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63화 (363/1,009)

싸움이 끝나고, 당혹스러운 기분을 떨쳐낸 우리는 각자 할 일을 시작했다.

변기칸에서 나왔건만 공중화장실 세면대가 단수된 것 같은 찝찝한 마무리이긴 했으나, 일이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이 영지의 곳곳에 프로스트 참피언트가 날뛰고 있었고, 그 몬스터 사건을 수습해야 할 영주님은 가츠한테 버려진 뒤의 그리피스처럼 온몸이 곱창나서 인간 토템이 돼 버렸다.

내 풍둔 주둥아리술에 당한 귀족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꿀 빠는 일만 찾으면서도, 일단 사태의 수습에 착수했다.

〈……영주님의 상처는 저희로는 치료가 어렵겠군요. 형제자매님들께서는 우선 하늘의 재앙을 수습하는데 진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힐 능력이 후달리는 야누스 교단의 사제들은 시냐티오가 시키는대로 했다.

영주는 존나 한니발과 단 둘이서 지구 최후의 인류로 살아남은 사람처럼 뼈랑 가죽만 간신히 남은 상태였다.

저 상태에서 완쾌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엘릭서를 냉면대접으로 들이부어도 1~2번으로는 불가능하겠지.

그래서 시냐티오는 영주를 깨끗한 천에 눕혀두고서 야누스 교단 사제들과 하늘의 균열을 닫는 의식부터 펼쳤다.

〈야누스시여! 부디 저희를 보듬어 주시옵고……!〉

죽상이 된 사제들은 죽을 동 살 동 의식에 몰두했다.

자기가 부임한 영지에 흑마법사가 숨어든 것도 규탄받을 일인데, 그 새끼가 영주님을 티르시 리모콘으로 만들고 비선실세 노릇을 하던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씨발, 상상만 해도 눈앞이 훈련소 첫날밤처럼 캄캄해진다. 나 같았으면 그냥 목을 매달 밧줄부터 찾아볼 것이었다. 잘 가, 내 예쁜 출셋길아!

그리고 그런 꼴을 지켜보면서 나는 뭘 하고 있었냐면, 힘이 빠진 듯 기절한 티르시 근처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으으음…….”

“끄으으응…….”

잠에 빠진 티르시가 몸이 아픈 듯 낑낑댔고,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눈을 감고 인상을 썼다.

나는 지금 디아볼로가 오러를 사용하면서 검술을 펼쳤을 때, 그 씨팔럼의 마나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필사적으로 복기하는 중이었다.

상상하는 것은 최강의 자신이다.

오러-블레이더 강북호!

이것만 해낸다면 마스터-노르드까지는 못 돼도, 광선검을 휘두르는 미스릴 클래스의 다스 노르드가 될 수 있을 터!

“애미야 마나 좀 다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무슨 무협식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수의 움직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포장하면 듣기는 좋다.

근데 솔직히 내가 느낀 기탄없는 감상은, 대단한 깨달음이라기보단 E스포츠 프로리그 플레이로 만든 게임 매드무비를 기깔나게 몰아본 듯한 느낌이었다.

21세기 감성에는 감동이 없다. 이런 건 무협이 아니야!

‘쓰벌. 이걸 내 무기나 전술에 맞게 조립하는 것도 일이네.’

원리를 알았다고 재현할 수 있으면 누가 고생을 하겠는가!

그게 됐으면 존나 나도 지구에 살 때부터 수의대 같은 데 안 가고 ‘고졸이 게임을 잘함’이나 ‘옐로 몽키가 농구를 잘함’ 같은 거 찍었지, 개씨발 빡대가리 노르드 새끼야…….

‘심지어 칼이랑 창이면 주 캐릭터도 다른 수준이자너.’

존나 나더러 이걸 어떻게 재현하라는 것이지?

얼스터 군락에서 들었던 조언에 비교하면 참고는 되겠지만, 갈 길이 좀 멀어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이 감각을 잊어버리기 전에 깨달음을 체화할 시간조차 촉박하다는 거였고 말이다.

“남편놈아. 니 찌찌더러 얌전히 좀 있으라고 해라. 왜 힐을 받는데 젖탱이가 꿈틀거려. 치료하는 저지방유 빡치게.”

집중하다가 가슴 근육에 힘이 들어갔는지, 거친 싸움에서 지친 몸에 활력을 채워주던 다나가 꼽을 줬다. 나는 눈깔을 감고 오러의 돈오(頓悟)에 몰두하며 필터링 없이 대답했다.

“원래 젖은 크면 흔들리는 법이란다. 거유인력의 법칙이지. 물론 가슴둘레 80cm 이하는 모를 수 있음.”

“죽일까? 안 돼, 참아. 내 안의 얼스터.”

“옷만 입었다 하면 가슴살이 사라지는 매직…… 그야말로 다이어트의 마법사……. 느이 늑골엔 이런 젖 업재잉?”

“좋아, 죽인다.”

꼭지가 돌아버린 다나는 남편 모가지에 팔을 감고 조르기 시작했고, 내 쥬지는 그 와중에도 젖 여깄어요! 하고 미약한 존재감을 어필하는 우리 눈나의 찌찌를 느끼고 흥분했다. 얘! 봄 가슴이 맛있단다!

전투 후의 흥분이 발기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 들어봤지만, 지친 몸에 산소를 돌리던 피들이 쥬지로 발령나니까 진짜로 골로 갈 것 같다.

〈노르드. 잠깐 와 보도록.〉

다행히 내가 오딘의 분신이랑 천국에서 재회하기 일보직전 쯤에 미네르바가 나를 호출했다. 켁켁 거리지 않게 헛기침을 하고 일어서는 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일이랄 만한 건 아니다.〉

미네르바는 말을 고르며 말했다.

〈나는 네 활약과 노고를 평가한다. 가감없이 말해서, 너와 네 일행이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서 그녀를 제정신으로 되돌리고 디아볼로를 쓰러트렸는지까지는 몰라도 말이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어도 미네르바는 불필요한 말을 길게 늘이는 사람이 못 된다는 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혀가 길어진다는 건 후달린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이 나한테 한 발 물러난 자세를 취할 이유가 뭐 있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물었다.

〈제가 거인들을 퇴치하는 걸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래준다면 물론 고맙겠다만, 다른 용건이다.〉

이게 아니라고? 나는 또 요툰인지 이계 생물인지 모를 그 놈들을 처리해 달라는 부탁인 줄 알았지.

그거라면 기꺼이 도울 생각이 있었다. 가용량의 3배는 되는 마나를 써서 몸은 엉망이었지만, 다나의 치료로 피로를 덜어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 요툰 새끼들을 족치면 마나도 늘어날 테니까.’

저번에 짝퉁 토르를 족치고 나서부터 버닝 이벤트가 거의 드물지 않았는가.

그때 이후로 내 마나통이 이전의 2배 가까이 늘어나서 마나 부족을 실감할 일은 없었지만, 돈이랑 마나는 다다익선이다.

근데 씨발 그렇게 생각하면, 예전의 2배 어치 마나통을 몇 배로 채워버린 티르시는 뭐지. 짝퉁 토르보다 많은 거 아냐?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미네르바가 말했다.

〈여기 있는 귀족들 중에, 네가 흑마법사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시하는 작자들이 있다.〉

〈넵?〉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이 사단이 난 와중에도 흑마법사 드랍템을 줍겠다고 같이 레이드 뛴 공대장을 밴 하려고 한다고? 우와! 정말 데단해!

‘그럭군요. 그런 좆 같은 거 알려줘서 고마워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어진다. 않이 뭔 염병, 이번에는 영혼이랑 대화한 것도 아닌데 왜 흑마법사 취급인 것인 것?

미네르바는 표정 변화도 없이, 재롱잔치의 쪽대본을 읽는 유치원 교사처럼 말했다.

〈이반 리터 폰 디아볼로를 데리고 도주한 자가 너를 고평가하고 호의를 보인 게 의심스럽다는군. 소속이 없는 흑마법사에게 사악한 마도서를 선물한 거면 어쩔 거냐는 둥, 너를 구속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미친 거 아냐?〉

티르시를 간호하던 프랑이 얼굴색도 안 바꾸고 중얼거렸다.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짧고 굵은 촌평이었다.

이야, 역시 빡쳤을 땐 우리 프랑이 가장 빠꾸가 없구나.

〈히꺄아앗?! 아, 아니에요! 저희 언니 암말도 안 했어요!!〉

평소에 온화하던 프랑이 귀족 앞에서 심한 말을 뱉은 것에 경악하며, 라리루라는 프랑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미네르바는 딱히 화를 내는 일도 없이 말했다.

〈정말이지 그 말대로다. 뇌가 장식이 아니고서는 그따위 망언을 입에 담지는 않을진대.〉

표정이 곱지는 않다. 폐급 과장이 출근하자마자 리니지를 키는 걸 목격한 사장 같은 눈초리였다.

일부러 내게 말해주러 온 걸 보면 미네르바도 저 의견을 개소리로 취급하고 있는 걸까.

나는 엘리트-대갈통을 굴리며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순 망언은 아닐 듯 하군요. 돈이 되니까 한 소리가 아닐까요.〉

〈뭐라?〉

〈알기 쉬운 이야기입니다. 제가 흑마법사라면, 전리품 분배율에 큰 변동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대충 설명했다.

〈레나폴리스의 영주님께서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큰 후유증이 남으실 겁니다. 통치에 곤란함이 따른다면 영주의 자리가 바뀔 공산도 있죠. 디아볼로가 대리활동을 하던 걸 보면 자식 분도 없으실 거고요.〉

〈영주직을 노린다는 거냐? 하지만 네가 경쟁 대상은 아닐 텐데.〉

그렇게 말하는 미네르바의 눈빛에는 ‘너 만한 달인을 굳이 적으로 돌리려고 할까?’ 하는 의문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뇌피셜을 담담하게 입에 담았다.

〈영주직이 아니라, 디아볼로의 개인 명의로 넘어가 있는 자산의 분배율입니다. 그 놈이 상태가 메롱할 때 뱉어낸 유물만 해도 저만큼이나 되지 않습니까?〉

나는 대가리에 빵꾸난 디아볼로가 쏟아낸, 그 새끼의 인벤토리 내용물을 가리켰다.

유물과 물품이다. 도둑맞지 않게 챙겨둔 물건이니 딱 봐도 고급스러운 것들 뿐이었다.

인벤토리 안의 물건만 쳐도 저 정도다.

자기 앞으로 돌려놓은 자산이 얼마일지는 상상이 갔다. 이 세상에서도 진짜 거금은 화폐나 현물보다 서류 위의 글자와 토지, 권력 같은 것들이니까.

참고로 해석 불가능한 마도서도 저기에 올려뒀다.

지금은 귀족의 호위들이 서로서로 빼돌리거나 훔쳐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는 모양.

〈제가 흑마법사로 몰리면 배분율에 변동도 있을 테고…… 뭐, 평민이 상대이지 않습니까. 견제 삼아 해 보고 실패해도 밑지는 판단은 아니라고 여기신 거겠죠.〉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실패하는 장사도 아니니까 해볼 만 한 일이긴 했다.

나는 한숨을 참으며 한탄했다.

‘이래서 씨발 후원자가 존나 절실한 건데.’

내 뒤에 막 유명한 귀족이 있었어도 이 지랄을 했겠는가?

이 씨팔럼들이 나중에 내가 항의하러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깝쳐대는 것이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것밖에 없는 병신 새끼들이나 할 법한 발상이다.

‘그나마 대놓고 염병 떨지 않는 건 내가 싸우는 꼴을 봐서 그런 건가?’

이세계에서 일부의 초월자는 법치보다 위에 있다.

미스릴 클래스 쯤 되면 합법이든 불법이든 촌놈 귀족보다는 잘났다.

앵간한 귀족들이면 머리만 숙여도 프리패스로 부하가 될 수 있고, 진짜 개빡치면 계급장 떼고 붙어서 다 죽여버리는 것도 씹가능이다. 못할 건 없는 일이니까.

만약 내가 직접 날뛰는 건 물론이고, 어디 귀족이랑 대충 쇼부를 봐서 그 밑으로 들어가면?

나한테 시비를 턴 십새들은 나를 거둬들인 귀족이랑 척을 지게 되겠지. 영지도 좆만한 영주나 자기 앞 땅문서도 없는 귀족들이라면 동급의 적을 만드는 건 싫을 것이다.

‘존나 창에서 오러 뿜는 놈이 자발적으로 지 따까리가 돼 주겠다는데, 그걸 싫어하는 권력자가 어딨겠어.’

저 디아볼로 새끼도 그렇게 해서 여기에 알 박은 걸 텐데.

아마 그런 이유로 저런 소극적인 견제나 던져봤을 것이다.

‘마나빨이긴 했지만 싸우는 걸 보여주길 잘 했네.’

옥새 카드로 일시불한 마나는 이제 바닥났지만, 일단 나를 오러 뿜는 존나 쎈 전사로 보고 있는 동안에는 대놓고 염병을 떨진 못할 것이다. 흑마법사 의혹이야 항의해도 얼버무리면 되니까.

〈……허. 그게 사실이라면 정녕 귀족의 수치로군.〉

미네르바가 한데 모여 있던 귀족들을 쳐다보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눈을 피하는 놈들이 있었다.

저렇게 쫄리면 하질 말 것이지. 왜 자기 욕심 하나 관리 못하고 지랄이나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파앗!

그렇게 생각하며 소인배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자, 눈코에서 피를 흘려가며 주문을 외우던 야누스 교단의 사제들이 노력의 성과를 거두었다.

빛의 구체는 하늘의 나무에 날아가서 부딪혔고, 마치 금이 간 소묘를 복구하는 것처럼 균열을 지워갔다.

하늘에 빛이 달리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굉장히 아름답고 초현실적이었다.

특히 마나에 예민한 내 영감은 그 겉모습 이상으로 성스러운 기백을 느끼고 있었다.

‘거 존나 멋지네.’

나는 순수하게 그 성스러움에 감탄했다. 이세계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를 알겠다.

자연풍경을 보며 감탄해 본 적이 거의 없는 나조차, 우리 프랑의 가슴을 처음 봤을 때에 비견될 정도로 소름이 돋았으니까 말이다.

‘……살아생전에 저런 짓을 하고 다녔으면, 쌩판 인간이라도 죽고 나서 신으로 섬겨질 만 하군.’

정상적인 파란 하늘로 돌아가는 걸 올려다보며 나는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디아볼로는 저 신력의 근원이 되는 야누스를 ‘만들어진 신’이라고 했었다.

인간이 인간을 신으로 만든 결과물이라고 말이다.

‘하긴, 지구에서도 위인을 신으로 추앙하는 문화는 있었지.’

중국의 신선도 그런 문화 아니던가.

근데 그렇게 치면 로마니아의 신들은 생사경에 올라서 우화등선한 절세의 무인들 같은 건가? 이세계의 교단은 그 신선을 시조로 삼는 소림 문파 같은 거고?

‘씨발 갑자기 친숙함 오져부네.’

나는 낄낄대면서 정상화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향을 더럽히는 이계의 문을 닫는, 한때 인간이었던 신의 빛.

그 장엄한 광경을 보고 있자. 저세상 소인배들이 헛짓을 해대며 조져놨던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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