콘의 성지도 들켰던 거겠지.

“뭐하세요? 바쁘신가요?”

호랑이도 말하면 온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룬의 위치를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있자 유니콘 앨리스가 나타났다.

“잠깐 뭣 좀 하고 있었어. 너는 여긴 어쩐 일이냐?”

“그 문신범벅 여자애가 불러서요.”

“……족장님 얘기지?”

“흥. 족장은 족장이에요. 머리가 꽃밭인 문신 계집애면 충분하죠.”

투덜거리는 앨리스. 하이로메인이 치료받을 때 옆에 붙어서 엉엉 울더니만, 그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저게 당연한 일일까. 작전의 근간을 잘못 짜서 하이로메인이 몸통박치기(산탄 버전)에 맞아서 골로 갈 뻔 했는데 태연하면 더 이상하겠다.

나야 뭐, 내가 원해서 목을 들이밀었고 다치지 않았으니 됐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보수 준비가 끝났다니까 시간 되면 오세요? 저는 제대로 말씀 드렸어요?”

대충 대답해두고 버드 드론에게 집중하려는데 앨리스는 내 옆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아, 아뇨 그…… 감사해서요. 제 저주를 풀어주신 것도 그렇고, 잔느를 구해주신 것도 다 당신이잖아요? 그런데 잔느가 일어나면 감사를 드릴 타이밍이 없을 것만 같아서요.”

앨리스는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말했다.

“대단하시던데요? 성지의 전사들도 그렇게까지 뛰어나지는 못했어요. 인간이라고 얕볼 게 못 되네요. 아니 그, 얕봤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흐흐. 남의 얼굴에 금칠하는 솜씨가 아직 모자라군. 너희 교수님을 상대로 연습한든지 해서 더 정진하도록.”

“이씨, 진심이거든요?”

내가 대충 흘러보내자 앨리스는 토라졌다. 삐지긴.

“장수 종족이 수련 시간 등에서 유리하긴 해도, 결국 개개인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신마저도 자기 한계를 느끼고 셀프 인신공양을 할 정도다. 이세계에서 수련에 들이는 시간과 성장치는 정비례가 아니다.

‘결국 재능충 월드라는 얘기지.’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고 말이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서 그 위로 야수회귀의 마나 코팅을 씌웠다.

─몽글.

녹색 마나 코팅이 거품처럼 솟아났다. 거기에 마법을 부여하자 마치 기름 방울에 불을 붙인 것처럼 타올랐다.

‘이 룬에 투자한 가치는 있었어.’

나는 엔리르를 족쳐서 얻은 마나 중에서 일부를 투자해서 ᛒ(Berkanan)의 룬을 강화했다.

참된 깨달음을 얻은 룬은 복합적인 쓸모가 있다. 특히 저 새처럼 나랑 멀리 떨어져도 추적이 가능한 룬이라는 점에서 이점이 컸다.

‘보통 다른 룬은 떨어지면 해제됐으니까.’

변화를 일으키는 룬이기에 거리랑 상관없이 시간에 비례한 유지력을 보인다.

그건 다시 말해서 추적 등에도 유리해진다는 뜻이다. 물론 프랑보다야 못하겠지만, 손패가 늘어서 나쁠 건 없다.

창에 야매 오러를 감을 때도 도움이 될 거고 말이다.

‘──나는 아직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실감이 들었다.

나는 불꽃 방울을 터트렸다. 이 혈통빨 재능충 이세계에서, 단명 종족인 나는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벽을 맞이해도 금방 넘어서 보여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내 아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느껴지는 룬의 마나를 감지하고 돌아섰다. 앞으로 더 강해지려면 이전보다 계획을 철저하게 세울 필요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족장님께 가자. 아직 이르겠지만 먼저 가서 기다리지 뭐.”

“네? 뭐 하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아니, 방금 끝났어.”

그릇에 먹이는 남은 건 지가 와서 알아서 먹겠지.

숲의 북서쪽에 날려보낸 룬의 마나가 어느 특정한 범위를 들어가지 못하고 맴도는 걸 확인했다. 그곳에 룬의 마나 없인 못 들어가는 결계가 깔려 있는 것이었다.

즉, 바이콘의 결계는 저 숲의 북서쪽에 있다.

‘다음은 베로니카가 공간이동 마법을 습득하면 돼.’

그렇다면 좀 더 거침없이 세계를 무대로 힘을 손에 쥐고자 움직일 수 있게 되겠지. 나는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강해지기 위한 밑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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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광기

족장은 혼자서 우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오셨군요. 앉아서 얘기하죠.”

시키는대로 앉았다. 얼스터의 전통 차─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가 나오고, 잠깐 감사 인사를 섞어서 잡담을 나눈 다음에, 그녀는 본론을 꺼냈다.

“여러분께 드릴 보수가 선정됐습니다. 여기, 저희 마을에서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마법 시약들입니다. 로마니아의 화폐도 적게나마 담았습니다.”

그녀는 밑에 사람도 부리지 않고 손수 물건을 가져왔다.

현찰은 마을의 공공재를 떼 온 건지 생각보다 묵직했다.

베로니카는 시약이라며 제공된 돌가루나 약초즙 등을 점검했다.

“정확한 용법은 모르겠다만, 마법진 등에 쓸모가 많겠군.”

표정을 보면 우리 시종님은 만족한 모양.

잘 된 일이다. 공간이동은 마나 소모가 빡센 만큼 시약과 자연의 마나 등으로 채워넣어야 하니까. 포탈처럼 마법진을 설치하면 가성비가 유리해질 것이었다.

“흐응. 보수가 좀 짜지 않아?”

그런데 대놓고 꼽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사람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그녀는 신족이다.

당연히 뿔 2개 달린 야하고 귀여운 우리 여신님은 아니고, 자뭇 당당한 레즈비언 유니콘 얘기다.

“그만한 괴물을 물리쳤잖아? 그것도 당신 실수 덕분에 중간중간에 죽을 뻔 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걸 약초랑 돌 부스러기 조금에 동전 몇 푼으로 땡치겠다고?”

일견 매서운 말투였지만 팩트는 팩트다.

‘좀 조촐한 보수이긴 해.’

나는 오러의 사용법과 짐승 빙의를 배웠고, 다른 파티원도 보통은 알려주지 않을 주술을 조금 배우긴 했다.

하지만 사전에 그 보수를 줄 테니까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들었다면 우리도 난색을 표했을 것이다. 그냥 따져봤자 이런 시골 마을에서 뭐가 더 나올까 하는 마음에 닥치고 있었을 뿐.

“네. 덕분에 마을 사람들도 많이 미안해 하더군요. 내줄 수 있는 게 얼마 없어서요. 저도 그들의 마음에 공감합니다.”

그런 앨리스의 말에 족장은 당당하게 손가락을 세웠다.

“그래서, 제 독단으로 마을의 보물고를 열려고 합니다.”

“……보물고?”

앨리스가 미심쩍게 말하자 족장은 웃으면서 시약을 한 움큼 쥐었다. 그리고 그걸 초록색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에 던졌다.

무슨 작용이 일어났는지 딱 봐도 마법적인 불꽃은 열기를 더했고, 굴뚝을 타고 불이 치솟자 그 밑에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튀어나왔다.

“아시다시피 에린의 후예에게 유물이랄 건 얼마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건 대대로 족장만 아는 비밀이랍니다. 조촐한 창고이긴 하지만요”

예상 밖의 기믹에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에게 족장은 싱긋 미소지어 보였다.

“저희 조상님들께서는 후손에게 남겨줄 보물을 만들지는 못하셨어도, 뺏어올 줄은 아셨던 듯 하거든요.”

이 시발, 듣고 보니까 그렇네.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에린의 전사들이 진짜로 오지에 쳐박혀서만 살았다면, 3대 야만족으로 꼽혔을 리는 없는 것이었다.

족장의 말마따나 지하 보물고는 단촐했다.

그래도 아예 건질 게 없는 공간은 아니었다. 열 몇개밖에 없어서 1인당 1개씩 챙겨가면 양심에 펑크가 나게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얼마나 챙겨가면 되겠습니까?”

“원하시는대로 가져가셔도 되지만, 대부분은 정비받지 못 해서 잡동사니가 된 것들입니다. 주의 깊게 골라주세요.”

무슨 폐품 떨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는데, 우리가 제대로 각 잡고 뒤져보자 절대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찾아낸 건 하얀 건틀렛이었다.

일단 무게만 봐도 철제는 아니다. 무척 가벼운데 존나게 딴딴한 물건이었다. 족장은 감긴 눈으로 내가 구경하던 건틀렛을 확인했다.

“아, 그거군요. 이름은 유실되었지만 선대 족장께선 [주술 각인 건틀릿]이라고 불렀던 물건입니다.”

주술 각인이라고?

내가 고개를 모로 꼬자 족장은 소매를 걷어서 문신을 보여주었다.

“얼마 없는 에린의 유산입니다. 저희가 [주술 문신]이라는 문화가 생기기 전에 사용되던, 족장의 증표라고 하더군요. [주술 문신] 이전에는 그런 도구에 주술을 새겨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마법을 새길 수 있다는 겁니까?”

“네. 술식을 발동하는 건 결국 사용자의 능력이지만요.”

과연. 그거 쓸모 있어 뵈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고대 문명 시대의 족장들이 쓰던 물건이라면 아직 여기 걸린 주술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꽤 매력적인 아이템이라서 슬쩍 족장의 눈치를 보는 나.

‘이걸로 챙겨가고 싶은데…… 족장의 상징이라매.’

존나 유명무실해진 물건이라지만 그런 걸 남한테 줄 수는 없지 않을까? 내가 눈치를 보자 족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 다음 족장에게는 ‘누켈라비와의 전투 중에 파손됐다’고라도 전해둘까요?”

“아니면 마을의 은인에게 선물했다고 사실대로 가르쳐도 되고요. 낙원의 땅에 계신 선조님들께서도 낡은 물건을 아까워 하면서 은혜도 갚지 않는 놈을 후손으로 쳐주진 않으실 듯 하네요.”

돌려말하긴 했지만 가져도 된다는 뜻이었다. 개꿀이구만. 난 흐뭇하게 건틀릿을 챙겨서 옆구리에 꼈다.

그렇게 파티원들도 하나씩 물건을 챙겼다.

베로니카 같은 경우는 타오르는 가지보다 나은 무기를 찾지 못했는지 귀중한 시약을 챙기는 걸로 만족했는데, 다나랑 프랑은 뭘 챙겼는지 알려주질 않았다.

“않이 부부 사이에 이러기 있음?”

“후후. 당분간은 비밀이야! 내가 쓸 무기는 없어서 이걸로 골랐어.”

“그러는 니 건 뭔데? 이번에도 방어구야? 새끼, 하여튼 지 몸 하나는 존나 애껴요.”

“내 몸이 내 게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우리 4인 부부는 대충 골랐지만, 메인 장비가 꼭두각시인 라리루라는 고민이 길어지는 듯 했다.

그 왜, 게임에서도 장비 매물이 없는 직업군은 경매장을 돌아다니는 시간이 남들의 2~3배로 늘지 않던가. 나는 차분한 마음으로 라리루라의 선택을 기다렸다.

“선배? 이거 어때요?”

라리루라가 20분만에 찾아온 물건은 분홍색 보석이었다.

이 기집애가 선보이는 극한의 컨셉충이 이제 본받아야 할 경지에 올랐군. 하다하다 장비까지 깔맞춤을 하네.

나는 얘가 나랑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아티스 여아용 신발의 핑크핑크함에 낚이는 새나라의 흑우 암소가 됐으리란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나마 파티장 같은 곳에서는 빨간색으로 챙겨 입어서 다행이지…… 는 염병. 생각해 보니까 빨강도 핑크 계통이잖아? 이거 시발 중증이네.

“야. 니 그냥 마땅한 게 없어서 비싸 보이는 걸로 집었지.”

“아핫~♡ 혼수금에 보탬이 될까 해서요~.”

핑크색 보석을 선물로 받아서 기뻐하는 남자가 있다면 꼭 보고 싶다.

핑크가 상남자의 색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내 유년기에 꼬츄 달린 새끼가 그리스 로마 신화 말고 캐릭캐릭 체인지 만화판 따윌 집으면 왕따 직행이었다고.

남자가 여자 외의 핑크색을 가까이하면 X알 떼인 기집애 새끼 되는 건 순식간이다.

그건 어른이 되도 마찬가지다. 여자 화장실 앞에서 여친의 가방을 들고 대기해 본 뻘쭘함을 아는가? 나는 안다.

아, 이제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전 여친이여. 잘 지내니? 안 그랬으면 좋겠네.

“그건 깃털바람의 보석이네요.”

그때 족장이 설명했다. 드물게도 곤혹해 하는 기색이었다.

“손에 쥔 사람이나 부착한 물건을 가볍게 만드는 마법이 걸린 물건이에요. 하지만 연원이 확실하지 않아서, 남들 눈에 안 띄게 조심해서 사용하시는 게 좋으실지도 몰라요.”

“선배! 무게를 가볍게 하는 보석이래요! 와, 비싸겠다♡! 저 이제 다이어트 안 해도 되겠어요!”

“미친련……. 보험 가입할 때 약관 안 읽을 련…….”

뭐, 라리루루한테 어울리는 물건이긴 하다.

서커스의 기예는 물론이고, 무거워서 발이 느린 링링이의 이속 버프도 될 것 아닌가. 싸우는 중에 잘 전환해서 쓰면 큰 힘이 돼 줄 것이었다.

솔직히 나한테도 쓸모가 많을 것 같은 효과였고 말이다.

‘히히. 무거운 장애물 같은 거 치울 때 빌려달래야지.’

아까 한 말은 취소다. 진정한 마초는 핑크를 가까이 해도 된다.

드웨인 존슨이나 울버린이 핑크색 란닝구를 입었다고 게이라고 부를 남자가 있겠는가? 그리고 색깔로 성별을 좌우하는 건 차별적인 행위다. 유 뻐킹 컬러 레이시스트 같으니.

“교수님? 교수님도 고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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