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0화 (310/1,009)

내 질문에 프랑은 답지 않게 펄쩍 뛰었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베로니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라. 일어나 보니까 곁에 그대가 없었던 탓에 연신 울면서 미아처럼 돌아다니는 걸 간신히 찾아낸 참이다.”

“……뭐시기요?”

“여긴 어디냐, 혹시 발할라는 아니냐, 아직 노르의 아이도 낳지 못했는데 죽을 순 없다, 뭐 그런 얘기로 하도 난리여서흐이야악?!”

베로니카의 비명은 프랑 때문이었다. 어쌔신처럼 그녀의 등 뒤로 파고든 프랑이 오금을 쳐서 넘어트리고 가슴과 손으로 베로니카의 입을 원천봉쇄했던 것이다.

“우읍?! 우으으읍흡?!”

“아무 일도…… 없었어!!”

프랑은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면서 소리쳤다.

아마 꿈에서도 이성을 유지한 두 바이콘들이 프랑을 찾아내서 이성을 되찾게 해 준 모양이다. 베로니카만 해도 처음 나랑 꿈에서 만났을 때부터 제정신을 유지했었으니까.

그건 바이콘이 신족 출신이라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면 비유적인 표현으로 ‘인간’이라고 불리는 종족들은 전부 꿈을 꾸는 종족이네.’

인간족, 엘프, 드워프. 이 이세계의 주요 종족들은 셰이드 같은 특수한 의식이 없어도 꿈을 꾸는 종족들이다. 여기에도 뭔가 이세계 특유의 종족 분류법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아무튼 프랑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흑역사를 들키는 건 싫었겠지. 나는 그러려니 했다.

아까 역대급의 갭을 보여준 누구누구 씨 덕분에 그 정도면 양호한 편 같다. 내가 옆에 없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나도 그리 생각했는지 말없이 눈을 피하길래, 나는 바로 이야기의 주제를 전환했다.

“아델라이데 씨? 상황은 파악이 됐습니까?”

아델라이데는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죄송하옵니다, 후계자님.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셰이드 중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죠? 어떤 일인지만 간략하게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말에 아델라이데는 천천히 대답했다. 꿈이어서 그런가? 그녀의 말은 브리타니아 어였다.

“당초에는 후계자님의 내면세계에 쌓였을 구신의 마나…… 그 태양 형태의 내부를 조사할 생각이었사옵니다. 그리 하면 천공신님의 기억을 엿볼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여기가 오딘의 기억 속인 겁니까?”

“아니옵니다. 절차가 진행되는 도중에 제 3자의 의지 탓에 술식이 비틀렸사옵니다.”

제 3자?

내 의문을 당연히 짐작했을 아델라이데가 설명했다.

“저와 베로니카가 짐작하기로는, 이곳은 천공신님께서 후일 후계자가 될 존재가 자신의 기억에 접속하려 할 때를 기약해 창조한 공간인 듯 합니다.”

“꿈 속이긴 한 거죠?”

나는 사라진 차량을 떠올리며 묻자, 프랑의 질식 허그에서 벗어난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렇다. 이 공간은 말하자면 천공신님이 창조한 꿈 속의 공간이니라. 그리고 여기에 그대를 불렀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꿈의 주도권은 그대에게 있으니 말이다.”

“……뭐 유산이라도 챙겨줄려나?”

“받아봤자 현실에는 못 가져가지 않겠느냐? 지식이라면 또 모를까.”

“마법의 신한테 마법 지식만 받아도 손해는 아니겠지.”

룬 스톤의 상위호환인 VR 인강이라면 이 공간에도 상당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델라이데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꿈속에서 무얼 하든, 일어난 뒤에는 한 순간의 백일몽처럼 사라지기 마련이옵니다. 남는 것은 기억과 순간의 영감(靈感) 뿐이죠.”

그럼 결국 뭐야? 여긴 뭐하는 공간인 거지? 나는 호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면서 팔짱을 꼈다.

“……일단 내가 원하는대로 조작할 수가 있는 걸 보면 내 꿈을 기반으로 만든 공간인데.”

구신의 마나라도 움직여 볼까?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천해 봤을 때였다. 난 마치 뱃속에서 쇳물을 젓는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감각에 화들짝 놀랐다.

“시발?”

내 마나가 지들 좆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나가 내 통제에서 벗어나는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좆 같음이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게 느껴지는 듯한 기분에 인상을 썼을 때, 내 마나는 그렇게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우리들이 서 있던 구름에 마법진이 펼쳐졌다.

“──전원 물러나라!”

“끼요오옷!! 덤블링 회피!!”

파팟─! 우리는 다년 간의 짬밥으로 순식간에 의식을 전투 모드로 바꾸고 백 스텝을 밟았다.

마법진이 무지개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프랑은 버릇처럼 무기를 꺼내려다가 맨손인 걸 알고 내게 질문을 던졌다.

“노르! 혹시 뭔가 했어?!”

“마법진은 내가 한 거 아냐!”

혹시 내가 구신의 마나를 움직인 게 방아쇠가 되서 뭔가 일이 터진 것인가?

나는 일단은 파티원들에게 장비를 분배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각몽처럼 내 꿈을 조작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쿵!!

마치 마법진에서 하늘에 기둥을 세워지는 것처럼, LED 원기둥이 치솟았다.

──그건 무지개로 만든 다리였다.

기둥이 잠잠해지자, 마법진이 있던 곳에는 낯선 노인이 한 사람 나타나 있었다.

로브와 고깔모자를 쓴 회색 수염 노인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바닥의 주름은 자글자글했다. 하지만 그 손에 선 핏줄과 근육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생명력이 있었다. 오른손에 든 지팡이는 키보다 길었다.

아니, 지팡이가 아니다!

그것은 길쭉한 칼날이 붙은 창이었다. 나는 온몸의 솜털이 솟는 듯한 공포를 느끼며 전율했다.

“──간달프가 무지개 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톨키니스트라면 누구든 꿈꿀 상황이지만, 진짜 꿈속에서는 그다지 보기 싫은 광경이다.

왜냐고? 저 이세계 간달프는 아무런 말도 없이 굉장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거든.

꿈이라지만 원 펀치로 내 강냉이를 우수수 수확하게 생긴 괴물이랑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일단 나는 그런 꿈을 선호하는 마조히스트는 아니었다.

무지개의 솔로처, 아니 간달프가 손을 들었다.

나는 그가 창을 사용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투콰아아아아아앙!!

간달프에게서 느껴지는 마나가 미미하길래 나도 모르게 견적을 낮게 잡은 순간, 벼락 한 줄기가 말 그대로 번개처럼 나를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애미 씹……?!”

나는 매머드 앞발에 싸커킥을 맞은 것처럼 뒤로 날아갔다.

야수회귀를 켜는 것이 늦었다. 꿈이 아니라면 즉사였다.

여기가 고통이 없는 꿈 속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내가 이성을 유지하려고 ᚦ(Thurisaz)의 룬을 켜 놓지 않았다면 나처럼 죄 없는 꼴마초가 발할라로 떠날 뻔 했다.

착한 사람일 수록 신이 일찍 천국에 데려간다던데, 내가 그 낭설의 피해자가 될 줄이야!

착하게 산다고 산 게 이렇게나 내 발목을 붙들다니! 누가 알았겠는가!

“──이익!”

프랑은 내가 갖고 왔던 미스릴 창을 던졌다.

무기가 없는 탓에 궁여지책으로 벌인 반격이었지만, 근력과 손재주에 종족 보정이 걸린 프랑의 투창은 나 못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녀의 공격은 실패였다. 간달프 새끼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공간에 돌풍을 일으켜서 투창의 궤도를 옆으로 틀어버린 것이었다.

“이 시발, 저 노친네는 또 뭐야!!”

다나는 고함치면서 나를 치료하려는 것처럼 달려왔다.

그 어떤 상황에도 부상자와 남편을 우선하는 다나의 기질은 존경받을 만 했지만, 어차피 꿈에서 부상 따윈 의미가 없다. 손을 들어서 접근을 멈췄다.

‘……저렇게 눈에 띄는 아델라이데를 두고 굳이 선빵으로 나부터 노렸다?’

목표는 나인가.

아델라이데와 베로니카는 고양이 앞에 던져진 햄스터처럼 굳어버렸다. 그녀들을 탓할 수는 없다. 혈통빨 DNA 우월주의 이세계에서, 그녀들과 저 간달프는 상성이 너무 최악이다.

그게 시골 영지 영주더러 국왕이랑 맞짱 뜨라는 거랑 뭐가 다르겠는가.

“……남자 새끼가 쪽팔리게 선빵까지 맞아놓고 아내들한테 도움을 구할 수는 없지.”

나는 번개 원콤에 무릎 꿇었을 때부터 팽팽 돌아가던 대굴빡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 혼자 싸운다.’

꿈속에서 뒤진다고 별 일 있겠냐만, 상황을 보면 아무렇지 않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건 100% 그 도이치 짝눈신의 안배일 테니 말이다.

나는 의식해서 원하는 심상을 꿈에 짜냈다.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의 발밑에 검은 구멍이 뻥 뚫렸다. 내가 꿈에서 깨어날 때처럼, 저길 통해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앗?!”

“아니 씹, 야 임마?! 노르!”

그녀들은 블랙홀처럼 자신을 빨아들이는 구멍에 거스르지 못했다. 아내들과 아델라이데는 정신에 여파가 남지 않도록 내 꿈에서 쫓겨났다.

초대한 손님을 쫓아내는 것도 초청자의 권한 아니겠는가.

“……거기는 우먼홀. 남자인 나는 맨홀을 찾아보겠다.”

아마 나도 깨어나면 바가지 좀 긁히겠지만, 이건 나랑 저 새끼의 문제였다.

간달프도 내가 그녀들을 쫓아내는 걸 지켜보고 있다.

저 새끼의 의식이나 지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맞다이를 바라는 건 간달프와 그 창조자의 원래 목적과 합치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내 마나통을 점검하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마상에 시발. 원큐에 마나가 절반은 나갔자너?’

존나 엔리르를 족치기 전의 나였다면 저 선빵 한 방에 고대로 반숙이 될 뻔 했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침을 뱉었다.

“거 이세계 간달프 뒤지게 쎄네.”

좆 같은 고인물 새끼야. 왜 쪼렙 상대로 빡겜하냐고.

이러니까 격겜 장르가 좆망하지. 저 미친 할배, 영화에서는 칼질 봉질만 하더니 법사로 전향하니까 딜랑이 미쳐돈다.

선쿨도 없는 마법이 짝퉁 묠니르의 10만 볼트보다 쎈 느낌이다.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나는 야수회귀를 발동하면서 창을 소환해서 들었다.

─슈확!

그게 신호가 된 것처럼 발치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전기장판을 최대로 틀어놓고 잠든 것처럼 치솟는 뜨거움! 하지만 난 피하지 않았다. 피하려고 해봤자 늦을 거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야수회귀에 마법을 더했다.

녹색 마나 코팅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마초세우스의 불꽃 타입 폼 체인지다.

지면에서 치솟은 불꽃이 도마뱀의 혀처럼 나를 감쌌지만, <타오르는 손길(Burning Hand)>의 불꽃 내성을 전신에 바른 나는 거의 뜨거움을 느끼지 않았다.

“불주먹!!”

불꽃의 권역에서 피하면서 펀치.

ᛒ(Berkanan)의 만다라가 떠오르면서 불꽃의 마나가 발사되었다.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두들겼다. 나랑 똑같은 ᛒ(Berkanan)의 만다라다.

─투확.

변신 마법의 물질 변형이 구름을 벽으로 만들었다.

달궈진 구름은 열기를 받아냈다. 나는 눈을 반개했다. 여러 개의 호기심과 추리가 뉴런의 바다를 어지럽게 헤매다가 결론으로 완성되었다.

“너 이 씹새끼…… 교수였군.”

지금,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내가 한 거라고는 이글이글-총을 갈긴 것 뿐인데, 이렇게 왕창 빠져나갈 리가 없었다. 아니, 왕창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런가? 저만한 기예를 펼치는데 이 정도라. 가성비는 뛰어나군.

“누가 남의 마나로 마법 쓰래, 개새끼야.”

나는 방금 전의 마법 겨루기 1번으로 꿈 속 공간의 의미와 적의 정체를 간파해냈다.

노인이 마법을 쓸 때마다 내 마나가 사라졌다. 저 놈은 내 마나를 훔쳐다가 지 것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가만히 보면 마법도 내가 습득한 것만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저 노인은 말하자면 나의 악몽이다.

누군가의 술식으로 내 꿈에 개입해서 창조한 악몽!

‘내가 근두운이나 자동차를 부르는 거랑 같은 이치인가.’

여긴 내 꿈이다. 상상력이 받쳐주는 한은 뭐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에 베로니카가 내 꿈에서 오두막을 세워보였듯, 잘난 마법사는 남의 꿈에 간섭하는 게 가능하다. 누군가가 내 꿈과 마나를 조작해서 이세계 간달프를 생성한 것이다.

‘이 술식을 설치한 건…… 오딘이겠지?’

꿈 속에 나타난 가짜 오딘, 가짜 간달프.

그렇다고 다른 꿈 속 오브젝트들처럼 지워버릴 수도 없다.

마음에 안 든다고 없앨 수 있으면 그게 어디 악몽이겠는가? 저 씹새는 십중팔구 마나로 두들겨 패서 박살내야만 사라질 것이었다.

악몽은 꿈이 아니라 약이나 물리치료 같은 외부의 요소로 고쳐는 것이니까.

‘그래서 꿈의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거였군.’

내 마나를 횡령해서 쓰려면 어쩔 수 없이 나한테 주도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종의 바지사장인 것이다.

“남의 물건에 손 대는 새끼는 이제 지긋지긋한데.”

나는 혀를 내두른 뒤, 내달렸다.

저 새끼가 꿈 속의 존재인 이상, 꿈에서 만든 물건으로는 해치울 수 없겠지.

내가 총이나 미사일을 소환해서 갈겨봤자 빨간 딱지 붙이러 온 빚쟁이한테 파워레인저 칼을 들고 덤비는 애새끼 같은 꼴이나 날 것이다. 역할극이란 건 상대가 무시해 버리면 찐따 짓에 불과하니까.

노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돌개바람이 나를 감쌌다. 열기에 내성을 바른 이상, 번개나 불꽃, 얼음은 마나 낭비다. 가장 효율적인 조합으로 나를 족치려고 드는 것이다.

‘그건 예상했어.’

구름 발판을 부술 듯 밟으면서 옆으로 뛰었다. 돌개바람이 휘몰아치기 전에 회피에 성공했다. 예상 못 했으면 피할 수 없었을 속도였다.

이게 내 마법 능력으로 가능한 스킬이라고? 나는 돌개바람이 수증기로 구성된 것을 눈치까고 혀를 찼다.

‘예전에 예르나랑 싸울 때의 나랑 비슷하군.’

가진 기술을 조합해서 새로운 마법을 제작하는 것!

마법의 창조에 가장 필요한 재능이다. 저 노인이 도이치 짝눈신 년이 만들어둔 매지컬 A.I.라면 그 정도는 할 것이었다.

스펙은 같지만 컨트롤과 마나량 싸움에서 너무 불리하다.

막말로 저 새끼가 내 마나를 전부 끌어다 쓰면 마나가 텅 빈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지지 않는가!

꿈속에서 마나 포션을 마신다고 내 몸의 마나가 회복될 리도 없고 말이다.

‘아내들을 물린 건 옳은 판단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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