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하네.”
크고 낮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는 것처럼 구획마다 치솟자 다나는 아연해했다.
─동동.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지 다나는 발을 굴렸다. 여행지의 풍경을 사진으로 미리 보고 흥분한 것 같은 상태였다. 내가 고향의 풍경을 제대로 설명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빡센레후.’
하지만 나는 꿈인데도 땀이 날 만큼 골치가 땡겨왔다. 이 넓은 도시를 혼자만의 상상력으로 커버하기엔 살짜쿵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끙.”
나는 상상력을 풀로 발휘해서 내가 다니던 대학 주변의 거리를 생각나는대로 재현하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화색이 되며 손가락을 튕겼다.
‘기억이 애매모호하면, 그 기억을 추출하면 되잖아?’
가능할까? 아니, 밑져야 본전이다.
나는 구신의 마나를 끌어올리며 속삭였다.
“ᛈ(Perth).”
휴르르르륵─!!
룬을 읊조린 순간, 나의 무의식 하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추출되기 시작했다.
“야 이게 되네.”
나는 씨익 웃었다.
꿈 속의 자아란 육체와는 별개의 것!
다시 말해 영혼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ᛈ(Perth)의 룬이 가진 ‘기억의 추출’ 효과로 내 기억을 셰이드의 꿈에서 재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하긴, 가 본 적도 없는 예르나 년의 멸망한 고향도 재현한 마법인데.’
이거라면 집중하지 않아도 내 기억 속의 대학 거리를 100% 재현 가능했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인기척 없는 대낮의 대학 거리와, 난잡한 교차로에서 두리번거리는 다나의 모습에 굉장한 위화감을 느끼며 실실댔다.
“씨, 뭘 쪼개. 신기할 수도 있지.”
다나는 그게 자길 놀리는 건 줄 알았는지 툴툴댔다. 나는 그녀의 팔짱을 가볍게 꼈다.
“신기해 하긴 이르지. 사람이 없어서 휑하긴 하지만, 같이 구경이나 하자고. 남편 추억 돋았어.”
“……지루하기만 해 봐. 겉만 화려하면 나더러 촌년 소리 할 자격 없다?”
잠깐 삐쳤던 다나도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표정을 풀었다. 내가 이 즉석 데이트의 코스를 빠르게 짜고 있자, 다나는 대학로에 진입하면서부터 빵 터졌다.
“푸흐흐. 길거리 정신 사나운 것 봐. 네 고향은 진짜 이래?”
“간판 얘기야? 저게 한국인의 얼임.”
구획정리 따윈 없이 건물 각 층마다 그득그득 달려 있는 저 간판들!
크, 씨발 이게 한국이지. 여기다 가게에서 나오는 팝 송에, 사람 소리까지 추가하면 돌아만 다녀도 정신 사나워서 피곤해지는 건 순식간이다. 적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른 나라는 안 그렇다는 얘기지? 재미있네. 너무 많아서 어떤 가게가 뭘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흐흐. 그냥 따라만 오셔.”
이곳은 쇼핑할 곳이 많은 거리로 유명하지만, 꿈이니만큼 뭘 사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결국 돌아다닐 곳이라고 해 봤자 뻔하다.
“한국인이면 데이트에는 영화관이지.”
다행히 무의식까지 끌어내서 재현하는 룬 마법의 효과는 끝내줬다. 우리가 전세 낸 영화관은 모든 영화가 자유 상영인 데다가 모든 음식이 무료였던 것이다.
나는 고민 끝에 감동적인 영화를 하나 골랐다.
내 개인적인 인생 영화는 데이트 중에 볼 만한 게 없었다. 그밖의 판타지 영화도 찐퉁 판타지 동네 사람인 다나한테는 웃기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치만 사는 세상이 달라도 감동 실화의 갬성은 통하는 법이지.”
“흐응……. 잘 모르겠지만 이거 다른 나라 배경 아냐? 난 네 고향 얘기가 보고 싶은데.”
“……다시 골라옴.”
나는 팝콘과 콜라를 가지고 와서 적당한 영화를 스크린에 띄웠다. 언어의 장벽은 내 파파고 번역 치트로 노력했다.
배경 지식이 없이는 몇몇 장면이 힘들겠지만, 그건 오히려 상영이 끝난 뒤에 대화할 건수가 되겠지.
뭣하면 전세낸 상영관이니까 설명해줘도 되고.
─움찔!
광고는 생략. 잼민이들이 발사한 폭죽이 하늘에서 터지며 배급사의 로고를 띄우자, 상영관에 들어올 때부터 약간 움츠러들고 있던 다나가 태연한 척 하는 것에 실패했다.
나는 그게 너무 귀여워서 웃음 참기에 실패했다.
“흐흐. 맘 놓고 그냥 봐. 잔잔한 영화니까 편안하게 보다가 눈물 짤 포인트에서 울면 됨.”
“웃기고 있네. 나는 남의 얘기에 울어본 적 없거든?”
다나는 쏘아붙이고 등받이에 어색하게 기댔다.
…와삭.
쪼로록─.
“……흐크응?! 뭐, 뭐야 이거?!”
캬라멜 팝콘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콜라의 탄산에 파르르 떠는 다나.
탄산 자체는 맥주로 경험해 봤겠지만, 뚜껑을 닫아서 뭔지조차 모를 콜라의 단맛과 현대 기법으로 가득 채운 탄산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 절로 국뽕과 비슷한 지구뽕을 채워주는 반응이었다.
이거 영화보다 누나 반응이 더 재밌겠는데. 나는 실실대며 내 웃음에 부아가 치민 듯한 다나에게 조곤조곤 궁금해하는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확하게 1시간 쯤 지나자, 다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상영관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크흥. 훌쩍.”
“야, 우냐? 우냐?”
“……이 시발, 뭐! 울라고 만든 연극이면 우는 게 예의지!”
“연극? 아아, 이건 연극이 아니라 「영화」라는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 씬에서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더니만, 스탭롤 내내 정신을 못 차리길래 실컷 놀려줬다가 옆구리를 꼬집혀졌다. 엉엉 울면서 꼴에 자존심은.
나는 영화관 카페에서 다나가 좋아할 법한 밀크티를 뽑아다 주었다.
참고로 밀크니는 그냥 상상해서 만들었다. 카페 알바는 해 봤지만 굳이 안 해도 생각만 하면 나오는걸 뭐.
“한 편 더 볼래? 저건 좀 옛날 시대 얘긴데. 영화만 잔뜩 봐도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내 고향 이해도 100% 찍을 듯.”
“……좋은 생각이긴 한데, 일단 너 살던 곳부터 구경하고. 근데 저런 게 몇 개나 있는 거야?”
어설프게 빨대를 물고 타피오카 밀크티를 마시면서 다나가 물었다. 나는 입술을 헤 벌리며 폭력적인 단맛에 넋이 나간 누나에게 케이크를 주며 말했다.
“내가 본 것만 수백 편은 될 듯? 1번 본 내용이면 100% 재생이 가능하지만 나도 완벽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라서 볼 만 하네. 4년만에 보니까 개꿀잼임.”
다나는 입술을 우물대다가 한숨을 쉬었다.
“……너 진짜 미친 곳에서 살다 왔구나? 금수저가 어쩌고 하더니 존나 기만이었네.”
“부잣집 도련님 아니그등요? 내가 살던 세상의 빈부격차는 설명하자면 존나 기니까, 영화로 관람하시다 궁금한 게 있음 물어보도록 하십시다. 그니까 실컷 놀고 먹어. 꿈에서 암만 먹어봤자 살 안 찌니까.”
“돌았네. 존나 1달 내내 잠만 쳐 자고 싶어졌음.”
“그러려면 매일 섹스해야 하는디요.”
“4명이서 로테이션 돌리면 씹가능임. 인정합니까?”
“어허. 남편놈 쥬지 끊어질라.”
물론 그런다고 끊어질 리가 없겠지만 말은 그렇게 했다.
나는 눈물콧물을 쏙 빼낸 다나를 데리고 데이트 코스의 정석을 밟았다.
놀 거리가 궁한 곳은 아니었던 데다가,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하겠지만 같은 대학 다른 학과였던 전 여친과 데이트하던 경험이 은근 도움이 됐다.
쫌 양심에 찔렸지만, 전 여친이랑은 퓨어하게 사귀다 헤어졌으니 괜찮지 않을까? 내 아다는 프랑에게 도둑맞았는걸.
“난 널 믿었던 만큼 네 아다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딴 도시에 떠나가게 했고!!”
“아니 누나 가사. 가사 다 틀렸어.”
“안일하게 떠나보낸 첫사랑이 1달만에 결혼 반지를 끼고 나타났던 당시의 심경을 담아 노래해 보았읍니다.”
“다음 가자, 다음!!”
코인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치다가 장소를 옮겼다. 내가 한 곡 뽑은 노래를 곧바로 리믹스하는 다나에게 크리티컬에 쳐맞아서 사랑 노래를 기깔나게 뽑아보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독한 년 같으니.
우리는 한국은 물론, 지구의 문화도 아는 게 없는 다나가 지루하지 않을 코스를 선택해서 대학로를 크게 돌았다.
몸을 쓰는 놀이는 VR 멀티방의 좀비 게임에서 겁을 먹은 다나가 펀치를 날려서 기계를 박살냈기에 잠시 접어뒀다. 이 초인급 폭력수녀님을 현실 지구에 던져두니 개판 나는 것도 순식간이군.
다음엔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공포 영화 틀어놓고 몰래 빠져나와야지. 히히.
“PC 게임은 복잡하니까 아웃이고……. 애들도 사용 방법 몰라도 할 수 있는 캐쥬얼 게임 같은 거 해 볼래?”
내가 말을 걸었지만 다나는 몇 걸음 뒤에서 목에 담 오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왜?”
“저거, 술집이지?”
다나가 가리킨 건 3층 정도에 있는 치킨 집이었다. 당연히 술도 파는 프렌차이즈였지만 나는 꺼벙하게 물었다.
“맞기는 한데, 어케 안 것? 술 냄새라도 나?”
“건물 내장(內粧)이 딱 고급 주점처럼 생겼어. 저런 게 주변 1층 건물에도 여러 곳 있더라고.”
“이야 시발 이젠 생긴 것만 봐도 술집인지 아닌지 파악이 돼 버리네. 술고래답다. 지구 술 마셨다가 입 고급화되면 브리타니아 오줌 맥주 못 마실 게 뻔해서 넘어갔는데.”
내가 혀를 내두르자 다나는 정색을 빨았다.
“브리타니아 술을 오줌이라고 하는 건 괜찮아.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를 오줌 마시는 미친년으로 여기는 건 용서 못함.”
“사실 우리 나라 맥주도 저렴한 건 브리타니아랑 삐까뜸. 같이 먹는 안주 나름이지만 보통 외국 맥주가 낫지.”
“추하다 북호야. 고향 부심 밑천 까졌죠? 자기도 오줌 맥주 마셔대다가 왔죠?”
“예~ 미. 들켜버렸냐고~.”
킹치만 K-맥주의 밍밍함은 월클인걸?
게르마니아의 맥주를 마셔본 소감으로는 주류의 종류라면 어쨌든 퀄리티 면에서는 이세계도 지구 뺨친다. 나는 노가리를 까면서 다나를 치킨집에 데려가 앉혔다.
가게는 치킨 집이라는 느낌보다는 카페에 가까웠다.
안의 완성도가 치밀한 걸 보면,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여기에 술 마시러 와 본 적이 있는 모양이다. 홍대에 뒤를 잇는 유명한 대학 거리여서 그런 걸까. 꽤나 돈 좀 깨졌을 것 같은 가게였다.
진갈색의 목제 인테리어와 보란 듯이 놓인 오크 통은 무척 운치가 있었다.
…꼬물.
은은한 고급감에 다나는 괜히 자기 옷의 미스 매치를 신경 쓰는 듯 의자에 앉아서 몸을 꼬았다. 귀엽기는.
─샤샤샤샥! 나는 수우미양가의 인(印)을 맺었다.
“인법, 치킨 소환의 술!”
“그거 현실에서 쓸 수 있으면 황금으로 저택을 세울 듯.”
“지금 황금이 문제냐, 황금 올리브가 눈앞에 있는데.”
나는 온갖 종류의 치킨으로 테이블을 채워놓고서 흐뭇하게 맥주잔을 부딪혔다. 다나는 고급스러운 전등─어디까지나 이세계인들 기준─으로 가득한 천장을 구경하다가 웃었다.
“근데 닭이랑 맥주면 우리가 먹던 대학로 술집이랑 별 다를 거 없지 않냐? 이거 너네 나라 음식 아니지?”
“갈─! 양념 치킨은 한식이다! 으딜 조미료라곤 소금하고 후추하고 그밖의 두어 개 밖에 없는 미개한 중세랜드 수녀가 K-치킨의 심오함을 논하느냐!”
김치가 딱히 그립지 않은 애새끼 입맛인 나라도 치킨은 그 얼마나 그리웠던가! 왜 진작에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후회될 만큼 거침없이 베어문 닭다리는 끝내줬다.
꿀꺽, 꿀꺽…!
“……크으으으으!!”
치킨의 기름기를 즐기며 피처 잔에 채운 맥주를 원샷했다. 꿈이라 취기가 올라오진 않았지만, 알딸딸한 알코올의 맛은 절로 캬 소리가 나왔다.
…꼴깍.
다나는 내가 감탄하는 걸 보고 맥주를 쳐다봤다.
투명한 유리잔의 황금색 액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기포! 콜라의 장난 아닌 탄산을 떠올린 듯 우리 눈나도 절로 침을 삼켰다.
‘이세계에서 그런 진한 탄산의 목 넘김을 즐기려면 귀족들이나 갈 법한 주점을 가야 하니까.’
다나는 내가 닭다리를 건네주자 눈치를 보다가 맥주잔을 슥 입에 가져갔다.
첫 입을 목으로 넘긴 다나의 눈이 부릅뜨였다.
─벌컥, 벌컥!
“……푸하!”
커다란 잔이 눈 깜짝할 사이에 비워졌다. 다나가 안주도 안 먹고 잔을 원샷때렸기에, 나는 손가락을 휘저으며 다시 잔에 맥주를 만땅으로 급유해 주었다.
“치킨도 먹어 봐. 맥주만 마셔봤자 여기선 취하지도 않음.”
“이젠 안 먹어봐도 알겠는데? 비교할 게 못 되네. 이세계인 주제에 깝쳐서 미안합니다.”
“삶에 여유가 늘면 놀거리나 먹을 거리도 발전하기 마련이니까.”
이세계 요리사들은 재료의 맛만큼 가성비도 치열하게 따지니만큼 귀족의 셰프가 아니면 이 정도의 맛을 보기 어렵다. 요리사의 최고 실력자를 따진다면 비등하겠지만 평균 레벨은 지구가 압승이겠지.
후라이드를 한 입 물자마자 다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놀라는 기분에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프랑한테도 먹게 해 주고 싶네. 다른 애들도 좋아할 거고.”
“다음에 데리고 오면 되지. 지구의 문화에 중독되면 차원 이동 연구를 도울 동기 부여도 딱 되고 좋겠구만 뭘.”
프랑은 주류나 기술 같은 것에 관심을 보일 것 같다.
베로니카는 영화 전문가나 소설 평론가가 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본다. 라리루라도 단 거나 마스코트 인형을 집에 가득 쌓으면서 엔터테이너가 될지도 모른다. 남자 아이돌을 빨기 시작하면 질투날 것 같지만 말이다.
“……차원 이동이라.”
다나는 화장지에 치킨 기름을 닦고 중얼거렸다. 내가 눈을 끔뻑이자 그녀는 픽 웃었다.
“암 것도 아냐. 그보다 다른 술은 없냐? 맥주 종류 말고도 많지 않아?”
“많기는 한데, 내가 마셔본 종류가 그렇게 많진 않아서. 딱 한국 술 몇 개랑 외국 전통주, 편의점 특가 상품 정도인가.”
“이 새끼 이거 인생 절반 손해 봤네. 혼자 손해보지 왜 내 인생에서까지 즐거움을 뺏어감? 술 좀 쳐먹고 살지.”
“술 쳐마시고 병 걸려 뒤지라는 것? 시발 남편이 죽다 살아났는데 암살 각을 잡네. 누나 내 앞으로 보험금 들어놓은 거 있지? 다 들켰어 이년아.”
“아 진짜? 어째 매일 니 아침밥에 세제를 그렇게 타댔는데 죽지를 않더라. 역시 다 알고 있었군.”
“뎃?”
“농담이니까 개뼈다구 뺏긴 똥개 같은 표정 짓지 말고, 딴 술도 꺼내 봐. 궁금하게시리.”
“그렇다면야.”
나는 상냥한 얼굴로 민트초코 소주를 꺼냈다가 병대가리로 뚝배기가 깨질 뻔 했고, 우리는 그렇게 오랫 동안 떠들며 술자리를 가졌다.
구래도 취하지 않는 술자리라는 건 분위기가 고조되기 어려웠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밖으로 나왔다. 배가 부른 감각은 없었지만 산책하는 느낌으로 걷기로 한 것이다.
대학 이름이 붙었지만 도저히 면학의 분위기랑은 거리가 먼 이 거리는 조금 걷다 보면 호수가 하나 나온다. 나는 다나를 거기로 데려갔다. 이쪽은 딱히 전 여친과 가 본 적이 없었다.
─살랑.
봄답게 벚꽂을 피운 길을 걸어가자 꽃잎이 다나의 머리에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집어들고 픽 웃었다.
“그러고 보면 누나네 세상에는 벚꽃도 없네. 아니, 키타이 쪽에 가면 있을라나?”
“가 보면 되지. 네 말대로라면 그쪽에는 너희 고향과 닮은 나라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글쎄. 우리 나라 역사도 나름 복잡해서. 정말 있어도 느낌이 꽤 다를 걸?”
─힐끗. 밝은 하늘은 내가 쳐다보자 금방 밤이 되었다.
현대와 근현대 이전을 나누는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야경일 것이다. 새벽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不夜城)조차 현대에서는 일상의 풍경이니까.
다나는 불빛이 반짝이는 야경을 호숫가에서 바라보았다.
“……엄청 놀랍고, 조금 당황스럽네.”
저 거리의 불빛은 길게 늘어져서 호수의 수면에 비춰졌다. 다나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웃으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기가, 네가 돌아가고 싶은 세상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