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399화 (399/1,009)

최근 들어서 ‘업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예수게이로 시작된 장대한 야부리가 돌고 돌아서 오늘날의 지옥도로 이어지다니, 누가 알았겠는가. 그만 됐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오딘의 눈 페널티 때문에 말도 못하고 1시간 동안 생사를 겨룬 나였다.

오딘의 눈을 끄면 되지 않았냐고? 1초가 머다하고 몽둥이가 날아드는데 좆이나 가능하겠다. 벡안 끄면 공격예측 막혀서 휘두르는 족족 쳐맞겠더만. 씨팔아 니 목검에만 철심 박았지. 존나 아파 살려줘.

〈수고하셨습니닷!!!!〉

이 한 몸 바쳐서 볼거리를 선보여서 그런가. 대련을 끝내고 갓 태어난 새끼 젖소처럼 후달달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쿨한 키타이 대전사를 연기하고 있자, 기사들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마실 물을 대령했다.

‘내가 이 사람들한테 뭐 해주기라도 했나?’

그래도 일단 주길래 받아서 마셨다. 〈얼어붙는 손길〉로 차갑게 식히고 있으니까 막 대단하다 엄청나시다 아부를 떨어대더라. 아아, 이건 포터블 냉동장치라는 것이다. 지구에도 없는 것이지.

이거 동화 몇 닢 주고 배운 건데, 님들도 배우싈? 바람 속성 테크도 좋지만 얼음 테크도 꿀잼인데.

오러의 습득법에 더 가까워졌으니 손해는 아니었지만, 분명 목검인데 마나 코팅이 얇게 베여나갔을 때는 ‘아 씨발 그냥 돌아가는 길에 얼스터 군락에 들러서 물어볼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을 정도다.

그 문신 알비노 대전사님한테 칼춤이나 보여달라고 했으면 이 지랄 안 했어도 될 뻔 했는데.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사고가 편협해지는구나. 엘리트 대갈통의 이름이 운다.

〈뭔가 감이 잡히십니까?〉

후련하게 땀을 닦은 기사단장이 말했다.

분명 이 사람한테 가르침을 달라고 했던 건 내가 뭣 좀 건져 보자고 꺼낸 제안이었는데, 왜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 더 개운하고 얻은 게 많아 보이는 느낌이지.

그렇다고 얻은 게 별로였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간 밥 먹고 또 한 판 뜨자고 지랄할 게 뻔해서, 대충 괜찮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됐다 하고 겸양을 떨어주었다.

목검이라고 칼보다 덜 위험하리란 건 착각이다. 아버지한테 몽둥이로 쳐맞으면서 ‘아! 식칼보다 낫다!’ 하면 그건 긍정적인 게 아니라 쳐맞다가 뇌가 광기에 잠식된 거다.

존나 원로원 가문 칼질 대빵은 짬밥순이 아니더라. 쳐맞고 기절하거나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선방한 거였다.

기사단장, 나는 확실히 강해졌다. 너와 대등하거나 약간 더 이하야.

그렇게 내가 기사단장의 실력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데, 그는 그런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아아, 아뇨. 실력이 무척 뛰어나신 듯 해서요.〉

내 적당한 핑계에 기사단장은 가가대소를 터트렸다.

〈제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군요. 노르드 님께서도 무척 대단한 달인이시지 않습니까.〉

〈뭘요. 기사단장님은 물론이고, 마스터 클래스에는 조금도 못 미칩니다. 아직 갈 길이 멀죠.〉

이 이상 부담을 주지 말아달라는 뜻에서 겸손을 섞어가며 대답한 건데, 그는 신기한 듯 질문했다.

〈말씀하시는 걸 보면 혹시 마스터 클래스 분들을 만나뵌 적이 있으십니까? 그 분들이 그렇게 쉽게 뵐 수 있는 분들은 아닌데 말입니다.〉

〈예? 어…… 스스로 자칭한 분은 없었지만 제가 보기에 미스릴 클래스보다 강한 듯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력만 놓고 보면 단장님께서도 일반적인 미스릴 수준은 넘으신 듯 한데요.〉

시냐티오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녀가 미스릴 클래스보다 더 윗선의 전사라고 생각했다.

그 느낌에는 큰 착각이 없었고, 결과만 보면 시냐티오는 내 안에서 미스릴 클래스의 기준점이었던 네페르티티보다 강해 보였다. 종합평가가 아니라 전투능력만 평가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흠……?〉

그런데 기사단장은 뭔가 이상한 소릴 들은 사람처럼 팔짱을 꼈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노르드 님은 동방에서 오셨었죠?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요.〉

〈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전사의 강함을 평가하는 척도로 가장 유명한 것은 모험가 길드 연합의 클래스 제도입니다만, 저는 거기서 말하는 마스터 클래스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뎃?

나는 예상 밖의 겸손에 눈만 끔뻑거렸다.

이 기사단장은 시냐티오나 디아볼로에 버금가는 달인이다. 그건 직접 쳐맞아가며 확인한 내가 보증한다.

그리고 저들은 내가 보기에 네페르티티보다도 한 수 위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실력을 모두 봐 왔던 내가 내리는 평가다. 오차는 있어도 틀리진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그 소문만 무성한 마스터 클래스급의 전사나, 거기에 한 발을 걸친 수준의 달인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단장이 깨달음에 목매는 것도 다음 경지의 몇 발자국 앞에서 성장이 멈춰섰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음, 조금만 더 부연설명을 드릴까요.〉

기사단장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 클래스 제도란 모험가 길드 연합의 장(長)께서 직접 기준을 정하고 정립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께선 전사의 강함을 분별하면서, 미스릴 클래스를 ‘달인’이라는 경지의 중간지점 정도로 삼으셨다고 하더군요.〉

〈……오러를 다루는 게 중간지점이란 말입니까?〉

듣던 나까지 어이가 없어지는 발언이었다.

이세계 전사들의 90%를 개씹병신 중산층 미만의 하류인생으로 만드는 평가로군. 뭐지? 오러쟁이식 기만? 겸손을 너무 아는 사람인가?

‘검 배운지 1달 된 뉴비인데 검에서 마나가 나와요. 이거 좋은 건가요?’ 하고 묻고 다니나?

〈제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산의 정상에 오른 뒤에도 하늘의 높이는 변하지 않는다고요. 저도 10년쯤 전에나 간신히 그 말의 참뜻을 실감했습니다.〉

그는 허리의 검을 건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오러는 모든 전사가 동일하게 도달하는 경지입니다. 이 경지의 전사는 확실하게 달인이라고 불리죠.〉

〈아, 네. 그런 듯 하더군요.〉

이런 암묵의 룰이 처음 시작된 곳이 로마니아라던가.

예전에 카르미네 대학에서 고문서를 번역하다가 안 건데, 이세계 서방대륙의 선진국인 로마니아는 문화면의 영향력도 컸다. 유서 깊은 고대국가이니만큼, 이세계의 문화와 기술은 절반 이상이 로마니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브리타니아만 해도 공중 목욕탕이나 콜로세움 문화는 로마니아의 정책을 카피한 거였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로마니아는 마법사 길드가 발족한 국가다.

다시 말하자면, 룬 어를 개찬해서 만든 현대 마법들의 총본산이 로마니아라는 의미 아니겠는가?

‘마법사 길드가 새로운 마법 체계를 만들지 않았다면, 룬 마법을 봉인당한 이세계 인류는 우가우가 전사들만 남았겠지.’

그리고 고대 문명 이후로는 기술력이 전혀 발전 못 하고, 중세랜드가 되어버렸을 것이었다.

문화의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로마니아에 삐까뜨는 나라는 게르마니아 정도일까. 말하자면 이 두 국가가 현대 이세계의 문명을 선두하는 양두마차였다.

동방의 키타이. 유목 엘프의 국가.

나르메르-나일과 수메르니아.

그리고 이세계 식인종랜드인 아즈테카조차도 저들의 영향력에서 100%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본론으로 돌아왔다.

〈마스터 클래스라면 경우가 다른 겁니까?〉

〈경우가 다르다기보단, 격이 다릅니다.〉

기사단장은 검지를 세웠다.

〈하늘 아래를 나는 새들에게 높낮이는 있겠습니다만,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차피 오십보 백보 아니겠습니까. 제가 주워들은 마스터 클래스의 승급 요건부터가 그렇습니다.〉

〈승급 요건이요?〉

─쫑긋.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귀를 세웠다.

몇 번인가 말했지만, 플래티넘 위부터는 모험가 길드 연합에서 승급을 결정했다.

티르시랑 처음 만났던 날, 하수도 정찰 중에 들었던 얘기다.

‘정확한 승급 조건도 지들만의 업계 비밀이라고 했었지.’

다른 단체─마법사 길드나 고고학계 등─에 소속한 이들에게는 특히 평가가 짜고 박하다고 듣기는 했는데, 어떤 기준으로 승급의 가부(可否)를 정하는지는 몰랐다.

‘트집을 잡는 기준에 지금까지 주로 어떤 의뢰를 해왔는가 하는 것도 있다고 했던가.’

그래서 전직 귀족 영애나 되는 티르시가 조별과제 팀장을 맡아가며 하수도에 기어들기까지 했다.

이윤만 쫓는 모험가가 아니라는 전례를 남기고자 말이다.

〈예. 마스터 클래스의 승급에는 실적 외에도 조건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사실 미스릴 클래스를 넘어가는 모험가 분들께선 더 난이도가 높은 의뢰를 받기는 힘들죠. 세상이 그렇게 위험천만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니까요.〉

〈그건 정말이지 그렇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겪은 역대급 대사건이었던 우당탕탕 골렘 대소동이 좋은 예시다.

그런 게 미스릴 클래스급 의뢰라고 치면, 저딴 사건이 빈발하는 세상에서 힘 없는 평민들은 그냥 목 메달고 자살하는 편이 차라리 호상(好喪)일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조건입니까?〉

〈간단합니다.〉

기사단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간단하다’는 자신의 평가를 스스로도 안 믿는 것처럼 말이다.

〈미스릴 클래스를 상대로, 그 어떤 변수가 있어도 이길 수 있을 정도의 강함. 그것 뿐이라고 합니다.〉

그거 참, 말로만 들어도 아득해지는 이야기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