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만개해, 초원과 장인어른의 텃밭에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3월.
여러가지 일들에 더해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는 건 따로 나만이 아니다.
다나 역시 고향의 방식으로 식을 올린다는 것에 조금 기대감이 있는 것인지─전통의례를 따른 결혼식은 현대인의 감성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긴 했다─, 발굴하는 틈틈이 장모님과 상담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흩날려라 호애앵.”
내가 휴일에 처가 마당에 핀 야생화의 꽃잎을 뿌려대면서 놀고 있자, 다나가 서류를 넘기다가 말했다.
“남편, 남편. 이것 좀 봐 봐.”
“머임?”
부르길래 가 보자, 그녀는 유적의 경구를 번역한 종이를 쫙 펄쳤다.
“훌두폴크 유적의 번역본인데, 옛날 에린의 축제에는 알반 에일레르(Alban Eiler)라는 게 있었대.”
“알반 에일레르…… 대지의 빛이라는 뜻인가?”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맞아, 브리타니아 식으로 말하면 춘분(春分)이지. 봄의 첫 날을 기념하는 3월 21일에 열린다는 축제야. 훌드폴크 말고도 다른 에린의 후예들도 하던 행사라더라.”
다나의 말을 경청했다. 얼스터에 있어서 알반 에일레르란 땅에 씨를 뿌리는 날이며, 드루이드의 마법이 더욱 강해지는 변화의 시기 중 하나라고 한다.
장모님이 선대 사제장에게 배웠던 행사나 축제에도 비슷한 게 있었지만, 픽트에서는 거의 유실되서 명목만 남았다나.
“근데 저거 선배 글씨체 아니에요~? 왜 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이신가요~?”
“3류 번역가는 자기가 한 번역 따위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정색하고 말씀하셔도……”
프랑이 깎아준 과일─장인어른이 주신 것─을 먹던 라리루라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지만, 존나 요 1~2달 사이에 내가 술술 써다바친 번역이 어디 한둘인가?
물론 나처럼 했다간 경화수월 깨지듯이 번역본의 퀄리티가 곱창이 나 버릴 가능성이 커지지만, 나는 내가 번역하는 게 아니잖은가. 해석은 파파고만 해 주고 나는 옮겨쓸 뿐이다.
그리고 시발, 애초에 일주일 전에 쓴 깜지 내용을 기억하는 새끼가 어딨어.
“아무튼, 그리고 또?”
“이 날에는 신이나 정령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식을 올리는 전통이 있대. 처음부터 있던 전통은 아니고, 고대문명 중기 쯤에 변화가 일어난 모양인데…… 결혼식 날로는 괜찮지 않냐?”
수줍음을 숨기려는 듯 틱틱대는 다나. 나는 씩 웃었다.
축제는 준비할 때가 제일 즐겁다는데, 그건 결혼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프랑과 식을 구상할 때도 느꼈던 사실이다.
“그렇군. 고고학자 부부한테 어울리는 결혼식이겠어.”
전통을 복원하면서 그 대표주자로 선다니, 그럴싸하지 않나.
원래 전통대로라면 전통 잔치처럼 축제를 벌이듯 신혼부부들이 식을 올리며 왁자지껄 노는 잔치겠지만…… 이번엔 오직 나랑 다나만의 결혼식이 될 테니 형평성면에서도 괜찮다.
신인지 정령인지에게 축복을 받는다는 의의도 무척 괜찮고 말이다.
“근데 3월 21일이면 1주일쯤 남은 거 아냐?”
촉박하다면 촉박하고 여유롭다면 여유롭다. 다나는 괜찮지 않겠냐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적당하지 뭐. 유적에서 찾은 드레스랑 비슷한 옷도 이미 주문제작 해 뒀는데.”
“누나가 그렇다면야.”
나는 엘리트 대갈통을 굴리다 다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1~2달 동안 준비는 대충 끝났고, 일자만 잡으면 된다. 이번 결혼식에는 사람을 부를 것도 아니니까 더 그렇다.
안 부르면 섭섭해 할 연구소 사람들도 알윈에 있잖은가. 말만 하면 반나절만에 도착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살벌한 메탈 암을 끼고서 결혼식을 하는 건 좀 아니지.’
강철 의수는 남자의 로망이지만 결혼식에는 옥에 티다.
나는 오른팔에 낀 의수에 손을 얹고서 ᛒ(Berkanan)의 룬을 사용했다.
“감쪽같이 얇은 깜짝 텍스터!”
자신의 마나에 룬의 변신 마법을 더해, 팔의 피부를 재현!
쉽게 말하자면 매우 고화질의 칼라복사 같은 것으로, 만져보면 금방 가짜라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장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참고로 이 이름은 옛날에 대 유행했던, 휴재가 많은 만화 설정에서 따온 것이다!!
“외견 부활!!!”
“빠르군….”
베로니카가 넌덜머리인지 감탄인지 모를 탄성을 흘렸다. 후, 내가 봐도 진짜 팔로밖엔 안 보이는 완성도로군.
나도 다나도 밀린 일이나 급한 불은 다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결혼 준비에 매진하자.
***
결혼식 일자를 잡고, 픽트 인들이 수백 년 만의 알반 에일레르를 준비하는 일주일.
장모님은 벌써 구전되는 사제장의 지식을 글로 남기기 시작하셨고, 실험자재로 구매해 놓고 별 효과가 없던 마법 시약을 폐기하는 대신 챙겨서 새로운 인벤토리 석판을 만들었다.
외인을 배척하던 이들이, 마을의 문을 개방하고 열리는 첫 축제.
기대감에 준비는 빨라지고, 일주일 째 되는 날에 나는 얼스터의 전통 혼례복을 입고 마을 한켠의 스탠바이 중이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간지나는 의례복을 입고 스탠바이하길 2시간 째.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늦게 나올 걸 그랬나.
하늘을 보자 해는 중천에 가깝다.
알반 에일레르는 오후에 시작해서 밤에 캠프 파이어를 지르는 걸로 마무리되는 축제라고 한다. 당연히 훌두폴크 놈들처럼 짚더미 안에 산제물을 쳐넣지는 않지만 말이다.
“시간은 똥이라고 친구.”
나는 다나가 오는 걸 기다리며 초조하게 다리를 떨어댔다.
이번에도 남편놈의 놀라는 반응을 보고 싶어하는 아내님의 저의에 따라, 나는 오늘까지 아내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다나에게 드레스를 시착시키거나 하는 동안 계속 쫓겨나 있었다.
하지만 장인어른이 딱한 눈빛을 보내며 간식을 챙겨주던 그 굴욕의 시간도 이제는 끝이다.
오늘은 결혼식 당일.
이 기쁜 날에 나는 그루터기에 앉아 신부를 기다리며, 오른팔의 무게와 절로 떨리는 다리를 흔들며 회중시계만 죽어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번째인데 도저히 적응될 것 같지 않군 그래.
결혼식에 이 꼴이면 아내들이 출산이라도 할 때는 옆에서 조바심 나서 어떻게 견딘담.
─저벅.
1초가 1시간 같은 기다림을 보내던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후딱 일어났다. 마을 한켠에서 세상의 진리에 대해 고민하던 나에게 웨딩 드레스를 입은 다나가 다가왔다.
부스스하던 개털머리는 귀신같이 정돈했으며, 머리카락의 길이는 대체 무슨 일인지 허리춤까지 길게 늘어나 있었다.
뽀샤시한 양쪽 어깨를 드러내는 어깨는 드레스는 말해 뭣하겠는가. 슬랜더한 허리를 꽉 조이는 드레스는 다나의 골반과 긴 다리를 강조하며 섹시함과 청순함이 적절하게 뒤섞였따.
긴 보라색 머리를 풀어헤친 우리 눈나는 몇 발짝 쯤 두고 멈춰서서는 픽 웃었다.
“감상은?”
“……존나 예뻐서 말이 안 나와.”
나는 쩍 벌어진 입을 어렵사리 닫으며 말했다.
“미리 어떤 모습일지 안 봐두길 잘 한 것 같다. 지금이야 이렇게 넋이 나가서 다행이지, 몇 번 봐 두고 적응했으면 울 누나 미모에 홀려서 계속 힐끔거리느라 남 보기 창피했을 듯.”
“새끼, 아부는.”
다나는 부끄러운 듯 치렁치렁한 머리를 손으로 집었다.
나는 뒤늦게 정신이 들자마자 메다닥 달려갔다.
눈으로 허락을 구하고 만져봤는데, 가발이 아니라 100% 찐 머리카락이다.
단발은 진짜 미녀한테만 어울리는 헤어 스타일이라고 주장하는 나조차도, 드레스까지 입은 장발 다나의 미모는 여우에 홀린 듯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뭐지? 우리 눈나 머리카락 왜 일케 길어짐? 내가 또 꿈을 꾸고 있나?”
“잠깐 변화 좀 줘 본 거야. 내일이면 원래대로 돌아간대.”
“세상에 마상에, 어떻게? 누가 마법으로 길러준 거야?”
“그게 바로 나다.”
내가 기쁜 경악에 허둥지둥거리고 있자, 이세계식 정장을 빼입은 모히칸 대가리가 엄지를 세웠다.
이 시발, 셈무스 아녀.
“뭐야 님이 왜 여깄어요.”
“머리를 기르는 매직 아이템. 단가 3실버. 잠입 작전에 참 좋다.”
“이 녀석은 자문자 역할로 족장에게 얼마간 고용된 거다. 얼스터 인의 관점에서 바깥 세상을 접한 이는 드무니까. 외부와의 첫 접촉이기도 하고, 신중하게 준비하는 거겠지.”
동문서답을 하는 흑우 새끼를 대신해서, 저번에 셈무스랑 짝짜꿍하던 마기마기 소속의 모험가 마법사가 말해주었다.
그, 이름이…… 스… 스…… 아방 스트랏슈였나 그랬었지?
“마법사다운 설명 타임 고마워요. 근데 그러는 댁은요?”
“나? 나는 이 녀석을 팀에 권유하는 중이고…… 여기 사제장이 내가 속아넘어갔던 사기꾼의 마법 스승이라며? 콩고물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했지. 무영창 마법은 배워서 손해볼 것 없고, 마침 알윈에 일거리도 많아서.”
아, 그러셔요.
하긴 누구든 자기 살 길은 찾아가는 법이지.
나는 눈치라곤 없는 수컷 두 놈을 훠이훠이 거리면서 쫓아내고 다나를 돌아보았다. 안면 좀 튼 게 전부인 남남보다는 우리 아내님의 변신이 수천 배는 더 중요하니 말이다.
긴 머리카락과 드레스 때문일까. 다나에게 평소의 수더분한 인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야, 언제까지 멍 때릴래? 같이 기다리다가 나가야 하는데 계속 그렇게 넋 놓고 있을 거야?”
“아, 그래. 그래야지.”
나는 뺨이 붓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갈겨대며 자책하고서 다나의 옆에 섰다. 그녀는 방금 전의 당당함이 거짓말처럼 좀 머뭇거리다가,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조금 기다리자 축제의 전반이 끝났는지 마을사람이 우리를 불렀다.
둘이서 나란히, 포장되지 않은 길을 걸었다.
식장은 다나가 열심히 복원한 옛 에린의 건물이었다.
스톤헨지처럼 돌을 세우고서 천과 나무로 포장한 건물은, 세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거룩한 자연의 기척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을 사람들과 몇 명의 지인들이 각자 자리에 있었다. 우리 가족들과 연구원들, 리루아를 비롯한 윙글링 인들, 픽트와의 교류를 위해서 온 듯한 알윈의 영주.
그리고 다나의 고향 사람들.
한껏 꾸민 아름다움은 없어도, 자연의 생기가 넘치는 곳에 옛 전통을 살린 의복을 입고 매무새를 신경쓴 사람들은 무척 생동감이 흘러넘치는 것이었다.
상석에 앉은 장인어른이 벌써 코가 시큰한 듯 훌쩍거리고 계신 게 조금 웃겼다.
선단에는 마찬가지로 검소한 드레스를 입은 장모님이 얼굴 아래의 피부를 완전히 감추고 서 계셨다.
[고귀한 삶에 또 하나 변화를 맞이하는 픽트의 아이에게, 사제장 시로나 베르베이아가 축하를 바친다.]
새 종이가 빳빳핸 책자를 넘기던 장모님이 입을 여셨다.
그 눈빛은 따스하게 자신의 딸의 새 출발을 기도하며, 옛 선조의 축문을 읊었다.
[──당신의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의 지갑에 언제나 한 두 개의 동전이 남아 있기를.
당신의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서는 가난하고, 축복에서는 부자가 되기를.
적을 만드는 데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는 빠르기를. 이웃은 당신을 존중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하지 않기를.
당신이 죽은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이미 당신이 천국에 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의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신이 늘 당신 곁에 있기를.]
긴 듯 짧은 축문을 끝내고, 장모님은 애틋하게 웃었다.
“결혼 축하한다, 우리 딸.”
“……폼 잡을 거면 끝까지 좀 잡지. 몰입 깨지게.”
다나는 약간 물기 어린 눈을 닦고 픽 웃었다. 나는 손을 꽉 잡는 그녀의 손을 더 굳게 잡아주었다.
과거라는 건, 숨기건 잊건 그 사람의 뿌리이다.
뿌리 없이 열매 맺는 나무가 없듯, 외면하거나 떠나더라도 자신의 태생이나 과거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끝도 없이 펼쳐진 세상의 무진장한 역사에 비하면, 우리들 개개인의 삶 따윈 찰나이고, 시시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비밀을 만들고 숨기며, 때로는 자뭇 당당한 태도로 남을 속인다.
자신의 염치 없는 잘못이 영원토록 회자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나, 결혼 축하한다!”
“드레스 잘 어울리네! 어쩜, 못 알아볼 만도 하지!”
“앞으로도 자주 놀러 와!”
하지만 그 100년조차 못 될 역사 역시, 잊거나 잊혀지기는 쉽지 않다.
20년만에 재회한 10살배기 보라 머리 꼬마애의 추억이 이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듯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잊혀진 과거가, 수백 년 전의 흙을 파헤치는 손길 앞에 감춰둔 비밀을 토해내듯이 말이다.
이미 본인도 잊어버렸을 만큼 과거의 일이지만.
다나가 어릴 적에 이웃들과 선의로 쌓아온 신뢰와 호의가 존재했기에, 그녀는 지금 고향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남편과 키스를 나누는 미래를 얻은 것이겠지.
아무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장엄한 세계의 역사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토록 시시한 오해 투성이의 인생이 얽히고 섥혀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 역시, 고향 사람들에게 자기 남편을 자랑하듯 내 허리를 껴안는 다나를 마주 안으며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결혼을 축복하는 예식이 끝나자,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축제를 즐길 차례였다.
완전히 우리를 쌩까고 놀면 좀 얼탱이가 없었겠지만, 마을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춤사위가 신랑신부의 행복을 기원하는 뜻이라니까 뭐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그럭저럭 볼 맛 있는 절차가 지나면서 어느새 밤이 가까워지자, 선조들의 전통 축제를 처음 경험하고 흥분한 사람들이 미리미리 짚단에 불을 붙여버리기도 했다.
조금 남은 추위도 불길과 축제의 열이 휩쓸자 따스할 정도였다. 나랑 다나는 근처에 앉아서 술병을 땄다.
딸랑딸랑─!!
캠프 파이어를 등지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여사제와, 그 사제의 춤사위에 홀린 듯 박수를 치는 남자들. 딱 보니까 짝이 없어서 다음 축제의 신랑이 되길 노리는 모양.
음. 축제라기보다는 잔치 같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다.
“외부와의 교류를 시작한 이상, 픽트의 독자성은 이전보다 흐려질 수밖에 없지.”
아까까지만 해도 웨딩 드레스를 입은 다나를 보고만 있어도 눈물을 흘리던 장인어른께서도, 이젠 좀 진정하셨는지 코를 대충 훔치고 말씀하셨다.
“그런 만큼 옛 얼스터의 문화를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마을 안에서 벌어진 건 당연한 일이야. 바깥 세상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마을 안에서 계속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닌가.”
“장인어른도 바빠지시겠군요.”
“어디 나만 그러겠나? 새 사제장도 키워야 하고…… 우리 족장도 연세가 연세니까. 내 생각대로라면 아마 다음 족장은 시로나가 되겠지만, 그 전에 후계자를 키워둬야지.”
“족장? 엄마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잠깐 쉬고 있던 다나는─얼마나 활동적이었는지 치마가 덜 치렁치렁한 것도 그래서였나 싶을 정도였다─ 눈을 깜빡였다. 장인어른은 픽 웃었다.
“그래. 내가 할 순 없잖니? 하지만 그렇게 바빠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텃밭만 멍하니 보면서 유유자적 보내는 것도 관둘 때가 됐지. 그 왜, 겨울에 옷을 입고 있으니 참 따듯하니 좋더구나.”
“나도 편지 자주 쓸게. 한가하면 아빠도 써 부쳐.”
“운송 길드인가 하는 놈들을 또 믿으라고? 차라리 내 직접 찾아가마.”
“아, 그건 좀 에반데. 편지로 참아 줘. 우리 남편놈이 영주님한테 부탁해서 그쪽 길드 비리는 뿌리 뽑았다고.”
딱 잘라 말하는 다나에게 상처를 받은 듯 하던 장인어른은 눈을 둥글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 사위?”
“지금 사제장님이 제일 혐오하는 게 그 놈들이라고 하니까 얼른 해치우시던데요?”
나는 번갯불의 콩 볶아먹던 전개를 떠올리고 어깨를 슬쩍 으쓱했다. 정치란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아주 좋은 소식이군. 그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자주 편지 쓰마.”
“얼스터 말로 써도 돼. 가끔 선물 사다 보낼게.”
“그래, 그러려무나. 나도 과일 기른 것들 좀 보내마.”
결혼식 당일에 할 얘기로는 조금 웃겼지만, 20년만에 다시 만난 가족끼리의 대화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듣기 좋았다.
참고로 알윈의 영주는 축제 중간에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족장님과 딱 악수를 나누고서는, 초청한 화가에게 그 기념할 만한 장면을 초상화로 그리게 하고 떠나갔다.
초상화는 2장을 그려서 한쪽을 픽트 인 마을이 챙겼다.
액자에 넣고 족장님 댁에다 장식한다나. 마을과 알윈 간의 조약을 적은 서면은 다나랑 같이 슬쩍 훑어봤는데, 무척이나 양심적인 내용이었다. 적어도 사기칠 걱정은 없겠더라.
하긴, 나랑 다나가 회의실에서 야부리를 터는 걸 봐놓고도 사기 칠 깡은 없었겠지.
“이크. 네 엄마가 부르는구나. 가 보마.”
그렇게 한동안 얘기를 나누던 장인어른은 장모님이 부르자 일어나셨다. 영주의 가신과 이것저것 얘기하던 장모님께서는 사제들의 춤을 BGM으로 웃고 계셨다.
정중하게 장인어른을 배웅한 나는 얼굴에서 믿음직스러운 사위의 표정을 지우고 새실맞게 술병을 흔들었다.
“누나, 우리도 슬슬 술이나 마실래?”
“좋지. 한 잔 타 줘.”
“예이, 마님.”
얼스터의 전통 사과주를 한 잔 가득 따랐다.
아마 브리타니아 인들과의 교류로 빚게 된 술일 텐데, 이게 또 맛이 꽤 괜찮더라. 다나는 자기 잔에 따라지는 샛노란 술에 싱글벙글 웃어댔다. 이 누나도 참 술 좋아해.
“그나저나 남편, 사과주인데 하나도 안 단 게 쫌 신기하지 않냐?”
“당분이 전부 알코올로 전환되서 그래. 야생에서도 저절로 당분이 알코올로 변하는 과일이 있어서, 우리쪽 세상에서는 야생 코끼리부터 원숭이, 타조, 기린까지 그걸 쳐먹고 헤롱거리기도 한다더라.”
“야생 동물들이? 개웃기네, 존나 봐 보고 싶게. 근데 취해 있으면 육식동물한테 안 잡아먹히나?”
“취해서 분노조절능력에 장애 생긴 코끼리랑 기린이 가득 있는데 거기에 한타를 들어간다구요? 우리 누나 킬각 보는 눈 존나 없죠? 박사 진급 해보려다 맨날 떨어지던 안목 어디 안 가죠?”
“에베벱 석사라서 안 들림. 박사도 들을 수 있는 영역대의 고주파로 말해주세요.”
“그 원패턴 안 질리냐? 아주 누나 언변이 나날이 무뎌져. 남편을 하도 사랑해서 험한 말을 못하게 된 것임?”
“푸흐흐, 병신. 얼굴 시뻘개져서 우다다다 말하는 것 봐.”
“이 쓰벌.”
대머리한테 대머리라고 하는 거랑 석사 졸업자한테 석사라 하는 건 진짜 비겁한 짓인데.
나는 투덜거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원래 이세계의 결혼식에서는 주로 ‘허니문’이라고 불리는 벌꿀주를 마시는데, 그건 또 게르마니아 쪽 풍습이 전파된 거 우리 결혼식에선 걸렀다. 이번엔 얼스터 중점이다. 알간?
다나가 자지러지듯 웃다가 그만 술을 흘리고, 내가 목선에 흐르는 술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갔다가 쳐맞거나 하며, 우리는 마을의 활기를 안주로 잔을 기울였다.
“너! 거기 안 서?!”
“꺄하하하!”
“느리대요~ 느리대요~! 도시 애들은~ 거북이래요~!”
그렇게 어깨를 맞대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 마을 애들이 왁자지껄 노는 게 보였다.
바깥 세상에 흥미가 있어도 도시로 진출하기엔 너무 어린 윙글링 인 아이들에, 픽트 인 아이들. 그리고 다나네 연구소 사람들이 데려온 그들의 아이들까지 뒤섞인 조합이다.
밤이 가깝지만 잠들기 전까지 남은 체력을 불살라서 같이 노는 걸까.
문화 대융합의 장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게 정말 조난한 외지인도 쫓아내던 픽트가 맞냐? 진짜 장모님은 전설이다……
취기 때문인지 별 같잖은 생각을 하던 나는 저기 꼬마애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평범한 소녀를 발견하고 뒤통수에 하이킥을 쳐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야. 너 거기서 뭐하냐?”
“응? 지금은 술래잡기 중인데…… 왜? 같이 할래?”
2달 전 버려진 유적에서 만났던 소녀 신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물었다.
님은 또 왜 여깄어요. 숲에는 초대장 안 돌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