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말 한 마디 없이 무작정 찾아와서 드린 질문이었는데 친절하게 대답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바쁘신 중에 여러모로 실례했습니다.〉
〈예? 버, 벌써 가십니까? 식사라도…….〉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무는 마우로였다. 그럴 수밖에. 가면을 쓰고 밥을 먹는 방법이 있다면 나도 배우고 싶다. 어쩌다가 가면 쓸 일이 많아진 처지걸랑. 꼭 알려주면 좋겠다.
‘짝퉁 토르를 죽인 놈이랑 아서 웨인을 엮을 단서는 없어. 이 사람들도 나랑 엮어서 험한 꼴은 안 겪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당장 나를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을 수상쩍은 범죄단체가 있는데, 내가 남을 걱정할 만큼 여유가 있진 않았다. 짝퉁 토르급 전력이 2명만 떠도 못 이길 가능성이 크니까.
〈로잔나에게 인사만 하고 가겠습니다.〉
베로니카랑 로잔나는 마우로가 돌아올 때까지 실컷 얘기를 나눴으니까, 그만 가자고 해도 떼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마당 쪽을 가리켰다.
〈아. 그리고 죄송한 일이게도 오늘 길에 의도치 않게 마우로 씨의 사업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양조업을 하시는 걸로 아는데, 혹시 기념주가 많이 남으십니까?〉
〈예? 아. 맞습니다. 에투르 라스나의 영주님께서 아드님을 잃으신 직후여서, 신년에 팔 예정이었던 기념주로 축배를 들 분위기가 아니었죠. 덕분에 많이 남았습니다. 혹시 몇 상자 가져가시겠습니까?〉
아까 전에 본 광경에서 추측한 내용을 묻자, 당황하면서 뭐라도 챙겨주려는 그였다. 나는 그 선량한 장사꾼의 모습에 동정심이 절로 솟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운이 없는 사람이다. 이사 온 곳에서 술을 팔려고 하자마자 악재가 겹쳐버린 거니까.
나는 사양하지 않고 몇 병만 챙기면서 말했다. 받아들고서 확인해 보자, 저번에 내가 라리루라랑 데이트하고 돌아가는 길에 샀던 술이었다. 별 우연도 다 있군.
〈제가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이 기념용 술들은 손해를 봐 가면서 처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어, 어째서죠?〉
〈그 영주님의 며느리께서 돌아가신 도련님의 아이를 임신하셨거든요. 곧 불티 나듯 팔릴 겁니다.〉
후계자의 맥이 끊겼다가 간신히 다음 대의 조짐이 보이게 된 상태 아닌가. 내가 어르신이어도 대대로 광고 때리고 다른 귀족들한테도 알리고 다닐 것이다.
출산까지 기다리는 게 보통이긴 한데, 그래서는 너무 늦다. 언론 플레이는 속도가 생명이다.
그리고 아직은 은은한 초상집 분위기인 이 도시도 그때가 되면 프리모르의 임신을 기념하면서, 생산량이 감소한 이 기념주를 사려 들겠지.
〈다른 도시에서 이 술의 재고를 운송해 오기 전까진 원래 가격으로 팔 수 있을 겁니다. 장사 번창하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군. 나는 피식거리면서 술을 챙겨 베로니카한테로 갔다.
〈음. 왔느냐?〉
베로니카는 망아지 상태로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변신을 풀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다. 로잔나는 자기가 보살피던 말이 사람의 말을 한다는 점만 해도 경악스러운 듯 했으니까. 원래 모습까지 보여줬으면 기절했을 것이다.
〈얘기는 다 했어?〉
〈음. 감사는 하지 말라더군. 좋은 주인님을 둔 덕분이지. 그대가 내 은혜도 대신 갚아준 걸로 퉁쳤다.〉
〈웨 내 동의도 없이 기브 앤 테이크 쌤쌤을 해 버리는 것?〉
〈후후. 싫으냐?〉
〈흐흐. 사실 별 상관없긴 함.〉
남편의 것은 아내의 것, 아내의 것도 아내의 것이다.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로잔나는 어른들의 분위기를 눈치 빠르게 살피고서 내 바짓춤을 붙잡았다.
〈……가는 거에요?〉
〈네. 로잔나가 건강하고 착하게 자랐다는 건 봤으니까요.〉
〈그러는 오빠는 저랑 했던 약속 어겼으면서.〉
나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는데, 로잔나는 눈을 도끼처럼 세우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보기에 그건 로잔나가 자기 어머니를 흉내 내는 듯한 모양새였다.
〈200밤도 넘었어요.〉
〈뭐가요?〉
〈뭐가요가 아니에요! 헤어질 때는 100밤만 자면 만날 수 있댔으면서, 오늘까지 200밤도 더 걸렸어요!〉
아하, 그런 얘기군.
어린애다운 투정에 나는 웃음을 참기 힘들어졌다. 그러고 보면 헤어질 때 그런 얘기를 했던 것도 같다. 100밤을 넘게 자면 다시 만날 수 있다던가, 그런 순수한 약속 말이다.
그걸 어겼으면 내 잘못 맞지. 나는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미안해요, 로잔나. 용서해 줄래요?〉
로잔나는 저번보다 키가 커졌다. 곱추였던 척추가 펴지고, 키가 더 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어린아이의 생명력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인생의 쓴맛을 이것저것 맛본 나한테는 굉장히 눈부셔 보이는 순수함이다.
〈……알았어요, 용서해 줄게요.〉
로잔나는 허리에서 손을 떼고 내 목에 포옹을 했다.
〈대신 또 와 줄 거죠? 이번에는 꼭 100밤 지켜서요.〉
이거 어린 아가씨가 조숙하신데 그래. 나는 쓴웃음을 짓고 이번에도 저번처럼 기약이 없는 약속을 나눴다.
〈물론이죠. 그때까지 건강하고 착한 아이로 있기에요?〉
〈네!〉
로잔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우는 아버지와 웃는 딸을 떠나서 길가로 나왔다.
당연히 그렇게 큰길로 나왔을 무렵에는 우리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였다. 참 변화무쌍한 부부도 다 있구만.
“이럴 때마다 운명을 부정하기 힘들어지더군.”
베로니카는 옆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인연과 재회라는 건 예측할 수가 없지. 끝났다고 생각한 인연이 이렇게 다시 이어지니, 기쁜 일이다.”
“반대로 끝나길 바라는 인연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편찬대대〉라든가, 〈임모르탈리스〉라든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헤니르와 아이들이라든가.
좋은 만남이 있으면 좆 같은 만남도 있다.
한창 성장통을 겪던 고삐리 강북호는 그 사실을 소환사의 협곡에서 배웠다.
“그건 감안해야 할 문제겠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인연과 만남이라는 주제를 들으면 고민이 되는 점은 있다만.”
“고민? 뭐길래?”
“꽤 중대한 문제다. 내가 그대의 아이를 낳아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지.”
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조금 이야기의 주제가 달라진 것도 같았는데, 하긴 생각해 보면 자식이 태어난다는 건 부부 사이의 인연에서도 어떠한 터닝 포인트이기는 했다.
부모와 자식의 연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말이다.
“……신족과 인간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가 하는 얘기야? 아니면 태아에게 걸릴 저주에 관한 얘기?”
전자라면 이세계 신화에 전례가 많으니 문제는 없다.
그치만 후자라면 내가 바이콘의 생태를 캐묻지 않았기에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부부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선은 있기 마련이었고, 남자들 중에서는 출산 과정을 보고 충격을 받고 아내를 향한 사랑이 식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자식 계획도 없으니까 묻지 않았던 것이다.
베로니카는 텔레파시로 말했다.
“임신이 성공한 다음엔 별 문제 없다. 애초에 우리 일족도 주변에 다른 종족이 없을 때라면 인간형을 취하니까. 성지의 바이콘들이 아이를 낳을 때는 산모도 아이도 원래 모습이다.”
“아, 그랬지 참.”
“일족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저주에 걸린 상태이긴 하다만, 만약 내가 임신하더라도 출산할 때까지 성지에 있다가 오면 끝날 문제 아니더냐.”
“그건 내가 싫은데.”
바이콘의 혼혈이 저주의 대상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임신 기간 중에 남편도 없이 보내야 한다니?
그런 건 평생 가는 불행한 기억 아닌가. 군인이나 출장이 많은 남편을 둔 아내들의 비극으로도 유명한 일인데, 그런 걸 베로니카한테 겪게 하기는 싫었다.
“말은 고맙지만, 사실 그 이전의 문제다.”
베로니카는 한숨을 쉬었다. 텔레파시는 그렇게 입이 걱정 가득한 한숨을 내뱉어도 막힘없이 들렸다.
“그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고, 나는 이 세상의 저주받은 신족이다.”
뿔이 없는 베로니카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 우리 사이에, 정녕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이 걱정이어서 어쩔 수가 없구나.”
“……………….”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런 식으로 치자면 프랑과 다나, 라리루라도 피차일반이긴 하겠지. 하지만 의문으로서는 큰 오류가 없다. 우리 가족들이 생물학적으로 같은 분류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니까.
잠깐 찬 바람을 맞으며 고민해 본 끝에, 나는 답을 내렸다.
“뭐 어때. 임신이 힘들면 다른 방법을 찾아내면 되지.”
“……다른 방법?”
베로니카는 당황하는 듯 했다. 이런 머리가 필요한 문제에 내가 이런 주먹구구식의 답을 내려놓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풀어가야 할 난제가 몇 갠데, 그 중에 너희의 임신 문제 하나쯤 껴도 티가 나겠어? 확실히 걱정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신이 다 죽어서 없어진 것도 아니잖아?”
나는 베로니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정말로 불안했었던 건지, 이 추운 겨울날에도 베로니카는 가쁜 숨을 쉬며 체온도 꽤나 높아져 있었다. 확실히 3류 괴담보다는 무서운 얘기였으니까.
“아직 살아있는 신을 찾아서 물어보려고. 이 세상의 역사에 나 같은 경우가 달리 없었는지, 그놈은 후사를 봤는지. 오래 살아온 신이라면 비슷한 케이스도 보지 않았겠어?”
“……후후. 쉽게도 말하는구나.”
베로니카는 기가 막힌 것처럼 머리를 저었지만,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가실 줄을 몰랐다.
허무맹랑한 소리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신뢰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증거라곤 없는 허세도 든든한 법이다. 베로니카는 얄밉다는 것처럼 내 손등을 꼬집었다.
“그대의 곁에만 있으면 내 고민거리가 전부 시시한 기우만 같구나.”
“한숨만 쉬어봤자 바뀌는 건 없더라고. 이거 경험담임.”
“아하? 논문을 도둑맞았을 때 얘기로군?”
“존나 그걸 굳이 짚고 넘어가네. 우리 마눌님 인성 무엇?”
“후흥. 여신은 잔혹하기 마련이지. 그대도 용사라면 여신의 시련 정도는 넘어 보이거라.”
“시련은 무슨. 집안 싸움이면 그냥 마누라 바가지지.”
“시련 쪽이 나을 텐데? 다른 아내들이랑 합세해서 괴롭혀 줄 수도 있다만?”
“와─ 노르 시련 너무 좋아해 메우─.”
영혼 없이 대답하던 나는 좀 전의 보석샵을 떠올리고서 불현듯 식은땀을 흘렸다.
‘천상의 시련 따위보다 눈앞의 반지 1~2개가 더 무서운 것 같은데.’
시련은 넘으라고 있는 거지만, 마음의 상처나 가족의 불화는 극복 못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자고로 타노스 같은 초대형 빌런보다는 패륜 살인마 윈터 솔져가 더 마음에 와닿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데, 데이트나 마저 할까? 아직 해도 중천인데, 놀러 가고 싶은 곳이라든가 없어?”
나는 궁여지책으로 이야기를 없던 것으로 한다는 수를 선택했다.
베로니카는 내 손을 먼저 잡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가고 싶은 곳이라. 흐음……. 저 건물이라든가는 어떠냐? 굉장히 독특한 외견이구나.”
베로니카가 가리킨 곳을 확인한 나는 그만 어색한 표정을 짓고 말았는데, 고개를 돌린 그녀는 눈치 못 챈 듯 말했다.
“본 적도 없는 건축 양식이군. 호기심이 자극되는걸.”
“……베로니카. 저건 말이지.”
귀족이나 부자들이 섹스하려고 세운 모텔이란다. 나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에 못 내고 머뭇거렸다.
앵간치 야만적인 국가가 아니고서는 종교랑 성행위라는 개념은 맞물리기 쉽지 않다. 신성제국이라는 국명을 달 정도인 로마니아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그보다 예외인 건 나르메르-나일의 노출증 신도들 정도 아니냐.
아무튼 그런 만큼, 신들의 눈을 가려줄 움막이 생겨나거나 발전하는 것 정도는 평범한 일일 것이다.
─꽈악.
그런데 내가 저 건물의 정체를 말하기를 망설였을 때였다.
베로니카는 눈치 없는 새끼를 꼬집기라도 하듯 내 손을 세게 쥐었고, 나는 덕분에 그녀의 빨개진 목덜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절로 내 얼굴에는 음충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흐응~? 헤엥~? 후응~?”
“……왜 그러지? 가고 싶은 곳을 말하라고 했던 건 그대가 아니더냐.”
이제 와서 손으로 가려봤자 달아오른 열기는 목을 넘어서 옆얼굴에까지 올라간 뒤였다. 나는 끝까지 시치미를 뚝 떼는 베로니카가 귀여워져서 실실 웃어댔다.
“나도 기대하긴 했지만, 아직 점심이 조금 지난 무렵인데? 벌써?”
“늦기 전에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 식사를 하고 다른 곳을 들리면 남은 시간은 거의 없을 텐데.”
아, 그러니까 하다 만 듯 끝나긴 싫다는 거군.
하여튼 우리 아내님들께선 한평생 광기의 절륜남만 상대해 봐갖고 그런가. 남편 밑에 깔린 채로 기절해서 오고곡 할 때까지가 원 스텝으로 착각하는 면이 있단 말이지.
‘덕분에 남편놈은 벌써부터 쥬지가 터질 것만 같아요.’
한창 임신 얘기를 하다가 이런 권유를 받고 넘어간다면 그날부로 나를 병원에 데려가는 게 맞을 것이다. 정신과든 비뇨기과든 다 치료 마법을 보유한 교단에서 처리하니까 고민할 것도 없겠네.
나는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베로니카와 둘이서 이세계의 섹스 호텔로 직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