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놓쳤다.
열등종의 전사가 도주하는 것을 보며 트롤 킹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게 했다. 만만치 않은 전사였기에 그 역시 진심을 다하여 싸움을 벌여야 했다. 흐트러진 호흡은 그에 따른 결과였다.
[……호르샤 님, 쫓을까요?]
분노를 삭히고 있는 트롤 킹에게 부하가 물었다.
그의 대검과 비슷한 크기의 도끼를 양손으로 든 트롤 전사였다. 일단 질문의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사실 왕이 허가를 내려주기를 바라는 간청에 가까웠다.
그 역시 적을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호승심이 끓고 있던 상황이었다.
만약 그들의 왕이 추격을 명한다면 이대로 저 열등종들을 추살하고자 내달릴 것이었다.
[……아니. 태세를 정돈한다.]
하지만 트롤 킹 호르샤는 대검을 등에 매며 말했다.
[시험으로 운용한 ‘병사’들의 힘은 확인했다. 옥새는 우리 조국의 상징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그것 뿐이야. 전황을 무너트려 가면서까지 집착할 이유는 없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놈이 남쪽이나 해외로 벗어난다면 영영 놓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 동생의 복수는 뒷전이다. 놈도 긍지 있는 홀두폴크의 전사다. 자신의 복수보다는 조국의 재건을 우선하겠지.]
어리석은 의동생을 떠올리며 호르샤는 혀를 찼다.
몇 달 전, 핏줄만 믿고 고압적으로 굴던 동생은 일족의 은신처에서 쫓겨났다. 아직 전쟁의 준비가 모자란데도 호전적으로 구는 동생을 호르샤가 직접 축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그의 동생은, 쫓겨나면서 무려 왕조(王朝)의 옥새를 훔쳐 달아났다.
─……동생 분의 성격 상, 인간들의 이목이 닿는 곳이라고 은인자중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호르샤는 부하들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조금만 더 시간들 들여 병력을 기르려던 계획을 멈추고, 이리도 다급하게 전쟁을 준비한 것이었다.
‘말을 하는 몬스터’의 소식이 널리 퍼지거나 했다가는 자칫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가 실패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의 동생도 바깥에서 무언가를 얻어서 돌아오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죽어서 열등종에게 옥새를 빼앗긴 이상 하등 생각할 가치가 없는 가정이었다.
─텅!!
인상을 쓰면서 이가 나간 대검을 던져버린 호르샤는 그의 앞에 무릎 꿇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땅에 있는 선조의 무기를 되찾고, 병력부터 보충한다. 텔츠즈는 있나.]
[예. 여기 있사옵니다.]
검은 안개가 모이며 비쩍 마른 트롤의 모습을 갖췄다.
사막에 방치된 시체처럼 비쩍 말랐지만 그 눈에는 감추지 못할 사악한 지혜가 엿보이는 자였다. 호르샤는 주술에 능통한 부하의 등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보아서 알겠지. 열등종과 맞서던 용자가 2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병사를 보충할 준비를 해라. 단, 전시이니 장례는 간략하게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헌데 병사는 몇 명 보충하면 되겠습니까?]
[글쎄…….]
경의를 드러내며 허리를 숙이는 그를 보며, 호르샤는 죽은 부하들을 점검했다.
살아남은 병사의 숫자는 63.
병사들의 능력과 복종심은 충분했다. 호르샤는 결의했다.
[농장에 있던 병사를 전부 데려와라. 남은 병력과 합쳐서 200을 채운다.]
추산으로 약 220마리.
시범으로 운용했던 편제의 2배를 넘는 병사였다. 그러면서 호르샤가 모은 병력의 전부이기도 했다.
가능하다면 지금에서 더욱 2배는 모으고 싶었지만, 동생의 우행이 아니었더라도 이 이상의 병력은 과욕일 것이다.
열등종보다 우수한 그들의 유일한 단점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체력과, 비효율적이게 많은 식사량에서 발생하는 보급의 어려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숫자라면, 아무리 열등종이 기승을 부려도 북부 정도는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병력은 친위대의 밑으로 재편시켜라. 얼마나 걸리겠나.]
[그렇군요…….]
비쩍 마른 트롤 마법사는 고민 끝에 소름 끼치게 웃었다.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총력을 다하면 보급이 어렵겠지만, 문제는 없다.
그들보다 발이 늦은 열등종들은 성벽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어야만 할 테니까 말이다.
식인종인 그들의 군세 앞에서, 적과 식량은 동의어였다.
***
장거리 마라톤 선수처럼 달려서 돌아오자, 소란스럽던 픽트 인 마을은 더 시끄러워졌다.
[이 개새끼야! 이번에야말로 진짜 뒤진 줄 알았잖아!]
[살아 돌아왔군! 잘 했어!]
장인어른한테 부축 받으며 뭔가 외치던 다나는 내 등장에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장인어른도 비슷한 얼굴이셨다.
아마 날 구하러 가자는 소리를 하던 참이 아니었을까. 나는 픽 웃었다.
[내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야? 어지간히 살아서 튀었거니 하고 쉬고 있지 그랬어.]
[말이 쉽지, 씨발 새끼. 니 같으면 내가 거기 혼자 남아도 침착했겠냐? 우리 연구소에 누가 습격해 온 줄 알았을 때는 눈 뒤집혀서 달려오던 새끼가.]
[킹치만…… 나랑 달리 눈나는 좆밥인걸…….]
[이 씨발. 뒤져 진짜. 진짜 뒤져 진짜!]
─퍽, 퍽! 우는 다나한테 정강이를 까이면서 실실대던 나는 우리 눈나를 끌어안고 다독여주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지? 프랑은?]
[기절했어. 나랑 달리 힘이 남아돌았는지 내려달라고 버둥대다가 뒷목에 한 대 맞았대.]
[아이고.]
급박한 상황이었으니까 이해 해야겠지.
가서 깨워주고 나도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다는 걸 알려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누나도 쉬고 있어. 장인어른, 바로 피난할 거죠?]
[그래.]
나랑 다나가 욕을 주고 받는 걸 봤을 텐데, 장인어른은 그 점에 딱히 눈쌀을 찌푸리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그런 지적을 할 상황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도시, 알윈에 이미 발이 빠른 사람을 보냈다. 그들이 쫓겨나면 아내와 족장을 데리고 이대로 남부로 계속 내려가고, 입성이 허가받는다면 거기서 항전한다.]
[영주가 쫓아낼까요? 저였으면 1명이라도 전투 요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텐데요.]
[우리가 먼저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저들이 몬스터를 몰고 왔다’는 헛소리를 떠들면 피곤해질 거다. 경고를 해 주고 마을의 중진을 데리러 왔을 뿐, 이라는 자세가 편할 거야.]
[아, 그렇군요. 현명하십니다.]
만약 먼저 숙이고 들어갔다가 원인으로 지명당한다면 우리만 괜히 목숨 걸고 싸우는 화살 받이로 밀려날 수도 있다.
반면에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 우리는 경고해 줬다’고만 말하고 떠나려 든다면?
영주도 헐레벌떡 달려와서 고개를 숙이고 같이 싸워달라는 투로 간청할 것이었다.
과연 마을에서 가장 지식이 많을 사제장의 남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시군.
‘우리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손해 볼 것 없지.’
지금까지는 오우거 등의 처리를 그들에게 맡겨왔다는 북부도시의 병사들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싸운다면 주요 병력은 픽트 인과 윙글링 인이 맡을 것이었다.
성벽 말고는 딱히 의미가 있는 백업도 없다. 갑을 관계는 확실히 하는 게 옳았다.
븅딱 귀족 새끼의 지능을 생각해 보면 혹시 동생인 영주도 상상도 못할 개지랄을 떨지도 모르기는 한데, 그건 해 봐야 알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프랑한테로 갔다.
다나도 프랑도 마나 중독과 고갈을 동시에 겪고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영적인 상처는 치료도 힘들다.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처치는 정신회복에 좋은 약초를 달여 마시는 정도였다.
나 개인의 입장만 놓고 말하면, 이 점만으로도 도시에 들릴 가치는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치료는 정식 교단 쪽이 더 잘 하지 않겠는가.
[프랑. 일어나 봐. 프랑.]
나는 다나와 함께 프랑을 깨웠다. 프랑의 긴 속눈썹이 꿈틀거리다가 푸른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열었다.
[……내가 꿈꾸는 거 아니지? 노르, 돌아온 거 맞지…?]
[흐흐. 걱정 마. 만약 죽으면 매일 밤 꿈에 나와 줄게.]
[응.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노르 맞네.]
남편의 스윗함을 ‘이상하다’는 단어로 잘라 말한 프랑은 내 손을 꼭 잡았다. 누워서 일어날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프랑. 이대로 피난을 갈 거야. 남하하다가 중간 지점에서 마을의 척후랑 만나서, 도시로 갈지 더 내려갈지 정한데.]
[그래……. 그 오우거들, 우리끼리 당해낼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가 도망치면 성벽 안에 숨어만 있을 사람들은 100% 죽을 걸.]
시속 200km로 달리는 불도저가 100대 정도 있는 거랑 비슷한 상황이다. 전차 부대랑 마찬가지인데 마나랑 마법으로 보강한 정도로 성벽이 버틸 거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베로니카나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더 병력을 요청하는 건?]
다나가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은 해 봐야겠지. 하지만 아직 무리야.]
거리에 상관 없이 연락이 가능한 셰이드에도 단점은 있다.
가장 큰 단점은 꿈 속에서밖에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 바로 이불보를 덮고 드르렁 해도 사르가디스의 베로니카가 코코낸내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꿈에서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정기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수면 패턴은 맞추기로 했지만, 아직 해가 중천에 뜬 오전이다. 밤은 아직 멀었다.
어젯밤 나는 베로니카한테 이곳의 좌표만 알리고, 숲에서 만난 소녀 모습의 존재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나는 이제 베로니카의 지식이 어느 정도의 범주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소녀 본인도 모르는 정체나 이름을 베로니카한테 물어봤자 답이 나올 가능성은 낮았다. 그리고 사르가디스에 있을 그녀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설마 하룻밤만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겠냐고.’
내가 예언자나 회귀물 주인공도 아닌데, ‘오우거 100마리! 잡히면 능지처참!’ 같은 AV 기획물의 뺨따구를 후려치는 사태를 어떻게 예상하겠는가.
그 꼬맹이도 ‘야 숲에 오우거 존나 많더라? ㅋㅋ’ 했으면 좀 좋아? 씨-팔. 가오나 잡고 말이야. 어?
물론 알았어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도시와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오늘밤 내가 잠드는 거니까.
[척후가 돌아왔대. 도시로 이동할 것 같아.]
그렇게 프랑의 간호를 하고 있자 리루아가 찾아왔다. 도시 측에서도 우리의 조력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금발 여우 수인은 나를 보며 작은 머리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분명 마을 사람들이 몇 명 죽었을 거야. 젊은 애들은 다 나간 마을이지만, 어린 아이들이 1명도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감사 인사는 다 끝나고 하십시다. 그런 거 좋지 않아요.]
누구 하나 죽을 것 같은 복선은 관둡시다. 존나 불길하게.
내가 인상을 쓰자 리루아도 얌전히 수락했다.
[알겠어. 일이 끝나면 우리 마을에서 네 노고를 보상할게. 돈은 얼마 없지만, 무기 같은 거라면 있으니까.]
[무기요? 여러분들 중에 무기를 쓸 수 있을 법한 분은 몇 분 없으시던데…….]
나는 긴장감과 상황을 무마하고자 잡담처럼 질문했다.
이 베르세르크들은 손이 동물로 변형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기를 쓰던 전사는 그 바니보이 씨팔럼 정도밖에 못 봤는데, 보상으로 자신 있게 내밀 만한 무기랄 게 있나?
내 말에 리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못 쓰지만, 산 중턱의 신전에 선조가 고향 땅에서 가지고 온…… 유물? 이라는 게 있어. 그걸 줄게.]
[……유물이라고요?]
나는 떨떠름하게 그들의 마을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왜 그 트롤 군대는 윙글린 인들을 습격했던 거지?’
놈들은 전술전략에 능통했다.
이세계식 전술이기는 하지만 포위를 좁히는 방식이나, 가장 강한 달인급 전사를 상대방의 주 전력─나─에게 부딪혀서 졸병의 소모를 억누르는 돌출 전술도 사용했었고 말이다.
그런 놈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진로에 있던 이유로 윙글린 인들을 습격했을까?
만약 그 새끼들의 목적도 윙글링 인들의 유물이라는 것에 있었다면?
보통이라면 고민하는 것도 우스운 발상인데, 인간의 말을 능숙하게 다루며 마법이 걸린 무기까지 휘두르던 몬스터들이 상대라면 개소리라고 웃어 넘기기도 빡센 직감이었다.
‘씨발. 아니길 빌어야지.’
나는 속으로 육두문자를 쏘아대며 북부도시 알윈으로 이동했다.
사태가 어떻게 흐르든지, 북부에서의 결전은 피할 수 없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