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40화 (540/1,009)

나는 언밸런스한 공중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다음 계층은 무려 삼림이었다.

‘허미 씹. 스케일 씹창났네.’

한 그루만 해도 빌딩 한 척 정도는 되려나. 나는 나무들의 크기에 입을 쩍 벌렸다.

어린왕자가 논산에 돌아온 이등병처럼 노스텔지어 PTSD를 일으킬 듯한, 존나 큰 나무의 숲!

보통 숲이라는 건 식물로 빼곡하게 차 있어서 시야가 막혀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갑갑한 느낌이 훨씬 덜 했다.

바오밥 나무 뺨치는 거목들이 양분을 다 독식한 덕분일까. 전체적으로 체고가 높은 식물이 적었다. 시야의 탁 트였다는 얘기다. 숨으려면 숨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줄을 이루며 솟아난 거목은 나무 기둥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어서, 마치 천혜(天惠)의 파르테논 신전 같았다.

‘국어를 포기한 이과인 게 한스럽군.’

어휘력이 후달리는 게 한이다. 그만큼 산림이란 단어로는 이 풍경을 표현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백악기 시대의 지구라고 말하는 편이 더 이해가 잘 갈 것이다. 자연의 스케일에 압도당하는 느낌에 저절로 마음가짐이 겸손해졌다.

─호르르르.

오랜만에 자연을 구경하며 감명을 받고 있는데, 요란하게 나타난 에메랄드 비석이 산통을 깼다. 혀를 차고 싶은 것을 한숨을 쉬는 걸로 참아내고서 글을 읽었다.

《◇ 목표: 그리폰(Anzū)의 깃털을 10개 모으시오.》

《◆ 보상: 제 5계층에서 획득할 수 있는 모든 것. ???.》

물음표로 적힌 문자는 또 뭐지? 추가 보상인가?

대충 비밀 퀘스트 같은 걸로 보면 될 것 같았다. 턱을 쓰다듬고 있자 시련의 견본이라는 듯 사람 팔뚝만한 깃털이 1개 나타났다. 까마귀처럼 윤기 있는 검은 깃털이었다.

존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마나의 작용도 없이 뿅 하고 튀어나와서 쫌 놀랐다.

“우리 잼민이 파라오가 거침이 없으시네.”

나는 픽 웃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신비로운 광경을 보여준다면 싫어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특히 나처럼 지구 물이 덜 빠진 새끼는 어쨌든, 이세계인들에게 이런 초월적인 마법 현상은 오히려 현실성이 느껴지는 만큼 더 실감이 나서 무섭지 않을까?

판타지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나랑 다르게, 기존의 매지컬 상식이 부정당하는 기분에 몸이 저절로 떨릴 것이었다.

‘아마 지구인 갬성으로 보면 마법사랑 식인 외계인 정도의 차이려나.’

나야 독특한 경험이 많은 만큼 이 피라미드의 핵심 구조를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었는데, 다른 탐험가들은 외계인한테 납치당한 듯한 기분일지도 몰랐다.

암, 덤블도어랑 에일리언 퀸이 어떻게 같겠어.

─주섬주섬.

무식한 크기의 깃털을 챙기고 발품을 돌았다.

일단 시야가 존나게 트여 있어서 기습이고 뭐고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낙관적인 생각이 인간우월주의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별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쐐애액─!!

상공에서 내려꽂히는 기습이었다. 거의 90도 급낙하였기에 내 오감이 달인급으로 발달되지 않았다면 미처 막거나 피하지 못하고 다쳤을지도 몰랐다.

『──Kueeeec?!』

반대로 말하자면, 습격자는 나를 기습하는데 실패했다.

기척 감지가 특기가 아니어도 달인급의 평균은 되는 나다. 적의 속도를 감지하자마자 창을 뽑아서 바로 위로 찌르자, 내 창에 투신자살한 것처럼 몬스터의 몸이 꿰였다.

사자의 머리와 사지(四肢)에다가 독수리의 발톱과 날개를 가진 생물이었다.

‘그리폰이라. 간만에 좀 일반적인 판타지 몬스터로군.’

맨날 이상한 괴물만 보다가 이런 정상적인 몬스터랑 붙게 되다니. 새삼 감개가 깊다.

멸망 이전의 고대 이세계는 이런 몬스터들이 평범하게 돌아다니는 정상적인 판타지 세상이었을까? 꼭 망해가는 게임의 10년차 이벤트에 유입된 뉴비 플레이어가 된 기분이었다.

촤악─!!

그런 시시한 감흥을 그리폰의 몸통 채로 베어 갈랐다.

몸을 꿰뚫리고도 뛰어난 생명력으로 죽음을 미루던 그리폰조차 반으로 갈라지자 죽음을 면치는 못했다. 갈라진 몬스터 새끼의 피가 쏟아지는 듯 하다가 찰나에 빛의 먼지가 되었다.

자리에 남은 건 깃털 한 올 뿐.

해체할 필요도 없다니, 편리하고 좋군.

《◆ 그리폰(Anzū)의 깃털.》

깃털을 줍자 아이템을 설명하는 비석이 떠올랐지만, 별로 쓸모 있는 정보는 아니었기에 대충 훑고 넘겼다.

‘하나하나 잡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일단 무리를 짓지도 않는 모양이다. 하긴, 한 번에 10마리 씩 나타나면 시련이 너무 쉽게 끝나거나 밸런스가 좆망해서 탐험가들이 전멸해 버릴 것이니까.

고민 끝에 유인작전을 짰다.

장작을 꺼내서 불을 지폈다. 모닥불에다 꼬치에 꿴 고기를 향이 솔솔 나도록 세팅해 두고, 근처의 나무에 올라탔다.

선사시대의 우끼끼 사이어인 DNA를 깨우며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길리 슈트를 덮었다. 야수회귀의 마나 코팅을 감고 〈수사의 랜턴(Friar's Lantern)〉으로 위장하면 된다.

마무리로 기척을 줄여주는 ᚲ(Kenaz)의 룬 가면까지 썼으니 이제 완벽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상공을 날아다니는 그리폰들이라면 내 위장을 간파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인이 되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않을까?

〈고, 고기잖아!〉

〈쉿! 목소리 좀 낮춰요!〉

그런데 불행인지 행운인지, 그리폰보다 더 일찍 내 유인에 걸려든 생물이 있었다.

사람이다. 그것도 탐험가들.

얼마나 시달렸는지 무척 꾀죄죄한 이들이 코를 벌렁거리며 찾아온 것이다.

잠시 눈쌀이 찌푸려졌으나 별로 손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피라미드 내부에서 만난 첫 탐험가이니 말이다.

〈저것 좀 보라고. 누가 봐도 사람이 만들어둔 고기야. 이 주변에 있던 놈들이 식량을 두고 튄 거 아냐?〉

〈이 상황에 귀하디 귀한 식량을 두고 어딜 갔겠어?〉

〈혹시 모르지. 다른 놈들은 과일 같은 걸 먹고 있을지도. 늦기 전에 결정하자고. 저세상의 과일을 먹든, 저 주인 없는 고기를 먹든, 굶어 죽으면 의미가 없잖냐.〉

탐험가들이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20.0의 시력을 번뜩이며 그들을 살피다가 잠깐 놀랐다.

‘에르제의 파티원?’

브리타니아의 차기 여왕인 엘리자베스의 파티원이던 놈이 저 파티에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면면을 살펴봤지만, 그 외에는 전부 다 못 본 얼굴이다.

‘……배신을 때렸거나 스파이였던 건 아닌 모양인데.’

누가 봐도 개고생을 하는 낙오자의 몰골이었으니 말이다.

학자 같은 관상의 그는 안경에 묻은 흙을 닦다가 말했다.

〈뭔지도 모를 과일의 독성을 무턱대고 구분하자니 저희의 입이 고작 4개 뿐이군요. 딱 4번 있는 기회로 먹어도 되는 과일을 찾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명계의 음식을 먹는 건 좋지 않아. 혹시라도 그 사실을 저승의 신들에게 들키면 명계의 백성이 될 테니까.〉

나르메르-나일의 신관인 걸까. 옷을 입은건지 벗은건지 잘 구분도 안 가는 여인이 말했다.

탐험 중에도 저런 패션을 고집하는 의지만은 인정해 줘야 하겠다. 리더 같은 전사는 두 명이나 반발하자 투덜댔다.

〈먹고 죽나 굶어 죽나 뭐가 다른데?〉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은 없고.〉

여신관이 말하자 그들은 입을 싸물었다.

굶주림 앞에서 이성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 인류가 복어 같은 맹독 생물을 처먹게 된 건, 사냥에 실패한 원시인이 그것 말고 달리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마저 있는 판국이니까.

─와구와구!

그들도 식욕에는 패배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꼬챙이를 쥔 탐험가들은 그 향긋한 냄새에 눈이 돌아가선 육식을 탐했다.

〈젠장, 그냥 훈제 햄인데 더럽게 맛있네!〉

〈으흑,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겠어…….〉

그리폰의 덩치에 맞게 쌓아둔 고기들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엉엉 우는 여신관조차 최소 1kg은 먹은 것 같았다.

아깝지는 않았다. 이승과 연결된 동안에는 식량도 무한정 공급이 되니까.

그보다는 저들과 접촉할지 고민된다는 게 내 본심이었다. 식량과 교환해서 뭔가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내 가면 속에서 오딘의 눈이 빛났다. 나는 불시착한 UFO를 분해/연구하는 군수과학자처럼 철저하게 그들이 보유했거나, 감추고 있는 마법적 요소를 분석했다.

‘……또 기척이 접근해 오는군.’

고민거리에 또다른 변수가 늘었다.

접근해 오는 기척이 대략 10개 이상. 북쪽에 다섯. 서쪽에 최소 일곱.

특히 서쪽은 그리폰이다. 날개짓 소리 때문에 숫자를 세긴 어려웠지만 아주 떼를 지어서 오고 있다. 1마리씩만 돌아다닌다는 내 예측은 빗나간 모양.

‘하긴, 추측이라기엔 증거도 거의 없었지.’

아무튼 탐험가들은 굶주림이 심했던 탓인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냄새를 맡을 정도라면 다른 이들도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간과했다.

고기만 챙겨다가 냅다 튀었어야지. 밥이라면 다른 곳에서 먹어도 되잖아?

‘아니, 어차피 고기 냄새가 풍기는 이상은 의미가 없나.’

이제 와서 따져봤자 소용 없는 일이다. 나는 새로운 기척 쪽에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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