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트러블이 생겨서 연구소까지 달려와버리긴 했지만, 이대로 돌아가기는 또 싫었다.
“저번에 연구소 사람들한테 소개도 했잖아? 왜 남겠다고 떼 쓰는데? 설마 랩실에서 일이라도 도와주게?”
“차라리 입대를 하라고 해라.”
내가 정색을 빨자 다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가슴을 감췄다. 혹시 이 새끼가 남의 일터에서까지 성욕을 주체 못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다. 쓰벌 억울하네.
“그게 아니라, 니가 위험할까봐 그래.”
착각이었지만 연구소까지 달려오면서 내가 얼마나 초조해 하고, 얼마나 자신의 안일함에 분노했던가. 문제 없을 거라며 돌아가기엔 그때의 형언할 수 없는 초조함이 아직 생생했다.
사람이 기껏 그런 이야기를 전해줬더니만, 다나의 반응은 미적지지근했다.
“오늘따라 유난을 떠시네, 미스터 과보호맨.”
“과보호 좀 하지 뭐. 해 봤자 잠깐인데.”
“아내년 애끼는 마음 하나는 알아줘야겠네. 나도 고맙긴 해. 근데 니가 내 옆에만 있으면, 다른 애들은?”
잠깐 말이 막혔다. 맞는 말이었다.
“……혼자 있는 너보단 안전하겠지. 집의 방비도 강화하고 도시에 뿌린 동물들의 경계도 올릴 거 아냐.”
“그럼 내 옆에 있을 게 아니라 그것부터 하러 가야겠네. 여기에만 있지 말고. 어차피 너 잡으러 온 놈들이라면 우리끼리 뭉쳐봤자 안전하지는 않아. 내가 혼자 있는 게 불안하면 베로니카나 보내줘. 티르시도 부르고.”
나는 정론에 그만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다나의 말마따나, 연구소는 그녀들이 〈강림〉 마법을 연구할 장소로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괜찮은 제안이긴 했다.
“네가 분신 마법을 쓴다고 예르나처럼 늘어날 수도 없고, 늘어나 봤자 다른 쪽을 조종하려면 거기에 집중해야 하잖아. 뭘 나타나지도 않은 적을 상대로 쫄고 있어. 너답지 않게.”
“쓰벌. 걱정되니까 그렇지.”
“푸흐흐.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길래 나 보러 온 줄 알았더니만, 그래서 달려왔던 거야? 새끼 로맨틱하네. 반할 뻔.”
“뭐지? 지금까지는 반해 있지 않았음을 암시? 능력 있는 남편 잡아서 골수 빨아먹으려던 거 들켰죠?”
“개뼈다구라서 빨아먹을 것도 없음. 인정합니까?”
“이 망할 사회 과적응자년 같으니. 사회가 암만 각박해도 직장이랑 학력 좀 된다고 일용직 남편 무시하고 그러면 안 돼. 알겟서? 내가 사업 기똥찬 걸로 준비했으니까 밑천이나 좀 내놔 봐.”
“이거 미친 새끼 아냐 이거. 가정폭력에 사업 중독에 폭언 욕설까지 삼관왕이네. 잘 나가는 남자일수록 사생활이 개판이라더니, 동네 아줌마들 수다가 틀린 게 하나 없어.”
“않이 씨발 내가 니를 때렸다고요? 언제? 언제?”
“뷰지연쇄살인마는 조용히 해. 마누란 일 하러 갈 거야. 니 없다고 그 잠깐 사이에 뒤질 일 없으니까 안심하고.”
The ‘아다 폭격기’ 노르드는 그렇게 남겨졌다. 나는 본능을 이기고 여름철 산책보다 에어컨 앞 쿨패드를 선호하는 애완견처럼 낑낑대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맞는 말은 맞는 말이지. 내가 가만히 있든 경계하고 있든, 두 손으로는 열 손 못 막아.’
일기당천 만부부당이라는 단어가 말 그대로 실현되는 이세계에서는 저 속담도 통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숫자의 폭력이란 강대하다.
내가 애쓴다고 지랄을 떨어봤자 물리적인 한계는 존재하는 것이었다.
‘일단 빨리 움직이자.’
헨네시스 영애와 협력하면 도시의 치안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녀도 권력자라면 치안 악화를 좋아하진 않을 것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방법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우선 베로니카를 연구소까지 에스코트해 주고 마법사 길드로 직행했다.
본 목적은 티르시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그녀도 무단으로 출근을 제껴버린 벌을 받고 있을 게 당연했다.
사회생활도 있었기에 일단은 오랜만에 마법사 길드 지부의 크롬웰을 찾았다. 원래라면 영애가 공문을 보낸 다음에 갈 생각이었는데, 그것까지 기다리기엔 인내심이 부족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하루 정도는 기다리는 게 나을 뻔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 당신의 상사는 오늘도 공석이신가요?”
“위저드께서는 국토민안에 헌신하고 계시니까요. 개인적인 이윤에 눈이 먼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죠.”
내가 마법사 길드를 찾아갔을 때는, 하필 또 견원지간이던 이들이 으르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피 길드의 지부장(=마스터 대리) 에들린.
그리고 마법사 길드의 위저드인 버즈루드 크롬웰.
사르가디스라는 촌구석을 벗어나서도 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이 도시의 중대 권력자들이었다.
“저 그냥 집에 갈게요. 가스불 켜 두고 와서.”
“앉으세요. 의자 많습니다.”
시발.
***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원체 아는 게 없었는데 오랜만이기까지 해서 나도 가물가물했다.
나는 남한테 기본적으로 관심을 끄고 사는 경향이 있어서─꼭 알아야 하거나 관심이 가는 게 아니면 일부러 캐지 않는 게 매너니까─ 더 그랬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건, 이들이 서로 가치관을 상충시키며 으르렁대는 앙숙이라는 것이다.
“하하하. <동물 회화(Animal Conversation)>라! 재미있는 상담거리를 가져와 주셨군요.”
내가 이 죽을 쑨 분위기에서 어렵사리 얘기를 꺼내자, 회색 머리카락의 마법사 크롬웰은 가가대소를 터트렸다. 뭐가 재미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웃고 있는 건 그 뿐이었다.
“<동물 회화> 라니, 그런 희귀하고 애매한 마법을 어디에 쓰시려구요?”
애들린이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사람이 일부러 반댓편에 앉았구만 허리를 숙여서 가슴골을 어필하는 건 어째서이지?
외견으론 나이를 알기 힘든 미녀인데 몸짓은 또 고혹적이라 존나 킹받는다.
덕분에 눈 둘 곳이 곤란해졌다. 성욕이 들고 안 들고를 논외로 두고 계단에서 치마가 짧은 여자가 내 앞에 있으면 무심코 피해버리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내가 유부남인 건 동네 귀머거리도 알 건데 저러는 이유가 뭐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남의 집 여자를 돌 보듯 하던 나조차 강해질 수록 넘쳐나는 초월적인 정력 때문에 점차 쥬지에 지배당하고 있거늘.
혹시 할리우드 영화식으로 섹파 겸 사업 파트너라도 만들어 볼 셈인가?
내가 쥬지에 지배당해 사도(邪道)를 걷는 마초(魔礎)였다면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사악한 마녀야! 물럿거라!
“흥미가 들어서요. 그런데 애매한 마법이라뇨?”
“말 그대로입니다. 동물에게 뉘앙스는 전달되지만, 이게 또 사역마를 다루듯이 이심전심이거나 사람과 대화하듯 말이 잘 통하는 건 아니거든요.”
“같은 언어를 써도 유독 대화가 안 되는 갑갑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라던걸요?”
와! 설명충이 2배!
덕분에 듣는 사람은 편하군.
“흠. 그 부분은 제가 생각하는 게 있어서 문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배울 수 있을까요?”
“크흠. 실례했습니다.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야 영성(盈盛)입니다만, 저희 지부에 있지는 않을 겁니다.”
크롬웰은 빵 터진 다음에 이런 말을 하기는 거북한 듯, 좀 헛기침을 했다.
“혹시 길드에 보관 중이 마도서를 전부 외우고 계십니까? 대단하시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유통되는 마법에 대해서는 거의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일이니까요. 서류를 더 찾아봐야 확언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제가 기억하는 한에는 없었던 듯 하군요.”
립 서비스에 겸양을 떠는 크롬웰이었지만, 칭찬이 싫지만은 않은지 조금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부드러워진 건 부드러워진 거고.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길드 본부에는 있나요?”
“있긴 하겠습니다만…….”
말을 줄인다는 건 곤란하다는 암시다.
‘영애 지시를 언급하면서 밀어붙이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런 강압적인 방식은 악감정을 남길 게 뻔하지.’
사람 마음은 게임 NPC의 호감도 같은 게 아니잖은가?
좆 같은 상사나 선임은 100년이 지나도 좆 같기 마련이다. 적당히 뒤탈없이 서로 만족할 거래 조건을 걸고 윈윈하는 게 나았다. 물론 내가 더 이득을 얻는 입장에 서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가 제안을 꺼내려고 했는데, 애들린이 말했다.
“마법사 길드에서 마도서를 발주하려면 권한이 필요해요. 시중에 유통되는 마법에 대해서는 심의가 필요하니까요.”
“으음, 그렇습니까? 듣고 보면 당연한 얘기군요.”
마법이란 강력한 무기다. 유통에 권한과 자격이 필요한 건 당연한 얘기였다.
시골 지방의 경찰서에 개틀링건이나 자주포가 깔려 있으면 그게 얼마나 어이 없는 일이겠는가.
그걸 남획해서 나쁜 짓을 꾀하려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배울 의지가 있는 사람이 본부나 그에 버금가는 커다란 지부로 가는 게 순리 상 맞겠지.
물론 〈동물 회화〉 같은 마법은 갖고 오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일단 심의가 필요하다면 시간이 드는 법이었다.
“게다가 길드 마스터의 대리인의 대리인인 소서로는 그런 요청을 올릴 자격이 없답니다. 그렇죠, 크롬웰?”
“……………….”
크롬웰은 세상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 애들린이랑 말싸움을 벌이던 사람이다. 반론할 건수가 있으면 꼬투리를 잡았겠지. 입을 다문 이상에는 애들린의 말이 정확하게 팩트를 찔러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크롬웰을 조용하게 만든 게 기분 좋았던 걸까. 애들린은 흐뭇하게 웃으며 옆머리를 귀에 걸었다.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라면 마법사 길드에서 마도서를 발주해 오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애들린 님께서요?”
어떻게? 아니, 그보다는 왜?
그런 의미가 숨겨진 짧은 질문에 애들린이 대답했다.
“그게 길드장님이 길드를 설립하면서 만든 계약 중 하나거든요. 그리고 저는 그 분한테서 사르가디스 지부를 맡은 입장이기도 하고, 마법사 길드의 길드원이기도 한 걸요? 어머나? 발주를 받아서 넘겨드리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네요?”
나는 그녀의 제안에 고민을 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사르가디스의 마법사 길드 지부장─위저드라는 직책의 마법사─께서는 어딜 싸돌아다니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계속 기다릴 수는 없잖은가?
지금 당장 내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초조한데, 저 심의를 통과하고 여기까지 오는 걸 기다리려면 내가 정수리에 탈모 빵꾸가 숭숭 날 것이었다.
탈모, 절대 안 돼.
‘……〈동물 회화〉 마법을 내가 직접 개량했다는 핑계로 동물 드론들의 관리를 영애한테도 맡겨볼 생각이었는데.’
추가로 나도 캐서린한테도 마법을 가르치면 중간 관리자가 늘어날 것이다.
‘동물들이랑 대화하기 어렵다고? 암구어처럼 정해놓은 패턴대로만 움직이게 하고, 그걸 관리하게 시키면 되지.’
희박한 단서로 나와 동물 드론들의 존재, 관계를 간파해낸 그녀다. 일이 없어서 낑낑대는 캐서린의 통찰력을 빌릴 수가 있다면 치안 유지에도 중대한 역할을 맡길 수 있겠지.
사르가디스의 치안을 내려다보는 SF(Secret Fantasy) 빅-브라더즈의 완성이다.
아니, 날 빼면 대부분 여자니까 시스터즈인가. 동물 드론을 한 2만 개 정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이름일세.
‘헤스왈드 자매는 서로 약점을 잡았으니 배신할 걱정도 안 해도 되고.’
그것보다 내가 제일 윗자리에서 동물들을 휘어잡기만 하면 배신이고 뭐고 없다.
내가 <동물 회화> 마법을 배우려는 이유였다.
“감사한 제안입니다. 하지만 번거롭게 해 드릴 텐데, 제게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도와주시면 감사할 일이라면 있죠.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같은 모험가끼리 주고 받을 법한 간단한 부탁이에요.”
절대 그럴 것 같진 않았지만, 성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 정도면 족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크롬웰을 신경 쓰며─직접 쳐다보면 괜히 더 미안해 질 것 같아서 자제했다─ 말했다.
“……조만간 길드로 찾아뵙죠. 가능한 한 빠른 시일을 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머. 그러면 날을 잡고 말 것도 없답니다.”
애들린은 승리자의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같이 가시죠. 하루는 길고, 아직 점심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