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영지 알윈은 안개가 많은 도시였다.
뭔가 마나의 영향이 있어서, 라기보단 그냥 바다와 가깝고 추운 영지라서 그렇다.
영국 하면 떠오르는 스모크 가득한 런던보다야 낫겠지만, 우리가 방문한 알윈은 안개에 숨어 무겁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아직 트롤 킹의 군대가 습격해 왔다는 사실이 퍼진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영주를 만나기 전에 우리 족장부터 만나러 간다. 불만은 없겠지?]
[응.]
리루아는 장인어른의 말씀에 따랐다.
이 금발 여우 귀의 틀딱 소녀는 현장에서 트롤 군대를 본 사람의 대표로서 불려갈 예정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야생동물이 기른 듯한 유사 잼민이에게 조리 있는 발언을 기대하는 건 무리수였다.
그래서 사제장이신 장모님과 족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 분들이 영주에게 설명하는 자리에 겸석한다는 모양이었다.
제일 상태가 나쁘던 프랑은 일단 교단에서 치료부터 받게 되었다. 우리는 성문 앞에 잠시 멈추었다.
[다나, 너는 어쩔 거니? 어머니를 만나보러 갈 거야?]
[가야지. 영주님에게 설명하는 자리에도 남편이랑 꼽사리 낄려고. 괜찮아?]
[그래. 내키는대로 하렴.]
장인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모님과 족장이 있다는 여관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찌릿.
나는 저번날 우리 눈나에게 청혼을 했던 씨팔럼을 은근히 째려보았다. 마을에 안 보이는구만~ 했는데, 이 새끼 여기서 장모님이랑 족장님의 호위 겸 시다바리를 하고 있었는갑다.
“이, 이곳입니다.”
─부들부들.
NTR충 새끼는 바짝 쫄면서도 안내역을 수행했다. 우리는 여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르르 몰려갔다.
“……남편. 손 좀 빌려줘 봐.”
다나는 살짝 떨리는 손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잡아주었는데, 그걸로 마음이 놓인 건지 그녀의 숨은 깊고 차분해졌다.
[시로나. 나야. 들어간다.]
─똑똑. 그런 우리를 지켜보시던 장인어른은 잠깐 유예를 두었다가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다나를 닮은 목소리였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서서, 거기에 앉아서 지도를 펼치고 고민 중인 두 사람의 여성을 보았다.
족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딱 봐도 어디 마을의 대표일 듯한 노년의 여성이었다.
주름은 적었지만 흰 머리과 굽은 허리는 나이를 암시했다. 우리를 향해 돌아보는 눈은 눈부신 총기와 그것조차 뒤덮는 노인의 노쇠함이 드러났다.
[……다나, 맞니?]
그리고 조금 믿겨지지 않는 듯 말을 건 여성은, 그야말로 우리 눈나가 10년 정도 나이를 먹은 듯한 사람이었다.
눈가에 진 주름이 아니었다면 다나의 언니라고 해도 믿을 듯한 외모였다.
외모로는 도저히 29살의 딸을 가진 어머니라곤 생각할 수 없었는데, 옆에 연령 미상의 여우 수인을 동반한 나는 그런 부분에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단지 상황도 잊고 놀란 건 다나는 물론이고 베로니카조차 넘을 듯한 풍만한 가슴 정도였다.
아니 씨팔, 나도 그럴 때가 아니란 건 아는데 이건 놀라지 말라는 게 더 곤란한 얘기였다.
존나 다나의 가슴 부분 유전자는 장인어른 쪽에서 몰빵한 것인가? 장래의 성장을 기대하기엔 우리 눈나의 DNA가 너무 성숙기에 도달한 뒤라는 게 애석해질 정도였다.
[……오랜만이네요.]
다나는 20년만에 본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려다가, 나랑 딱 눈이 마주치자 손에 힘을 주었다.
[잘…… 지내셨나 보네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구나. 얼마 전까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곤 기대도 못 했는데.]
장모님의 시선이 언뜻 나를 지나쳐간 것 같았다. 내 얘기는 NTR 충에게 들으신 거겠지.
‘……뭔가 많이 삭막하네.’
나는 한숨을 참았다. 딸이고 어머니고 20년만에 재회해서 할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이 모녀 사이의 간극이 모종의 악의로 벌려져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무거운 침묵도 일어날 만 했다.
‘다나의 편지를 중간에서 쌔볐던 새끼도 찾아내야 하는데.’
나는 그 좆 같은 트롤 킹을 머리 속에서 어떻게 족칠지를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복잡하게 얽힌 과거사인데. 씨팔럼이 뜬금없이 끼어들어서 씹창을 내놓은 것 아니던가.
여기서 우리 눈나가 지금까지 얼마나 편지를 많이 썼는지 얘기하고서 오해를 풀어야 옛날 이산가족 상봉 방송처럼 눈물 겨운 재회가 가능할 텐데, 지금은 그럴 상황이 못 됐다.
장모님은 지도를 접고 말씀하셨다.
[쌓인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너와 내 개인적인 사유로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닌 듯 해.]
[그래야죠. 트롤 놈들한테 잡혀가서 회포를 풀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다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아마 오면서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뒀던 건지, 지금은 병풍 같은 자세를 관철할 생각인 듯 했다.
[콜록, 콜록!]
그때 족장이 기침을 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헛기침인 줄 알았는데, 고통이 섞인 기침 소리는 자연적인 것이었다.
다나의 손에 힘이 살짝 더 들어가는 걸 보면, 아마 누나도 아는 분이겠지.
하지만 20년이나 지난 지금, 남은 시간이 오래 남지는 않으신 것이다.
[……엘구스. 아파?]
[아니…… 괜찮다. 리루아,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렴.]
족장은 리루아에게 친근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리루아는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족장님, 사제장님. 영주님의 전령이 대기 중입니다.”
긴 설명이 끝나자, 그 NTR을 시도했던 씨팔럼이 영주에게 호출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렸다.
두 분은 아이 컨택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가겠다고 알리거라.]
[옙!]
족장이 지시하자 그는 메다닥 뛰어갔다.
─탁, 탁.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족장은 지팡이에 기대 내 손을 붙잡았다.
[고맙네, 젊은이……. 자네 같은 남자에게 저 아이가 시집을 갔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인 일이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여기서 존나 ‘헤헤 제가 사실 결혼생활이 쿼드라플로 돌아가는데요’ 같은 소리를 지껄일 수도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는 나였다. 인생 씨발이다. 어흑흑.
천천히 끄덕거린 족장이 장모님께 말했다.
[사제장. 나는 참석할 수 없겠지만, 맡겨도 되겠남?]
[……네. 맡겨 주세요. 별 일 없겠죠.]
장모님은 생각 끝에 수락하셨다. 사실 이 상황에서 우리를 적대할 만한 병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설명할 뿐인 자리가 힘들지는 않겠지.
침대에 앉은 족장에게서 지팡이를 받은 장모님은 다나와 나에게 물었다.
[너희도 같이 올 생각이니?]
[우리도 직접 현장을 봤으니까.]
─끄덕. 그 대답만 듣고 장모님은 앞서서 영주가 보냈다는 마차에 탔다.
숨 막혀서 뒤질 듯한 마차에서 나는 다나의 손을 잡아주는 토템 정도의 역할이었다.
장모님은 정말로 일이 끝날 때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생각이신지 눈을 감고 계셨고, 다나도 먼저 얘기를 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랬으면 대학 시절에 벌써 사겼지 씨발.
─덜컹, 덜컹!
마차는 존나 느려 터지게 달리며 음습하게 안개 낀 도시의 영주 저택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대기 시간도 없이 바로 회의실로 끌려가는 우리였다.
우리 전령을 팩트로 받아들였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는데, 회의실로 안내받은 나는 당당하게 방에 자리를 잡고 있는 놈들을 보고 조금 눈을 찌푸렸다.
“호. 이거, 오랜만에 뵙는 귀한 손님이군요.”
븅딱 귀족 새끼의 옆에서 잘난 듯 자리에 앉은 빨간 머리 마법사가, 그렇게 회의실에 들어온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시뻘건 머리카락에 흰 피부는 얼스터 인의 증거였다. 그는 마기마기의 문양을 단 로브를 구겨진 곳 하나 없이 입고서 우리더러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사제장님. 옛 제자가 스승님을 뵙습니다.”
“……코난드.”
장모님의 중얼거림에 그는 능글거리며 웃었다.
“예. 불초 제자 코난드 파하크입니다. 지금은 마법결사 마기마기의 장으로서, 여기 계신 벤자민 님의 섬기고 있죠.”
나는 잠깐 머릿속의 희뿌연 기억을 뒤져보았다.
사제장의 제자.
다시 말하자면, 차기 사제장 후보였던 새끼다.
─또다른 차기 사제장 후보를 선별하긴 했지만, 그 애도 마을에서 도망쳤어. 그게 고작 3달 쯤 전의 일이고.
다나에게 청혼하다가 나한테 쳐맞고 심문을 당했던 NTR 또도가스가 했던 말이다.
‘아 애1미. 일이 또 이렇게 됨?’
퍼즐이 이렇게 맞을 줄은 몰랐네.
인생 존나 씨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