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26화 (426/1,009)

마차로 돌아와서 다시 한나절을 덜컹거린 결과, 우리는 딱 북부도시로 가는 중간 쯤에서 내리기로 했다.

“예? 여기서 내리신다구요?”

“넹. 아, 피 넣은 통은 들고 갈게여. 조심해서 들어가십셔.”

트롤 피를 넣은 통은 가면서 석판에 넣을 생각이다. 물통이 여러 개라 어케 잘만 하면 전부 들어갈 듯도 했다.

일부러 중간에 내린 이유?

굳이 북부의 영지에 들렀다가 가는 것보다는, 이 위치에서 내려서 걷는 게 더 빨리 다나의 고향으로 직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도시에 들릴 이유도 없으니까.

그렇게 내려서 밤이 될 때까지 걷다가 야영을 한 번 하자, 금방 또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우리는 겨울잠도 없는 동물들의 가이드를 받아가며, 아침해를 맞는 다나의 고향에 도착했다.

“여기야?”

“……응. 이 동네는 하나도 변함이 없네.”

다나는 어색함도 잊은 것처럼 고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랑 프랑도 말없이 그걸 따라했다.

얼스터의 군락이래서 이번에도 약간 인디언 부족의 움막을 상상했는데, 현실은 조금 낙후화된 시골 마을 같았다.

그래도 내 눈에 보여지는 모든 양식은 브리타니아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생활감이랄 게 남는다.

거대한 도시든 작은 마을이든 풍토의 닿으며 그 생활감을 느끼면, 눈치코치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대략 어떤 곳인지 감이 잡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이만큼 작은 곳이라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

시골 마을이란 접점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늑하고 그리운 공간이지만, 외지인한테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자기만의 룰이 존재하는 장소에서 부외자를 들여보내는 건 그들에게 필요할 때 뿐이었다.

“방랑객인가? 우리 마을은 외지인은 받지 않는다. 식량이 필요하다면 나눠주겠지만, 쉴 장소를 찾고 있다면 남서쪽에 있는 브리타니아 인의 도시를 향하도록.”

단지,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얼스터의 방계 ‘픽트 인’의 마을은 무척이나 밝고 건전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새벽녁이 저물면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받는 전사들은 딱히 사납지도 무신경하지도 않은 수준에서 외지인을 거절했다.

숨기고 싶은 비밀을 묻어뒀거나 탐욕스럽게 방문자를 착취하는 사람들의 신경질적인 대처에 비교하면 아득하게 건전한 대응이었다. 하늘이 푸르러지는 중에도 꼿꼿한 그들의 등과 청빈한 눈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끄러움 없는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자부심이다.

단적으로 요약하자면, 첫 인상이 좋았다는 뜻이다.

아내님의 고향이라서 콩깍지가 씌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실례합니다. 저희는 사제장 님의 손님인데, 혹시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편지 말고는 초대장이랄 것도 없습니다만.”

“사제장 님의? 디펠로 놈 때문에 불려왔나?”

“……디펠로요?”

“아니라고? ……뭐, 됐다. 들어가도록. 너도 실력은 빼어나 보인다만, 힘만 믿고 사고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건 명심하고.”

쿨한 경비병들은 입성까지도 시크했다.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는 얼굴이네.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다나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을 힐끔 보면서 지나쳤다. 나도 궁금한 마음에 속삭였다.

“전혀 못 알아보네. 피부색이나 머리색만 봐도 알 법 한데.”

“저 사람들은 바깥 도시에 나간 경험이 거의 없을 걸. 아예 없을 수도 있고. 그럼 마을 사람이랑 어디가 다른지도 구분 못 하고, 하려고 들지도 않지 않겠어?”

“과연…… 방계라더니 얘기로 듣던 얼스터 인들보다 훨씬 더 얼스터답네.”

“푸흐흐. 얼스터 답다? 그거 칭찬이야?”

“욕은 아니지. 적어도.”

저렇게 남들에게 무심하면서도 자신의 힘을 갈고 닦는 것에 열중하는 사람들이니까, 고대 문명 황금시대의 르네상스에도 좆까라 하고 당시 국가의 일각으로 남아 있었던 걸까.

예전에 사르가디스로 가면서 마차에서 봤던,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얼스터 인 전사랑 비슷한 느낌.

21세기 사람인 내눈에는 저들의 현묘한 마음가짐이 저들을 야만인이라며 깔보는 병신들보다 현기 어려 보였다.

“우리 집은 이쪽이야. 사제장의 집인데 위치가 바뀌진 않았겠지.”

나는 다나를 쫓아서 걸어가면서 바짝 긴장했던 기분이 좀 헛방을 친 기분이었다.

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랑은 달리, 마을 사람들은 얼스터 종특으로 알몸족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다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저번에 고르갈리아에서 봤던 얼스터 인들이랑은 또 다르게, 제대로 마을 사람 같은 옷이었다.

다나도 눈쌀을 찌푸린 게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자기 고향 사람들이 야만하게 보이지 않은 게 마음에 들었는지 곧 표정을 풀었다.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도 있어서, 우리는 좀 빠르게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당최가 유력자의 집으로는 안 보이는, 심히 평범한 오두막이었다.

집 천장에는 짚을 덮고 울타리 안에서는 가축과 강아지를 기르고 있었다.

뭔데, 이 순박한 농촌 다큐멘터리 느낌은.

“멍멍!! (사람!!)”

입구에 멈춰서자 발 짧은 댕댕이가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와 씨발, 잡종견이 마중을 다 나오네.

새끼 강아지인 걸 보면 다나를 알아보는 것도 아닐 텐데, 경계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꼬락서니가 그야말로 친화력 맥시멈의 시골 똥개 그 자체였다.

‘이 물씬 풍겨오는 정겨운 시골 친가 삘. 감탄스럽군.’

이제 슬슬 여기가 강원도인가 브리타니아인가 헷갈리는데.

혹시 다나의 고향이 바깥 세상이랑 교류하지 않는다는 게, 코스트코나 대형 마트의 입주를 거절하는 지방 소상공인 놈들처럼 욕심 그득그득한 심보의 발로는 아니겠지? 아니길 빈다.

“욘석아. 넌 잠깐 이리 와 있어. 저 누나 긴장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나는 댕댕이를 우리 식량이던 육포로 꾀어내서 조용히 시켜놓았다.

“멍멍! 멍! (사람! 씐난다!)”

“음, 미안. 언니였구나. 암컷이네.”

내가 집어드는데 저항도 없이 헥헥 거리며 꼬리로 팔뚝을 쳐댄다.

경계심 뭔데. 개장수가 없는 시골이냐고.

혹시 내가 트롤의 몽둥이에 맞아서 기절 중인가.

“푸흐흐. 개들끼리라 마음이 잘 맞나 보네.”

다나는 그걸 보며 픽 웃고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한테 배운대로 숨을 크게 마셨다가 뱉으며 턱 막힌 폐를 뚫고서, 다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실례합니다! 사제장님은 계신가요!!”

“……아내라면 출장 중이오. 뉘시길래 오셨소?”

우렁찬 질문에 무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두막을 열고 나온 것은 정정한 중년 남성이었다. 술배도 안 나온 몸은 농삿일이라도 하는지 튼튼했다.

머리는 새빨갛고, 피부는 다나처럼 티 없이 새하얗다. 빨간 머리에 잘생긴 생김새도 있어서 약간 귀농한 드라큘라 삘.

나는 별로 닮지 않은 두 사람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냈다.

다나의 눈은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었다.

[……다나?]

얼스터의 말이었다. 우리를 바라보던 그는 다나를 발견한 듯 입을 찢어지도록 벌렸다.

좀 전의 경비병들처럼 현묘하고 무관심한, 은둔하는 중인 현자를 방불케 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든다.

─텅그렁! 그의 손에서 솥이 떨어졌다.

[다나!! 내 딸 다나구나!!]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는 신발도 안 신고 뛰쳐나왔다.

[우리 딸!!! 세상에,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20년 넘도록 어디서 뭘 하다 온 거냐!!]

[……용케 알아보네. 그리고 20년이 아니고 19년이야.]

[어떤 애비가 딸내미 얼굴도 못 알아보겠냐!!! 어디 한 번 안아보자!!! 아이고, 어쩌다 애가 얼굴이 반쪽이 됐어!!!]

─와락!

“윽!”

얼마나 세게 끌어안으셨는지 다나가 붙잡히면서 놀랄 정도였다. 장인 어른은 얼굴이 망가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며 다나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 녀석아! 이렇게 클 때까지 연락 한 통도 없이 대체 뭘 어쩌고 지냈어! 나랑 니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해요.]

다나는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에 고개를 숙였다.

편지에 전혀 답장이 없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다나의 잘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빼놓더라도 20년 넘도록 가출했다가 돌아온 다나를 혼내지도 않고 반겨준 것이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도 이럴 때라면 과장이 아니겠지.

[됐어, 인석아! 몸 성히 돌아왔으면 됐어…….]

그렇게 훌쩍 커버린 다나를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시던 장인 어른은, 그때 드디어 나랑 프랑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크흥, 훌쩍…… 자네들은? 우리 딸 친구인가?”

“아뇨, 그, 친구라기보다는…….”

당당하게 말해야 했는데, 당당해도 될 상대가 아니라서 좀 말이 느려졌다.

진짜 뒤지게 말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마초의 이름이 울 것이다.

나는 배에 힘을 빡 주고 허리를 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나의 남편인 노르드입니다.”

“……………………남편?”

장인어른의 눈이 점이 되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저 분의 기억 속에서 다나는 10살 때의 꼬꼬마 그대로일 것이다.

나이를 먹을 거라는 생각도 하고, 결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겠지만── 진짜 눈앞에 턱 들이밀어지니까 이해가 따라잡지 못한 거겠지. 이해한다. 나여도 그럴 것이었다.

“……남편? 아내와 남편 할 때의 그 남편?”

“앗, 예. 그 남편입니다. 맞습니다.”

“…………옆에 있는 그 애는?”

귀신 같은 눈치로 치고 들어온다.

우리 장인어른 직업이 무당이신가.

아니면 내가 홍콩할매 급으로 보기만 해도 티가 나나.

“어…… 프란체스카라고 해서, 이쪽도 제 아내입니다.”

“………………다른 아내가 또 있어?”

“에, 음…… 일단 둘 정도 더 있습니다.”

대충 10초 정도일까.

딸과의 재회에 만감이 교차하던 장인 어른께서, 낯빛에서 모든 감정을 싹 빼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스윽.

그 분은 다나를 옆으로 슬쩍 밀고, 내 앞에 섰다. 지혜로운 기운이 가득한 얼굴이시다.

“……자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앗, 예.”

나는 출장 나온 직장인처럼 고개를 90도 숙였다.

“아버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허허. 아버님이라. 과연.”

장인 어른은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내 목을 조르셨다.

와!! 천마 리어네이키드 초크!!

“으켁칵!!! 켁켁!!!”

“아버님…? 결혼…? 아버님……?? 결혼……??”

운율을 확인하듯 중얼거린 장인 어른께서는, 번개처럼 내 머리끄댕이를 잡고 내 무릎에다 니킥을 꽂았다.

“아버님──?!!!!!!! 결혼──?!!!!!!!”

“갸아아아악!!!”

나는 부조리에 쳐맞는 병신 자위대처럼 90도로 배때지를 내줬는데, 우리 장인어른께서도 얼스터 인의 피가 어디 가진 않았는지 매질이 존나 아팠다. 야수회귀 켜둘 걸 그랬다.

혹시 소싯적에 얼스터 피바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셨나요? 킥복싱 검은띠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이 쓰벌놈이!!! 열 살 때 가출한 딸내미를 20년만 넘도록 걱정했는데, 마음을 나누기 전에 들어오지는 못할 망정 볼 장 다 보고 나서 허락만 구하러 와?!!!!!!”

20년 넘게 웍을 돌리던 중국집 주방장 같은 팔뚝을 걷으며 장인어른께서 콧김을 뿜으셨다.

왜 딸 있는 아버지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손이 빠른 걸까. 나도 딸을 나으면 알려나? 이러다 알기 전에 뒤지겄는데?

다나는 깜짝 놀라서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아 진짜!!! 20년이 아니라 19년이라고!!! 그리고 우리 남편한테 무슨 짓인데!!!”

“뭐? 우리 남편?! 우리──?!!!! 남편──?!!!! 크아아아악!!!”

빨간 머리의 장인 어른께서는 주화입마에서 탈마의 경지에 오르는 천마처럼 사자후를 터트리셨다. 존나 보스 컷씬 같다.

프랑은 어버버 거리다가 냅다 낙법을 취한 나를 부축했고, 그런 모습에 장인 어른은 더욱 눈에 불똥을 튀겼다.

“비켜라, 얘야!! 너 같은 애한테도 손을 대는 놈은 맞아도 싸!!!”

“저, 저 스물 네살인데요!!”

“예끼 이 녀석!!! 어른한테 거짓말 하면 못 써!! 얼른 저리 비키거라!! 내 그 썩을 놈한테 훈육 좀 해야 쓰겄다!!!”

─까드드득! 장인 어른의 주먹이 공포 영화가 무색해지는 효과음을 냈다.

이제 보니까 농사하면서 생긴 근육이 아니라 실전 압축 근육이었다. 설명서에 취급 시 부상 주의 마크가 붙어 있을 것 같다.

“……저기, 아빠?”

“왜 불러, 우리 딸!! 아빠 지금 바쁘다!!”

“아니, 바쁜 건 보면 알고.”

어느새 장인어른 뒤로 돌아들어간 다나는, 그 분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고 뒤로 들춰엎었다.

“──남의 남편한테 무슨 짓이냐고 하잖아, 이 푼수떼기야!!!”

“크헤에엑?!!”

─쿵!!

180도 상하로 뒤집힌 장인어른께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감탄이 나올 만큼 깔끔한 져먼 스플렉스였다.

얼스터식 불꽃 효도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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