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
문을 열고 다나를 데려오자, 그녀는 숨을 몰아쉬는 남자를 보며 한숨부터 쉬었다.
[……그래서, 뭔데? 왜 20년이 넘도록 관심도 없다가 뜬금없이 찾아와서는 청혼 따윌 한 거야?]
[이, 일부러가 아니었어! 결혼한 줄 몰랐다고! 그리고 사제장님도 네가 어디 있는지 얼마 전에야 간신히 안 거야! 나는 널 마을로 데려오려고 청혼했던 거고!]
[핑계는 됐어. ……하아, 그래. 어머니 아버진 잘 지내셔?]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미처 완전히 떨쳐내진 못한 미련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우리의 또도가스 매지션은 나를 보며 어물쩍 거리다가 내 눈매가 나빠지자 후다닥 말했다.
[자, 잘 지내시지만 걱정이 많으셔. 사제장님은 영토 분쟁 문제랑 다툼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계시지.]
[그 소식이라면 몇 년 전부터 들었어. 딸내미한테는 편지 한 통 없었으면서, 그런 일에는 걱정이 많은가 봐?]
신랄하게 쏘아붙인 다나가 눈을 부라렸다. 또도가스가 입을 열었지만 말을 계속하던 다나가 빨랐다.
[나는 안 돌아가.]
[다나, 하지만!]
[내가 거기 가 봤자 뭘 하는데? 니가 했던 개소리는 잊어줄 테니까, 너 따라온 웰론 아저씨나 데리고 얼른 꺼져.]
[안 돼! 윙글링 놈들도 겨울에 들어서부터 유독 극성이야! 사제장님이 항전의 구심점이 돼 주시려면, 여차할 때 그 분 대신 에린의 역사를 이어나갈 차기 사제장이 필요해! 너도 잘 알잖아!]
다나는 윙글링이 어쩌고 하는 말에 잠깐 움찔했지만, 금방 냉정함을 되찾고서 말했다.
[……나는 고리타분한 역사 말고는 어머니한테 배운 게 거의 없어. 그때 했던 역사랑 마법 공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맞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도 다나는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경멸까지는 아니지만, 조폭인 아버지를 극혐하는 딸내미 쯤 되는 눈빛이었다.
[다른 제자도 있을 거 아냐. 설마 그 사람이 내가 떠나고 20년을 내내 허송세월만 보냈다는 소리는 아니지?]
[……또다른 차기 사제장 후보를 선별하긴 했지만, 그 애도 마을에서 도망쳤어. 그게 고작 3달 쯤 전의 일이고.]
다나는 그의 말에 잠깐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렇게 대화를 멈춘 건 나 밖에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잠시 뿐이었다.
[그거 대단한 인내심이네. 나 때문에 또 놓치지 않으려고 경계심이 강했을 텐데, 그걸 뿌리치려고 오랫 동안 참았겠어. 그래도 그 동안 배운 것도 많았을 테니까 마냥 손해는 아니었겠지.]
동정심에 호소하는 작전에 다나는 코웃음을 치고, 냉철한 정신으로 일의 핵심만 짚었다.
[내가 어머니의 뒤를 이으려면 한참 더 그 지루한 좌선에 어울려주면서 공부를 해야 할 거고, 그러면 내가 있건 없건 그 사람은 일선으로는 못 나갈 것 아냐. 아니지. 윙클링 인들이랑 투닥대는 건 전투랄 것도 없나?]
[고향을 위해서야.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1~2년 정도라도 시간을 들여줄 순 없을까?]
다나의 눈이 더 매서워졌다.
[그럼 그 1~2년 뒤에는? 다시 떠나라고? 나더러 그 사람 땜빵 역할이나 잠깐 하러 불려가라고? 그게 20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던 자식을 집으로 부를 만한 이유야?]
[그런 게 아니야! 사제장님은──]
[잠깐. 그쯤 하지.]
나는 또도가스의 말을 끊었다.
[우리 아내가 가기 싫다잖아.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니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다나가 가 봤자 곧바로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라매. 그냥 그 토꼈다는 다른 제자나 찾아 봐.]
[……어디로 갔을지도 모를 녀석이야. 노력해 봤지만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들었어.]
[흐응.]
나는 캐서린도 말했던 실종자 찾기의 어려움을 떠올렸다.
‘아마 다나는 자기가 어디에 사는지 고향에 간간히 알려준 모양인데, 그 다른 제자란 놈은 그러질 않았나 보군.’
대충 들어봐도 나름대로 안타까운 사정이지만, 그런 걸 가출한지 거의 20년이 다 되는 다나를 이제 와서 데려가갖고 해결하려는 한다? 그딴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것도 이런 새끼랑 결혼시켜서 말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새끼는 다나를 사랑해서 청혼한 것도 아니란 뜻이잖아?’
다나를 미혼녀로 알고 순수하게 고백한 거라면 해프닝으로 쳐 줘도 됐다. 그런 거라면 NTR 충이 아니라 저능아 병신인 거니까 부글거리는 분노를 참고 넘어가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저 뇌에 구멍난 또도가스 새끼는 감히 주판을 두들겨가며 결혼 각을 잡았던 것이다!
결혼식 날짜만 생각 중인 신랑 노르드 군은 몹시 빡이 칠 수밖에. 어? 빡치네?
[사정은 알았다. 하지만 나도 다나도 곱게 들어주긴 싫은 얘기군. 좋을 말로 할 때 이쯤 하고 떠나.]
나는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정 그렇게 간절하면 다음에는 최소한 우리 다나가 어디서 뭘 하고, 누구랑 어떻게 사는지 정도는 알아 봐. 결혼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저딴 실수를 저지를 지경이면 돌아가서 벌어질 일도 뻔하니까.]
[……크흠.]
내 정론에 할 말이 없는지, 끝까지 이름도 모를 또도가스 친구는 자리를 털고서 일어났다.
그는 축객령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가 마지막으로 우리 눈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제장님이 편지 보내시겠대.]
[딸로서 사제장님의 친필을 받을 수 있다니, 하혜와 같은 영광이라고 전해 줘.]
애둘러서 말한 비아냥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그는 내가 주워든 완드를 챙겨서 연구소를 떠났다.
“아…… 그 뭐냐. 너는 별 신경 안 써도 돼.”
연구실이 조용해지자 다나는 그런 애매한 분위기가 불쾌한 것처럼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그런 다나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예전에 10살 때 성인식을 안 치르고 가출했다는 얘기는 들었어. 부모님이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았나 봐?”
“아 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남편놈은 엄마 아빠 얼굴도 못 보고 있는데 이딴 걸로 찡찡대면 내가 뭐가 되냐?”
다나는 말은 퉁명스럽게 해놓곤 반대로 내 머리를 만졌다. 아마 아까 날뛰면서 흐트러졌던 모양이었다.
앞머리를 간지럽히면서 다나는 말했다.
“내가 있던 마을은 외부와의 교류를 진짜 극단적으로 피하려는 곳이었어.”
“얼스터 인들은 다 그렇지 않아?”
“방계는 더 심했어. 저번에 봤던 얼스터 부락이랑은 비교도 안 될 걸?”
말하면서 질색팔색을 하는 다나. 거의 뭐 랩실 시절을 회상하는 수준의 리액션이었다.
“그래도 나는 어쩌다 아버지가 준 책을 읽고 마을 밖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래서 10살 때 몰래 가출을 시도해 봤어. 마을에서 별로 안 먼 곳에 가~끔 교류하던 도시가 있었거든.”
“이건 그 얘길 처음 들었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10살 때면 너도 고생이 엄청났겠다 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말을 반복하고 공감해 주는 건 청자(聽者)로서 훌륭한 경청법이다. 3년도 더 알고 지내며 나의 화법에 적응한 다나는 편안하게 말을 꺼냈다.
“별로? 내가 사제 계급의 딸이라는 건 알았으니까, 안면을 트고 지내던 상인 아줌마네 밑에서 말도 배우고 일도 했어. 그런데 1년, 2년이 되도 날 찾으려고 하지도 않더라고.”
다나는 옛날 일을 떠올린 것처럼 인상을 팍 찡그렸다.
“웃긴 건 뭔지 알아? 우리 마을에 소식을 전해주던 도시의 운송 길드에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어쩌다 2년째 쯤 되는 날에 나랑 마주치고 깜짝 놀라는 거야.”
“놀랐다고? 널 보고?”
“그래. 니가 왜 여기 있냐더라. 2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도 내가 마을에 있는 줄 알았대.”
“……허미 씹.”
내 아가리가 싸물려졌다. 다나는 픽 웃었다.
“맞아. 마을이랑 유일하게 소통하는 운송 길드원들도 몰랐다면, 울 엄마는 내가 어디 갔는지 찾아볼 생각도 않았다는 거겠지? 그 뒤로는 너도 아는 내용이야.”
“여차저차 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나랑 만났지.”
“그리고 멍청하게 굴다가 프랑한테 새치기를 당했고.”
혀를 빼물며 다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가슴이 절로 철렁해지는 소리였지만, 생각해 보면 저런 농담 아닌 농담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와 프랑과 다나 사이에 쌓인 신뢰가 그만큼 단단해졌단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안 돌아가. 매년 봄마다 고향에 부치던 편지도, 너랑 같이 살게 된 올해에는 안 보냈다?”
“…………크흠.”
다나는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지만, 나는 갑자기 목에 존나 못 고칠 지병이 걸린 사람처럼 기침을 했다.
그녀의 말에 불현듯 불편한 진실을 눈치깠기 때문이다.
‘다나가 사르가디스로 파견 온 거…… 내가 몇 달 넘도록 편지 한 통 안 보내서이기도 했었지?’
혹시 그래서 우리 눈나는 캐리어에 손해를 볼 걸 감수하고 본인도 모르게 나를 찾아온 게 아닐까.
고향의 어머니에게 돌아오지 않는 편지를 계속 보내다가, 그렇게 답장을 받지 못하는 편지가 또 한 종류 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존나 씨발 내가 죄인이군. 장모님 뭐라 할 처지가 아니네.
“……야, 남편놈아. 내가 왜 올해엔 고향에 편지를 안 부쳤는지 알겠냐?”
내 헛기침을 들은 다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남편놈의 얄팍한 생각이나 죄책감 쯤은 전부 자기 손바닥 위에 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이제는 내가 돌아갈 집이 여기에 있으니까 그런 거야, 요 나쁜 아내 킬러 녀석아.”
─콕.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이 내 코를 찔렀다.
나는 그만 말을 잃었다가 짖궂게 웃었다.
“이 연구소 얘기지? 크으, 역시 학자의 본분을 잊지 않는 베르베이아 박사님이셔.”
“그렇지? 니도 석사 학위 떼려면 본받아야지. 언제까지 마누라한테 학력으로 밀릴래?”
“존나 그렇게 학력부심이 넘치시면 학계에서 지원해준 이 연구소 방에서 주무시는 건 어떨까요? 직장에서 먹고 자면 출근하는 시간의 낭비가 사라져서 효율적이랍니다!”
“뒤질래? 안 그래도 출장을 갔다 와도 뭐 하나 건져오는 게 없어서 연구원들이 병신 취급할까 무섭구만.”
“아니 티키타카 하다가 갑자기 현실 어택 갈기기 있음? 내 죄가 하나 같이 크다, 시팔.”
“알면 알아서 모셔, 개새끼야. 마누라를 남편 따라서 외국 놀러다니는 골빈 년 만들지 말고.”
“악! 이 팩트는 너무 아프다!”
현실의 쓴맛이 벌레 날개를 씹는 듯 하다. 나는 아내님의 캐리어 약력을 조져버렸다는 죄책감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빛의 교수 하이로메인이 보내준다는 논문은 아직일까.
그거랑 적당히 몇 개 엮어서 성과를 내든가, 아니면 우리가 빼돌린 고대 문명 유적에서 아티팩트 몇 개 건져서 학계예 베헤리트 바치듯 갖다주든가 해야지.
안 그러면 진짜 다나가 별 실적도 없이 반 년 이상 출장을 핑계로 여행만 다니던 년이 되게 생겼다.
“근디 생각해 보면 저어도 명목 상의 논문만 쓰고 연구에 충실하지 않은 것 같은디요.”
“니 대갈통 수준이고 그런 니한테 코 꿰인 년 수준이고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아니 미친 년아. 포기하지 말고 방법을 좀 찾아 봐. 존나 니가 회귀물 주인공임? 개썅마이웨이로 살다 캐리어 조져도 자살하면 아다 떼기 전날로 회귀하니?”
“태어난 날은 달라도 뒤질 때는 함께야, 여보!!”
“남편보다 1년 먼저 태어났으면 뒤질 때도 여보야가 1년 일찍 가는 게 예의 아닐까?”
안 그러면 누나가 나 죽는 꼴 보면서 엉엉 울 게 뻔한데.
그렇게 스윗한 속내를 감춘 나는 개소리를 한 값으로 다나에게 목을 졸리면서, 머리 한 곳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딱히 논리라고 할 만한 건 전혀 없다. 직감이나 제 6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뛰어난 사냥꾼이 어지러운 산길에서 짐승들이 걷는 길을 찾아내는 것처럼, 운명이나 트러블에 시달려 온 나만은 어째서인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다.
다나는 원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아마도 멀지 않은 시일, 우리는 그녀의 고향으로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