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보러 간다. 성벽으로 올라갈 생각이지만, 편제에서 뺄 수 있는 인원은 너희가 최적이다. 같이 와 다오.”
“부탁하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프랑의 말이 우리의 총의였다. 장인어른과 함께 장모님이 계실 성벽으로 올라가자, 영주를 뺀 알윈의 중역들이 집결해 있었다. 마기마기와 그 흑우 스폰서 벤자민도 있다.
코난드와 벤자민의 표정은 상이했다. 이 경우는 코난드의 씹창난 표정이 상황파악의 근거로 더 쓸모있을 것이었다.
“크하하하! 뻔뻔하게도 올라왔군! 봐라!”
몇 시간 전의 벌레 씹던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우리의 븅딱 귀족님은 장모님과 나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꼴에 목숨은 소중한 걸까. 마법이 걸린 갑옷까지 둘렀다.
“오우거와 트롤이 100마리라고? 아니, 너희가 스무 마리는 잡았댔나? 야만인은 숫자도 못 세는 모양이지!!”
벤자민은 산개해서 접근하는 트롤 킹의 군대를 가리켰다.
“어디 내 앞에서 세 보도록! 저 놈들이 몇 마리인지!”
“서른 정도로 보이는군요.”
장모님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 절대천공영역에 포위망이 관통됐던 걸 의식해서였을까. 뭉쳐있지 않고 흩어져서 접근 중이었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적다.
저 숫자라면 전원에게 ᚦ(Thurisaz)의 룬을 달아줬어도 별 문제 없이 섬멸될 것이었다. 나는 오딘의 눈을 켜고 적병을 검사했다. 마나의 기척은 없다.
“Roooooooooo──!!”
영지는 평야에 있었기에 성벽에 접근하면서 발각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트롤 킹은 우리에게 포착당한 걸 눈치챈 것처럼 호령으로 진군을 개시시켰다. 적당히 빠른 속도로 진군하는 병사들은 상당히 나약해 보였기에, 벤자민의 기세가 더 등등해졌다.
“이제 보니 귀족에게 거짓을 고한 건 네놈들이었구나!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빈다면 처형은 면해줄 수도──”
“벤자민 님. 양동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가신 중에서 등을 떠밀린 양반이 짜증을 숨기며 정정했다.
“몬스터에게 그런 지혜가 있겠나!”
“늑대에게도 가능한 수준의 작전입니다. 보통 트롤이라면 저렇게까지 무장하지 않습니다. 경계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벤자민에게 코난드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양동이건 아니건 배제해야 할 적군입니다! 벤자민님! 저와 제 동료들에게 교전을 허가해 주십시오! 성문을 내리지 않고 내려가서 저들의 목을 취해 오겠습니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아마 저 새끼도 상당히 똥줄이 탔겠지.
적군이 강해야 뭐라도 전과를 낼 텐데, 이 꼴로는 성벽에서 마법만 갈겨대도 끝날 것이다. 그리고 잔당을 추격해서 잡는 것 정도로 경각에 달한 자기 운명을 뒤집을 순 없다고 생각한 듯 했다.
벤자민은 벌써 자기가 후원하는 놈에게 실망했는지 경멸하듯 말했다.
“좋다. 단, 성벽 위에서 잡병의 수를 줄이고 나서다. 트롤 킹을 사살하도록.”
“베, 벤자민 님! 그래서는 영주님의 작전과 다릅니다!”
“현장의 판단이 우선이다! 동생은 꼬리를 말고 숨었잖나!”
영주는 아마 죽으면 큰일이니까 저택에 있는 걸까. 가신과 븅딱의 하찮은 분쟁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눈을 반개했다.
‘양동은 확실한데. 문제는 어디가 진짜냐는 거야.’
골치가 아팠다. 전술 전략에 대해서는 무지하다고 말한 건 과장이 아니다. 뭐 아는 게 있어야 추리를 하든 하지.
등 뒤를 돌아보면서 높은 성벽에서 영지를 확인했다. 고층 건물이 적었기에 내 시력이라면 영지 전체가 다 보였다.
‘그래도 가신들은 신중하군. 경비대랑 우리 측 전사를 모든 성문마다 배치 상태로 뒀어.’
하지만 이건 성문이 뚫렸을 때를 대처하긴 좋아도, 어디 한 곳이 무너지면 좆 되는 배치 아닌가?
‘그래도 트롤 킹도 이런 평야에서 우회작전을 쓸 순 없을 텐데…….’
하늘을 노려봤지만 어둠이 아직 덜 뒤덮은 하늘에 익룡이 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우우웅……!
그때 코난드와 그 따까리들이 들어올렸다. 그들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 빛나면서 커다란 광구를 만들었다.
“쏴라!”
다나가 쓰는 빛 속성 공격 마법과 닮았지만, 언데드 외의 적에게도 통하는 마법인 듯 했다. 무수한 빛 줄기로 갈라진 광구가 성벽에 접근해 온 트롤들을 우선해서 꿰뚫었다.
“Deaaaaaaaaaaa──!!!”
투구를 쓴 트롤들이 성벽 앞에 뒹굴었다.
몸통을 뚫린 놈은 비명이라도 질렀지, 머리에 바람 구멍이 난 새끼들은 비명횡사였다.
진짜 트롤 킹의 군대와 싸워본 우리들은 눈이 더 날카롭게 좁혀졌다.
“……위력은 괜찮았지만, 마법에 저항했다면 즉사하는 건 이상해.”
“그래. 특히 트롤이라면 재생력도 있는데.”
프랑이 속삭이듯 한 말에 나랑 다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너무 대놓고 함정이었다. 오딘의 눈으로 확인해도 저 시체들은 아무 마나의 작용도 없이 쓰러져만 있었다.
그때 코난드가 외쳤다.
“벤자민 님! 저희의 용전(勇戰)을 지켜봐 주십시오!”
“아니, 그럴 것 없다! 나도 내려가서 싸우겠다!”
“……예?”
평가를 올리고자 허세를 부리던 것도 잊고 되묻는 코난드. 벤자민은 말할 필요가 있느냐는 듯 침을 튀겨가며 외쳤다.
“동생이 겁 먹고 숨어 있다면 전황을 좌우하는 건 장남인 나의 의무다!”
“적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성벽 밑은 전장입니다! 저희들이 지켜드릴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내 몸에 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면 내려가서 싸우지도 말아야지! 내 말이 틀렸는가!”
코난드는 이를 악물었다. 쯧쯧. 나는 혀를 찼다.
‘코가놈을 거의 내쳤군. 언플 도구로 쓰고 버릴 셈이야.’
영주가 되겠다는 게 벤자민의 목표다. 저 새끼한테는 영지민과 가신들을 상대로 점수를 따는 게 더 중요했다.
다시 말하자면 ‘50살에 트롤 킹을 쓰러트린’ 같은 칭호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성벽에서 마법을 갈기고서 내려가라는 지시는 적의 강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왜 갑옷을 입고서 왔나 했는데, 멍청한 행태와는 달리 계획적인 행동을 벌이는 새끼였다.
상당히 허술하긴 하지만 말이다.
‘거기에 가신들도 점수고 지랄이고 관심 없어 보인다만.’
살짝 눈을 돌리자 그들은 이 싸움에서 벤자민을 위험하게 둘지 말지 주판을 두들기는 모양이다.
영주의 형이 뒤졌다가 책임을 지면 좆되지만, 저들도 내심 벤자민이 나가 뒤지길 바라는 것이다.
“……벤자민님. 영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잡설이 길다! 본론이 뭐냐!”
“벤자민님의 목숨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자칭 마법결사들에게 맡겨도 될 목숨이 아니십니다.”
자칭 마법결사의 우두머리는 계속되는 굴욕에 얼굴이 석고상처럼 하얘져가고 있었지만, 벤자민은 시시한 듯 지껄였다.
“내 목숨의 책임은 내가 진다! 내 싸움을 방해하지 마라!”
“……스스로 책임을 지시겠다면. 단, 목걸이의 인장을 참전 서류에 찍으시는 게 알윈의 귀족의 법도입니다.”
“시간이 없는데 귀찮게 하지 마라! 내놔!”
벤자민은 트롤 킹이 도망이라도 갈까 봐 서두르듯 인장을 찍었다.
‘어…… 지금 사법 살인의 현장을 본 것 같은데.’
가신들이 절벽에서 개폐급 행보관을 떠민 소대장들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죄책감과 후련함 사이 그 어딘가다.
“……음.”
나는 뭐라고 말참견이라도 하려다가, 말려봤자 알아들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몰라. 노르드는 아가야. 정치 전쟁 같은 어려운 거 신경 안 써.
“준비는 끝났다! 출전한다!”
벤자민이 칼을 뽑으며 무거운 듯 휘청거리자, 코난드는 지 부하들에게 악다구니에 찬 시선을 보냈다.
─펑!
시선을 받은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마기의 마법사 전원이 석회 가루를 성벽 바닥에 내려치자, 가루가 모여서 흰 말로 변신했다. 하늘을 나는 말인 모양이었다.
─다그닥!
마기마기의 마법사들이 탑승하자 말은 바람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들은 후방에서 지시만 내리는 트롤 킹에게 직행했다. 이 밑에 생존한 졸병은 없었으며, 평야에 있는 킹을 지키려는 듯 몇 마리가 달라붙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아, 옘병.’
그리고 나는 왜 가장 먼저 트롤 킹을 살피지 않았나 하고 후회했다.
킹의 장비를 입은 트롤에게서는 조금의 마나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리빙 포인트 하나. 야수회귀는 구신의 마나를 쌓게 만드는 마법이다.
나는 평소에는 그걸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오딘의 눈으로 봤는데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뭔가 마법의 힘으로 철저하게 숨겼거나 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그런런 뜻이었다.
나는 팔짱을 풀면서 뇌까렸다.
【태보하던 메롱시티로 다이빙…….】
트롤 킹 새끼, 대타출동 갈기고 습격에 불참했다.
[Yigl──!! Tewd──!!! (폐하께──!! 영광을──!!!)]
─콰앙!!!
시체 밑에 숨어 있던 투구 쓴 트롤이 일어나며 들고 있던 쌍도끼를 성벽에 내던졌다. 내 오딘의 눈으로도 잠깐 스쳐지나가는 정도론 해석하지 못할 고대 문명의 무기였다.
매직 아이템의 힘과 장비를 바꿔서 은신해 있던 트롤 킹의 사천왕이다.
“아 애미 씨바아알──!!!!”
정글러가 넥서스 앞에서 궁 쓰는데 우리 팀은 뭐하냐!
나는 트롤 킹의 장비를 입은 일반 트롤에게서 눈을 떼고, 프랑과 다나를 안으며 충격에 대비했다.
쿠우우웅─!!!!!
쌍수 트롤이 던진 도끼가 성벽을 박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