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6화 (326/1,009)

집안 싸움을 할 거면 손님을 부르질 말든가. 사람 불러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람.

‘아 맞다. 우리가 먼저 찾아왔지.’

날을 잘못 잡았네.

〈당신이 지금 하는 짓을 보십시오. 그러고도 남편의 묘 앞에서 당당하게 나를 보필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실례했습니다. 마님의 권위를 침범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럼 제가 허가하기 전까진 닥치십시오. 판단도 책임도 제 일입니다.〉

말벌처럼 쏘아붙인 프리모르는 숨을 조용히 뱉고 내게 말을 걸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나도 사죄를 들을 입장은 아니군. 나였어도 의심스럽긴 했을 거요.〉

자고로 뒷담화에 어울려 주는 게 남들이랑 가장 빨리 친해지는 방법 아니겠는가? 남의 뒷담화야 뒤탈이 무섭지만, 내 손으로 내 얼굴에 먹칠하는데 손해 볼 게 어딨어.

예수게이 씹게이 새끼라는 말을 빙 돌려서 전해준 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우리가 오늘 찾아온 것은, 그대들과 우리 사이의 입장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오. 저 친구처럼 서로 의심하고 적으로 여겼다간 우리끼리 헐뜯게만 될 것 아니오.〉

〈……네. 그렇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프리모르는 잘 참아냈다.

좋은 경향이다. 대표자인 그녀는 냉정하다. 노예 시장에서 봤던, 머릿속에 꽃밭이라도 피었을 듯한 귀부인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 이유는 없어진 왼손 약지와도 관계가 있을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내가 말했다시피 상대를 무릎 꿇리고 피 튀기는 해피네스 진실 게임을 벌이지 않는 한, 이 의심 싸움은 무의미한 소모전이다.

〈확실히 하지. 믿지 않을 거면 헤어지고 믿을 거면 함께 하는 것이오. 단, 믿든 믿지 않든 내가 아는 정보는 최대한 알려드리지.〉

〈정보를요? 어째서죠?〉

〈우리는 그대들의 목적에는 관심이 없으나,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순 있지 않겠소? 물론 우리를 고문해서 믿음직한 사실만을 토해내게 하고 싶겠다면…… 우리도 있는 힘껏 도망치는 수밖에.〉

‘그 새끼들 3대 패밀리의 일원 아냐?’ 라는 의심을 받을 각오는 하고 왔으니까.

〈……신의는 양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프리모르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예수게이 님께서 먼저 한 발짝 양보해 주신다면, 저희도 여러분을 믿을 수 있겠죠.〉

〈내게 무엇을 바라오?〉

〈가면을 벗고, 저희의 목적에 먼저 협력해 주세요. 만약에 그리 해 주신다면, 저희들도 예수게이 님이 이 땅에 계신 동안 전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좋소. ……단, 옆에 있는 이 친구는 안 되오.〉

나는 쿨하게 딜을 받으려다가, 라리루라의 티르시를 닮은 얼굴이 까발려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급하게 몇 마디를 추가했다.

〈이 친구는 내가 이 땅에서 사귄 친구이지, 중원 사람이 아니오. 의견이 합치했기 때문에 협력했다는 점에서는 그대들과도 비슷한 관계요.〉

〈……그녀도 암회에 목적이?〉

〈아는 사람이 그들에게 납치당했을 거라고 여긴다더군.〉

그 말에 프리모르와 호위들에게 잠깐 동요가 생겨났다. 내 생각을 견고하게 해 주는 반응이었다.

〈그, 납치당했다는 건 어떤 분이십니까?〉

표정을 숨기면서 묻는 프리모르였다. 라리루라는 고민하는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선배! 헬프 미!”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용하진 않았는데, 아무튼 고민하는 건 맞았다.

고향 말이라서 얘기의 흐름은 캐치한 듯 했지만 내 의견을 따르고 싶은 모양이다.이거 요 고맹이가 책임을 남한테 떠넘기려고 하네. 어디서 나쁜 물이 들어갖고 말야.

누가 그런 거 가르쳤어? 나인가?

“질러버려.”

내가 그런 텔레파시를 쏘자마자, 라리루라는 입을 열었다.

〈티르시 아르마슈나스.〉

〈……그렇군요. 아르마슈나스라.〉

그 이름에는 프리모르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예상했기 때문에 나온 무표정이었다. 전혀 모르는 이름이면 그게 누구냐는 듯한 느낌이나 질문이 나와야 했다.

프리모르한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마알스 가문의 며느리가 그 성씨를 공유하는 티르시네 가문을 모른다? 그런 핑계는 어불성설이다.

〈내가 친구에게 들은 바대로 생각하기로는, 3대 패밀리는 원로원 정통 가문의 일원을 노리는 듯 하오. 최소한 한 곳은 말이오.〉

〈분쟁을 정지하고 제 목에 현상금을 건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지 않겠소? 그대를 노리는 패밀리가 다른 이들에게 양보를 했던가, 아니면 다들 암묵적으로 ‘당신의 확보’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겠지.〉

나는 가면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이것 말고도 이유가 더 있지만, 말해줄 순 없었다.

〈내 목적은 아눌루스 패밀리의 징벌이외만, 함께 싸운 이들의 사정을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그리 말하며 가면을 잡아당겨서 벗었다.

내 얼굴이 드러나자 프리모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럴 만 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신하는 건 난이도가 꽤 높아서, 편법을 썼거든.

〈……제가 또 실례를 저질렀군요.〉

〈아니, 내가 더 미안하외다. 화상이 보기 흉하겠지? 염열공(炎熱功)의 수련 중에 얻은 부상이오.〉

나는 씩 웃었다. 여기 오기 전에 얼굴을 화상에 문드러진 사람처럼 변신시켜 놓았기에, 계속 가면을 써도 되는 당위성을 얻은 셈이었다.

‘나야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지만, 딴 사람들은 쳐다보기도 싫겠지.’

그게 아니어도 일부러 상처를 가리는 사람한테 얼굴 까고 다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 실제로 호위들 사이에서도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생겼다.

〈이 가면, 다시 써도 되겠소? 특수한 가면 없이 맨살을 오래 노출하면 진물이 나와서.〉

〈……그러시지요.〉

퍼-펙트. 넘어갔다.

나는 가면을 쓰면서 말했다.

〈시간을 두고 다시 오지. 어떤 대답이 나오든 적대상황이 되지는 않길 바라오. 가능하면 결론은 편지로 듣고 싶군.〉

〈아뇨.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프리모르는 눈을 반개했다.

〈여러분이 아르마슈나스의 옛 여식을 찾는다면, 저희와도 목적의 큰 갈래를 같이 하니까요.〉

〈흠. 무슨 뜻이오?〉

〈협력을 맺읍시다. 필요 이상의 신뢰를 주지도, 바라지도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동맹 성립인가. 일방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그런지 양심이 쓰라려지는걸.

내가 가면을 쓰는 걸 보면서 프리모르는 말했다.

〈코르보나 패밀리를 습격해서, 그 보스와 핵심 세력을 쳐부숩시다. 그게 저희의 요구입니다.〉

그건 우리가 부탁해야 할 일인데.

나는 예상 밖의 협력자를 얻은 것에 대해서 기쁨을 티내지 않고, 대인의 풍모를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일이 잘 풀렸다고 웃을 수만은 없었다.

‘일이 점점 커지는군.’

내 번역능력이 해석하는 바에 따르면, ‘아르마(Arma)’라는 로마니아 어에는 병기, 무기, 군대, 도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로마니아의 황제와 권력을 양분하는 원로원.

강대국의 제왕을 상대로 양보를 받아내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원로원은 모종의 수단으로 그것을 해냈다. 고대 문명 시대에서부터 이어지는 강대국의 황제를 상대로.

그 초대 멤버들이 공유한 성씨가 저런 흉흉한 뜻을 내포한 건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마피아를 부려서 그 초대 가문의 혈통을 노리는 이유도 말이다.

내가 승낙의 취지를 전한 후.

우리는 간단한 자기소개를 나누고 바로 작전에 들어갔다.

〈코르보나 패밀리의 보스는 마테이 로시라고 합니다.〉

프리모르는 지도를 펼치면서 말했다.

〈위치는 이미 파악해 두었습니다. 그는 분쟁 중에도 당당하게 패밀리 거처에 거주하고 있다더군요. 그곳이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겠죠.〉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서 표시한 위치는 내가 새들에게 들은 장소 중 한 곳이었다.

새들이 말하길, ‘위험한 느낌이 드는 곳’이랬던가.

마냥 헛다리를 짚었거나 거짓 정보는 아닌 모양이다.

〈암회의 멤버들 외에도 뒷세계의 용병들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습니다. 되도록 빨리 돌입하고 싶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가 정면에서 양동을 벌이지. 떨어진 곳에서 싸우면 서로 등을 찔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요.〉

〈그리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는 암회의 끄나풀이라고 의심받고 있으니까, 작전의 주 목적인 보스 사살은 맡길 수 없을 것이다.

그냥 메인 디쉬를 양보해 놓고, 적당히 이목을 끌다가 나중에라도 보스를 족치러 가는 게 편할 것이었다.

‘솔직히 이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거든.’

나는 마음 속으로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가타부타 말하는 건 이쯤 하지. 나랑 이 친구가 난장판을 벌이는 동안, 그대들은 보스를 처단해주길 바라오. 일이 일단락되면 우리도 쫓아가지.〉

〈예.〉

작전 타임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끝나자, 나한테 시비를 걸어대던 한스가 말을 걸었다.

〈어이, 노랭이.〉

〈뭐요.〉

노랭이 소리도 오랜만에 듣는군. 내가 대충 대꾸해주자 그 새끼는 미간에 혈관을 세우면서 악수를 권했다.

사과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악수하면서 죽빵을 갈길 것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뭐기는 뭐야. 잘 부탁한다고.〉

〈흠. 죽지나 마시오.〉

꽈아아악……!!

내가 악수를 받자 한스는 기선제압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선 넘지 말고, 양동이나 열심히 해라.〉

얼굴을 찌푸리는 나에게 그는 작게 속삭였다.

〈니 역할은 무대가 정비되기 전에 재롱을 부리는 광대야. 우리가 싸우는 곳에 얼굴을 내비치지 말란 얘기다.〉

이거 듣는 광대 빡치는 소리를 하시네. 나는 욱 한 것처럼 기분 나빠 하는 후배님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끄윽!!〉

악력에서 밀린 한스는 턱에 힘줄을 세워가며 버텼지만, 난 그런 그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았다.

〈별로 미덥지는 못하군. 위험해 보이면 도우러 가겠소.〉

〈끄, 으읍……!!〉

─홱! 손을 뿌리치자 악력에서 좆발린 한스는 팔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나는 픽 웃었다. 힘 싸움을 걸 거면 플딱은 졸업하고 와야 그나마 얘기가 될 것이다.

〈한스. 아직입니까?〉

그는 나를 째려보면서 뭔가 지껄이려 했는데, 그를 부르는 프리모르의 호출에 아가리를 하고 꺼져버렸다.

“퉤퉤. 나도 주인님 신분 갖고 뻗대는 고리타분한 아저씨 앞에서 공연하는 건 사양이다 뭐~.”

라리루라는 텔레파시로 정면에서 그의 뒷담을 까고서 나를 따라왔다.

타탓─!

로브를 쓰고서 누가 누군지도 구분이 안 가게 신분을 숨긴 우리들은 은신처를 나와서 바로 달려나갔다.

마법사로 보이는 남자가 매직 아이템을 조작했는데, 아마 인상을 흐릿하게 만드는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날따라 해가 하늘 높이 떠서 날이 맑았다. 겨울의 공기에 일행이 내뱉는 숨이 입김이 되서 빠져나왔다.

변신 마법으로 만든 털옷이 따듯해서 다행이긴 한데, 혈수마공을 쓰다 보면 더워질 듯 했다. 어차피 방어구도 아닌데 뭣하면 벗어버리든가 해야지.

일행의 스니킹 대쉬는 금방 끝났다.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코르보나 패밀리의 본거지는 대로에 있었다.

유흥가 쪽이긴 하지만 범죄자 새끼들의 집 치고는 굉장히 당당하게 세운 건물이었다. 양식은 이세계 느낌이 났지만 그 높이는 거의 21세기 지구의 고급 호텔에 가까웠다.

‘10층 정도인가.’

올라가는데도 한 고생 하겠군. 근처 건물의 그림자에 숨은 우리는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프리모르의 호위 중에서 도적처럼 몸이 날쌔던 여자는 골목 밖을 정찰하다가 눈을 찌푸렸다.

〈잠깐. 이거 좀 이상한데요?〉

〈뭐가 말입니까?〉

일행이 쳐다보자 그녀는 입구를 가리켰다.

〈저기 건물 입구에 선 남자들, 이그니스 패밀리에요.〉

〈……뭐라고요?〉

당황한 프리모르가 고개를 내미려는 걸 여도적이 막았다. 그녀는 일행을 더 뒤로 밀면서 말했다.

〈이그니스 패밀리들만이 아니에요. 키타이 전통복을 입은 또라이들도 보입니다. 3대 패밀리가 다 모였군요.〉

〈……함정인 거 아니냐?〉

한스가 우리를 꼬라봤다. 이 씹새끼가 또 지랄이네.

나는 병신 새끼를 타이르듯이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오늘 습격하쟀소? 그리고 머리를 좀 써 보시오. 저들도 그대들이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습격하려 들 걸 뻔히 아니까, 저렇게 한 곳에 모여있는 것 아니겠소.〉

〈체면을 중시하는 암회의 보스들이 말인가?〉

마법사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다행히 내가 그에게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여도적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체면? 뭘 모르네. 암회는 얕보이면 안 되니까 평소부터 허세를 부리는 거지, 가오를 챙기는 놈들이 아냐. 저 놈들이 한 곳에 모여있어봤자, 다른 놈들은 우리한테 쫄아서 저러는 거라곤 생각 안 할 걸?〉

〈……패밀리 간의 휴전 협정이군요.〉

프리모르가 중얼거렸다.

〈타협안을 정하고자 한 곳에 모였다는 명목으로 모였을 겁니다. 그 실태는 저희의 습격을 막기 위한 협력태세지만, 다른 세력들은 상의 중인 거라고 생각할 거에요.〉

〈마테이 로시가 머리 좀 썼군. 휴전을 제안한 것도 그놈 짓이겠지.〉

혀를 차는 마법사.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프리모르의 사정을 얼기설기 추리해갔다.

그녀의 사정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정보는 중요하니까.

─쿵. 한스는 벽을 가볍게 치면서 혀를 찼다.

〈망할. 그래서 뭐야? 저기에 3대 패밀리의 보스랑 그 호위까지 죄다 모여있다고? 그걸 우리끼리 어떻게 뚫어?〉

〈전부 다는 아닐 거요.〉

내가 말했다. 의심을 받더라도 여기서는 말해두는 게 옳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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