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488화 (488/1,009)

“어디 보자.”

잠깐 아쉬워했던 나는 곧 싱글벙글 거리면서 설명서를 탐독했다.

프로토타입! 로스트 테크놀로지! 강철 의수!

존나 어느 것이고 남자의 로망을 뒤흔드는 타이틀 아닌가. 팔도 잃어버린 놈이 철없이 가슴이 들뜬다.

“옐로 사이어인은 이미 충분히 쉬었다.”

─척.

팔의 단면에 붙이고서 천을 둘둘 맸다.

호르샤의 일태도에 당한 팔은 팔꿈치 위로 날아가서 팔뚝 부분만 남았는데, 그 점이 내 의수를 제작하기에 앞서 은근히 곤란했던 부분이었다.

팔꿈치 아래가 남아 있었으면 망치라도 달아놓는 느낌으로 대충 아랫팔에 붙여놓으면 그만이지만, 내가 쓸 의수에는 팔 관점이 움직이는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

팔뚝에 붙이자 마나와 은실로 만든 간이 신경이 연결됐다.

나는 생각대로 움직이는 오른팔을 움직였다. 아무런 촉감도 느껴지지 않아서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잘 움직이네. 역시 나라니까!”

오드리가 의기양양해 하는 걸 보면서 가동범위를 확인했다.

─끼익, 끼익.

윤활유를 쳤지만 아직 삐걱대는 느낌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거야 쓰다 보면 해결될 거고, 평생 쓸 물건도 아니니까.

‘치수는 딱 맞는군. 오드리의 성격이 그리 치밀해 보이지는 않고, 클라라가 도와줬나.’

역시 월클클이다. 나만의 작은 대장장이를 벗어나 위대한 도약을 시작하는 모습이라니. 코르넬리우스 어르신이 아직 덜 큰 하꼬들을 후원하는 게 이런 기분이었던가.

“흠? 그게 임시 의수인가?”

그러고 있자 마찬가지로 한가한 베로니카가 찾아왔다. 두 눈에 흥미가 가득하다.

“그래. 힘은 원래 팔에는 못 미치겠지만, 방어력은 훨씬 더 나을 것 같아.”

“힐끗 봐도 굉장한 완성도로군. 감촉은 있느냐?”

“아니. 전혀. 아프지 않은 만큼 거칠게 굴려도 되겠지만.”

“흐음.”

풀린 날씨에 미지근한 의수를 쓰다듬는 베로니카.

은박은 표면에만 입혔고 내부는 여러 금속의 조합이지만, 그 실체는 내 고향 지구의 로봇 암(Arm)보다는 통짤 금속을 전자력으로 움직이는 것에 가깝다.

이것 자체가 무지성으로 써먹을 수 있는 매직 아이템이다.

“출력은 직접 확인해 보자꾸나.”

베로니카는 나무를 주워서 흙바닥의 룬을 썼다. 흙벽이 내 앞에 솟아났다.

“어디 마음껏 부숴보거라.”

“격멸의 세컨드 불릿!!!”

나는 바로 야수회귀를 감고 펀치를 날렸다. 적당한 힘을 준 펀치다.

─퍼걱!!

바위보다 단단한 흙벽이 뻥 뚫렸다. 그 상태에서 오러까지 감고 활활 타오르는 형광색 팔로 흙벽을 찢어냈다.

콰르르륵─!!

촉감은 없지만 연결부위에 가해지는 압박으로 대충 느낌이 왔다. 야수회귀랑 【게르튀르】의 버프를 받는 진짜 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임시로 쓸 팔로는 충분하다.

“그래도 창술을 쓸 때는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마음가짐을 명심해야겠군.”

두 팔의 힘이 다른 만큼 주의하긴 해야겠지.

뭐, 급할 때는 오러를 감고 펀치를 날리면 평소 상태의 【게르튀르】 창술 못지 않은 출력이 나올 것이었다. 오러가 별로 연비가 좋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그쪽이 나은가?

“마나를 불어넣으면 팔을 움직이는 출력도 올라가긴 할 걸.”

“그래? 시험해 볼까?”

“하지 마. 과부하 걸려서 박살난다?”

오드리는 아서라는 것처럼 팔을 저으며 만류했다.

“요즘 의수는 거의 로마니아의 꼭두각시 기술을 융통하는 식이지만, 내부에 출력 제한이 설계된 코어가 없어. 너랑 직접 연결됐으니까 가감이 어렵다고. 만드는 재미는 있었지만.”

“멀쩡하게 굴러가면 됐지 뭐.”

“으히히. 역시 우리 사장님이야. 말이 통한다니까. 어쨌든 나한테 볼 일은 다 봤지?”

오드리는 흥분이 꺼지자 지친 듯, 어깨까지 축 쳐져갖곤 말했다.

“난 이제 갈게. 졸리니까 여관 잡고 잠깐 잘 거야.”

“내가 주는 쉬는 시간이 부족할 리가 없는데? 너 밤에 잠 안 자고 쳐 놀다가 수면 부족 걸리는 거지?”

“세상 사람들 중 안 그런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그건 그렇지. 퇴근하고 잠을 줄여가며 노는 건 직장인에게 허락된 유일한 마약 아닌가.

그리고 다음날 피곤해 뒤진다는 부작용까지. 진짜 마약 그 자체로군.

“숙박비는 내가 대 줄 테니까 거기 가서 자.”

“야호! 싸장님 최고!”

오드리는 그렇게 연구원들이 묵는 여관에 방을 잡았다.

크, 불경기에 장기투숙 손님이라고 숙박비를 깎아주는데, 그 여관에 우리 직원도 싸게 재워주면서 충성도까지 UP! 이게 비지니스지. 원래 복지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지구에서도 사업을 했어야 했나. 내가 흐뭇해 하자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나저나, 나의 그대여. 피라미드는 신경을 안 써도 되는 것이냐? 다른 이들이 먼저 공략하면 어쩌려고?”

“응? 아, 괜찮아. 피라미드라는 건 왕릉이잖아? 도굴꾼들은 다 죽여버리려는 게 기본 마인드인 황금시대 제왕들의 묘지 겸 인공 던전인데, 그게 그렇게 쉽게 뚫리겠어?”

나르메르-나일 왕가에서도 국력을 깎아먹을까 봐 포기하고 명예 귀족 선발을 미끼로 걸고 공략인원을 찾는 것 같던데, 그런 던전이 고작 몇 달 사이에 뚫린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리가 바로 갔어도 늦었을 걸.’

반대로 그런 미친 괴물이 공략 중인 곳에 얽히지 않을 수 있으니까 개이득으로 봐야 한다.

던전이든 유적이든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패싸움 나는 건 일상이지 않은가.

‘티르시한테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사업이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어르신을 통해서 한 자리 받는 게 빠르겠고.’

명예 귀족, 부백작 같은 매관매직도 먼 세상 얘기는 아닐 것이었다.

물론 발기부전도 있고 나르메르-나일에 가긴 가야겠지만, 굳이 피라미드 공략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저주를 해소하는 방법이라는 게 뭐인지도 아직 못 들었으니까.

안 그래도 팔까지 짤라먹었는데, 또 나대다가 병신 되기는 싫다는 게 본심이기도 하고 말이다.

***

처음에는 현실 부정을 하던 나도, 최근 들어서는 이 몸이 일약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있다.

〈임모르탈리스〉가 세계구로 활동하는 테러 단체라는 걸 생각하면, 강대국조차 엿먹이는 그 새끼들을 족쳐버린 나를 국뽕 메타의 일종으로 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정보 통신이 잘 안 되는 이세계에선 신문도 특종을 잡기가 힘들다.

소식의 전파가 인구의 유동보다 늦어지고 있다면 사골처럼 우려먹기도 바쁠 테니 내 이름이 자주 거론될 만 하다. 일부 여행객이나 행상인들은 ‘도시에 들릴 때마다 이 새끼 얘기네’ 하고 넌더리가 났을 수도 있겠군.

“선배! 신문에 저희 이름이 있어요☆!”

“아이고.”

그리고 그 광풍은 기어이 알윈까지 휩쓸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조만간 사르가디스에도 퍼질 텐데, 어딜 가도 눈에 확 띄는 검머외 사이어인 놈은 얼굴 팔리면 어디 편하게 외출 하겠나.

“아니 씁…….”

신문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자 이젠 골치까지 아프다. 존나 모친의 실존 여부가 의심되는 사악한 기자 새끼들이로군. 내 와꾸가 저렇게 못생겼냐고.

“흠. 하나도 안 닮긴 했구나.”

“푸흐흐. 이거 인종차별의 일종 아냐? 광대 툭 튀어나오고 눈 째지고. 존나 키타이 인 이미지의 스테레오 타입이네.”

“이젠 화낼 기력도 없는레후.”

아직 인종차별이 문제시되는 세상도 아니다. 머리 모양도 다른 걸 보면 대충 풍문과 망상으로 휙휙 그린 이미지겠지. 화가한테 3쿠퍼 던져주고 커미션을 맡길 수 있는 세계니까.

‘참 끝내주는군. 고흐도 생전엔 빈곤했다더니만.’

다나가 웃겼으면 됐나. 나는 의수로 신문을 넘겼다.

“좋게 좋게 생각하지 머. 저런 초상화면 날 알아보는 놈은 없겠구만.”

“헤헤. 그래도 노르가 신문에 나오니까 왠지 기쁘다.”

프랑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아내들도 은근히 으쓱으쓱해 하는 느낌.

90년대 쯤에 TV에 나오는 것 자체를 기쁘게 여겼던 감성이랑 비슷한 걸까?

하긴, 미디어와 언플의 폐해도 없으니까 순수하게 생각하면 그럴 만 했다. 인정욕구는 이세계 사람들한테도 있는 모양.

이세계에서는 동네 사람들~ 우리 아들이~ 하는 자랑조차 보통이니 말이다.

“텔레비젼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좆같네~ 정말 좉같네~.

흥얼거리면서 졸지에 동양의 오리엔탈 전사이자 흑마법사 사냥꾼이 된 키타이 인 노르드 씨를 숭배하는 나였다.

오죽하면 내가 팔팔하게 쏘다니는 걸 보고 알윈의 영주가 따로 부르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노르드 경의 공적을 인정하며, 3년간 우리 영지에서 세를 면제받을 수 있는 권한을 수여하겠소.”

이거 알윈에서 지내달라는 얘기지? 어떻게 영주들은 하는 짓이 다 똑같은가 몰라.

갑자기 반존칭이 된 게 좀 웃겼다. 맘만 먹으면 어지간한 관직 정도는 받을 수 있는 게 미스릴 클래스니까, 소식을 못 들었어도 저렇게 될 만은 한가.

하긴 영주라고 해서 회의실에서 나불대던 외국인이 오러 시오후키 마스터였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나저나, 별로 끌리는 제안은 아니군.’

말이 좋아서 세금 면제지, 매년 회수하는 비용만 면제다.

물건을 살 때 붙는 부가세나 상업에 붙는 관세는 예외다. 그것만 해도 돈으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정든 집을 버릴 마음이 없었다. 겸손한 자세로 무릎 꿇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잠시 한 마디 괜찮겠습니까?”

“……무엇이오? 말해보시게.”

유니콘 흑마법사를 해치웠을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간소한 자리였기에 나도 부담 없이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진짜 달인이 되고 나서 생긴 자신감의 영향도 있고 말이다.

“저 개인보다는 픽트 인들의 융화에 더 신경을 써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만, 영주님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픽트 인의 융화?”

이 영주님 표정 밝아지는 것 보게.

“그들이 교류를 시작하기로 했소?”

“예. 제 아내가 족장님과 사제장님의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물론 구라다.

얼스터 인의 과도한 자결을 버리고 교류를 시작하기로 한 건 장인어른 부부의 뜻이다. 다나랑은 관계 없다.

단, 이건 장모님과 다나의 합의 하에 입을 맞춘 구라였다.

유적 때문에라도 몇 주에서 몇 달은 알윈에서 발굴에 올인할 각이지 않은가. 적당히 업적을 쌓아두면 잠깐 동안이나마 편의를 봐줄 거라고 예상 가능하다.

저 지하도시는 픽트 인을 포함해서 에린의 옛 뿌리가 잠든 곳!

저곳의 발굴은 픽트 인들한테도 의의가 있다.

‘그리고 뭣보다, 픽트 인들이 먼저 교류를 권해도 알윈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잡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니, 할라면 할 수는 있다. 뒷일이 문제지.

피해는 적지만 호르샤의 습격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중인 알윈이다.

안 그래도 ‘저 새끼들 때문 아냐?’ 하고 백안시를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는데, 쓸데없는 악감정이라도 쌓이면 향후 교류에서 좆되는 수가 있다. 인종차별은 백인끼리도 있다고.

오히려 힘들 때 적당히 생색 내며 봉사하는 게 낫다.

‘연구소 팀이 장기 숙박을 한다니까 여관 주인이 울며불며 감사할 정도니까 말 다 했지.’

상대가 불행할 때 약점을 쥐고 흔들면 신뢰는 못 쌓는다.

외교는 총칼 없는 전쟁이라지만 여기서 적의를 쌓아두는 건 좋지 못한 수다.

어차피 결과가 똑같으면 중간에 뭐라도 챙겨야지 않겠나.

‘알윈의 사정이 좋지 않지만, 그것도 유적의 발굴을 끝내고 언플만 잘 때리면 전화위복이 가능할 거고.’

그럴 능력은 되는 영주로 보이니까 말이다.

내가 그렇게 대굴빡을 굴려대자, 주판을 두들기는 듯 하던 영주도 흔쾌히 말했다.

“좋소. 픽트와 알윈은 긴 시간 동안 우애를 맺고 지내왔던 이웃이자, 벗 아니오. 독립과 자주성을 보장하면서 관세에도 혜택을 부여하겠소. 나 역시 적극적인 교류를 기원하오.”

“귀하신 분의 말씀, 족장님께 전하겠습니다. 추후에 말씀을 올리러 대표가 찾아올 것입니다.”

나는 기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젠 귀족을 상대로 이득을 떼어먹는 것도 익숙해졌군.

이제 와서 시골 영주님한테 빌빌대기엔 내가 귀족이랑 쌰바쌰바한 경험치가 좀 많기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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