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44화 (444/1,009)

알윈 척후부대의 부대장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곧 적군이 지나간다. 대기.

수신호로 반대편 나무에 은신한 동료에게 사인을 보냈다. 마찬가지로 수신호로 보내온 답을 받고서, 부대장은 언덕의 아래로 지나가는 군사들을 관찰했다.

─쿵, 쿵, 쿵.

멀리서 들려오던 행군의 발소리는 어느샌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들은 트롤 킹의 군세라는 것의 존재와 위험도를 눈으로 보기 위해서 차출된 척후들이었다. 3인 1부대로 나눈 세 팀의 척후대 중에서 이들이 맡은 구역으로 적군들이 이동해 오고 있던 것이다.

‘숫자가 많다. 손끝이 저절로 떨리는군.’

이 숫자라면 전사 종족이라는 야만인들이 도망쳐 온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부대장은 그렇게 숨을 죽이며 적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꼴을 발견했다.

‘……엉?’

그리고 당황했다. 사전에 보고받은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100마리라더니, 20마리도 안 돼 보이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우거와 트롤이 섞인 병사들은 마치 갓 성체가 된 듯 빈약했다. 무장이라고 해 봤자 어디 대장간에서 무책임하게 산에 불법 투기한 듯한 낡고 무른 대검이나 몽둥이 정도였다.

‘저게…… 트롤 킹?’

그렇지만 그 선두에서 나름 위풍당당하게 걷는 트롤을 발견했을 때는 부대장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검을 든 트롤이었다. 투구를 썼다는 건 다른 오우거들과 비슷했지만, 무장 상태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리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것보다도 좋은 장비로군.’

척후이긴 해도 부대장이다. 그도 마나를 다룰 알았다.

저것이 매직 아이템으로 무장한 트롤이라는 것과, 싸우면 얼마나 위협적인지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평야에서 마주쳤을 때의 얘기다. 마법을 씌운 성벽을 끼우고 숫자에서도 유리한 아군이 고작 20마리가 좀 안 되는 몬스터들에게 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군이 질 것 같지 않자, 공포는 사라지고 용기가 샘솟았다.

그리고 저 몬스터 집단을 상대로 호들갑을 떨던 야만인을 비웃고 싶어지는 마음도 생겼다.

‘……핫. 무식한 놈들. 지레 겁 먹고 도망쳐 와서는 보고를 과장되게 했구만. 한심하기는.’

부대장은 대략 견적을 잡아냈다.

‘머리가 굴러가는 돌연변이 트롤이 어디 유적에서 장비를 찾아냈고, 그걸로 동족과 오우거를 휘어잡고 부하로 삼아서 단체를 꾸린 거야. 틀림없어.’

거기에 저 몬스터들의 영양 실조 같은 용태는 또 어떤가?

아마도 무분별하게 몰려다닌 탓에 제대로 영양을 취하지도 못하고 본래 이상으로 나약해졌을 것이다.

강력한 몬스터는 그만큼 많은 식사가 필수였다. 오우거 체급의 몬스터들이 무리를 짓지 않는 건 그래서였다.

‘척후를 보낸 영주님이 옳으셨다. 야만인들에게 우리들처럼 냉정하게 전력을 분석하는 능력이 있을 턱이 있나.’

해 봤자 오지에 모여사는 모자란 야만인들이다.

저 만한 트롤이 병력을 데리고 오면 ‘말을 한다’느니 ‘100마리를 넘는다’느니 법석을 피우면서 ‘트롤 킹’ 같은 기똥찬 헛소리도 하게 될 만도 했다.

─후속 부대, 발견 불가능.

─우두머리를 포함해 19마리로 추정.

부하들도 비슷한 표정으로 수신호를 보내왔다. 부대장은 픽 웃고서 손짓했다.

─파악 완료. 철수한다.

파사삭─! 대장의 사인이 떨어지자 그들은 포복하며 적을 내려다 볼 수 있던 언덕에서 철수했다.

저 정도의 몬스터라면 성벽을 끼워서 수성전을 치룰 것도 없다. 성 밖에서 야전을 벌여도 승산은 충분할 것이었다.

[……끌끌끌. 주술은 잘 통했군.]

그리고 그렇게 물러가는 척후들을, 더 높은 나무에서 유령처럼 굽어보던 트롤 주술사는 조소와 함께 배웅했다.

─스르르르.

그가 나무에서 뛰어내리자 행군 중이던 오우거의 군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났다.

연기는 뭉쳐들며 메마른 고목 같은 트롤 주술사가 되었다. 그는 작전의 성공을 기념하듯 음습하게 중얼거렸다.

[적에게도 용기를 솟게 만드는 주술을 다 걸어보고. 역시 오래 살고 봐야 하는 법이야.]

주술은 잘 통했다. 손가락에 생겨난 황금색 마나를 지우며 텔츠즈는 경멸의 눈빛을 띄웠다.

그는 여러 개의 주술로 저 3마리의 열등종에게 적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암시를 불어넣은 것이었다. 그가 익힌 주술에는 이렇게 생물의 감정을 유도하는 암시 마법이 많았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되는 주술은 거의 없다.

저 열등종의 척후에게 걸어둔 주술들도 그렇다. 저것들은 맹목적인 용기── 다시 말하자면 ‘무모한 특공’에 내보낼 때 쓰기 좋은 흥분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만용은 실패를 부른다. 적을 얕봤다간 이길 싸움도 지게 되거늘. 육체만이 아니라 지혜마저 빈약하구나.]

척후들은 빈약해 보이도록 위장시킨 수준 낮은 부하들을 ‘겁 먹을 가치도 없는 졸병’으로 보고하게 될 것이었다.

열등종들의 생각이야 직접 보지 않아도 알 법 하다. 분명 20마리 정도의 군세라면 우월종의 힘을 감안해도 자신들이 이기고 남으리라 믿겠지.

치이이익….

텔츠즈는 주술의 부작용으로 비틀리는 손가락을 쥐었다가 펴며 로브를 눌러썼다.

[자, 열등종 놈들. 만용을 부려보거라. 병사의 소모를 줄일 수 있다면 잠깐의 오명 정도는 문제 삼을 것도 없지.]

열등종들이 그간의 평화에 취해 교만한 가축이 돼 있다면, 아마 지금 쯤은 시시한 자중지란으로 바쁠 것이다.

적병의 수급이 성과물이 되는 것은 저들도 같다.

입지를 다지고자 전공에 달아오른 열등종들이 성벽을 뛰쳐나와 준다면 충분했다. 텔츠즈의 관점에서는 병사 스물 정도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잃어도 좋은 건 어디까지나 졸병들의 한한 얘기다. 텔츠즈는 나무 밑에 눈을 굴렸다.

[자네 한 명에게만 맡겨서 미안하네. 힘내시게.]

[군략에 따르는 것도 장수의 일이죠. 참모님의 기대 이상의 전과를 가져오겠습니다.]

트롤 전사는 투지를 드러내며 도끼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해는 벌써 산의 능선에 숨어든 뒤다.

결전의 때가 멀지 않았다.

***

대기실은 조금 난민 피난소 같았다.

“아니 씹. 텐트 수준 봐.”

다친 사람은 거의 없는데─부상 입은 윙글링 인들은 치료를 받았다─, 텐트가 후줄근해서 수준 낮은 느낌.

‘북부가 가난하긴 하군.’

척박한 땅이니까 어쩔 수 없을까. 판타지 국룰이다.

카르미네 대학이 있는 남부에 비하면 다 강남 땅값 앞에서 도토리 키 재기였지만, 내 홈 타운 사르가디스도 여기보다는 낫겠다. 헨네시스 영애가 평양 부잣집 따님으로 보이기 시작하네.

“야! 노르! 여기, 여기!”

다나가 손을 흔드는 곳으로 가자 프랑도 돌아와 있었다. 난 표정이 무섭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인상을 지었다.

“프란체스카 양.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더니 또 싸우려고 왔군요?”

“엣? 어, 아, 응. 안 돼……?”

예전에 프랑이 거짓말을 했던 나를 혼낼 때처럼 존댓말을 하자, 프랑도 허리가 꼿꼿이 섰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 포동포동한 볼살을 잡아당겼다.

“헤으으으…?!”

“하지 말라는 무리를 그렇게 하다가 병원에 실려가 놓고는 또 싸우려고? 보는 사람 기분도 좀 생각해 줄래?”

“냐, 냐는 노루가 무묘하게 귤어도 볼 꼬집진 아났써…!”

“아하! 그건 피장파장의 오류에요. 이 녀석, 이 녀석.”

“아우으으으…!”

나는 프랑의 뺨을 잡아당겼다가 늘렸다가 하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아내들이 나랑 같이 싸우려는 걸 막겠다는 독선은 좀 버려가고 있는 나였지만, 그래도 역시 거부감이 남기는 하는 것이었다. 아직 스테레오 타입의 마초이즘을 벗어나지는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놈의 새끼야. 나도 아까 존나 무리했는데? 난 싸워도 된다 이거임? 아내 고향에 묫자리를 깔고 싶음을 암시?”

“님은 유성군 안 막으면 뒤질 각이었으니까 으쩔 수 없지. 그리고 사실 눈나는 고생 안 하는 모습이 더 어색한 것. 막 소파에 누워서 키메라 좀비처럼 으어어 거려야 현장감 있지.”

“너 그거 권태기야 씨발놈아.”

우리 누나가 많이 삐진 것 같아서 우쭈쭈 해 주려다가도, 장인어른 눈치가 보여갖고 참는 나였다.

“경비대와 말씀 나누고 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래. 마법사들이 성벽 위에서 요격을 하다가, 여차할 땐 경비대와 협력해서 싸우기로 했다.”

“여차할 때라는 건요?”

“트롤들이 도주했을 때. 그리고 상상하기도 싫지만, 성문이 무너졌을 때다.”

“아, 이해했습니다. 저 놈들이 살아서 흩어지면 여만 골치 아픈 게 아니니까요.”

원래 수뇌부를 박살내는 것보다 잔당 소탕이 더 빡세다.

이해가 잘 안 간다고? 시리즈 게임이나 만화영화 극장판을 생각해 보면 된다.

‘지온 군의 잔당’, ‘좆망한 마왕군 사천왕 C(레벨 99)’ 같은 것들이 우후죽순 나온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장인어른과 친구들 입장에서는 이루 말할 데 없이 좆 같겠지.

‘북부도 여만 넓은 게 아니니까. 잡병이라도 사람 수십 명 잡아먹기엔 충분한 괴물이고.’

원래 추운 지방이 땅만 더럽게 넓은 것도 국룰 아니던가. 현실도 판타지도 그 점에선 같았다.

말이 좋아서 싸잡아다 북부라고 부르는 거지, 이 강북호의 이세계 축적법에 따르면 브리타니아는 대한민국보다 크다.

남한보다 큰 게 아니다. 남북 합친 것보다 크다.

‘영주랑 가신들도 우리 말을 100% 믿지는 않겠지만, 놓친 트롤들을 방치하면 좆 된다는 점은 이해가 일치했겠지.’

그런데 여기서 일가실각한 트롤 킹의 군대를 방치한다?

인간 국가 간의 전쟁처럼 트롤국이랑 쇼부 봐서 종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방치했다가는 브리타니아의 북부에 오우거 빨치산과 트롤 테리리스트가 속출할 것이다.

행동양식은 독립군이지만 실상은 네오 나치다.

인육도 잘 쳐먹는 씨팔럼들이 실장석처럼 산에서도 강하게 살아가면 거기가 애미 씨발 헬턴트지 브리타니아냐?

RPG의 마왕성 근처 마을처럼 집 밖으로 3걸음만 걸으면 ‘오우거 매지션이 나타나따!!’ 이 지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북부 전체가 그야말로 개좆망 위 아 더 월드가 돼 버리는 것이다.

북부에 사는 픽트 인/윙글링 인들이 참전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전략에도 밝군. 나는 이해하기까지 여러 번 설명을 들어야 했는데.”

“그냥 주워들은 토막 지식에 상상력을 더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전투가 어떤 양상이 될지는 알 수가 없는 나였다.

‘두뇌 풀가동으로 상상하는 건 가능한데, 확신하고 있다가 그 예상이 빗나가는 사태가 더 좆 같을 테니까.’

확고하게 적의 작전을 예측하고 믿었다가 똥볼을 찬다?

그랬다간 할머니 방에서 실과 바늘을 찾으려고 쿠키 상자를 열었다가 안에 들어있는 쿠키를 발견한 것처럼 극한의 경악과 공포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와 마주하면 사람은 생각이 멈춘다.

빈유 프랑 같은 악몽의 산물을 본 것처럼 이성 수치 체크를 위해 주사위를 굴리게 될지도 모른단 뜻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트롤 새끼들이 어떻게든 잔꾀를 부려서 성벽 밖으로 병력을 빼내고자 애를 쓸 거라고만 예상했다.

암만 군사력에 자신이 있어도 수성전에서 대가리 꼴아박고 우랴돌격을 감행하는 건 원시 고대 러시아식 전법이잖은가.

그랬다간 ‘잠시 소련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꼴이 날 것이었다. 일가실각 하기도 전에 몰살 각이다.

어떻게든 꾀를 부려서 유리한 전황을 만들려고 하겠지.

“아, 그러고 보면 전사장 같은 분은 안 계십니까? 얼스터 촌락 같은 곳에는 있던데요.”

“나이로 천수를 다했다. 후보는 있지만 아직 공석이지.”

“허미.”

수도권 집중 현상이 이걸 또.

나는 합장하는 것으로 묵념을 표했다. 이조차도 젊은이가 유출되는 시골 마을의 슬픈 현실일까.

[……배고파.]

아니, 픽트 인은 그나마 나은가. 나는 유사 할망구 수인의 꼬르륵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민들의 피난은요?”

“아, 그건 내가 여기 오면서 봤어. 다들 소식은 들었더라.”

프랑이 설명해줬다. 나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전할 이유가 늘었군.’

영주나 일부 몰지식한 놈들이 언플을 때리면 트롤 군대의 깜짝 위꼴 공연의 원인으로 우리가 지목될 수가 있다.

선날 필승이라는 말은 이세계에서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시, 실례합니다!”

그렇게 내가 언제쯤 트롤 놈들이 습격해 올지, 그리고 그 전까지 오의 The 트롤 슬레이브를 완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끙끙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난민 텐트 같은 우리 나와바리에 난입해 온 2명의 남남 페어를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어, 어어! 이 새끼들! 그 무례한 놈들이다!]

[마귀마귀! 마귀마귀다!]

난입자들을 알아본 픽트 인 전사들이 성을 내며 냉병기를 장비했다. 교회 예배장에서 게이 커플이 물고 빨아도 이렇게 거친 욕설과 즉각적인 살인-피드백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자, 자자! 잠시만요! 저희는 마기마기가 아닙니다! 아니지! 맞기는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아닙니다!”

[그렇다! 나도 얼스터 인이다! 폭력 반대!]

남법사는 남전사의 뒤로 숨었다. 진짜 게이 커플인가 하던 나는 마법사 쪽을 알아봤다.

‘저번에 픽트 인 마을에서 용역질 하면서 현타 오져하던 걔 아닌가?’

그러다가 누더기 갑옷을 입은 전사가 투구를 벗었을 때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셈무스?”

거의 반 년에서 1년 쯤 전에, 처음 사르가디스로 가던 마차에서 마주쳤던 얼스터 인이었다.

처음으로 올 누드 여신 모드의 베로니카랑 만났을 때, 내 꿈에 뜬금없이 등장했던 빨갱이 모히칸 새끼이기도 했다. 이 씨발럼 존나 반갑네.

새끼도 나를 알아본 걸까. 그는 얼굴색이 환해져서 외쳤다.

“노랭이! 나 좀 도와다오!”

“우끼끼 좆까 끼끼.”

이 개좆 같은 리틀 히틀러년.

이제 안 반가워 씨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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