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다.
귀동냥으로 들어서 알고 있던 그 격언 같지도 않은 격언을, 베로니카는 오늘이 되서야 진심으로 이해했다.
통제하지 못할 감정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까진 그 감정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발동했던 걸지도 모른다. 고갤 돌린 채로 은근히 눈을 굴리자 하얀 머리의 미녀도 그녀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이 맞았다. ─홱! 베로니카와 티르시는 누가 먼저인지 승부하듯이 눈을 돌렸다.
“크흠.”
“엣흠.”
어색하다. 어색하기 이루 말할 데 없다.
‘아니, 당초에 우리는 원래 어떤 사이였지……?’
베로니카는 명치를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해주를 도우며 안면을 틀었다 뿐이지, 그렇게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이런 숨 막히는 침묵에 불편해 하는 관계는 아니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렇게 고민해 보면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결국, 질투심이다.
한심하다는 생각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떨궜다. 내가 감히 질투 씩이나 해도 되는 입장일까?
로마니아에서 사 왔던 소설의 여주인공은 그게 아내의 권리라고 말했지만, 그런 논리대로라면 프랑은 모든 아내에게 눈칫밥을 먹일 권리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런 티를 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넓은 마음에 대한 존경심으로 다나를 시작으로 한 아내들은 한 걸음 물러나 있기는 했지만── 그 ‘한 걸음’보다 더 바깥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온 건 티르시가 처음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그게 소설의 문구를 그대로 옮겨온 표현이라는 생각에 베로니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일이긴 하지만, 정말 영향을 받기 쉽군.’
로마니아에서 그녀가 구매했던 책 중 1권은 무려 성인향의 치정극이었다.
30화가 되도록 성교 장면이 없었기에 베로니카는 깨닫지 못했고, 판매하던 직원은 그녀에게서 물씬 풍기는 어른 여성다운 색기에 의심도 없이 책을 팔아버렸던 것이다.
비교적 개방적인 로마니아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한 글이었던만큼, 그 내용은 상당히 질척질척했다.
베로니카도 그게 극의 재미를 위해서 현실보다 과장된 것이라고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실 책 1권으로 사고방식이 바뀐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희귀한 경우도 아니지 않은가.
신대와 고대의 구전설화 정도가 전부였던 베로니카다.
그녀에게 매운 맛에 익숙한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짜인 자극적인 치정극─쉽게 말해서 막장 드라마─의 몰입도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화기애애한 부부에게 찾아온 시련.
남편에게 반한 첩. 첩에게 끌리는 남편.
첩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아내와의 약속을 어기는 남편과 그렇게 소외된 아내가 느끼는 슬픔과 질투심이 낱낱이 적힌 치정극은 그녀에겐 일대 호러 서스펜스와 다름없다.
이렇게 될 리가 없다. 이건 과장된 내용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섬찟한 공포는 무시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의 아내가 지금보다 몇 명이나 더 늘어난다면, 그녀와 노르드가 저번처럼 단 둘이 웃으며 놀 수 있을 기회는 앞으로 몇 번이나 될 것인가?
그리고 데이트 중에 책에 한눈이나 파는 아내보다는, 그의 마음을 능숙하게 들뜨게 하는 여인에게 더 정을 주고 마음이 끌리지는 않을까? 마치 그 치정극의 첩처럼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자신감의 부족이 원인이다.
확고부동하게 사랑받을 자신이 없었기에 발작적으로 나온 경계심이었다. 질투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맞다.
“으큭…….”
베로니카는 자괴감에 얼굴을 비볐다.
지금 그녀는 음유시인의 영웅담을 듣고 나뭇가지에 전설의 검의 이름을 붙이는 꼬마와 큰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그 꼬마가 전설의 영웅은 아닐 지언정, 일류 검사 정도의 실력은 갖고 있다는 점일까. 베로니카가 계속 정색하고 떼를 쓴다면 티르시도 상당한 고역을 치르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 입장에서나 ‘떼 쓰기’지, 당하는 티르시한테는 얼마나 큰 부담일 것인가.
그녀가 아내가 됐을 때 프랑이나 다나가 방금 같은 눈치를 준 것도 아니잖은가. 자신은 간편하게 그의 옆자리를 꿰차고 그녀들의 자리를 좁게 만들어 놓고, 정작 자기 자리는 양보하기 싫다는 말인가?
베로니카는 조금 전의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인간 사회에 대한 미숙한 지식과, 그에 어울리지 않게 성숙해진 지혜나 성격이 언밸런스하게 얽힌 결과였다. 베로니카는 테이블에 침몰하는 배처럼 엎어졌다.
물론 그녀가 오나홀이 어쩌니 하는 농담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자기 방의 침대에서 수치심에 몸부림치게 되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인간족이라면 15세 전후로 거치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좀 늦게 온 셈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런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나의 그대가 라리루라에게 말했다는구나. 아내는 해 봤자 4~5명 들일 거라고.”
“4~5명이요? 그만큼 더 들이신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내게도 충분히 희망이 있지 않을까.
티르시는 본인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얼굴이 밝아져갔다. 무슨 조건으로 아내를 선택하는지는 몰라도 자리가 최대 5석 정도는 남아 있다면 한 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말투로 보면 ‘최대’ 5명이다.”
“……………….”
기대했던 만큼 낙차는 컸다. 확 밝아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죽상으로 변한 티르시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4~5명이라고 말한 걸 보면 4명에서 만족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도 행복해 보이는 그가 자신을 골라줄 가능성이 있기는 할까? 그럴 만한 매력이나 이점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사정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소문으로 듣는 노르드의 성장은 가히 파죽지세다.
이대로 간다면 어디 귀족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와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3녀나 4녀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보내진 이들이겠지만, 미모가 뛰어나고 성품이 바른 이도 없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더 자신이 그의 아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놓고 티르시는 ‘이젠 아예 대놓고 그쪽으로 머리를 굴리는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날 둘이서 대화하며 연심을 자각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다는 말인가. 만약 그에게 이런 속내를 완전히 들킨다면 수치심에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아예 몰라주는 것 같지는 않은데…….’
티르시는 한숨은 참아낼 수 있었지만, 울적한 마음에 그만 테이블에 엎어지고 말았다.
하긴 그렇게 표를 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도 티가 안 나서 솔직히 좀 긴가민가 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생각대로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거라면 이건 완곡한 거절의 사인이 아닐까.
그렇게 중증의 자신감 결핍증인 두 미녀는 테이블에 같이 머리를 박고 있다가, 슬쩍 고개를 들고 눈이 마주쳤다.
미묘한 경계와 애매한 질투심.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유대감.
그녀들은 나나 그녀나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픽 웃었다.
“뭐어…… 나로부터 말하자면 고작 4~5명으로 끝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그때 조금 어색함이 줄어든 베로니카가 말했다.
“인간의 왕후장상들도 축접질은 일상이라지? 격에 따라서 여자를 늘리거나 하고. 그렇다면 나의 그대가 인간의 왕보다 못할 이유가 없는 건 사실이다.”
“그, 그래요?”
진심이 담긴 말에 티르시는 입을 벌렸다.
뿔을 숨긴 아름다운 미모 탓에 깜빡하기 십상이지만, 베로니카는 티르시와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저주가 어쩌니 하던 자리에는 티르시도 있었기에 사정은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왕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니?
그건 베로니카는 노르드가 왕보다 더 존엄하거나, 아니면 장차 그만큼 위대한 인물이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 점도 놀랍기는 했지만, 티르시는 이것만은 묻고 싶다는 생각에 머뭇거리며 질문했다.
“……그러면 아까 전에는 왜 그러셨어요?”
“그, 그거랑 이거랑은 얘기가 좀 다르지.”
베로니카는 산뜻한 얼굴로 낭군의 위대함을 의심하지 않던 때랑은 다르게 대답을 어물거렸다.
“나는…… 우리는, 나의 그대가 새 여인을 들인다고 해도 거부할 생각은 없다. 내가 그의 마음을 얻은 게 아니라, 그가 나의 마음을 받아준 것이니까.”
티르시는 말하지 않고도 눈만으로 말을 재촉했다. 그녀의 눈빛에 베로니카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그, 그렇지만! 눈 앞에서 대놓고 그러면 나도 조바심이나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잖느냐! 나와 네가 동등한 입장인 것도 아니니만큼 더 그렇다!”
“이해해요! 진짜 완전 이해해요!!”
라리루라에게 눈 앞에서 보란 듯이 당했을 때를 떠올리고 머리를 끄덕이는 티르시였다.
“으흠. 아무튼 아내들끼리는 사이가 돈독해서 이해심을 잘 발휘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나도 나빴다. 올챙이 적을 생각 못 하고 서투르게 굴었던 건 인정하마.”
그녀는 ‘책 때문’이라는 쪽팔린 이유는 숨기고 말했지만, 그런 대답에 티르시는 또 한숨을 쉬었다.
“저도 알고 지낸 기간은 프란체스카 양이랑 비슷한데…… 후으으…….”
차라리 그때부터 거리를 둘 게 아니라, 그와 가까이 알고 지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아니, 적어도 명예 귀족이라는 허울에 눈이 팔리지 않았더라면 집들이에 초대 받는 사이에서 더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다른 아내들과도 더 친해졌을 텐데.
‘라리루라도 아직 좀 더 독점하고 싶어하는 모양이고…… 지금 당장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티르시느 그렇게 방침을 정했지만, 잊고 있는 게 있었다.
이미 그 장황한 계획이 실현되기도 전에, 새치기라곤 부를 수 없는 새치기가 몇 번씩이나 발생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베로니카는 그녀의 한숨에 움찔하더니 항변했다.
“하지만 네 잘못도 있다. 네가 그렇게…… 그, 능숙하게 유혹하지만 않았어도! 나도 그만큼 흥분하진 않았을 거다.”
“유혹이요?! 제가요?!”
금시초문이다. 혼비백산이다.
“그래! 내 경우는 어땠는지 아느냐?! 언제 말하지? 지금? 지금인가? 하면서 주인에게 간택 받고 싶어하는 들고양이처럼 주변을 서성거리는 정도였다! 그에 반해서 티르시, 너는 어떻느냐! 아예 입에 목줄을 물고 나의 그대에게 얼굴을 비벼대는 수준 아니냐!!”
─쿵쿵! 숨도 안 쉬고 몰아붙인 베로니카가 테이블을 쳤다.
“네 몸의 제어권을 나의 그대에게 넘기겠다고? 그게 당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더냐!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냐?! 무식해서 용감한 것이냐?! 그거 아주 숫처녀다운 만용이로구나!!”
“수, 숫처녀요?! 제가 왜 숫처녀에요!!”
“에이잇! 가까이 오지 말거라! 처녀 냄새가 진동을 한다!”
베로니카는 의자를 뒤로 당기면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랬지 참. 저 사람, 아니 저 바이콘은 사람의 처녀성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지. 티르시는 뒷목이 뻐근해졌다.
하지만 왜 정결을 지킨 걸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같은 연금술 학파의 친구로부터도 주구장창 비슷한 이유로 놀림받았던 만큼, 그녀도 억하심정이 폭발했다.
“아~ 네!! 그러시군요!! 그러는 베로니카 씨는 처녀 관두셨나 보네요!! 저주도 안 풀렸다면서 원래 모습으로 잘 돌아다니시는데, 그 모습으로 고향이라는 곳에 돌아가면 일족 분들이 ‘아 이 녀석 했구만?’ 하고 눈치까고 뜨듯미지근한 눈으로 바라봐 주시겠네요!!”
“으꺄아아아아아악──?!”
너무나도 쉽게 상상이 가는 현실적인 광경에 베로니카도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작은 단서로 적의 급소를 훌륭하게 찌르는 지혜. 그야말로 마법사의 귀감이었다.
“안 돌아간다!! 나는 저주가 다 풀릴 때까진 고향에 안 돌아간다!! 아니, 못 돌아가!!”
베로니카는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털어댔다. 마치 그렇게 하면 티르시가 때려박은 팩트가 머리 밖으로 뿌리쳐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오래 알고 지낸 이웃들에게 경험의 유무와 시기까지 싸그리 간파당한다니? 상상만 해도 마음이 잘게 썰리는 듯 했다. 묘하게 상냥한 대우를 받으면 그날 부로 유서를 쓸지도 몰랐다.
“내, 내 사정이야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제어권은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갈 테니 명심하거라!!”
공포에 떨던 베로니카는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울먹이면서 삿대질을 날렸다.
“그딴 걸 만들었다가는 나의 그대가 네 몸을 탈취하는 것도 여반장이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암캐처럼 배를 까뒤집고 싶은 것이냐?! 나의 그대는 자기 여자한테는, 과, 과, 과격하다고!!”
“과, 과격해요?! 정말요?!”
“의외지?! 의외겠지?! 그게 숫처녀의 한계다, 어리석은 것!!”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또 숫처녀라고 했어──!!!!”
티르시는 희박하게 남은 이성으로 생각했다. 이 연구실이 방음이 잘 돼 있어서 다행이라고.
“후우, 후우……!!”
“하아, 하아……!!”
그렇게 소란을 피우던 그녀들은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날카로운 눈빛을 부딪히다가, 천장에서 아직까지도 춤을 추고 있는 불꽃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거의 동시였다.
흥분한 몸에 열기까지 닿자 계절도 잊을 정도였지만, 불꽃 무리를 발견하자 머리가 식는 기분이었다.
“……싸우지 말고 협력해 달라고 했었지.”
“……그랬죠.”
“……연구, 시작할까.”
“……네. 시작해요.”
그녀들은 크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녀들이 앉은 자리는 도저히 친밀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었지만, 아까까지의 어색함은 더 이상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팔랑.
티르시는 베로니카가 말 없이 날려준 연구 내용을 읽다가, 조금 걱정스럽게 빈 자리에 눈을 향했다.
“그나저나, 노르드가 많이 늦네요. 별 일 없겠죠?”
“무얼. 찻잎을 찾느라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그렇겠지?
티르시는 어딘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연구에 집중했다.
딱히 그가 어디로 간 것도 아니잖은가. 쓸데 없는 걱정을 할 시간이 있다면 연구에 몰두해서 빨리 결과를 내는 것이, 그를 더 기쁘게 만들어줄 거라고 티르시는 생각했다.
그렇게 두 마법사는 어찌어찌 심금을 털어놓고, 진심으로 협력하는 관계를 갖춘 것이었다.
사족이지만, 노르드가 돌아온 것은 그 뒤로부터 30분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