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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04화 (404/1,009)

〈너, 처음부터 우릴 속이려고 했었잖아! 어딜 발뺌이야!〉

내가 고양이가 닭 보듯 병신 보는 눈초리를 한 게 티가 확 났던 걸까. 오드리는 적반하장으로 성을 냈다.

아니, 내 잘못이 없기는 해도 뒤통수를 깠다는 의미로는 별로 틀린 말도 아닌가. 선을 넘을락 말락 하면서 작두를 타던 젊은이를 교화시키긴 했지만, 그 방법이 구라와 통수로 이루어졌으니 사소한 원망 정도는 살 만 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혀를 내둘렀다.

‘헨네시스 영애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내가 후원자를 구했단 소식을 들었나 했더니…….’

나는 오드리의 등장에 약간 인상을 쓰다가 눈치챘다. 로마니아에서 활동하다가 브리타니아로 넘어온 이 녀석의 동생이 영애에게 소식을 넘겨주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로마니아에 머물던 기간을 생각하자. 일주일 이상 먼저 움직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시간차가 생긴다.

‘어차피 외국으로 날를 거, 자기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헨네시스 영애 밑으로 온 건가.’

게다가 사르가디스에는 나도 있다.

모험가 노르드가 여기 산다는 것 쯤은 캐서린이라면 금방 알아냈겠지. 나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은근슬쩍 외국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너희들. 헨네시스 영애를 통해서 사르가디스로 온 거냐? 로마니아에선 사업 접고, 아예 여기에 새 터전을 만들려고?”

“………뮤, 뮤슨 소리인지 몰루겠입니다? 브리타니아-어법 베리 쏘 어려움─?”

오드리는 화를 내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색하게 시치미를 뗐지만, 내게는 그게 바로 대답이었다.

한 탕 벌인 괴도나 사기꾼이 자산을 들고 외국으로 날라서 살아가는 것! 그야말로 느와르 물의 국룰이다.

내 눈초리가 뜨듯미지근해지자 오드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로마니아 말로 해! 우리도 이젠 나쁜 짓 안 한다고! 착실하게 살려고 이렇게 취직까지 했잖아! 외국 말도 배우고!〉

〈아, 그러셔.〉

하긴. 꿍쳐둔 돈이 있으면 남들보다 살기는 편하겠지.

로또 맞은 사람의 안 좋은 결말처럼 흥청망청 쓰다가 다시 범죄에 손을 댈 가능성이 적다는 점에선, 제대로 돈을 벌 직업을 구한 건 장한 일이었다.

갱생의 여지가 보이니 이번에도 넘어가 주도록 하지. 나는 교수와 살인자 외의 죄인에겐 비교적 자비로운 석사다.

얘네가 제 버릇 남 못 주고 민간인의 재산에 손을 댄다면 그 즉시 교수 슬레이어가 되겠지만 말이다.

남들이 일궈낸 삶의 결과물을 갈취하는 자는 모두 교수다.

이 녀석들은 교수나 진배없는 졸부들로부터 돈을 갈취해서 대학원생─로마니아의 빈곤층─들에게 뿌리고 다녔으니, 그 점에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괴도와 의적 사이 그 어딘가다.

〈그래 뭐, 착하게 산다면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 너그 동생은?〉

〈당연히 같이 왔지. 브리타니아는 정보상 길드가 유명무실한 수준이라면서 한탄하던데? 푸흐흐.〉

정보상 길드는 또 뭐야. 이름만 들어도 댄디한 게 마초의 마음이 들끓는 듯한 워드로군.

‘내가 모르는 걸 보면 보편화된 길드는 아니란 거겠지.’

외국의 일이라면 내가 처음 들어도 딱히 이상하진 않았다.

지구에서도 한국 특유의 배달 문화를 전혀 모르는 동아시아권 외국인들이 어디 한둘이었는가? 나도 생활반경은 결국 브리타니아에 쏠려 있다. 관심이 없다면 모를 수밖에.

그나저나 자매 치고는 무척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그래도 언니 된 사람으로써 동생이 고생한다는 소리엔 웃음을 참기 힘든 모양이다.

형제자매란 것들이 하는 짓은 다 이세계나 지구나 거기서 거기로군.

〈아무튼, 너도 오늘은 주문 제작 의뢰를 하러 온 거 아냐? 내가 여기 있다는 건 모르고 온 눈치 같은데?〉

오드리는 털털하게 말하면서 근처에 앉았다.

인사를 할 때 긴장하고 있던 것만 봐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다시 의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이 정말로 가죽 장비 공법에 소질이 있나?

〈이 가죽으로 장비를 만들려고 하는데, 가능하겠냐?〉

나는 석판에서 꺼내뒀던 가죽을 1장 내밀었다. 이 신삥이 대장장이의 실력도 볼 겸 챙겨뒀던 가죽이다.

오드리는 가죽을 받아들고 재질부터 확인했다. 나름 프로다운 면목이 있긴 하군.

〈쓰읍…… 캐서린이 말하던 그 거인 놈들의 가죽인가?〉

〈여기 설계도.〉

〈보여줘 봐.〉

프랑이 만든 설계도를 앞뒤로 훌훌 넘겨보는 오드리. 우리 프랑의 기본 장비인 판초 우의 비슷한 외투다.

그녀는 금방 눈을 반개했다.

〈소매 없는 외투네. 그 하프 드워프가 입을 물건이지?〉

어쭈. 눈썰미는 꽤 빠른데?

대장장이라면 당연히 치수로 눈치챌 만한 일이긴 했지만, 그 속도가 상당했다. 결론까지 2초도 안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괴도 놀이를 하며 얻은 빠른 사고능력이 손재주와 비례한다고는 할 수 없는 법!

오드리는 내 생각도 대충 눈치챈 듯 설계도를 탁자에 뒀다.

〈이만큼 단순한 가공이면 그냥 맡겨 보지 그래? 마음에 안 들면 그때 가서 다시 가공해. 이렇게 단순한 옷이면 나중에 수선하는 것도 누워서 떡 먹기일 걸.〉

〈흐흐. 말하는 것 봐라. 자신 있냐?〉

〈너야말로 내가 니 여자한테 혼신을 다해서 만든 작품을 혹평받았던 거 기억 안 나? 다음에야말로 개쩌는 퀄리티로 만들어서 찍 소리도 못 하게 해 주겠어.〉

〈얼씨구.〉

나는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 괴도 아이템을 가공하는 솜씨가 허접하다고 까였었지.

돈 외에도 자존심이 걸렸다면 보통 때보다 더 열의를 올릴 이유로는 충분했다. 오드리 말마따나 외투는 수선이나 재가공이 어려운 옷도 아니니까, 일단 맡겨나 보자.

내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오드리가 말했다.

〈그런데 왜 그 하프 드워프한테 안 맡기고? 남의 솜씨를 의심할 거면 차라리 걔한테 맡기지.〉

〈프란체스카라고 불러. 하프 드워프가 아니라.〉

〈아, 그래. 암튼 그 프란체스카도 드워프의 피가 흐르기는 할 것 아냐. 걔가 직접 만들면 되는 거 아냐?〉

〈연장이 없잖아. 이 존나 질긴 가죽을 뭘로 수선해?〉

프랑이 아무리 힘이 세도, 이건 바늘과 실만 갖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가죽이 아니잖은가.

연금용액까지 동원해서 전문 마도구를 써야 하는데, 그건 너무 대대적이다. 프랑도 거기까지 심도 깊은 기술을 습득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돈 좀 쓰고 마는 게 편했다.

남의 노동력을 돈으로 사는 부자들과,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는 일반일의 하루는 똑같은 24시간이 아니라고 하니까.

〈아, 그것도 그렇네. 좋아. 나한테 맡기라고.〉

─씨익. 금방 납득하며 오드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우리가 입던 옷도 전부 내 작품이거든? 재료비만 제대로 치르면 끝내주는 걸로 만들어 줄게.〉

〈쓰벌. 그 옷도 니가 만든 거였냐.〉

존나 스파이더맨도 아니고 자작 슈트를 입고 다니네. 배트-돈지랄이 불가능한 빈곤층 히어로의 궁생 맞은 장비였다.

‘근데 그걸 놀려대자니 나도 고만고만한 처지였네.’

아서 웨인의 코스튬은 프랑이 만들어준 거니까 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좀 웃겼다. 여친이 만든 코스튬을 입고 싸우는 히어로라니? 존나 별 인싸 히어로도 다 있군.

〈5일, 아니 3일 쯤 뒤에 와. 그때까지 마무리해 놓을게.〉

〈일 존나 빠르네. 건성으로 하진 마라?〉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손이 빠른 거야, 이 의심 많은 인간아.〉

〈그럼 됐고.〉

나는 대충 손을 저어주고 오드리가 요청한 금액을 일시불 현찰박치기로 지불했다. 시세를 모르는 내가 들어도 합리적인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얘도 머리가 빈 게 아니라면 나를 상대로 사기는 안 치겠지.

〈네 동생은 어디서 지내냐?〉

〈왜? 조사라도 의뢰하게?〉

〈어. 사람을 찾고 싶어서.〉

〈흐응.〉

오드리는 건성으로 종이에 깃털펜을 놀리고는 잉크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내밀었다.

열기로 잉크를 말린 나는 종이에 적힌 주소지를 보고서 픽 웃었다.

‘무타라트의 아이들.’

나도 익히 아는 여관이었다.

하여튼 세상 참 좁기도 하지.

***

“바람 피웠다가 집에서 쫓겨났니?”

“오랜만에 뵙는데 인삿말 한 번 끝내주시네요.”

나는 여관 주인 베이냐 씨에게 쓴소리를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왜 다들 나를 바람둥이 취급하는 것이지? 내가 여복이 쫌 많기는 하지만, 그에 비해서 쥬지 간수는 나름대로 잘 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어째서?

“농담이야. 술 사러 왔어?”

“가는 길에 1병 사 갈게요. 여기 아는 사람이 묵는다길래 잠깐 보러 왔죠. 별 일은 없으시죠?”

“장사도 잘 되고, 우리는 아무 문제 없어. 강매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신경쓰지 마십셔. 제가 요즘 돈 좀 만지고 있어서.”

“어머? 그래? 역시 프랑이 남자를 잘 골랐네.”

아무튼 별 일 없으시다니까 됐다. 나는 베이냐 씨와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캐서린을 찾았다.

“흐이이에에엑?! 노르드 님?! 노르드 님 왜?!”

방에서 서류를 읽던 그녀는 노크 소리를 듣고서 문을 열었다가, 알몸뚱이의 저승사자가 벽을 부수고 나타난 것처럼 혼비백산을 했다.

“내가 여기 사는 거 모르고 오진 않았잖아. 너네 언니가 너 여기 있다는 거 알려줘서 온 거야.”

“그, 그러셨군요. 벌써 돌아오셨는지 몰랐어요.”

그렇게 감격의 만남이라기엔 너무 이른 재회를 거친 후에, 우리는 각자 착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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