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04화 (504/1,009)

《……실례했습니다.》

단상에 선 나는 귀족들이 트집잡기 전에 먼저 사과를 박아두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뭐라고 하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키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럴 만도 했다.

자화자찬은 쪽팔리지만, 나는 이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의 강자다. 귀족이라도 자기들 앞에서 살기인지 투지인지를 흘려대는 미스릴 클래스를 마주친 경험은 적을 것이었다.

‘분노도 진짜였고.’

호르샤를 쓰러트리기 전에, 나는 오딘에게 서원했다.

내 영과 육을, 이 세상의 모든 교수를 말살하는 데 바치겠노라고 말이다.

그리고 흑마법사는 기본적으로 교수다.

지 혼자 독수공방하며 부작용에 갸아악 구와악 하는 타입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한국인=김치맨 정도의 편견을 가져도 무리가 없다. 상대가 엘프면 경계부터 하고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내가 흘린 살의의 농도는 누구라도 쉽게 상상일 갈 것이다.

뒤에 있는 아내들의 얼씨구 하는 듯한 눈총은 일단 무시해 두자.

《저는 〈임모르탈리스〉의 흑마법사를 여럿 해치우고, 그 놈들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했습니다. 제 사적인 이유까지 합치면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지요.》

제가 편하게 살려면 저 새끼들이 싹 뒤져야 되걸랑요. 언제 저희집에 좀비 폭탄을 던지러 올 지 몰라서.

물론 그 사실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거래 상의 약점이 되는 부분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자너?

《저는 그 쓰레기들에게 피해를 입는 분들을 보면 슬픔을 참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고매한 정신력으로 놈들에게 맞서 싸우는 여러분의 투쟁에도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지요.》

《그렇지! 흑마법사는 모조리 몰살해야 마땅한 존재요!》

마할의 영주는 휘발유에 성냥불을 던진 듯 거래 중이라는 것도 잊은 듯 가슴에 불이 붙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계산이 깔린 리액션이겠지만, 나로서는 나쁠 것 없다. 나는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부채질을 하듯이 커다란 목소리로 성토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이 놈들과의 싸움에서 제가 개발한 기술을 유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흑마법사를 축출한다는 정의로운 뜻을 가진 자가 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들려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팩트가 어찌됐든, 지금 이 나라에서 내 대외적인 이미지는 뭐다?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감히 독립유공자님들의 이름을 빌려와 비유하자면, 대충 살아있는 0.3 윤봉길 의사 쯤 된다.

천하의 좆 같은 새끼들을 시원하게 지옥에 쳐박아버리거나, 반신불구로 만들어 줬다는 점에서 그럭절거 유사점이 있지.

‘그러면 느그들 나르메르 귀족들이 민심을 가라앉히는 데에 이름을 빌려 쓴 내가, 흑마법사 축출을 위해서 기술을 가장 먼저 증여하겠다고 언플을 떨면 어떻게 되겠슴?’

식민지에서 벗어난 나라들도 자기네를 괴롭혔던 제국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하면 이가 갈리는데, 하물며 지금도 피해를 입고 있는 시민들은 어떻겠는가?

당연히 미스릴 잔뜩 사 가도 ‘우리 영주놈이 노르드 님과 쇼부를 보더니만 간만에 세금을 좋은데 쓰는군’ 하겠지.

‘──아아, 이건 「애국심 메타」라는 것이다. 좆까면 니들 민심이 씹창나지.’

혹시 꼬우신가요? 그러면 남의 이름으로 언론에 대서특필 하면서 흑마법사 사냥꾼 메타에 올라타시지 말았어야지.

‘내가 기껏 장사하러 와줬는데 쩨쩨하게 쥐꼬리만큼 사가지 말라고. 부가 서비스 1개월 무료 서비스도 해 줬잖아?’

저들에게 나눠준 미스릴 주괴는 21세기 마케팅 메타를 싹 복붙한 ‘맛보기 시스템’이다.

‘무과금 유저도 없으면 꼬와서 게임 못 할 정도로 필수급 아이템이라면 억지로라도 과금해야 하는 법.’

게다가 인생은 게임이되 놀이가 아니다.

우리네 삶은 뒤지면 진짜로 쫑나는 데스 게임이다.

만약 저들 중에서 누구 혼자만 군비 증강에서 쏙 빠지면, 미스릴 골렘이나 장비로 강해진 영지들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된 도적이나 흑마법사는 어디로 갈까? 뻔하다.

‘좆밥 저레벨존으로 상대적 너프를 받은 영지는 범죄자들 정모로 미어터지게 되겠지.’

미스터 루이스 캐럴은 작품 속 캐릭터의 이름을 빌려가며 말했다.

남들과 비슷한 선상에 남아있고 싶다면,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K-온라인 게임에서 그 사실을 배웠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흑마법사가 사라지고, 저 대사막을 상대로 기른 정신력과 기술력을 오롯이 나라의 성장에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 개발에 저와 여러분의 노력이 녹아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은글슬쩍 흘린 달인의 투쟁심과, 그것을 연설을 듣는 이들의 고양감으로 전환하는 카리스마를 뽐냈다.

저 귀족들이라고 흑마법사에 대한 원한이 없을까?

설마. 자기 가족과 친구를 잃지는 않았어도, 이 지랄 맞은 모래마을에서 현실 심시티를 하듯 애지쥬지 기른 영지가 흑마법사들 때문에 화끈해졌던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님’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런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미 넘어온 마할의 영주를 뒤이어 다른 귀족들도 당연한 일처럼 생각했던 ‘흑마법사가 없는 영지’를 상상하며 숨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그들의 손이 내가 뿌린 은화를 향했다.

그들도 직전에 뒤집어쓴 내 살기에 놀라 쿵쾅대는 심장을 흥분으로 여기기 시작한 듯 했다.

《님이란 언제나 그리운 이름입니다! 우리들의 가슴입니다! 태양신이 보우하사, 우리가 사모하고 눈물 흘리며, 오랜 세월 동안 목말라해 온 이름입니다!!》

─팟! 나는 좌중을 휘어잡으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님은 바로 흑마법사들이 없는 낙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오오오오오──!!!》

《참으로 우리 조국의 영웅다운 신념이십니다!!》

《훌륭하시오, 훌륭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귀빈 여러분!》

나는 허허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설마 내가 뽀찌도 넉넉하게 챙겨줬는데 입 싹 닦고 갈 건 아니지? 우리 이제 오래 볼 사이인데.

감히 남의 이름을 팔아먹으며 시민들을 진정시켜 왔으니.

이제는 그 값을 20배로 토해낼 때다.

‘알아들었으면 나갈 때 좆 같은 계약서에 서명하고 가라고.’

돈 말고도 댁들이 뱉어내 줘야 할 게 많거든.

***

“흥. 속물스러운 인간들이군.”

계약서를 작성하고 파티를 즐기며 인맥을 다진 뒤였다.

베로니카는 영주들의 마차가 줄줄이 떠나가는 걸 보며 침을 뱉듯이 경멸의 말을 토해냈다. 아내들과 별실로 돌아와서 마차를 부른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시종님도 참 냉정하셔. 이 나라만큼 내치(內治)에 군사력이 요구되는 나라도 없는데.”

“농담은 말거라. 저게 어디 평화를 바라는 눈이지? 안정을 바라는 자의 눈은 저렇게 야욕으로 타오르지 않는다.”

창틀에 앉아서 늘씬한 다리를 드러낸 베로니카는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매혹적인 살갗에 눈이 빨려들어가던 나는 그녀의 어깨에 겉옷을 걸쳐 입혀주었다. 발기부전 남편은 성수 비아그라가 없으면 삶의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따흐흑.

“흐흐.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잖아? 옹호해줄 가치는 없지만, 약에 써먹을 만한 개똥이긴 해.”

“……조금 더러운 속담이로구나. 뜻을 알기는 쉽다만.”

“응? 푸흐흐.”

의외의 답변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더운 듯 후드를 훌러덩 벗어던진 라리루라도 베로니카한테 앵겨들며 시시덕댔다.

“그래도 멀쩡한 사람도 있었어요~? 선배보다 근육이 2배 쯤 많던 영주님은 힐끗 봐도 꽤 멀쩡하던데요~?”

“그래. 고집이 강하고 애국심이 줄충한 군인이라고 하드만. 굳이 말하자면…… 음, 애국보수?”

“……왠지 욕 같은데, 칭찬 맞아요?”

“애국보수에도 나쁜 애국보수가 있으면, 좋은 애국보수도 있는 법이지.”

교수조차 선량한 이가 있을진대 애국보수라고 뭐 다를까? 나는 라리루라의 옆머리를 떼주며 말했다.

“이걸로 남은 건 1~2곳 뿐이야. 며칠 안으로 알리씨크로 돌아가서 그 대회에 참석하면 그만이지.”

“으응. 선배가 하는 일이니 괜찮겠지만요~. 저 미스릴이 제 대전상대의 골렘에 쏘옥 들어가버리면 어떡해요~?”

라리루라는 뺨에 닿은 내 손을 어깨랑 볼따구로 붙잡으며 말했다.

이런 사소한 애교가 사람 애간장을 타게 만든다. 그치만 내 표정을 본 베로니카가 뚱해지고 있으니 참도록 하자.

“문제 없어. 저걸 전부 써도 네 링링이 6호에는 못 당할 게 뻔하니까.”

“아핫♡ 신뢰가 무겁네요!”

“신뢰가 아니라 사실이지. 오히려 홍보의 역할이 될 거야. 그리고 경종의 역할도.”

나는 파티홀에서 가져온 와인을 마셨다. 기껏 돈 주고 산 건데 아깝잖아.

생각해 보니까 이 양심 개터진 이세계 사교 파티에서는 뭘 제대로 쳐먹어 본 기억이 없네. 존나 꼬와 뒤져버리겠다.

“경종? 누구에게 말이냐?”

“저 사막 어딘가에 숨어 사는 흑마법사 새끼들한테.”

사막의 달밤은 시원해서 바람을 맞는 보람이 있다. 와인의 맛은 잘 모르겠지만, 비싸서 그런지 고급진 맛은 났다.

“〈임모르탈리스〉가 아니라도 이 나라에 숨어 사는 흑마법사들은 있지.”

간단한 원리다. 사방에서 핍박받는 새끼들이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은 범죄조직이나 사막 같은 한정된 장소 뿐.

“군비를 확충하고 병사의 사망률을 골렘이 대체하면, 나르메르-나일은 흑마법사와의 전면전을 꺼리지 않게 돼.”

흑마법사 새끼들의 악행은 이미 국가에서 타협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잘난 놈들이라도 본진에서 세력을 불리거나 상처를 회복할 수 없다면 기세가 꺾이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면 당연하게 견적이 나오지. 뒤가 켕기는 놈들은 내 희귀금속 판매 사업의 확장을 막고 싶을 거야.”

“내버려 두면 국력이 강해지니까요?”

“맞아. 보급을 끊으려면 원인을 박살내는 게 편하니까.”

베로니카는 내 말에 약간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아르마알스 가문을 직접 노리지는 않겠구나. 목표는 어디까지나 우리 주인님인가.”

“원로원의 본가를 노리기엔 부담이 크니까. 당장 나 하나 잡는 것보다 10배는 빡셀 걸.”

그렇다고 듀니미스 공방을 노릴까?

아직 지부도 만들지 않았는데 어디를? 사업체를 부수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그럼 어떻게 나올까.

단순한 테러? 절대 아니지.

라리루라는 입술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런 대도시에서 대놓고 암살하는 건 무모하죠. 노르드가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도 아니고, 〈임모르탈리스〉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가는 병사들이 원군으로 달려올 테니.”

“그래. 당연히 주위에 사람이 적을 때를 노리겠지.”

빠꾸 없이 사는 놈들이라도 선이라는 게 있다.

대화가 안 통하는 놈들이라고 여겨지면 음지의 물자조차도 구할 수 없게 된다.

나치도 일본인을 가스실에 쳐박아댔으면 일제랑 협력하진 못했을 텐데, 남녀노소 안 가리고 죽여대는 놈들이랑 거래를 하고 싶어하는 범죄자가 있다고요? 네, 개소리죠.

돈과 권력을 좋아해도 정도가 있지, 수틀리면 자기도 죽이려고 들 쾌락살인마랑 상종하고 싶은 장사꾼이 어딨겠어.

‘그렇지만 〈임모르탈리스〉는 전혀 자제하지 않고 있지.’

도시 안에서 벌이는 암살은 고사하고, 그냥 멀쩡한 소도시 하나를 멸망시키는 것도 개의치 않는 미친 놈들.

하지만…… 그 놈들 자신이야 능력이 좋으니 재량껏 살아남는다지만, 놈들에게 물자를 팔아주는 놈들도 그럴까?

“사람은 혼자서는 못 살아. 마법으로 식수는 어떻게 할 수 있어도, 식량이나 연구 재료를 제 발로 구하기엔 이 땅이 좀 많이 넓지. 설마 궁색맞게 몬스터나 잡아먹을 리도 없고.”

그러면 왠 돈에 미친 행상인이 정기적으로 만나러 가 주는 걸까?

설마. 〈임모르탈리스〉랑 거래를 틀면 왕가의 척살대상에 오를 건데, 범죄자들이라도 뇌가 있으면 절대 상종 안 하지.

“그러면 눈이나 귀, 발이 돼 주는 사람들이 있겠네요☆!”

“특히 음지에서 장사를 하려면 본거지가 필요해. 지들 은신처가 조져지는 걸 감수하면서 몇 명 되지도 않는 정신 나간 흑마법사들이랑 거래를 할 이유가 없지.”

〈임모르탈리스〉는 국가의 주적이 아니던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숨어 사는 빨치산이나 레지스탕스는 주로 현지 시민들에게 보급을 받는 식인데, 저 놈들은 민심도 조져버렸다. 누가 저딴 미친놈을 좋다고 도와줄까.

반역도당을 돕는 시민들도 뽀찌나 공감대가 있어야 하지, 저 새끼들은 이미 광기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 뿐이야.”

“──〈임모르탈리스〉한테는, 필요한 물건을 조달해 주는 부하 조직이 있다는 뜻이군.”

베로니카의 결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명 높은 그 놈들을 대신해서 시다바리를 해 주는 씹새들.

나는 돌을 들춰서 그 밑에 붙은 벌레떼를 떨구듯, 이 나라를 상하좌우로 흔들어서 저 새끼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 놈들의 인맥을 잡고 기어올라가서, 언젠가 우리 가족의 평화를 어지럽힐 게 분명한 〈임모르탈리스〉를 먼저 족쳐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저 쓰레기들한테 협력하는 놈들이라면 자비를 베풀 것도 없지.’

좋은 씹새끼는 죽은 씹새끼 뿐.

개심 따윈 기대도 않는다.

정보를 캐내든 이용하다 버리든, 몬스터 다루듯이 대충 써 먹고 끝 무렵에는 ‘좋은 흑마법사’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와인을 든 의수를 끼릭거리며 중얼거렸다.

“오게 두어라. 화이트 울프는 충분히 쉬었다.”

천만 다행히, 나랑 우리 가족만 좆뺑이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 나라는 누구보다 흑마법사 학대에 진심인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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