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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30화 (430/1,009)

“내가 직접 나서기까지 했건만, 결국 수확도 없이 돌아가게 생겼군.”

벤자민 알윈은 말에 탄 채로 자신의 부하를 노려보았다.

셀틱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대마법사 씩이나 되는 자가 자신의 한 마디에 읊조리는 모습에 벤자민은 충족감이 솟아났지만, 그는 귀족답게 감정을 숨길 줄 아는 남자였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네 용기가 모자라 이렇게 일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네놈도 알다시피 나는 관대하다. 내가 권력을 얻은 날에는 너희들도 나름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알았으면 이만 꺼져라. 저 천박한 얼시 혼혈 놈들을 쫓아낼 방법을 구상할 때까지 꼴도 보이지 마라.”

벤자민은 셀틱을 쫓아내고 침을 뱉었다.

타고 있는 말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다시 혀를 찼다. 혈통증명서도 없는, 노새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말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영주를 물려주시기만 했으면!’

나이를 헛먹고 판단력이 흐려진 가신들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면서 그는 이를 갈았다.

생전에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염려할 만큼 그에게 큰 애정을 쏟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면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어째서 동생에게 작위를 빼앗겨야 했단 말인가.

‘……쯧. 뭐, 상관없겠지. 저 얼시 놈들을 쫓아내면 그만큼 장차 영지에서 다스릴 수 있는 토지도 늘어난다.’

그렇다면 가솔들도 자신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생도 영지를 운영함에 있어서 그의 지혜를 빌리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점차 섭정의 형태를 띄어서 영주 자리를 내놓도록 종용하면 돼. 완벽한 계획이다.’

벤자민은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원래 그의 가문명을 그대로 씌운 북부도시 알윈은 오우거, 트롤 등을 대비해서 얼시 놈들과 무난한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바로 그 오우거나 트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것도 1년이 넘었다.

─영지를 어지럽히는 몬스터가 없다면, 더 이상 저들에게 자비를 내릴 필요도 없는 게 아닌가?

벤자민은 자신의 총명한 머리로 그 사실을 깨닫고, 귀족과 연을 대고 싶어 하던 신흥 마법결사와 만났다.

몬스터의 피해가 줄어든지 무려 1년이다.

벤자민이 보기에 그건 10년을 아우르는 정책을 정하기에 충분한 근거였다.

오히려 더 이상 시행이 늦어진다면 때를 놓치고 100년을 후회할 막심한 손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가신들과 다르게 마기마기라는 이름의 마법결사는 빠르게 그의 명석함을 알아보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기에 벤자민은 기꺼이 자금과 권력을 내주었다.

그 자금이 영주인 남동생을 닦달해서─사용처도 말하지 않고─ 캐 온 돈이라는 사실은 어쨌든, 벤자민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의 계획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가 북부를 더욱 융성하게 만든 성군으로 이름을 날리는 날도 머지 않은 것이다.

‘우선 세금을 올려서 자금을 충당하고, 저 얼시 놈들은 내 사병으로 삼아줄까.’

갈 곳이 없어진 얼시들은 북부 최고의 도시가 될 알윈으로 올 게 뻔하다.

그렇다면 저 야만인들을 브리타니아의 위대한 기술과 식문화로 감탄시킨 뒤에, 유일하게 봐줄 만한 힘은 몬스터를 해치우는 병사로 써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애초에 자신의 영지에 병사가 천 명도 안 되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 사제장이라는 년도 얼굴이 봐줄 만 했지. 영부인 자린 내줄 수 없겠지만, 첩으로 삼아줘도 좋겠어.’

그렇게 병합한 병사들로 영지를 지키고, 세금을 걷으면서 일을 하지 않는 시민들을 귀농시키면 돈이 복사가 될 것이다.

벤자민은 완전무결한 미래상을 그리며 미소지었다.

앞일을 생각하자 지금 타고 있는 한심한 말도 넘어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그 새끼 혹시 병신이야?”

장인어른과 사제 계급의 여성으로부터 앞뒤 사정을 듣고, 다나가 고심 끝에 내뱉은 본심이 저거였다.

거침없는 욕설에 장인어른은 충격을 받은 듯 했는데, 우리 눈나는 살짝 움찔하다가 한숨만 내쉬었다.

“영주는 뭐래? 혹시 저 머저리를 앞세워서 마을을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고?”

“사제장께서는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요. 저는 이 마을에 살던 시간보다 다른 곳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요.”

“아가씨를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여긴 언제든지 아가씨의 고향입니다. 기억은 혼자 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걸요.”

다나는 그녀의 촌철살인에 입을 다물었다.

“……하여튼. 그 마기마기란 놈들도 하는 걸 보면 저 놈을 이용하는 거겠지. 영주가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야 큰 문제는 아니겠네. 이 마을이랑 척을 질 생각이 아니면 어련히 수습하겠지.”

“예. 문제는 오우거의 트롤이 줄어들었다는 사실과, 윙글링 인들이 극성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저번에 왔던 그 NTR 씨벌럼도 말했던 단어에 눈을 깜빡였다.

“윙글링이요?”

“베르세르크야. 게르마니아에 사는 사람들이랑 다르게 꽤 천성이 난폭하지만, 특징은 비슷해.”

내가 의문을 표시하자 다나가 간결하게 설명해주었다.

베르세르크. 동물의 신체적 특징을 가지는 3대 야만족의 한 인종이다.

“난폭하다고? 막 약탈 같은 걸 하나?”

“그렇진 않다. 우리도 가만히 보고 있진 않으니까.”

장인어른은 그럴 리 있겠느냐는 듯이 말씀하셨다.

“대신 무척 호, 호…….”

“호전적?”

“그래, 다나야. 호전적. 싸움을 걸어서 일을 해결하려 드는 경향이 많다. 결투의 승자가 쟁취하는 방식이지.”

허미 씹.

내가 알기로는 이세계의 베르세르크는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인 걸로 아는데, 브리타니아로 흘러들어온 이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섬나라 매운맛에 중독이라도 됐나?

하긴, 맨날 정어리 파이 같은 걸 쳐먹으면 미칠 만도 하지. 나는 로지컬한 추리에 이해심이 치솟았다.

“트롤이나 오우거가 이유도 없이 줄어들진 않았겠지. 뭔가 일이 있어서 사냥감도 몬스터도 적어진 거겠네?”

“윙글링 인들의 식량 수급은 사냥이 대부분이니까요.”

다나가 중얼거리자 사제 계급의 여성이 대답했다.

“그래서 저희에게 식량을 양도하라는 식의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제장님과 족장께서 쫓아내고는 계시지만, 깨끗하게 담판을 짓기에는 부담이 커서…….”

“그 사람이나 족장이 다치면 아까 그 빡대가리 귀족이 뭘 할지 모른다? 그래서 어머니 같은 에린 원리주의자가 도시로 나갔던 거고? 족장님이 설득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어.”

“후후.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말을 삼가야겠네요.”

그녀가 너스레를 떨며 암묵적으로 수긍하자, 다나는 뭔가를 생각하려는 듯 눈을 굴리다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남편아, 남편아.”

“왜. 내 호칭에서 ‘놈’ 자가 빠진 걸 보면 벌써부터 불길한 예감이 뷰룻뷰룻 한데.”

내가 불안해하자 다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잠깐 같이 그 윙글링 놈들 줘패러 안 갈래?”

“이 누나가 기어이 돌아버렸구나. 망했네. 힐러가 상태이상 걸리면 폭망 각인데.”

지금 대화에서 그런 결론이 나올 이유가 어디 있었지? 난 물론이고 프랑이나 다른 사람들도 입을 쩍 벌렸다.

“아, 아니! 다나야! 니가 그 위험한 놈들한테는 왜 가!”

“어차피 족장님이랑 어머니는 영주한테 하소연이나 하다가 돌아올 거 아냐. 같은 얘기 두 번 하기 싫으니까 아빠랑 그 사람이 둘 다 있을 때 할 얘기 끝낼 생각이야.”

당황하는 장인어른에게 다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알윈으로 따라가 봤자 길이 엇갈리기나 더 하겠어? 몇 대 쥐어박아서 말을 듣는 놈들이니까 줘패주고 오면 딱 그 사람도 집에 돌아와 있겠네.”

“그러면 적어도 다른 전사들이라도 데려가거라!”

“그 멍청이 귀족 못 봤어? 뭘 할지 모르는데 여기 사람들을 왜 데려가. 그리고.”

다나는 약간 말하기 낯뜨거운 듯, 새초롬하게 내 옷소매를 살짝 쥐었다.

“얘는 내가 고른 남자야. 귀 4개 난 무식한 바보들에게 질 것 같아?”

“……어머머머?”

사제 계급의 여성은 뭔가 재밌는 거라도 본 사람처럼 눈초리를 둥글게 휘었고, 장인어른은 넋이 나가버리셨다.

“……………….”

그리고 왠진 모르지만, 프랑도 내 반대쪽 소매를 잡았다.

음. 소외감이라도 느꼈나. 존나 귀엽긴 한데, 너희 신랑은 지금 쪽팔려서 죽겠다.

“남편. 같이 가 줄 거지?”

다나는 내가 아무 말도 못하게 앞뒤로 틀어막아놓고서는, 무슨 나한테 선택의 여지라도 있는 양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서로를 잘 알고 머리가 범상치 않은 만큼, 재간을 부리면 어느 서커스걸 못지 않은 그녀였다.

“……그래, 가! 가자고! 여기서 싫다고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이 여편네야!”

“푸흐흐. 왜?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얘기일 걸?”

포기한 듯 성을 내는 나를 달래듯 다나가 말했다. 나는 좀 미심쩍은 듯 눈쌀을 좁혔다.

“나한테도? 어디가?”

“베르세르크 인들은 우리랑 다르게, 보물이나 유적 같은 게 그럭저럭 있는 편이거든?”

나는 말이나 해 보라는 듯 경계심 맥시멈으로 쳐다봤는데, 다나는 가시를 구르는 고슴도치라도 보듯이 웃었다.

“박사, 안 할 거야♡?”

아잇 싯팔.

그렇게 석사따리 석사따인 남편은 속절없이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고 말았다.

목에 목줄이 채워져도 산책을 나간다는 것에만 신나하는, 잘 교육된 애완견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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