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렇게 서점 안에서만 무려 3시간이 넘도록 보낸 것으로,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번 데이트 코스를 조사한 시간은 일반 지리상식을 습득한 셈 치자고 넘어갔을 무렵.
베로니카는 그때가 돼서 문득 제정신을 되찾은 것처럼 옆 자리에서 책을 읽는 나를 눈치챈 것처럼 입을 벌렸다.
아마 그 순간까지는 그냥 ‘남편이랑 책을 읽는다=즐겁다’ 같은 식의 단락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진 사람처럼 티가 확 나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서점 데이트라고 치면 꽤 건전하고 즐거운 시간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 그만 가겠느냐?”
“그럴까? 몇 권쯤 더 사갈래? 책은 도로 팔기도 쉬우니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지만, 베로니카가 이상하게 사양하지 않도록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내 얄팍한 거짓말은 그 자리에서 탄로나진 않았다.
〈다음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3시간에 걸쳐서 이미 구매한 책과 새로 고른 책이 석판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숫자가 10권을 가볍게 넘기는 했는데, 자기 돈으로 그걸 구매하는 베로니카에게서는 아쉬워하는 기분마저 느껴졌다.
나는 그런 아내의 모습에 조금 자책감을 느꼈다. 일족에게 걸린 신의 저주를 푼다던가 하는 멀찍하고 장대한 목적보다는 이런 소소한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베로니카가 내게 먼저 뭔가를 부탁하지 않은 건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 것도 있겠지만, 따로 뭔가를 바랄 만큼 인간 사회에 빠삭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맹렬한 미안함에 자괴감이 맥시멈이 되는 거에요.
‘……간단하게 악세서리라도 선물해 주고 싶은데, 보석류보다는 기념품 같은 걸 더 기뻐하려나?’
그리고 미안한 마음은 곧 만회하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속물적이어서 미안하게 됐다. 킹치만 우리 아버지는 결혼기념일을 잊었을 때는 꽃다발이랑 백화점 상품권으로 사죄하는 분이었다고. 그 분 밑에서 자란 내가 오십보 백보인 건 가정환경의 문제다. 내 잘못이 아니다.
‘아무튼 저번에 샀던 하찮게 생긴 고양이 조각상도 방에다 장식해 놨던데. 분명 기념품 가게가 여기서 왼쪽──’
─끼이익!
나는 전방 100미터 지점의 보석샵에서 ‘반지 세일’이라는 간판을 발견하고 마하로 우향우 했다.
“베로니카, 다음은 오른쪽이야.”
“응? 아, 그러자꾸나.”
다행히 베로니카는 거리를 구경하느라고 눈치 못 챈 듯, 내 인도를 의심없이 따라왔다. 나는 속으로 안심했다.
‘쓰벌!! 존나 놀랐네!!’
애꿎은 보석 가게에 욕을 한 사발 퍼붓는 나. 베로니카가 저 가게 앞에서 멈춰서기라도 했다간 존나 씹 가불기였다. 즐겁고 행복한 데이트가 순식간의 지옥의 현현으로 바뀌어버릴 것이었다.
다나가 우느냐, 베로니카가 우느냐.
혹은 순번을 새치기당한 우리 눈나가 이 일을 평생토록 마음에 두게 하느냐와, 눈앞에서 쓰루당한 여신님이 평생 자신은 몇 번째인지 신경 쓰며 살게 만드느냐의 선택지였다.
이 무슨 밸런스 개좆망 게임이란 말인가. 어느 걸 골라도 배드엔딩 직행이잖아. 이게 미연시였으면 스팀 환불 사유다.
‘넥스트 타임 베이비.’
나는 빌어먹을 보석샵에게 보류 딱지를 붙이고 빙 돌아서 기념품 가게로 갔다. 술부터 악세서리까지 별별 물건을 파는 가게였는데, 나랑 손을 잡고 걷던 베로니카가 갑자기 멈췄다.
“이 기척은…….”
“왜 그래?”
베로니카는 내 말에 눈을 찌푸리다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손목의 팔찌에 손이 가면서 마나가 눈을 떴지만, 다행히 뭐 싸울 일이 생기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대여. 잠시 따라와 주겠느냐?”
“위험한 일은 아닌갑네. 그래, 가자.”
좀 전과는 반대로 베로니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 인도를 따라서 골목 사이로 들어갔다.
골목이라곤 해도 사악한 씹새끼들이 암약할 법한 공간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냥 편의점 뒤쪽 골목 같은 느낌이다.
공사현장처럼 널찍한 뒷마당에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거기에서 두 남자와 어린 여자 아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더라.
〈대량으로 빚은 기념주가 악성 재고가 된 것은 애도를 표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남자 1명은 그렇게 말하며 마당을 빠져나갔다. 남은 남자는 당황하며 소녀에게 뭐라고 말해주고서 그를 쫓아갔는데, 베로니카는 그렇게 남겨진 소녀를 보고 기쁘게 외쳤다.
“역시!”
나도 나대로 그녀의 놀란 소리를 들으며 납득했다. 베로니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눈치채서였다.
“베로니카. 그 모습이면 못 알아볼걸.”
“으, 확실히 그렇구나.”
생각 없이 소녀에게 향하려던 베로니카는 내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서 망아지 모드로 변신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굴욕적인 모습일 텐데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아마 그만큼 재회가 기뻤기 때문일 것이다.
〈……앗!!〉
소녀도 저주 받은 모습으로 변신한 베로니카를 알아봤다.
시무룩하게 집으로 들어가려던 소녀의 얼굴이 눈에 띄도록 밝아졌다. 그녀는 나와 베로니카에게 경계심도 없이 집의 문을 활짝 열어버리고서는 뛰쳐나왔다.
〈아서 오빠! 망아지야!〉
말로 변신한 베로니카가 움찔했다. 아, 그래. 그때는 아직 저주가 최대치여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은 대화 한 마디 못 했었지. 이름을 모를 만 했다.
나는 고개를 젓고서 예전에 쓰던 아서 웨인의 말투를 다시 입에 담았다.
〈오랜만이에요, 로잔나.〉
그녀는 작년까지 서커스단에 붙잡힌 베로니카를 보살피던, 로마니아 인 곱추 소녀였다.
***
내가 아무리 사람 이름을 잘 잊는다지만, 세 글자 이름의 가여운 소녀까지 잊지는 않았다.
이미 억지로 휘어졌던 등이 완벽하게 나아서 평범한 소녀로 돌아온 로잔나는 양조 업자인 아버지를 따라서 에투르 라스나까지 이사를 왔다고 한다. 도시의 치안과 척추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전부 다 웨인 씨의 지원금 덕분입니다.〉
로잔나의 아버지 마우로 씨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마구 쏟아냈다.
일단 아서 웨인답게 옷과 나무 토막을 변신시켜서 가면이랑 코스튬을 입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딸을 납치당한 경험이 있던 그는 수상쩍게 생긴 나를 보며 날뛰었었는데, 로잔나의 설명을 듣고서 우리를 집까지 초대한 것이었다.
〈예전에 살던 곳보다 치안도 좋고, 포모나 교단의 중책을 맡은 사제님도 계셔서 저희 가족들도 전부 이렇게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잘 지내시는 듯 해서 다행입니다.〉
경험 상 뭐라고 부정해봤자 의미도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사소한 인연과 우연한 재회였지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있었다. 베로니카가 로잔나에게 감사하고 싶어 할 거라는 게 가장 큰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의문과 호기심이었다.
〈사실 감사 인사를 받을 처지도 아닐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 탓에 마우로 씨 댁에 불행이 닥칠 공산도 있어요.〉
〈더 이상 불행해질 수 없었던 저희에게 딸아이를 돌려주셨는데, 사소한 불행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사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문제지. 나는 한숨을 쉴 뻔한 것을 참으며 말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런 의미에서 묻겠습니다만, 혹 딸아이와 재회한 뒤로 제 인상착의 등을 캐묻는 수상한 사람은 있었습니까? 가족 중 누구에게든요.〉
〈웨인 씨를……? 아뇨. 없었습니다.〉
마우로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제 딸아이가 웨인 씨의, 그, 맨얼굴을 봤다는 이야기는 저 역시 들었습니다.〉
〈예. 우연한 만남이었으니까요.〉
〈웨인 씨에겐 우연이었더라도 저희에게는 기적이었습니다. 딸에게도 나날이 신신당부를 하고 있으니, 누군가에게 말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저도 그렇죠. 만에 하나 제가 알았다면 댁에 감사의 편지부터 보냈을 겁니다.〉
그쪽 걱정도 있기는 했다. 어쩌면 로잔나의 가족이 그녀를 별로 아끼지 않거나 내가 베푼 은혜를 좆으로 여겨서 남에게 내 몽타주 등을 팔아넘길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보는 한 그런 쪽 문제는 없을 듯 했다. 남은 염려는 다른 쪽이다.
〈걱정을 덜었군요. 하지만 저를 쫓아온 사람이 있는가도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내 걱정거리는 하나다. 〈편찬대대〉에서 타뷸라의 죽음을 의문시하고 조사한다면, 운송 길드장과 엮인 아서 웨인이나 티르시까지 도달하는 게 어렵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헤이스벤트의 서커스단 사건까지 쫓아가는 것도, 내 맨 얼굴을 아는 로잔나를 찾아내는 것도 가능했다. 그들의 증언을 고문이나 심문 등으로 캐내거나, 서류로 남은 증거를 쫓아온다면 어려울 건 없었다.
내가 하도 진지하게 물어서인지, 마우로는 나에게 의심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끙끙대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딸아이가 어떻게 돌아왔느냐고 묻는 사람은 많았지만, 당시에는 저도 아내도 이웃들을 의심하고 있던 차였기에 대답해 준 적은 없습니다.〉
〈로잔나에게도요?〉
〈예.〉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다. 100%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전제에서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편찬대대〉는 낙오자들의 죽음엔 신경 쓰지 않아.’
그래서 내게는 추살자가 붙지 않은 것이다.
내가 하프 인간으로 여기던 타뷸라는 〈인신〉이 되지 못한 ‘낙오자’였던 거겠지.
‘지금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단서를 합쳐보면, 이건 거의 확실한 결론이야.’
그들도 야수회귀의 부작용을 받은 나처럼 몸에 변화가 일어났던 걸까.
‘나야 쥬지가 여의봉이 되고 끝났지만, 타뷸라의 부작용은 그 추악한 얼굴이었던 거겠지.’
프랑의 원수였던 투스타스 상회장도 비늘이 돋아난 몸을 가졌으니까 증세는 천차만별이겠지만, 아무튼 그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뷸라의 와꾸와 자존심을 동시에 깎아내리는 따따블 도발을 걸어버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존나게 개빡돈 나머지 자기보다 수준도 낮은 내게 당해버렸던 듯 하다. 존나 꼬시다, 하프 인간 새끼.
어쨌든, 그렇게 〈인신〉이 못 된 그들의 역할은 심플하다.
‘낙오자’이자 ‘하수인’.
‘그게 타뷸라를 비롯한 〈편찬대대〉의 ‘실패작’들이 맡는 역할이겠군.’
그들은 〈인신〉의 제물이 될 어린 아이들을 회수하거나, 타국에 분노조절장애 염료를 뿌리는 하수인들이었다.
〈인신〉의 제물로는 어린애들만 쓰이는 듯 한데, 그러면 하수인으로 쓸 자들은 애초부터 성공시키지 않을 생각으로 했던 게 아닐까. 부하들의 전투력을 늘릴 수도 있고, 〈인신〉 실험의 표본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부려 먹다가 뒤지면 끝. 굳이 누가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했는지까지는 조사하지 않는다.’
거기까지라면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우리가 투스타스 상회장을 족쳤다는 점이다.
‘우리는 토르의 〈인신〉인 엔리르를 죽이고, 니다벨리르를 효과적으로 망쳐오던 초대형 프로젝트까지 막아버렸어.’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추적자가 붙었을 것이다.
토르의 성좌를 빼앗은 ‘성공작’을 죽여버릴 정도의 존재가 자기들의 존재를 알고, 적대시하기까지 한 것 아닌가. 〈편찬대대〉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진 않겠지.
‘적이 우리를 쫓아오길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위치를 찾아낸다면 선공을 때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협력자를 구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코르넬리우스 어르신에게 부탁했다간 거절당하려나? 말은 꺼내볼 만 했다.
만약 추적자가 붙었다면 투스타스 상회장의 동생이었던 조이드를 찾아볼 필요도 있을까. 혹시라도 그의 신변에 문제가 일어났다면 분명 〈편찬대대〉가 개입한 것이겠지.
‘캐서린한테도 편지로 의뢰해 보자. 방법이야 많군. 성공할 확률이야 어쨌든.’
중년의 쿼터 드워프 금발 태닝 양아치.
존나 특징적이기 짝이 없으니까 찾기는 어렵지 않겠지. 캐서린이 아직도 레나폴리스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만큼 개성적인 상대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충분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