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89화 (389/1,009)

빵과 서커스라는 말이 있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불만이나 근로 의욕을 컨트롤하는 방법에 대한 비유인데, 이건 이 미-개한 이세계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예를 들자면, 아르아말스 가문의 저택이 있는 에투르 라스나에는 로마니아의 주요 정책 중 하나인 콜로세움이 있었다. 이세계판 종합경기장 정도의 포지션이지만 저 정도 크기라면 볼거리는 충만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찐따미 넘치는 여신님이 마초와 몬스터들의 피 튀기는 싸움을 보면서 흐헤헿 거릴 것 같진 않았다.

발할라의 개념이 존재하는 아스가르드의 여신님이면서 그쪽 방향에 흥미가 0라니 좀 모순적인 것 같기도 하다.

신대인들의 감성에서 ‘종목도 불문하고, 죽지 않는 몸으로 영원히 싸울 수 있다’는 말은 21세기 지구인인 내가 받아들이는 거랑은 조금 다른 뜻이겠지.

아마 그들에게 발할라란 PC게임, 콘솔 게임, 격투 게임을 불문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질리도록 막고라를 뜰 수 있는 천국 쯤 되는 포지션이 아닐까.

얼음지옥 VS 멀티 PC방이면 나라도 후자를 고르겠다. 천국 맞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기에 내가 가장 먼저 베로니카를 데려온 곳은 연금술 길드였다.

몇 번 말했다시피 이세계의 연금술은 금속 재련과 약초학, 마법 등을 포괄하는 분야다.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에투르 라스나의 연금술 길드는 주로 약초와 식물의 재배에 몰두하는 곳이라고 한다.

하급 기사들에게 브람마톤 교수님의 PT를 시행해준 대가로 들은 내용이었는데, 그럴 만도 했다. 이 주변은 원로원 가문의 땅이니만큼 토지도 풍요로울 테니까. 좋은 식물이 자라겠지.

“흐응. 마법사니까 시약이 넘쳐나는 곳으로 데려가면 기뻐할 거라는 발상이더냐? 뭐, 안일하게 포장마차 순례나 역사 깊은 건물 등을 고르지 않은 것만은 높이 평가하겠다. 나쁘진 않구나.”

“그 캣닢부터 내려놓고 말하렴.”

그렇게 소중하게 끌어안지 않아도 아무도 안 훔쳐가.

이세계의 애묘 문화는 귀족 계층 밑으로는 실로 처참했다. 시골 개처럼 사람이 먹고 남은 밥을 먹이는 사람도 흔하고, 애초에 동물에게 먹이를 주며 기르는 사람도 적은 편이었다.

그런 만큼 올해의 깡촌 of 깡촌에 노미네이트 될 법한 사르가디스에서 캣닢 따위를 팔 리가 없다.

베로니카는 고양이가 좋아 죽는다는 저 이파리의 존재조차 몰랐는지, 재고를 전부 털어가려는 걸 만류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우리 집에 텃밭이 없었으면 아무도 그녀의 매점매석을 막지 못했겠지.

아마 〈정화〉 마법이 아니었으면 베로니카의 옷에서는 늘 고양이 털이 튀어나왔을 거다. 그게 애묘인의 숙명이지.

흥분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베로니카는 궁색하게 변명했다.

“이건 그…… 그거다. 그대가 순찰을 시키는 고양이들에게 줄 포상 같은 개념의 그것이다. 알겠지?”

“나도 아직 못 받아본 아내님의 포상을 고양이가 먼저 받아가다니, 남편놈은 무척 배알이 꼴리는 거에요.”

“질투하지 말거라. 나중에 주마, 나중에.”

“해-피.”

그렇게 업계 포상은 예약 받을 수 있었지만,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서 캣닢은 내가 쳐먹는 풀떼기보다 비쌌다. 사람 사료보다 동물 사료가 비싼 건 이세계도 똑같다. 시발거.

“이것도 사 가자. 포모나 교단에서 직접 축성한 과일 나무인데, 1년이면 다 자란대.”

나는 묘목 코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분에 담긴 묘목이 내 눈에 보일 만큼 뚜렷한 풍요의 마나를 품고 정렬해 있었다.

“어떤 걸로 살래? 하나 골라 봐.”

“……내 마음대로 골라도 되겠느냐? 다른 아내들의 의견도 구하고 사자꾸나.”

“이미 좋아하는 걸로 사 오라고 듣고 왔어. 우리 가족 중에 과일을 제일 잘 먹는 건 너니까.”

웬만한 남자라면 다 알 것이다. 과일이란 게 어머니나 할머니가 깎아주지 않으면 입에 댈 기회가 좀처럼 없다. 직접 사기에는 좀 비싸거나, 맛있는 놈을 고르지 못하거나 해서 손이 잘 안 가니까.

유통망이 범죄자 새끼들의 뇌처럼 발달하다가 만 듯한 이세계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과일은 유통이 어려워서 보통은 주변 과수원이나 시내에서 기르는 걸 파는데, 가격대가 미쳐돌고 맛도 좀처럼 없다. 존나 시거나 존나 밍밍하거나였다.

‘고삐리 시절 급식보다 딸리니까 말 다 했지.’

거기다 일가족 중에서 비타민을 챙기는 건 프랑 정도여서, 우리 집 식탁에는 과일이 좀체 안 올라왔다. 술 안주로 가끔 올라오는 정도일까.

“베로니카 너, 고향에 있을 땐 과일 자주 먹었을 거 아냐. 우리 집에 마당도 있으니까, 과일 나무를 한 그루 쯤 있어도 되지 않겠어? 취미 삼아서 길러보자.”

성지에 숨어 사는 바이콘들이 동물을 사냥하거나 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성지란 곳도 현실과 격절된 이계는 아니니까, 동물들이 안에 들어오긴 하겠지. 하지만 주식으로 삼을 만큼 자주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성지의 땅 자체는 젖과 꿀이 흐르는 초원이었다.

아마 가끔 나가서 몰래몰래 사냥해 오는 육류를 빼면 바이콘들의 주식은 엘프처럼 식물이나 과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베로니카는 쌀밥을 못 먹은지 한참 된 코리안 미국 유학생 같은 상태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자 베로니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과일을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느냐? 따로 말하거나 한 적은 없었을 텐데.”

“어제 저녁 식사 때 보니까 과일 요릴 무지 잘 먹더만 뭘. 다른 음식도 많았고 사양할 만한 자리도 아니었는데 과일에 손이 자주 가길래, 좋아하는가 보네. 진작 물어볼걸~ 했지.”

지금까지 눈치 못 채서 미안할 정도였다.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밥 먹으면서 한 번도 말을 않길래 고향에서 질리도록 먹어서 관심이 동난 줄 알았지.

내가 그걸 알아차려준 게 완전히 예상 밖이었던 걸까. 베로니카는 조금 기쁜 것처럼 웃었다.

“……그럼 사과로 부탁하마.”

“사과라. 여신님께 어울리는 과일이군.”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역시 신이라고 하면 사과지. 에덴 동산이든, 황금 사과든, 데스노트의 사신이든 간에.

〈구매 감사합니다!〉

디아볼로를 족치고 번 돈으로 지불하고, 사과 나무 묘목은 이번에도 석판 속으로.

사과가 열매를 맺으면 냉장고 같은 걸 사서 장기 보존해야 할까? 아니, 열매를 맺는 철 안에 다 먹을 정도려나. 그래도 냉장고 정도는 사 두고 싶은데.

돈이 생기니까 쓰고 싶어서 죽겠군. 나는 기지개를 피면서 다시 베로니카의 손을 잡았다.

“다음은 이쪽이야. 여기도 무슨 박물관이 있다고는 하던데, 거긴 별로 볼 게 없다더라고. 대신 꽤 유명한 서점이 있대.”

“서점?”

귀를 쫑긋 세우는 베로니카였다. 벌이가 괜찮고 글 읽을 줄 안다는 이세계인 치고 책 싫어하는 사람은 적다. 이세계의 웹소설인 향락소설도 있기는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인간 문화를 거의 글로만 접했을 베로니카 역시 서점에 도착하자 눈을 빛냈다.

새초롬하게 냉안시하고는 있지만, 목 위로는 터렛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어서 미처 기분을 숨기지는 못하는 중이었다.

나는 나대로 서점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운 크기에 감탄하고 있었고 말이다. 유명한 서점이라더니만 확실히 그래 보였다. 가게를 보는 사람도 무척 많았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가요?〉

그렇게 베로니카가 서브웨이에 처음 와 본 대학생처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자, 카운터에 있던 여성이 물었다.

“읏.”

베로니카는 그녀의 인사에 안색을 굳히며 백스텝을 쳤다. 음. 이런 반응에서 상대방의 사정을 알고 싶진 않았는데.

카운터를 보던 여성은 베로니카만한 미인이 기겁하면서 자신과 거리를 두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몸 상태를 점검하기까지 했다. 미안해요, 우리 아내님이 병이 있어서.

나쁜 뜻은 없을 겁니다. 아마.

〈뭐 도와 드릴까?〉

그때 다른 점원이 상황을 보다가 말을 걸었다. 책방에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이번에는 과연 상대방의 나이가 나이여서인지, 베로니카도 한결 표정이 편해졌다.

〈그, ‘나탈리아의 댐’은 있느냐? 도미수스의 다른 작품이나 ‘찬색의 외마디’도 좋다.〉

〈호? 어이쿠, 이거 책 팔 맛 나는 손님이셨군. 그런 옛날 명작을 다 찾고. 따라 오시겠소?〉

장유유서가 천박한 농담이 된 이세계여서일까. 노인은 고풍스러운 하대를 신경 쓰지도 않고 말했다. 아무튼 베로니카의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면 찾던 책이 있어서 기쁜 모양이다.

‘베로니카가 흥미를 보이던 건 주로 다른 종족들의 문화 쪽이었으니까.’

그래서 데이트를 구상할 때도 그걸 염두한 거였는데,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아니다. 이건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미리 깨달았어야 하는 부분이었는데, 일이 계획대로 된다는 건 말처럼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데이트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있는 것은 다른 바이콘들이 성지에 가져온 책들이나 그녀가 여행하며 운 좋게 얻어온 책들이 아닌,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손님의 흥미를 자극할 법 하다고 판단하고 모아둔 책들이었다.

─반짝반짝.

손만 뻗으면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는 환경은 베로니카를 장난감 코너에 처음 와 본 어린아이처럼 만들고 말았다. 활자의 매력에 푹 빠진 그녀의 눈동자는 옆에서 봐도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게 그녀에게 어울리는 교양 서적이 아니라, 흥미 위주로 전개되는 평범한 수필이나 소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머리에 딱히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결국 내가 오늘 준비한 계획도 모두 그녀에게 저런 표정을 짓도록 만들기 위해서였기 때문이겠지.

목표를 달성했는데 아쉬울 이유가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유동적으로 설계했던 계획을 가볍게 철폐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여길 데려올 걸 그랬나.’

이제부터는 베로니카를 도서관에 자주 데려가 주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사르가디스에도 꽤 커다란 도서관이 있기는 했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좋은가 싫은가조차 알기 힘든 법 아니던가. 나도 내가 모험가 일에 이렇게 잘 적응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라도 일단은 베로니카가 혼자서 바깥을 다닐 수 있도록 손을 써야 했다.

베로니카는 나갈 일이 생기면 꼭 지금까지 나나 다른 아내들이랑만 외출했지만, 그런 궁여지책을 몇 년씩 이어갈 수도 없기 마련이었다. 결혼 후의 호적 등록 문제도 있다.

‘……신분 제작이 시급하겠어.’

브리타니아의 인맥에게 방법을 물어보거나 헨네시스 영애 쪽 라인에 타진하는 수밖에 없을까.

나는 손에 든 책보다는 그쪽에 머리를 쓰며, 서점에 놓인 테이블에서 사색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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