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더 여기에 체루했다간 돈까스 망치에 맞은 한돈 안심살처럼 다져질 것만 같은 예감에, 나는 아내들+티르시를 데리고 바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허허. 저녁이라도 먹고 갈 것이지.〉
어르신께서는 아쉽다는 듯 말씀하셨지만 다음 기회를 기대하겠다며 사양했다. 이 으르신도 이제 말하는 게 손주놈 밥 멕이려는 할아버지처럼 돼 가는군.
호감도 쌓기 성공인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다음으로는 일단 프리모르한테도 찾아갔다. 내가 얼굴을 안 비추면 직접 마중 나올 사람인데, 임산부를 움직이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어르신 눈에서 불똥 튈라.
〈어머, 오셨군요.〉
〈아, 안녕하세요오…….〉
흔들의자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던 프리모르의 환영에 라리루라가 대답했다. 자기 나라 말인데도 어색하게 들릴 정도로 움츠러든 우리 후배님. 그 기분 잘 알지.
〈후후. 아가씨가 ‘그때 그’ 분이시죠?〉
상냥하게 웃으며 말하는 프리모르.
내가 예수게이를 연기할 때, 라리루라는 티르시의 가족인 척 하면서 함께 마피아의 본거지에 쳐들어갔었다. 이번엔 작별인사도 하고, 그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온 것이었다.
〈그, 그때는 프리모르 님을 속이는 듯한 짓을 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괜찮아요. 노르드 님께 당신 몫까지 사과 받았는걸요.〉
털실을 내려놓으며 프리모르가 말했다. 바구니처럼 나무를 엮어서 짠 흔들의자에 기대서 뜨개질을 하는 그녀는, 옷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 푸근하고 정 많은 귀부인처럼 보였다.
약간 배가 부풀어 올라 보이는 건 착각일까. 그녀도 태아도 별 탈 없이 건강하다니까 다행이다.
〈조금 궁금했거든요. 티르시 양을 찾는다는 건 적당한 핑계였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정말로 아르마 슈나스의 다른 생존자 분이 남아 계시는 걸까~ 하고요.〉
시종들도 없는 자리겠다, 그냥 편하게 질문하는 그녀였다.
나랑 라리루라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대답하기도 힘든 질문이었고, 티르시의 과거사를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캐는 것 같은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티르시 양은 아버님의 후원을 거절했어요.〉
그런데 프리모르는 원래부터 이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지, 우리 반응이 애매해도 거침없이 말했다.
그녀는 조금 눈을 내리깔았다.
〈어째서일까요? 혹시 저희 가문도 그녀에게는 원수와 한통속으로 보이는 걸까요?〉
〈음. 그건 아닐 겁니다.〉
조금 솔직하긴 했지만 충분히 할 법한 고민이었다. 남편을 잃고, 그의 아이만 임신하고 있는 그녀 아닌가. 걱정스러울 만 했던 일이었기에 나는 안심시키고자 설명했다.
〈거절한 건 아마 서로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커서였겠죠. 티르시는 복수 따윈 바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십시오.〉
프리모르와 같은 걱정을 품는 귀족들이 생기면 아르마알스 가문에도 ‘저 새끼들이 아르마슈나스의 생존자랑 뭘 하려고 저러는 것???’ 하는 이야기가 나돌 수 있다.
티르시로서는 딱히 좋을 것도 없는 제안이다. 재액을 몰고 오는 기분이라서 미안하기도 할 거고.
〈뭣하면 저도 옆에 같이 있어드리겠습니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고마워요. 노르드 님께는 신세만 지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이 가문 이름값에 신세를 질 예정인데 뭘.
〈그런데 가주 어르신께서 티르시에게도 후원 제의를 하신 겁니까?〉
오히려 그 점이 내게는 무척 의외였다.
‘제안 자체는 여기 오는 길에 마차에서 했나?’
나는 며칠 전을 떠올리며 엘리트 대갈통을 맹회전시켰다.
내가 마차에서 베로니카의 무릎베개를 만끽할 수 있었던 건 티르시가 우리랑 다른 마차를 탔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르신과 뭔가 얘기가 오갔던 걸까?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점도 있었다.
딱 봐도 어르신이 뒷배를 서 주는 사람들은 꽤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었다. 나는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기사단장의 갑옷만 봐도 일류의 대장장이가 만든 것 아니던가.
입밖에 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르마 슈나스’의 마나를 잃은 티르시가 그 기준에 적합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나랑 더 깊은 연을 만들고 싶어서? 아니, 그랬다면 아내들한테 제의했겠지. 다나만 해도 후원 받아도 이상할 것 없는 박사님 겸 연구소장님인데.
〈……이건 제가 약혼자였을 무렵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프리모르는 나를 그만큼 믿는 건지, 목소리를 낮추고 비밀 이야기를 했다. 서두에서부터 흥미진진한 이야기여서일까. 라리루라가 약간 관심을 가지는 게 전해질 정도였다.
〈얘기가 조금 빙 돌아가지만, 아버님께서는 가주가 되기 전까진 세상을 유랑하며 검을 갈고 닦으셨대요.〉
〈검을요?〉
어째 칼 솜씨가 존나 쩌시더니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기사단장이 여기 취직한 것도 그래서인가? 동질감?’
그도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가주님에게 충성을 바쳤다고 하니까, 뭐 연관이 아예 없진 않겠지.
어르신께서는 사물을 냉정하게 판단하면서도 가슴에 뜨거운 마초이즘을 품은 분이시다.
나한테 가문의 문양을 내줄 때의 계산적이면서도 대범하신 모습을 떠올려 봐도 그건 확실했다. 불 같은 성격을 차가운 머리로 억누르는 모습, 등에 짊어진 것이 많은 마초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과거에 따로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거가 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엑스트라에 불과한 상대라도 삶의 굴곡이나 비하인드 스토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그 비하인드 스토리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지만.’
남의 과거사는 내 인생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호기심은 개구리를 죽인다던가, 뭐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남의 삶이나 과거에는 적당히 관심을 끄는 것. 이게 바로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가정과 인생에 충실해지는 비결’이다.
어디까지가 ‘남’인지를 정하는 게 문제이긴 한데.
〈당시에는 차기 가주로 선택받은 분이 아니셔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하는데, 그때 결혼을 약속한 분이 계셨다더라구요. 저희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해 줬던 이야기지만요.〉
〈그 분이 가주님의 사모님이십니까?〉
〈아니에요. 아버님께서 가주로 추대받은 탓에 그 여성 분과는 잠깐의 만남만 가지고 헤어졌다고 하는데…… 저는 혹시 그 분이 아르마슈나스 가문의 사람이 아닐까 해요.〉
〈네?〉
〈후후, 그냥 제 생각이에요.〉
비밀 이야기를 하는 프리모르는 정말 사교계나 티 타임을 즐기는 귀부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첫 인상과는 상당히 달랐지만, 어쩌면 이게 더 그녀에게 어울리는 모습일지도 몰랐다.
〈과거에 사랑을 나누었던 분께서 숙청을 당했다면 아버님께서도 절대 가만히 있으셨을 리는 없으니…… 연령까지 생각한다면, 티르시 씨는 손녀딸 정도가 아닐까요?〉
나는 라리루라랑 나란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문득 라리루라에게서 텔레파시를 전해받았다.
“선배. 혹시, 그래서 프리모르 님도 그때 저희를 믿어줬던 거 아닐까요?”
“그때?”
“그 왜, 있잖아요. 티르시 언니를 구하려 한다는 얘기를 했었을 때요.”
라리루라의 말에 떠오르는 건, 예수게이와 티르시 언니로 분장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분명 그때 프리모르는 아르마슈나스라는 성을 읊조리다가 우리를 받아들였었고, 혹시 그런 배경도 그녀의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떠오르는 게 있다.
저번에 환영회에서도 어르신은 내게 티르시가 기력이 상했으니 밥을 잘 먹이라고 타일렀었다.
특히 오리 고기가 어쩌니 하면서 어떤 음식이 몸에 좋은지 메뉴까지 콕 찝어가며, 자기가 있으면 식사를 하기 어려울 거라고 비켜주기까지 하셨다.
‘하지만…… 보통 그렇게까진 안 하지 않나?’
그런 건 대귀족의 품위 있는 배려심 등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내게 사과도 못할 만큼 체면을 따지시던 분 답지 않다.
그건 오히려 우리 친가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나더러 왜 이렇게 말랐냐며 고봉밥을 얹어주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손주를 보는 노인들의 시선은 동서고금을 불문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냐고 물으시면 드릴 말씀은 없지만…….〉
잠깐 그렇게 얘기를 전해준 프리모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티르시 양이나 노르드 님께서 저희에게 안 좋은 기억이 없다면, 부디 아버님을 나쁘게 보지는 않아주셨으면 해요.〉
〈예. 그 점이라면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
나는 거울처럼 프리모르와 똑같은 쓴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고지식하신 분들께서 호의를 전하는데 서투르다는 건, 꽤 자주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가족을 잃고 자란 소녀와, 예전에 목숨을 잃은 옛 연인의 손녀에게 대부 노릇을 해 주는 귀족이라.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녀와 마초’ 콤비였다.
양쪽 다, 국룰 조합보다는 나이를 좀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