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1화 (341/1,009)

그 납치범이 뭐하는 새끼인지는 몰라도, 약혼을 받아들여서 귀족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거부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맞는 말이지만, 헨네시스 영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 나도 그 점에는 동의하고.”

베로니카가 받아온 편지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손에 든 편지에 시선을 향했다.

─티르시에게 사정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귀족 복귀가 일각을 다투는 급무(急務)가 아니라는 것만은 저도 들었어요. 이 뜬금없는 약혼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 저는 그게 걱정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부디 티르시의 진심을 듣고 와 주시길 바랍니다.

“……편지를 읽어보니까, 로마니아의 귀족들은 약혼을 할 때도 절차를 걸쳐야 한대.”

나는 헨네시스 영애의 편지를 접으며 말했다.

“당장 1~2달로 가능한 약혼이 아니야. 티르시도 아직까진 손님이라는 명목으로 구속돼 있겠지.”

약혼 상대도 아니고, 결혼 상대는 더더욱 아니다.

단순한 손님 신분이라면, 티르시가 쪽지 한 통만 대충 던져두고 훌쩍 없어져도 납치법이 양지의 권력을 휘두를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이대로 돌아가는 건 쬐끔 배알이 꼴리는데?”

씨익 하고 특유의 웃음을 짓는 다나.

나도 100% 동의한다. 몽골식 납치혼에 지인이 끌려갔는데 로마니아에서도 강하게 살아가렴! 하고 퉁치라는 게 어디 말이 되냐?

게다가 귀족인 의뢰주님이 더 비벼보라고 하는 상황이다. 저 편지를 받고 시른데용 하고 돌아갈 패기는 나한테 없었다.

시발 무슨 위화도 회군이야? 나더러 사르가디스에 돌아가서 역성혁명이라도 일으키라고? 노르드 폰 헨네시스 즉위는 쵸큼 선 넘었지.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영애가 고용하겠다는 현지의 협력자랑 합류해서, 레나폴리스에 있을 티르시와 접촉하면 돼.”

“흐음. 우리가 도시에 도착했을 때 쯤이면 그 귀족 수녀의 전서구도 협력자라는 작자에게 닿은 뒤겠군.”

“그렇겠지.”

전서구의 평균 이동 속도를 생각하면, 이제부터 출발하면 딱 맞춰서 현지의 협력자랑 행동을 개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자 라리루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면 선배~♡? 〈공간이동〉으로 날아가실 건가요~?”

“아니. 고민은 했었는데 다나가 구해왔다는 마차 행렬에 꼽사리 낄 생각이야.”

〈공간이동〉에 쓸 마나는 옥새에 모아두는 게 현명하다. 만일의 사태에서 비장의 카드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시간의 알리바이를 짜려면 어차피 며칠 정도는 시간을 떼워야 하고 말이다.

“행렬이요? 앗, 정기 캐러밴?”

라리루라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손을 탁 쳤다.

“잘 아네? 맞아. 그거에 한 자리 낄 수 있게 됐거든.”

“아핫♡? 저도 로마니아 사람인걸요. 20년 인생의 절반은 외국에서 보냈지만!”

행상인과 기타 여행객들이 뭉텅이로 이동하는 캐러밴은 이 험한 이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 중 하나였다. 쪽수가 수십~수백 명이면 좆밥 도적들은 못 덤빌 것이니까.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들지만 로마니아나 동방의 키타이 쪽 사막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랜다.

“그래서 새해 첫 캐러밴 출발이 오늘 점심에 정해져 있어. 우리도 그 행렬에 껴서 레나폴리스로 간다.”

나는 시계를 보고 나서 일행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이번 출장도 얼마 안 남았어.”

협력자와의 접선을 기다리던 시간은 지났다.

이제는 안전이 보장된 티르시에게, 자유 또한 선물해주러 가면 출장 종료다.

나로서는 그저, 티르시가 우리의 손을 거부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로마니아의 캐러밴은 내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컸다.

〈으허허! 환영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간접적인 고용주가 될 드레이크입니다!〉

다나가 알아봤다는 캐러밴의 대상인은 우리를 보고 그렇게 인사했다.

상인에게 고고학자와의 인맥은 꽤 쓸모가 많다.

당장 유물 같은 게 휘하 상단에 굴러들어왔을 때라든지, 행상(行商) 중에 유적을 발견할 때 아는 고고학자가 있으면 좋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눈나는 고고학 박사 겸 사르가디스 연구소장이란 신분으로, 캐러벤에 우리 파티를 호위로 참가시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다나 베르베이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흐허허! 뭘 그렇게 빳빳하게 구십니까! 엔토로우스 씨께 소개는 들었습니다. 편하게 계십시오!〉

드레이크는 불룩 나온 배를 쳐대며 말했다.

〈이 장대한 캐러밴에 덤벼들 간 큰 도둑은 없습니다! 만약 다치는 일이 있더라도 야누스 교단에서 나온 선교사들이 금방 치료해 줄 테니까요!〉

〈그거 멋지네요. 그럼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예? 아니, 잠깐 식사라도……〉

〈아뇨. 남편이 기다려서.〉

칼 같이 손절한 다나는 우리한테로 돌아오면서 티 안나게 질색을 했다.

“크흐흐. 대상인 치고는 노골적으로 흑심이 묻어나오더라?”

“닥쳐 시발. 저 인간, 머릿속에서 느그 아내 옷 벗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가서 패버리고 싶어지잖아. 나 참지 말까?”

“참아 그냥. 해 봤자 며칠인데.”

얼굴값을 못 하는 경우가 많지만 다나도 미인인 건 주지의 사실. 이런 일에는 익숙한 건지 우리 눈나는 어깨만 대충 으쓱거리고 흘러넘겼다.

저 인간도 캐러밴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싫으면 딱히 우릴 건드리진 않겠지. 가볍게 경계하는 걸로 충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캐러밴의 행렬에 참가했다.

〈인원 점검 끝! 출발하겠소!〉

행렬의 대표로 보이는 장년의 남성이 그렇게 호령하자, 마차의 행렬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초원으로 나섰다.

우리는 모험가로 고용된 거라서 마차에 타진 못했다. 대신 프랑이랑 라리루라의 진급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 며칠 걷는 것 정도로 골골댈 우리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걱정해야 했던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앞서 생각했다. ‘쪽수가 많은 대형 캐러밴은 좆밥들이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치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큰 물에서 노는 도적이면, 그만큼 큰 먹잇감을 노리고 캐러밴을 노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내가 그걸 깨달은 건, 그날 새벽에 불침번을 서며 지루한 시간을 잡생각으로 흘려보내던 때였고.

〈아─ 하하하하하─!! 월척이네, 월척이야!!〉

〈괴도다!! 루크레겐스의 자칭 괴도 년들이 나타났다!!〉

오늘도 언제나 그랬듯, 트러블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습격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팔찌를 창으로 바꿨다.

‘……내 감지를 뚫고 들어왔다?’

나는 소란스러워진 야영지에 예리하게 시선을 돌렸다.

한국 남자들에게 불침번이란 건 시간을 때우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지루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세계에선 그렇지만도 않다.

‘나름 긴장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몇 시간 피곤한 걸로 위험을 사전에 피할 수 있다면 마냥 방심하고만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야영지는 탁 트인 평원이다. 엄폐물도 없어.’

고작 해야 근처에 솟은 절벽 정도일까. 그리고 나 말고도 야영지 곳곳에서 경계하던 사람들은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속이고 침투했다면, 적은 은신술이나 도둑질에서 일대 경지에 오른 이들일 수도 있었다.

일단 적당히 상대해도 될 적일 것 같진 않다. 나는 도끼를 쥐고 후다닥 일어나는 모험가에게 질문했다.

〈루크레겐스의 괴도가 뭐하는 놈들입니까?〉

〈웬 미친 도둑년들이 둘 정도 있소!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 중에서도 소문이 안 좋은 놈들만 노려서 터는 년들인데, 이 행렬을 노리던 모양이오!〉

의적(義賊) 같은 건가? 그다지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의적질을 할 실력이 있으면 다른 일로 먹고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귀족을 상대로도 덜미를 안 잡힐 실력자가 굳이 도둑질을 한다는 건, 뭔가 비뚫어진 신념이 있거나 의적 타이틀이라는 빙자한 사기꾼일 가능성이 더 컸다.

아무튼 얼굴도 모르는 인간들의 평가는 이쯤 하고, 나는 그 즉시 아내들이 있는 곳으로 튀어갔다.

캐러밴의 행렬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은 있는데, 결국 자기 안위는 자기가 챙겨야 했다.

〈끄아아악!! 이, 이 개 같은 년들이!!〉

다행히 그녀들은 다치지 않은 듯 싶었는데, 괴도란 것들이 가는 길에 뭘 한 건지 드레이크인가 하던 대상인이 얼굴이 터져라 고함을 치고 있었다.

〈꺄하하하! 진정 좀 해, 아저씨! 얼굴 터지겠어!〉

〈푸후훗.〉

그가 손가락질을 하는 마차의 위에는 젊은 여성 둘이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양쪽 모두 눈가만 가리는 아이 마스크를 쓴 도적이었다.

‘쌍둥이인가?’

코스튬도 깔맞춤한 건지 망토에 가죽 갑옷까지 똑같다.

그런데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눈 주변만 간신히 가리는 간단한 마스크인데도 말이다.

‘인식저해를 거는 매직 아이템인가?’

나는 오딘의 눈을 키면 술식이 뚫릴까 해서 눈에 힘을 주었는데, 그것보다 자칭 괴도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게 더 빨랐다.

〈죄인명! 드레이크 스타빌리멘! 오웬 솔루션!〉

〈죄목! 거래처 부당착취 및 장물 유통!〉

〈판결! 재산 일부 압수!〉

─펄럭! 동시에 망토를 벌린 쌍둥이 괴도가 외쳤다.

〈부당한 부(富)를 누리는 자들은 들으라!〉

〈우리들 괴도, 그웬&스테이시! 죄 있는 곳에 있으리!〉

〈꺄하하하하! 그럼 다들 안녕!〉

도둑 치고는 무지하게 당당한 선언을 던진 쌍둥이는 마차 천장에 뭔가를 던졌다.

─펑!

붉은 가루가 피어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퍼졌다.

쌍둥이 괴도는 그 연기를 피해서 반대쪽으로 튀었다. 그쪽 방향에도 사람들이 있었지만 바람처럼 달리는 두 사람을 잡지는 못했다.

‘오, 시발 개빨라.’

거의 뭐 물 찬 제비였다. 풀밭을 달리는데 소리도 안 나는 걸 보면 저 년들은 프로 도둑이 맞았다. 초상비(草上飛)가 극성에 이르렀군 그래.

그나저나 저 붉은 가루도 독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쫄아서 물러나자 드레이크가 빼액거리며 소리쳤다.

〈거, 겁 먹지 마시오!! 그냥 후추 스프레이요!!〉

〈케흑! 크하아아악?!〉

〈끼에에에에엑──!! 캬에에에에엑──!!〉

‘그냥’ 후추 스프레이라기엔 뒤집어 쓴 놈들이 뒤지려고 그러는데요.

살짝 코를 킁킁대자 할라피뇨 같은 매콤한 냄새가 났다.

‘우욱 씹.’

나는 기겁했다. 이건 최소 스코빌 8000은 넘는다.

존나 불닭 스프레이라고 개명하는 게 맞겠네. 저딴 걸 눈깔이나 콧구멍으로 들이마셨다간 지옥도를 보게 될 것이었다.

─붕붕붕붕쯔쯔쯔쯔!

나는 가루를 몰아내고자 창으로 풍차 돌리기를 돌렸다.

하지만 이 가루도 보통 물건은 아닌지 바람에도 쓸려나가질 않았다. 도주용 아이템 치고는 질이 높다. 괴도라는 이름값은 하는군.

〈어딜 가, 이 좀도둑들아!!〉

목이 찢어져라 외쳐댄 남자가 화살을 쏴댔다.

아마 저기 저 인간이 오웬 뭐시기인가 하는, 2번째 도둑질 피해자인 모양이다. 괴도들은 인파를 휙휙 오가다가 망토를 넓게 펼쳤다.

〈아깝긴 하지만, 파티는 쫑났어!〉

〈애프터에 집요한 남자는 꼴사납네요!〉

그녀들의 검은 망토는 뼈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행글라이더처럼 변형했다. 마법을 사용한 건지 강한 맞바람이 그녀들의 망토를 공중으로 띄웠다.

날아오른 쌍둥이 괴도는 깃털 모자를 벗으며 조롱하듯 상쾌한 미소를 던졌다.

〈뜨거운 환영은 고맙지만, 오늘은 이걸로 작별이야! 뺏긴 물건이 아까우면 앞으로는 착하게 살라구!〉

〈──도둑이 할 말입니까?〉

작은 목소리는 그 뒤에 찾아온 파공성만큼이나 날카로웠다.

마차를 박차고 화살처럼 날아오른 여성이 괴도의 행글라이더에 돌격창으로 구멍을 뚫어버렸던 것이다.

〈언니!!〉

〈으햐아아아악!!〉

행글라이더에 뚫인 구멍 때문에 비행능력을 상실한 괴도는 땅으로 곤두박칠쳤다. 나는 그보다 먼저 착지하는 여기사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눈나는 또 왜 여깄어?〉

저 스프링 점프는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돌격창과 방패를 든 여기사. 나랑도 싸워봤던, 프리모르의 호위였다.

눈깔을 굴려보자 선교사 일행과 복장을 깔맞춤하긴 했어도 익숙한 체격의 남녀가 몇 보였다.

인원수도 딱 맞다. 여럿이 둘러싸서 지키고 있는 건 죽은 성기사의 시체일까.

‘……야누스 교단에서 주선해 준다는 탈출법이 이거였나?’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혀를 내둘렀다.

의외의 만남이 아직 이어지고 있다. 그 아르마 뭐시기 가문들이 티르시가 납치된 도시로 모여들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잡아!! 도둑맞은 물건을 되찾아라!!〉

드레이크가 외치자, 그에게 고용된 남자들─복장이 통일된 병사들이니까 아마 상단의 전속 호위겠지─이 추락한 괴도를 포위했다.

〈언니, 괜찮아?〉

〈아야야……. 정보랑 다르잖아. 저런 실력자 얘기는 못 들었다구.〉

─척! 동생인 듯한 여자도 추락한 언니의 곁에 착지했다.

그래도 이 포위를 뚫고 도망칠 수는 없겠지.

하늘을 날면서 화살을 피하거나 막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다시 여기사가 점프샷을 날리면 결과는 똑같을 것이었다.

〈으하하하! 얌전히 물건을 내놓도록! 그렇게 하면 해를 가하지 않고 순순히 경비대에 넘겨주겠다!〉

우쭐해진 드레이크는 뚱뚱한 배를 내밀며 껄껄댔다.

다친 괴도는 웃기지도 않다는 듯 실소를 띄웠다.

〈포부 있게 말할 거면 놓쳐준다고 하던가. 경비대에 넘긴다는 말에 고맙다고 따르는 바보가 어딨냐? 그리고 애초에──.〉

─팍! 빠르게 허리춤의 완드를 뽑는 그녀.

〈타겟이랑 협상하는 괴도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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