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87화 (387/1,009)

‘씁. 너무 오버했나.’

부담스러운 과대평가를 받은 나는 터덜거리며 아내들에게 돌아갔다. 기사단장이 직접 검술을 펼치는 걸 봐 두고 싶은 마음에 약간 MSG를 쳤을 뿐인데, 일이 좀 커진 것 같다.

솔직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일단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이상에는 땀 냄새가 나지 않게 <정화(Clean)> 마법이든 샤워든 해서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게 맞았다. 지금 홧김에 감자와 고구마 친구들을 샌드백으로 삼는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잖은가?

물론 대련 후에 체력단련을 시킨 건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줬을 뿐이라는 핑계를 위해서였지만 말이다.

“앗, 선배♡!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방으로 돌아가자 라리루라가 벌떡 일어나서는 뺨에 키스를 해 왔다. 내가 거부하지 않게 된 이후로는 점점 신체 접촉에 망설임이 없어져 가고 있는 후배님이시다.

“노르, 어서 와. 고생했지?”

“고생은 무슨. 맨날 하는 훈련인데.”

프랑이야 늘 그렇듯이 내 옷이나 신발을 정리하며 신부다운 일을 해 주었는데─본인이 원해서 하는 거라는 걸 알았기에 이제는 말리기도 뭣했다─, 다나랑 베로니카만 눈치를 보며 붕 떠 있었다.

애교니 뭐니 하는 것과 영 연이 없는 식자(識者) 아내들의 비애였다. 하긴, 저 둘이 평소부터 자연스럽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나로서도 상상이 잘 안 갔다. 특히 다나.

“……으흠.”

“흠흠…….”

라리루라처럼 달려와서 포옹이라도 하면 될 텐데, 그런 건 자기들답지 않다는 생각에 눈빛만 교환하고 있는 둘이었다.

머리 좋기로는 슈퍼 엘리트인 나 못지 않으면서 저러고들 있다니. 고고학 얘기로는 삼일 밤낮도 쉼없이 떠들 수 있을 미녀들이 애교 하나 못 부려서 저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존나 귀엽기 짝이 없다.

‘이게 찐따미라는 건가. 좀 꼴리는데.’

내가 저 찐따 미녀 콤비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키스라도 해 줄까 했는데, 베로니카가 선수를 쳐서 말했다.

“여, 여급(女給)이 말하기로는 7시까지 오면 된다더구나. 2시간 이상 남았으니 여유롭게 준비하거라.”

“그랭.”

뭐,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다. 언젠가 저 고학력 찐따미 콤비가 수치심에 몸부림치며 애교를 부려주는 날을 기대하자. 나는 라리루라의 허리를 감고 뺨에 키스를 돌려줬다.

무기를 들고 깝싼지 반 년 된 야매 드루이드가 미스릴 클래스의 기사단장이랑 무예에 대해 얘기를 나눠야 한다는 걱정도 라리루라의 애교 한 방에 싸악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우리 후배님 같은 미녀가 달라붙어서 애교를 부려주면, 팔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에 근심걱정이 싹 달아나고 기운이 물씬 솟아나는 것이었다. 역시 아무리 변명해도 남자는 쥬지에 좌우되는 생물인가 보다.

“선~ 배~? 간지러운데요~♡?”

내 키스에 라리루라는 자라목을 하면서 꺄르륵거렸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사랑에 충만한 눈빛이 쥬지에 큥큥 울렸다. 시발, 오늘 어디 가지 말고 라리루라랑 뒹굴 걸 그랬나. 왜 저녁 식사까지 2시간밖에 안 남은 거지.

이건 거의 중독증세다. 이 녀석 애교는 중독성분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여간 귀엽게 구네. 너 내 인내심 시험하냐?”

“아핫♡? 굳이 시험 안 해도 얼마나 유혹하면 넘어올지 다 알거든요~?”

“지금 나 90%는 넘어간 것 같은데?”

“유감~. 이번 주는 안 되요~.”

살갑게 웃은 라리루라는 검지끼리 교차해서 X를 만들었다. 아, 마법의 날인가. 리얼한 얘기가 훅 들어오니까 정신이 확 드는군. 나는 아쉬움에 후배님 목에 키스를 한 번 더 하고서 물러났다.

구석에서 베로니카가 꼬물거리는 게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부담 없는 자리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불렀다면 모를까, 식사 자리에 노인네가 앉아있으면 편하게 밥도 못 먹지 않겠나.〉

〈흐흐헤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르신 같은 분께 삶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니, 그게 얼마나 값진 시간인데요.〉

나는 립 서비스를 털었지만,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코르넬리우스 어르신께서는 피식거리며 웃기만 하셨다.

〈며늘아기도 손주도 건강에 큰 문제는 없다더군. 식사 자리에 못 나온 건 자네가 이해해 주게. 내가 앞으로는 제발 몸조리에 신경 좀 쓰라고 엄명을 내려뒀거든.〉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군요. 경하드립니다.〉

〈고맙네.〉

프리모르의 아이도 내 예상대로 어르신 아드님의 친자식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네 친구, 티르시 양.〉

마찬가지로 식사에 초대받은 티르시를 보던 어르신은 지팡이를 짚으며 말씀하셨다.

〈그녀도 몸에 별 문제는 없다더군. 단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기력이 조금 쇠하긴 했다는 모양이니, 옆에서 식사나 잘 챙겨주게. 오리고기나 전복 같은 걸 먹게 하면 되겠지.〉

〈일부러 감사합니다.〉

으리으리하게 차려진 진수성찬의 뒤로 나를 잠깐 부른 건 진단 결과를 말해주기 위해서일까.

이 가문 사람들은 귀족치고는 참 엉덩이가 가벼운 듯 했다. 서민인 내가 보기엔 그것도 장점이지만 말이다.

〈기사단장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있게.〉

마지막으로 나에게 다시 약간의 부담감을 주고서 어르신은 집사장을 대동하고 떠나갔다. 아니, 부담을 줄 생각은 없었을 테지만 내 입장에서는 밥 먹기 전부터 체한 기분이다. 쓰벌.

“……밥 묵자.”

어르신과 얘기하고 돌아온 내가 그렇게 말하자, 우리 가족+티르시의 6인방은 10미터 짜리 긴 테이블에서 휘황찬란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덥썩.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나 보일 듯한 음식들은 맛도 생긴대로 끝내줬다.

메이드나 집사들이 옆에서 쳐다보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 아내들도 이번에는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식사를 했다. 어쩌면 프리모르가 저번에 교구장과 식사할 때를 생각하고 말을 전해줬던 걸지도 모르겠다.

“오, 뭐야? 천익장 시상회에서나 봤던 고급 식재료가 마구 굴러다니네.”

“으으응! 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요☆!”

“라리루라, 첫 스푼인데 단 것부터 먹는 거야……?”

간간히 요리를 들여오는 메이드를 빼면 우리 파티만 있는 자리였기에, 적당히 잡담이나 나누면서 즐길 수 있었다. 나는 뭔지 모를 동그란 내장 요리를 나이프로 자르면서 물었다.

“티르시. 몸은 괜찮은 것 맞죠?”

“읍?! 아, 으읍! 네, 네!”

오리 다리를 먹던 티르시는 내가 말을 걸자 깜짝 놀라서는 급하게 입에 있는 음식을 삼켰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한대. 먹으면서 말한다고 누가 추하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여러분 덕분에요. 일단 보편적인 병세는 없다더라구요.”

물을 마실 때 쯤엔 그럭저럭 전직 귀족다운 품위를 되찾은 티르시가 그렇게 말했다. 아마 〈강림〉 의식의 정확한 부작용은 제대로 연구해 보기 전까지는 말하기 힘들겠지.

나는 듣는 사람이 따로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말문을 뗐다.

“사르가디스로 돌아가면 연구가 필요하겠군요.”

“그렇겠죠. 하지만 그 연구자료가 유출되면 큰일이니 제 기숙사 방이나 마법사 길드에서는 못 둘 거에요.”

“저희 집에서 해야죠. 보안 강화에 좀 신경을 쓸 필요는 있겠지만요. 티르시도 와서 도와주시깁니다?”

담장을 보강하기보단 매직 아이템을 깔아두는 게 더 확실할 것 같다. 내 말에 티르시는 화색이 되서는 고개를 위아래로 거세게 헤드뱅잉 했다.

“네, 네! 물론이죠! 제 몸과 관련된 연구인걸요! 꼭 도와드리러 갈게요! 아니,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바로 달려갈게요!”

“흐흐. 그거 든든하네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얘기가 나온 김에 말했다.

“그러면 말인데요, 티르시. 혹시 저한테 바람 계통 마법을 알려주실 수 있어요?”

“바람 계통 마법이요? 어떤 종류로요?”

“어…… 응용하기 편한 마법이면 좋겠네요. 난이도도 조금 낮으면 더할 나위 없고요.”

하지만 나는 바람 마법에 무척 적성이 없었다. 이쯤 되면 눈깔 치트나 몇 개의 반칙 요소를 떼고 보면 마법 자체에 별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세계 록리 수준 어디 안 간다.

‘뭔 씨발 저위급만 벗어나면 습득이 존나 빡세져.’

마나 운용이라면 꽤 자신이 있다. 혈수마공으로 불사조를 만들어댈 수준은 되니까, 내 자뻑은 아니다.

그런데 정작 속성별 적성으로 넘어가면 저위급의 마법─〈타오르는 손길〉 등─을 제외하면 영 후달리기만 하더라. 오딘 년아, 내 마법 재능은 어느 쪽에 있는 건지나 알려줄 순 없겠니.

없겠지. 쓰벌, 좆도 도움 안 되는 년.

“갑자기 바람 마법은 왜?”

프랑이 궁금하다는 듯 묻길래, 이미 죽었다는 마법의 신을 씹어대던 나는 후딱 대답했다.

“필요한 곳이 있어서 그래. 싸울 때도 도움이 될 거고.”

일단 절대천공영역의 발동에도 강력한 바람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구름 생성〉의 출력 강화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 외에도 아르마알스 가문의 검술을 분석하다가 눈치챘던 부분도 있다. 기사단장이 이상한 걸 물어보면 그 점을 언급하면서 어떻게 아는 척 해 볼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는 내 마나를 바람의 마나로 바꿔줄 마법이 필요했다.

정확하게는 그 마법의 술식이 말이다.

“가능하다면 하루이틀 정도로 습득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완벽하네요.”

너무 쎈 마법이라면 내가 못 배울 거다. 그리고 응용력이 낮으면 오딘의 눈으로 Re-프로그래밍을 해도 절대천공영역 등에 쓸 만한 출력으로 개조하기도 힘들어질 것이었다.

“음…… 응용하기 쉬운 바람 마법인가요…….”

티르시는 고민하는 듯 포크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원래 얼법인 티르시는 바람 속성의 마법을 많이 알지는 못 할 것이었다. 고민하게 될 만 했다.

나한테 알려준 〈정화〉는 바람 마법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바람과 큰 연관이 없고, 그녀가 전투용으로 쓰던 게 있기는 했지만 딱 봐도 중위급 이상의 마법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티르시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해요. 저한테 이상하게 배우시기보다는 마법사 길드를 찾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짚이는 마법들이 있기는 하니까, 나중에 후보를 알려드릴──.”

습득하진 못했어도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는지, 티르시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딱 멈췄다. 그녀의 얼굴에 좀 빨갛게 달아오른 듯도 보였다.

“어, 음. 그, 괜찮으면 저랑 같이 가시겠어요? 제가 가서, 어떤 마법이 좋은지 같이 봐 드릴 수 있는데…….”

“넹? 흐흐. 아니에요. 후보만 알려주십셔. 아내랑 다녀올게요.”

내가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자 티르시는 입을 닫고 얼굴이 더 빨개졌다. 마치 사랑하는 소녀가 은연중에 호감을 드러냈다가 까인 듯한 반응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도끼병에 걸린 새끼처럼 굴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호감이 쌓일 일은 많긴 했지만, 호감이란 게 전부 이성 간의 감정만 있는 건 아닌 법! 안 그래도 저번에 티르시가 파티 가입을 부탁할 때 헛다리를 짚고 개쪽을 살 뻔 하지 않았는가.

“베로니카. 너 내일 모레 시간 돼?”

나는 자살하고 싶은 사람처럼 무안해 하는 티르시를 적당히 달래주고서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미식을 만끽하던 우리 시종님은 입에 있던 음식을 삼키고 밝게 웃었다.

“상관없다. 주인님이 시간을 내라면 없던 시간도 내야겠지. 왜 그러느냐?”

다 들었을 텐데도 시치미를 떼는 건가. 나는 픽 웃었다.

아니지. 어쩌면 겉보기로만 침착하게 먹던 것처럼 보일 뿐, 주변 이야기가 제대로 안 들릴 정도로 식사에 몰두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의 식사는 그만큼 맛있었으니까.

평소에는 비교적 지적이고 섹시한 타입의 미녀인 베로니카지만,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즐길 때는 어딘가 철없는 어린애 같을 때도 있다.

볼이 빵빵해지도록 떡볶이에 튀김을 찍어먹는 중학생인 것 같아서 보고 있으면 즐겁다. 아이스크림을 쥐어주고 싶은 삼촌 같은 마인드가 된다.

나는 고개를 모로 꼬며 묻는 귀여운 아내에게 미소지었다.

“우리, 내일 모레 데이트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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