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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24화 (524/1,009)

라리루라는 커다란 무대에 익숙하다.

그건 서커스 설이라는 직업 덕이기도 하지만, 성격부터가 남들 앞에 서는 걸 별로 꺼리지 않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종종 무대로 꽂히는 비난이나 경멸의 시선을 속 없이 받아들이는 타입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인생사 덕분일까.

수백 수천 명이 지켜보는 대회의 무대에서도, 경기장으로 나서는 그녀의 가슴에 이렇다 할 긴장감은 없었다.

〈어이쿠, 등장했습니다!!! 나르메르-나일에 혜성처럼 나타난 듀나미스 공방의 링링이 6호입니다!!!〉

사회자의 시끄러운 중계에 라리루라는 직업병처럼 사방에 손을 흔들어주며 무대에 올랐다.

상대측도 이미 골렘을 세우고 무대에 나와 있었다. 로브를 쓴 체구가 큰 남자지만, 얼굴은 잘 보였다. 별로 의욕이 넘쳐 보이는 눈빛은 아니었다.

‘선배는…… 역시 없네.’

VIP석에 눈길을 던진 라리루라는 가만히 입술을 삐쭉였다.

여기보다 더 바쁘고 중요한 곳에 달려갔다는 건 안다. 아마 그쪽에서도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녀의 역할은 이 투기장에 사람을 모아서, 영주 대리라는 사람이 인파를 물린 싸움터에서 시민들을 줄이는 것. 그쯤은 잘 알고 있지만 역시 보여주고 싶은 상대가 있는 것과 없는 건 의욕에서 차이가 컸다.

‘그냥 남들한테 맡기고 얌전히 있지. 다치면 어쩌려고.’

당연하지만 진심으로 하는 불평은 아니었다.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그녀는 그에게 반한 것이다.

─슈르륵!

툴툴대던 라리루라는 느긋하게 마나의 실을 뻗었다. 힐끗 보였던 언니들이 손을 흔들어준 게 조금 의욕을 복돋았다.

오늘밤의 마지막 본선 경기.

준결승 진출자를 정하는 본선에 관객들이 눈을 빛냈다. 라리루라와 링링이 6호에 붙은 몇 개의 금박─그녀의 남편의 유명세, 금속 골렘이라는 특이성─이 기대치를 올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조금의 쇼맨십으로 거기에 보답하는 것도 그녀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노르드는 싸움이 벌어지는 구역을 자신의 마법으로 최대한 한정하고, 빠르게 제압한다고는 했지만── 결계가 깔린 이 투기장만큼 시민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곳은 얼마 없으니까.

상대 선수도 골렘을 향해서 마나의 실을 뻗었다.

짙은 보라색의, 무척이나 어두운 마나였다.

《경기── 시작!!》

라리루라는 어딘지 모를 기시감에 눈을 찌푸렸을 때, 사회자는 지체없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

〈얍!〉

저번에는 수세에서 방어력을 과시했으니까,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자.

라리루라는 미리 정해온 전략, 아니 홍보 방법대로 공격에 들어갔다. 속전속결로 끝내지만 않으면 될 것이었다.

─쿵쿵쿵쿵!!

유물의 능력에 힘입어 재질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대쉬한 링링이 6호가 손가락을 짐승의 턱처럼 오므렸다.

노르드가 보여주었던 손가락을 쓰는 무술이다. 손 끝에서 〈마법의 화살〉을 발사하는 6호라면 완력과 코어의 출력을 동시에 공격에 사용할 수 있기에, 상당히 적합한 조합이었다.

─부웅!!

하지만 상대 골렘은 6호 이상의 민첩함으로 회피했다.

저 공방의 전법은 1회전에서 보았다. 인공 미스릴을 손에 넣지 못한 공방이었기에, 나무 골렘을 최대한 경량으로 만들고서 코어의 순간 출력으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눈대중으로 본 게 맞다면 공격에 맞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성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면 피하는 게──

《──어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회자의 황당한 비명이 라리루라의 심경을 대변했다. 적 골렘이 무모하게 정면에서 공격을 시도했던 것이다.

─콰직!

속도를 살려서 파고든 것은 좋았지만, 짐승의 턱처럼 휘는 6호의 팔은 가볍게 적을 붙잡았다. 성능 차이를 개의치 않고 덤벼든 끝에 자충수를 둔 것이었다.

관객석에서 엘펙스 공방장인 듯한 중년의 남자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시합을 포기했어?’

이렇게 끝내도 될까? 차라리 놀리는 느낌으로 일부러 놔주면서 적에게 기회를 더 줘야 하나?

라리루라는 적 골렘을 살피며 고민했을 때였다.

─덜컥!

남자의 손가락짓에 골렘의 뚜껑이 젖혀졌다. 윙윙 거리는 코어가 이상한 발광을 뿜어대며 울어댔다.

〈……안 돼!〉

상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챈 라리루라는 꼭두각시의 출력을 최대한 쥐어짰다.

팔을 교차한 그녀의 인형이 내장된 마법진을 이용해 실드 마법을 펼쳤을 때, 엘펙스 공방의 골렘이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실드로 위력을 절반 이상 줄었지만 폭발의 여파는 관객석 위로도 쏟아졌다. 투기장 자체의 결계가 없었다면 인명피해는 틀림없이 3자리 수에 이르렀을 것이었다.

《모, 모리우스 선수!!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골렘을 자폭시켜서 상대 선수는 물론이고 관객까지 덮쳤습니다!!》

상황파악이 더딘 사회자의 중계가 귀에 거슬렸다.

사실 말의 뜻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라리루라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피난부터 유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관객들을 보면 피난을 지휘한 것 아닌 듯 했다.

〈아, 파라…….〉

신음을 흘린 라리루라는 투덜대는 입과는 달리, 냉정하게 허리춤의 인형을 꺼냈다.

─포롱!

봉제인형처럼 생긴 그것은 마나를 불어넣은 순간, 원래의 정체성을 되찾았다.

사람의 머리 정도의 작은 금속 꼭두각시.

완전금속 꼭두각시인 6호를 만들기 이전, 잠시 거쳐갔었던 프로토타입. 링링이 5호였다.

덩치를 줄이고 핵심 기능만을 남겨서, 전투 중에 노출되는 라리루라의 맨몸을 지키는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장비였다.

─두둥실.

〈꼭두극(Puppetry)〉 마법이 내장된 광대 인형은 프랑의 나이프처럼 실도 없이 떠올랐다.

대회의 룰에 따르면 2종의 골렘을─혹은 꼭두각시를─ 사용하는 것은 반칙패 처리였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방금 건 대회에서 이겨나가려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상대 골렘만이 아니라 선수를, 그것도 관객까지 휘말리게 하면서 노리다니?

거기다가 자기 공방의 솜씨를 어필하는 용도인 골렘을 터트리기까지했다. 제정신인 사람이 할 소행이 아니다.

─후우욱! 라리루라는 6호에게 폭연을 걷게 시켰다.

라리루라에게 치사성이 짙은 공격을 시도한 로브의 남자는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

〈저기요~ 열의가 좀 지나치지 않으신가요~? 저,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뻔 했는데요?〉

〈나도 상당히 놀라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네 실력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을 위력이었는데.〉

능숙한 로마니아 어와 대답의 내용에 라리루라는 눈을 반개했다. 마치 그녀를 본 적이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죄송한데, 제가 인기가 워낙 많아서 팬 여러분을 전부 다 기억해 드리진 못해서요♡ 자기 어필 타임을 좀 드릴까요?〉

〈놀라운데. 남의 물건을 훔쳐가 놓고 내 이름도 잊었나? 생각보다 뻔뻔하군 그래.〉

사뭇 능청스러운 말투에 라리루라는 혀를 빼물었다.

〈왜 이러시나 몰라♡ 저는 관객 여러분의 마음 말고는 뭘 훔쳐본 적이 없는데요~?〉

〈그 골무.〉

남자는 라리루라가 손가락에 끼운 골무를 가리켰다.

〈겉모양은 바꾼 듯 하지만, 20년을 사용한 물건인데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

〈……20년?〉

라리루라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녀가 손가락에 낀 이것은, 이전 로마니아에서 그와 함께 쓰러트렸던 어느 흑마법사의 물건이었으니까.

없던 집중력까지 끌어내며 숨을 골랐다. 불쾌한 긴장감이 사지를 굳게 했다. 나쁜 징조다. 기예를 실패할 때와 비슷한 손맛과 예감에 의식해서 어깨에 힘을 뺐다.

〈……당신, 누구죠?〉

〈말해봤자 기억하지 못한다지 않았나? 그렇다면 설명해줄 이유도 없군. 다만 네 손버릇 덕분에 너와 네 남자의 진짜 얼굴도 알아챌 수 있었으니, 그 점에는 감사해 두지.〉

말로는 표현 못할 혼란과 오싹한 예감에 등이 젖어들었다. 라리루라는 억지로 새침떼듯 웃었다.

〈아핫♡! 요즘 흑마법사는 잿가루를 주워다 되살릴 줄도 아나 봐요? 사칭범이라면 자백할 마지막 찬스인데요?〉

〈손을 떨고 있군. 네 남자의 불꽃에 타죽었을 터인 놈이, 이렇게 다시 나타난 게 그리도 놀라운가?〉

……쳇. 라리루라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떨려오고 있던 손가락을 주먹을 쥐어 얼버무렸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선수로 분장하고 대회장에 숨어들었던 걸까. 라리루라는 조용하게 관객석을 훔쳐보았다.

‘선배는 관객들 사이에 사티스 교단의 사람을 배치했다고 했었어.’

만에 하나라도 대회에 흑마법사가 숨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들었다. 사티스의 사냥개라면 근처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의 존재를 알아차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 남자는 저리도 당당하게 나타났다.

일개 흑마법사를 넘어선 〈임모르탈리스〉의 정규 멤버가 말이다.

배치했던 오프툼의 부하가 어느새 살해당하고 언데드가 된 걸까?

그때, 프리모르를 섬기다가 저 자에게 목숨을 잃고 가죽을 빼앗겼던 야누스 교단의 성기사처럼?

‘──그만.’

불필요한 곳까지 뻗어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잘랐다. 필요 없는 잡념을 멈추는 건 쉬웠다. 집중은 그녀의 특기였으니까.

그리고, 지금만큼 집중이 필요할 때는 달리 없었다.

〈삶이란 죽음의 변주일 뿐이지. 죽음을 지배할 수 있다면 삶 역시 지배할 수 있다더군.〉

─딱!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관객석의 결계가 사라졌다. 이미 투기장의 장치에까지 손을 뻗쳐 두었던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관객들의 소음과 사회자의 다급한 제지가 만들어낸 소음이 한쪽 귀를 뚫고 다른쪽으로 빠져나갔다. 두 눈을 적의 일거수일투족에 못 박은 라리루라가 말했다.

〈저처럼 못 배워먹은 광대도 안 속을 궤변이네요. 그런 헛소리는 또 누가 가르쳐 주던가요?〉

〈시시한 걸 궁금해 하는군. 정 신경 쓰인다면 너도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 보도록.〉

─촤르르르륵!!! 그의 손에서 뻗은 마나의 실이 수십 가닥 넘게 갈라졌다. 보라색 마나의 실은 상황을 종식시키고자 몰려온 병사, 도망치려던 관객, 구경하던 모험가 목을 관통했다.

《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시민들은 남자가 팔을 휘두르자 실에 묶인 조약돌처럼 날아서 무대에 곤두박질쳤다.

사람을 언데드로 만들어서 조종하는 마법. 예전에 싸웠던 어느 흑마법사가 애용하던 술식이었다.

〈……읏!〉

순식간에 일어난 대량학살에 입술을 깨물었던 라리루라는 서서히 일어나는 인간 꼭두각시들을 보며 자신의 예상이 안일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까득, 꾸드득.

입을 다물고 꼭두각시처럼 적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시민들의 눈은 혼란과 공포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언데드로 만들지 않았어!’

의식과 몸을 살려둔 채로 목 아래로 몸만 조종한단 말인가?

심지어 그것만이 아니었다. ─스릉!! 조종당하는 시민들은 맨손이나 가지고 있던 무기로 제각각 수십여 가지의 무술의 기수식을 취했다.

일격의 위력만큼은 노르드마저 위협적으로 여겼던 오만 가지의 무술을, 파괴당하건 말건 상관없는 인질들로 펼친다.

무술에 담긴 묘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빈틈을 보이더라도, 저 방법을 쓰면 부숴지는 건 어디까지나 꼭두각시── 다시 말해 조종당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이건…… 이걸 어떻게 해야……’

라리루라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적의 수뇌 중 한 명을 침입시켜 버린 시점에서, 가장 안전한 벙커였던 투기장은 도살장으로 변했다.

나포당한 시민과 병사들이 모두 적의 무기이며, 인질이었다.

조종당하는 인질을 죽여가며 싸우느냐.

인질을 살리고자 결말이 뻔한 방어전에 나서느냐.

이 도살장은 그런 의미의 이지선다였다.

인명을 전혀 존귀하게 여기지 않고, 도구나 수단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이 행태.

잔혹한 흑마법사를 여러 명 겪어본 라리루라였지만 사람의 생명을 이렇게 ‘사용’하는 작자는 한 명밖에 알지 못했다.

크뤤투스=코르보나.

아르마알스 가문의 장남을 죽이고, 그의 아내에게 저주를 내렸던 〈임모르탈리스〉의 흑마법사.

원로원 가문에 잠입하고자 신혼을 맞이한 남편을 죽이고, 가문의 후계자를 목숨을 걸고 섬기던 성기사도 죽이고, 그들의 살가죽을 뒤집어 쓰며 타인으로 위장하던 남자였다.

‘……큭!’

라리루라는 적의 정체를 깨닫고, 그에 동반해서 떠오르는 의문과 생물적인 공포를 싸그리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기억 속에 묻어버렸던 죽음의 사도가, 영원할 터인 잠에서 깨어나서는 이렇게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한 가지 방법만을 생각해내야 했다.

──어떻게 해야 다시 한 번, 저 남자를 지옥에 떨어트릴 수 있을지를 말이다.

〈너도 나처럼 죽음에서 되살아나 보면 알 수 있겠지. 영면이란 결코 최후의 안식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크뤤투스는 손가락에서 수십 가닥의 실을 뻗으며 말했다.

〈……아핫, 글쎄요? 저는 죽고 나서도 좋아하는 사람들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은데요?〉

〈하, 철이 없군.〉

〈그게 젊은 피의 특권이죠♡ 아, 그리고 이건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소리인데요.〉

절대 좋다곤 못할 상황에 뺨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라리루라는 능숙하게 웃음을 꾸며냈다.

〈──저희 선배는요, 당신 이름 같은 건 한~ 참도 전에 까먹으셨을 걸요?〉

〈……그래? 그거 참 기대되는군. 정말일지 아닐지는 조금 이따 물어보도록 하지.〉

코뤤투스는 그제서야 마음에 든다는 듯 히죽 웃었다. 겉에 뒤집어 쓴 사람 가죽이 물커덩 일그러졌다.

〈물론, 네 입을 ‘써서’ 말이야.〉

─크와아아아악!!

마나의 실에 조종당하는 인질들은 죽음도 불사하는 부나방처럼 라리루라에게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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