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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25화 (425/1,009)

무술의 달인은 무기의 차이도 쉽게 극복한다.

그게 이세계 전사들의 상식이지만, 그래도 역시 무기를 든 쪽이 맨손보다는 유리한 게 사실이었다. 달인은 붓을 가리지 않는 건 맞는데, 손꾸락에 먹을 묻히는 것보단 개털 붓이라도 있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일까? 내가 흡성대법으로 카피한 권각술(拳脚術)은 무기를 뺏는 기술을 주력으로 삼았다.

“Qrcc?!”

하이퍼 점프를 갈긴 나는 트롤의 몽둥이와 부딪혀서 상쇄 효과가 일어난 틈을 노려서 무기를 노렸다.

─콰득! 질은 낮지만 마나가 깃든 두꺼운 몽둥이에 짐승의 턱처럼 움츠러든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내 손은 전혀 다른 생물의 기관이 된 것처럼 엄청난 악력을 발휘했다. 나는 레고 모가지를 뽑듯 몽둥이를 탈취했다.

“쯧!”

하지만 그대로 손을 뻗어서 손목을 비틀고 뜯어내려던 내 노림수는 실패하고 말았다.

트롤 새끼가 머리 좋게 몽둥이를 버려버리고 문 워크를 밟았기 때문이다.

속도는 내가 앞섰지만 놓치고 말았다. 아직 이 기술을 완벽하게 체화하지 못했단 뜻이었다.

움직임에 유연함이 없고 집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장차 해결해야 할 문제다.

“야! 미련하게 주먹질 하지 말고 불로 태워버려!”

“마나 아끼려고 그랬지. 숲 태워먹을 일 있어?”

나는 뚱하게 다나의 훈수를 받아쳤다.

생물을 산채로 태워버리려면 화력이 높아야 하는 건 자명한 일이었으며, 트롤은 골드에서 플래티넘 정도의 몬스터였다. 이 숲골짜기에서 대책없이 화력을 뿜었다가 빗나가면 대참사다.

‘머리가 좋은 걸 보면 나이가 좀 있군. 하지만 몸이 약해질 정도로 늙지는 않았고.’

트롤은 젊을 때가 가장 육체가 강력하고, 늙을 수록 노회해진다. 호랑이 같은 새끼다.

“Bqa! Goooop!! (무기! 내놔라!!)”

그런 의미에서 이 새낀 전성기의 트롤이다.

몸은 적당하게 근력이 남았고, 살 만큼 살아서 경험도 풍부하다.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트롤이었다.

모험가 길드에 보고하면 플래티넘 클래스는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하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체평가에 쩨쩨한 나도 내가 플래급은 된다고 보니까.

“나도 도울게.”

프랑이 나이프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원래는 후방에서만 움직이던 프랑이지만, 내가 적이 1명이고 방어구가 충실해진 지금은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끄덕.

우리는 눈빛을 섞으며 이신전심으로 작전을 짜고, 그대로 움직였다.

스스스스…!! 내 손바닥이 시뻘건 빛을 뿜었다. 불꽃 같은 느낌은 없고, 마그마처럼 압축된 불꽃이었다.

‘재생을 막을 방법만 충실하면 트롤의 토벌 난이도 평가는 1단계 내려간다.’

불이 튀는 게 걱정된다면 화력을 좀 낮춰서 압축하고, 상처에만 화상을 남기면 될 것이다.

고기 무한 리필 생물인 트롤이라도 심각한 부상은 순식간에 치료 못 하니까.

화륵─! 견제타로 불을 붙인 몽둥이를 대충 던졌다.

수풀에 닿지 않게 던지려고 날아가는 속도는 무진장 느려터졌지만, 트롤이라면 피하겠지. 고양이한테 물을 끼얹는 셈인데 잡고 휘두를 리가 없었다.

“QUuuaaaaaaaaaaaaaaa─!!!”

그런데 놀랍게도 트롤은 본능을 극복하고 파이어 인챈트가 된 몽둥이를 잡아챘다.

손바닥의 화상 정도는 문제 없긴 하겠지만, 보통 똑똑한 게 아니었다. 이거 생각보다 엘리트인 새끼였네.

부웅─! 쥐불놀이처럼 불로 궤적을 그리면서 몽둥이를 휘두르는 트롤.

나는 수도를 세워서 양손을 X자로 휘둘렀다.

창 같은 날붙이로 베어봤자 트롤에게 치명상을 주기 어려워서 주먹질을 선택한 거였는데, 무기를 부술 뿐이라면 자르든 부수든 상관없었다.

아니 씨발, 근데 생각해 보니까 마법을 더할 거면 창이어도 됐겠네.

흥분했던 나는 뒤늦게 눈치를 깠지만, 아무튼 저 놈 모가질 따기 직전이니까 괜찮겠지.

혈수마공(血手魔功)

핑거 플레어 소드(Finger flare Sword)

새빨갛게 선 수도로 몽둥이를 베어냈다. 강력해진 악력은 수도의 튼튼함에도 크게 기여했다. 손가락을 세우는 힘은 다름 아닌 악력이니까.

─퍼버벅!

무기를 쪼개버리자 프랑의 나이프가 트롤의 근처에 날아들어서 꽂혔다.

트롤은 좆도 경계하지 않았다. 빗나간 궤도였고, 맞아봤자 작은 나이프 정도는 재생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GoGoGo──!!”

“Quo?!”

하지만 그건 완전히 오산이었다. 포크레인 대가리처럼 튀어나온 2개의 팔이 양쪽에서 도망치려는 트롤을 샌드위치처럼 짓뭉개버렸던 것이다.

“오오? 속도가 좀 빨라졌네?”

“연습 많이 했어!”

외투의 부속 효과도 도움을 줬을까. 나는 짧게 중얼거렸던 말의 대답에 웃으면서 CC기에 쳐맞은 트롤의 배에 타오르는 정권 지르기를 먹였다.

“불-주먹!!!”

─퍼엉! 힘과 압축 화력이 더해지자 살과 가죽은 스트리폼처럼 뚫렸다.

재생빨을 믿고 방어력에 투자를 안 했군. 갑옷만 입었어도 좀 더 고전했을 것이다.

─퍼버버버버벅!!

골렘의 손에 짜부돼서 비명도 못지르는 트롤에게 터질 듯한 악력을 주먹에 담아서 연속 진심 펀치를 날렸다.

내 시그니처 무술인 무무역역무의 연속기를 주먹질로 재현해봤는데, 성능은 영 아니었다. 모든 기술이 그렇게 잘만 맞물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qA, aaooo……”

그래도 배때지를 뚫어버리는 주먹질의 연타에 버티지 못한 트롤은 금방 고개를 떨어트렸다.

“으, 환 공포증 극혐.”

내가 중얼거리자 프랑도 마법을 풀었다. 골렘이 없어지니 냅다 넘어가는 트롤의 시체.

“이 녀석 피 비싸게 팔리지 않나?”

“포션 재료로? 좀 역하다는 사람도 있긴 한데 효과는 좋으니까. 근데 니 담을 통은 있냐?”

“아니. 석판은 갖고 왔는데 따로 빈 병은 안 챙겼어.”

이 트롤, 제대로 뽑으면 10~20L는 나오게 생겼다.

그걸 다 담을 통 같은 건 갖고 오지 않았다. 해 봤자 주전자나 냄비 정도?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그러자 프랑이 턱을 괴다가 말했다.

“으음, 마차에 가면 식수를 담은 물통이 있을 거야. 식수는 노르가 마법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통만 달라고 해 볼게.”

“오? 그렇겠네. 역시 우리 프랑.”

“그러게. 랩실쟁이 빡대갈통 석박사보다 낫다.”

“헤헤. 다녀올 테니까 기다려!”

프랑은 우리 칭찬에 발그레 웃으면서 달려갔고, 나는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문제에 직면했다.

“근데 이거 피는 어케 뺌? 뒤집어 놓고 하루 종일 존버?”

“아, 맞네. 돈이 궁하면 그러는 게 낫겠는데…… 으음. 니 맘대로 해라.”

“선택장애 남편한테 짐을 떠넘기네. 몹쓸 년.”

귀성길이 막힌다면 모를까, 아직 해도 창창한데 지나가는 시간을 낭비하긴 좀 그렇다.

“마차에 실는 건 에바고…… 이렇게 해 볼까.”

나는 로마니아에서 배운 바람 마법을 손에 띄웠다.

기압의 차이를 발생시켜서 회오리를 부르는 저위 마법, 〈돌진하는 돌개바람(Strike Gust)〉이었다.

─휴르르르르.

나는 오딘의 눈으로 마법의 술식을 주구장창 분석했다.

이 마법에서 유체(流體)에 압력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원리를 파악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개량을 시도한 것이다.

“통 가져왔어!”

다나가 지루해 할 쯤에 프랑이 자기 몸통만큼 큰 식수통을 가져왔다. 안에 물이 없다지만 종이 상자라도 들고 온 듯한 경쾌한 대쉬였다. 병신 종족 좆간은 오늘도 웁니다.

“땡큐. 나도 마침 완성했어.”

나는 죽어 나자빠진 트롤의 몸에다가 해적 룰렛처럼 바람 구멍을 송송 뚫어줬다.

그리고 압력을 발생시켜 그 상처에서 피를 뽑아냈다.

─촤아아악!!

분수처럼 터져나온 피를 프랑이 내려놓은 통에 담았다.

“요요 알부자 새끼.”

나는 뿜어지는 피를 흐뭇하게 구경했다.

채혈 방법 치고는 너무 난폭해서 판매 가격을 후려쳐 받게 되겠지만, 돈 욕심을 부릴 거였으면 불주먹으로 배를 쑤셔대지도 않았다. 버리고 가면 아까우니까 챙기는 거지.

“와, 이 미친 놈. 아주 대마법사 다 됐네.”

다나는 어이가 없다는 피 분수를 구경했다. 나는 으스대며 입가를 씰룩댔다.

“운 존나 좋아서 다행이네. 내가 노예 시절에 마법을 배웠으면 너는 나랑 얼레꼴레 하는 건 엄두도 못 냈을 걸.”

“눈깔 치트는 눈치껏 아가리 싸물자. 칭찬 좀 해 줬다고 바로 깝싸는 것 봐. 니가 라리루라한테 뭐라 할 처지냐?”

“아핫♡! 그야 사랑하면 닮는 법이니까요♡!”

“……우웨에엑.”

“누나? 우웩은 아니지? 누나?”

“괘, 괜찮아! 난 쪼금 귀엽게 들렸어!”

나는 진심으로 역겨워 해대는 다나에게 약간 울컥했지만, 프랑의 칭찬에 집중해서 빠르게 피를 빼냈다.

트롤의 시체를 땅에 묻고 불꽃을 퍼부었다.

“너는 양초다. 양초가 되어라.”

─화륵! 나는 손가락에 핀 불꽃을 꺼트렸다. 그리고 근처에 나뒹구는 오우거도 대충 던져버렸다.

“그나저나 다나. 오우거랑 트롤이 같은 지역에 사는 건 좀 미친 것 같애. 얼스터 방계 사람들이 산다고 이 지방이 무슨 RPG의 후반 지역 마을처럼 돼 버린 거야?”

“트롤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오우거는 이쪽에 좀 많아. 예전에는 더 많이 분포돼 있었다지만.”

“집 밖 길거리에 오우거가 바글대는데 10살배기 기집애가 가출을 했다구요? 우리 눈나가 20년 전부터 머리가 많이 안 좋으셨구나.”

그러니까 나처럼 인생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박사 과정 같은 걸 밟았지.

내가 가엾게 쳐다보자 헬턴트 사람 다나는 이마에 핏줄을 띄웠다.

“20년이 아니라 19년 전이야, 띨빡놈아. 그리고 오우거는 영역 의식이 존나 쎄서 지들 영역 밖으로 안 나오거든?”

“그렇게 말하는 자칭 동물 권위자는 절반 넘게 잡아먹혀서 동물행동학의 증편과 개찬을 돕는다더라.”

“아니 씹, 진짜라고. 오우거는 대형 몬스터 치고는 번식력이 꽤 좋은 편인데 영토의식이 있어서 숨어 산다니까.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쫓아가서 잡아먹기는 하지만 영토만 잘 피해가면 문제 없어.”

“그렇군요… 가족들도 알고 계신가요?”

이세계인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어썸하다.

아니, 지구에서도 치명적인 전염병이 유행하는데 ‘아무튼 안 뒤짐’ 하고 나돌아다니는 사람이 많던 걸 생각하면 이세계나 지구나 오십보백보인가.

도시나 마을도 오우거의 나와바리랑 떨어진 곳에 멩글었을 거니까.

“아, 그래. 사족이 붙은 김에 나도 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내 가슴 사이즈?”

“아니. 그건 알지. 다른 거야.”

다나는 간접적인 찌찌 비하 드립에도 놀라우리만치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마치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보는 사람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제미니는 또 뭐하는 년이냐?”

“어…….”

고전 명작 소설의 여자 주인공? 숲지기 댁 장녀? 괴물 초장이의 레이디?

여러 가지 표현이 떠올랐지만, 뭐라고 말해도 사실대로 안 믿어줄 것 같은 이 예감은 뭐지.

이것도 하렘남의 숙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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