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49화 (449/1,009)

트롤 주술사를 쫓아내고 성벽으로 달려갔다.

“쯧.”

민가를 나오자 겨울의 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탄내가 조금 섞여 있었다.

화르르르─.

가만 보자 오우거와 트롤 졸병들이 흩어진 곳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진압은 어렵지 않을 듯 했지만, 유사 이래로 화공(火攻)은 민심을 공포로 몰아넣고 사기를 깎는데 가장 좋은 전술이라고 들었다.

‘경비대는 성벽 안에 더 틀어박히겠군.’

좋지 않은 결과였다.

내가 알기로 수성은 공성보다 3배 이상 유리하다는 판타지 피셜이 있지만, 장기전이 되면 우리가 더 불리했다. 적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특공병이었으니까.

혀를 차며 달리자 성벽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프랑! 다나!”

프랑과 다나도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성벽으로 올라가는 벽 안쪽의 탑에 발을 걸친 채로 기다렸다.

마무리를 짓다가 튄 걸까. 프랑의 외투에 트롤의 피가 튀어 있었다.

“둘 다 다친 데는 없지? 어때? 싸울 만 했어?”

“어. 무슨 낡은 매직 아이템으로 불을 지르려고 깝치는 걸 막았는데…… 저쪽은 못 막았나 보네.”

“대처가 늦었나 보지. 마법사가 전부 성벽 위에 올라간 건 아닐 거야.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끄게 냅둬.”

“응. 그치만, 우리가 잡은 트롤들 있잖아. 이상하게도 별로 강한 느낌은 아니었어.”

역시 그런가. 생각했던 그대로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적군이 당장 쳐들어오냐 아니냐가 분수령이다.’

곧바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베로니카와 연락하고, 내가 족친 트롤 새끼의 기억을 읽을 시간도 생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선계단을 타고 성벽에 올라간 나는 죽상이 된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을 찌푸렸다. 어둠이 깊어진 성벽 위에는 커다란 횃불이 힘겹게 밤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횃불에 비춰진 사람들의 안색은 하나 같이 좋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장인 어른. 어떻게 됐습니까?”

장인 어른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없이 평야를 가리켰다.

거기엔 언데드 같은 몰골이 돼서 달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너무 늙어버린 얼굴에 한 순간 누구인지 못 알아봤는데, 저 갑옷을 보면 벤자민인 것 같았다. 새끼가 타임 머신을 잘못 탔나. 존나 늙었군.

조금 더 고개를 들어보자 마기마기의 로브를 입은 시체도 굴러다녔다. 그 셀 뭐시기 씨의 시체도 보였다.

“이 쓰벌?”

그리고 조금 더 뒤쪽엔 트롤 킹의 본대가 있었다.

트롤 킹은 안 보이지만 친위대인 듯한 놈들은 있었다. 거기다가 졸병들도 확실히 배불리 쳐먹고 근육 빵빵한 게, 이런 먼 거리에서도 알기 쉽게 강대한 군대라는 사실이 느껴지고 말 정도였다.

숫자는 100마리를 넘었다. 대충 150~160마리 정도인가?

‘애1미 씨발. 바퀴벌레도 아니고 어디서 계속 솟아나냐.’

적군은 마치 우리에게 전력 차를 과시하듯이 서 있었다.

잠깐 눈을 떼면 당장 돌격할 듯한 분위기면서도 움직임은 없었다. 거기다 평야의 끝과 끝이어서 마법으로 폭격하기도 힘든 위치였다. 무심코 욕설을 뱉은 내 마음에 공감한다는 듯 장모님도 입을 여셨다.

“네가 가짜라고 말한 트롤 킹은 쓰러트렸지만, 그 놈에게 돌격했던 이들은 거의 괴멸했다. 코난드는 불쑥 나타난 트롤 주술사에게 끌려갔고, 벤자민은 보다시피 저 꼴이지.”

“……끌려갔다고요?”

끌려갔다는 말에 나는 장모님의 안색을 살폈다.

장모님은 아무 표정도 없으셨지만, 그 무표정은 이 상황에 맞지 않는 낯빛이었다. 상당히 복잡하실 심정은 나도 미루어 짐작이 됐지만, 위로의 멘트나 코가놈의 악행에 대한 폭로는 잠시 미뤄뒀다.

“두 분. 잠시 이리로.”

나는 외팔이가 된 벤자민한테선 관심을 끄고 말했다.

장인 어른 부부는 가신들의 눈치를 살피고 따라오셨다. 이 성벽에 남은 가신은 머리를 쥐어 뜯는 한 사람 뿐이었다. 나머지는 벤자민이나 영주한테 달려갔겠지.

장인 어른은 냉정은 잃지 않으신 듯 조용히 질문하셨다.

“왜 그러지? 설마 도망치자고?”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적의 수뇌를 쳐야 합니다.”

“……안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자네는 말할 필요도 없는 지당한 소리를 하는 남자는 아닐 거야. 무슨 방법이 있나?”

“예.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만약 본대와 떨어져 있는 적의 수뇌를 칠 수 있다면 협력해 주시겠습니까?”

“가능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도울 거다. 단, 나와 시로나 중 한 명은 여기 남아야 해. 족장을 대신할 대표로서.”

장인 어른 부부께서는 다나에게 눈을 향하며 대답하셨다. 시로나, 라는 건 장모님의 이름일까. 다나가 말했다.

“사제장 님이 낫겠네. 아빠는 싸움 잘 못 하잖아.”

“……일반적인 전사 수준은 된단다.”

“뭐래. 일반적인 전사자겠지. 얌전히 지휘나 해. 앉아 있는 일도 지휘관의 중요한 일이야. 믿고 맡길게. 알겠지?”

“으, 음. 그래…….”

그렇게 장인 어른 대신 장모님께서 나서기로 했는데, 잠깐 도시를 바라보던 장모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우회해서 갈 생각인가? 너무 늦어지면 곤란해.”

“방법이 있습니다. 단숨에 목표로 날아갈 거에요.”

“시간 상의 문제가 안 된다면 리루아도 데려가지. 전위가 너 뿐이어서는 불안해.”

맞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설득은 부탁드립니다. 저희야 영지 측에서 편제에 안 넣었지만, 리루아 님은 몰래 빠져나와야 할지도 몰라요.”

“적장의 목을 들고 돌아온다면 뭔들 문제일까.”

그렇다면 됐다. 우리는 한데 모여서 성벽에서 내려갔다. 이 왕복도 지긋지긋해질 지경이다.

“프랑, 다나. 이런 상황에 미안한데. 부탁 좀 하자.”

“셰이드지? 으, 확실히 남 부끄러운 타이밍이긴 하네.”

프랑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나는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적군은 이미 전열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행히 베로니카가 잠에 들 시간까지 트롤의 기억을 뒤지면 셰이드의 꿈에서 이 사태를 그녀에게 전하는 건 간단할 것이었다.

“전사가 결전에 나서기 전에 아내와 하룻밤을 보내는 걸로 치자. 그런 장면이면 전쟁 영화 같은 데에서 평범하게 나올 법한 시츄에이션 아니냐?”

“영화란 건 또 뭔데, 이세계인 새끼야. 지들만 아는 거 또 떠들죠?”

“흐흐. 언젠가 보여줄게.”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을 이겨내야 했다. 장인 어른들과 다나의 고향 사람들을 버리고 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적당한 그늘에 숨어서 짧고 빠르게 셰이드의 준비를 끝냈다. 나는 당장 양반 다리로 정좌를 했다.

슈우우우우…….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였지만 잠드는 속도는 걱정 없었다. 아내들의 호법을 받으며 매지컬 수면 가스를 흡입하자 금방 앉은 자세로 잠에 골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음.”

눈을 뜨자 초원이었다. 익숙한 공간이다.

나는 바로 품에서 룬 스톤 옥새를 꺼내서, 거기에 봉인시켜 뒀던 기억을 해방시켰다. 예르나 년과는 다르게 이 새끼들은 정신에 파이어월을 세우지 않았기에 재현은 금방이었다.

화아악─!!

그러자 풍경이 순식간에 시꺼멓게 뒤바뀌었다. 뎃……?

“……아무 풍경 시꺼먼스?”

나는 뭔가 잘못된 줄 알고 당황했다가, 훅 풍겨오는 역한 트롤과 오우거 땀냄새에 여기가 빛 한 점 없는 지저라는 걸 눈치깔 수 있었다.

“이 개씨팔 새끼들. 니들이 어둠의 자식들이냐?”

지들이 밤눈이 듣는다고 나 같은 유색인종을 배려하는 걸 잊어버리다니?

콘솔보다는 PC를 높게 치는 PC주의자로서 용납해주기가 힘든 일이었다. 자고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건만, 이 새끼들이 사람이 아닌 이유가 있는 것이다.

─퐁!

혀를 차던 나는 마법으로 빛을 피웠다. 멀리까지 날리지는 않아서 주변만 밝아졌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전군, 준비는 끝났나?]

트롤 킹은 존나 까리하게 만든 옥좌에 앉아서 가오를 잡고 있었다. 얼굴이 개좆창난 몬스터만 아니었으면 꽤 간지 나게 보였을지도 모를 만큼 분위기를 쳐 잡고 있다.

그 새끼 앞에 부복한 건 철저하게 무장한 놈의 친위대 급 트롤, 오우거들이다.

윙글링 족에서 훔쳐온 유물일까. 처음 봤을 때보다 장비가 더 뛰어나졌다. 가장 앞에 무릎 꿇은 트롤 주술사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호르샤 님께서는 제 복귀를 기다리시며 야성에서 깨어날 준비를 갖춰 주십시오.]

[그래. 하지만 각성 자체는 순식간이다. 베르세르크의 잡종 놈들에게서 약탈한 유물 덕분에 말이야. 그러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간결하게 작전을 설명하지.]

트롤 킹은 호방하게 웃고서 말했다.

[열등종들은 높은 확률로 정찰을 보내올 것이다. 너희들은 내 옛 장비를 입힌 미끼 부대로 적들의 오판을 일으키도록. 그 후에는 뮈오논이 유물의 힘으로 성가신 성벽에 접근해 파괴하고 복귀. 본 부대는 한 발 늦게 도착해서 전열을 갖춰라.]

[예! 제 도끼가 훌드폴크의 영광을 열 것입니다!]

[믿고 있겠다. 작전의 세부 변경은 텔츠즈에게 일임한다.]

[예!]

지켜보고 있던 나는 눈빛이 가라앉았다.

도저히 몬스터들의 대화라곤 생각하지 못할 엄숙함과 총명함이다. 거슬리는 목소리만 감안하면 군인들의 작전 회의로 봐도 될 것이다. 알윈의 회의실에서 본 어수선함보다 훨씬 더 기강이 잡혀 있다.

“좆씨팔것이 꼴에 트롤 종족의 영웅이라도 되나.”

나는 뭐라고 더 떠들다가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트롤 킹을 새삼스럽게 쳐다봤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던가. 저 놈은 영토를 빼앗기고 이 땅밑에 숨어든 트롤과 오우거들의 영웅일지도 몰랐다.

물론 잡아먹히는 인류 입장에서는 천하의 씹새끼일 뿐이다.

나는 ‘각성’이라는 재수없는 말이 신경 쓰여서 떠나가는 인간쩝쩝충 새끼를 쫓아가 봤는데, 어둠을 나아가도 동굴 같은 곳이 이어질 뿐이었다. 호르샤 님이라고 불렸던 트롤 킹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잡은 트롤 새끼의 기억이 여기서 끊겼으니까.’

쌍수 도끼 털복숭이 트롤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 안쪽의 지형은 알고 있겠지만 트롤 킹이 어디로 가서 뭘 하는지까지는 보지 못했으니까 기억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나는 포기하고 안쪽을 더 탐사했다.

동굴은 점점 인위적이 되었다. 트롤이나 오우거의 커다란 손으로는 만들 수 없는 섬세한 공간이 나왔다.

나는 그곳의 좌표를 기억에 새겨두고 벽을 뚫으며 지상으로 날아올랐다.

“……나의 그대여. 이건 또 끔찍한 악몽이구나.”

그렇게 지상 1000미터 정도에서 존나 많은 트롤 킹의 본 부대를 내려보고 있자 어느새 나타난 베로니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평소 같은 로마니아 전통 드레스 차림으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나는 픽 웃고 말했다.

“딱히 꿈은 아냐. 좆 같은 현실이지.”

“그러니까 악몽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이라는 건 딱 보면 일목요연하니.”

베로니카는 혀를 내둘렀다. 부정 못할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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